안상용
1. 화성시 출신 독립운동가, 안상용
안상용은 1900년 7월 8일 경기도 수원군 공향면 제암동(현 화성시 향남읍 제암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19년 4월 5일 향남면 발안 장날을 이용해 안관순, 안경순, 안무순, 안명순, 안봉순, 안진순, 강태성, 김덕용(金德用) 등과 함께 독립만세시위를 벌였다. 그는 이날 천여 명의 시위 군중과 함께 태극기를 앞세워 장터를 행진했다. 일제 경찰이 그들에게 무차별 발포해 3명이 부상당하자, 군중은 분노해 투석으로 대항하여 일본인 순사부장이 돌에 맞아죽었고, 많은 일본인 거주자들도 부상당했다.
이에 분노한 일제 경찰과 헌병대는 철저한 보복을 단행하기로 결정했다. 1919년 4월 15일 오후 2시경, 일본군 중위 아리타 도시오(有田俊夫)가 인솔한 20여 명의 군경이 제암리에 도착해 민간인들에게 알릴 일이 있다고 속여 기독교, 천도교인 약 30명을 제암리 교회에 모이게 했다. 이에 안상용은 아무것도 모르는 채 주민들과 함께 교회 안으로 들어갔다. 그 직후 아리타 도시오는 출입문과 창문을 잠그게 하고 불을 지른 뒤 교회에서 탈출하는 주민들을 사살하게 했다. 안상용은 이 제암리 학살 사건 때 교회에 갇혀 있다가 피살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1년 안상용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2. 길주군 출신 독립운동가, 안상용
안상용은 1890년 2월 16일 함경도 길줌고 웅평면 남양리(현 함경북도 길주군 남양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천도교 신자로, 1919년 3월 15일 웅평면에서 일어난 천도교 신자들의 독립만세시위에 참가해 군중 300명과 함께 웅평면사무소 앞에서 독립만세를 고창하다가 면장의 신고로 출동한 경찰에 의해 체포되었다. 이후 1919년 6월 7일 함흥지방법원에서 유죄 판결을 받자 공소했지만 7월 28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기각되고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8개월을 선고받았다. 그는 이에 불복해 상고했지만 1919년 10월 9일 고등법원에서 상고가 기각되면서 옥고를 치러야 했다. 이후의 행적 및 사망년도, 사망지는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7년 안상용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