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 무이즈
재위 953년 3월 19일 ~ 975년 12월 21일
생몰 932년 9월 26일 ~ 975년 12월 21일
1. 개요
파티마 왕조의 4대 칼리파. 알 무이즈는 부왕 때에 비축해둔 국력을 바탕으로 그리스계 굴람[1] 출신인 재상 자우하르 알 사킬 (جوهر الصقلى)을 중용, 여러 정복을 이루어냈다. 955 ~ 959년 파티마 군대는 후우마이야 왕조를 몰아내고 모로코와 서부 지중해의 패권을 장악하였다. 뒤이어 969년 자우하르는 별 어려움 없이 익시드 왕조의 이집트를 정복하였고 970년에는 수하의 자파르 이븐 팔라를 파견, 시리아를 정복하였다. 그리고 973년 알 무이즈는 푸스타트 인근에 세워진 알 카히라로 천도하였다. 하지만 971년부터 3년간 익시드 잔당과 카라마트, 부와이흐 왕조 등의 연합군과 시리아를 두고 싸움이 벌어졌다. 이에 파티마 조의 통치력은 해군의 영향력 하에 있는 해안 지대에 그쳤고 시리아의 평정을 보지 못한채 알 무이즈는 사망하였다.
2. 치세
953년 3월, 자우하르의 도움으로 제위에 오른 알 무이즈는 부왕이 카이라완 원정에 나섰듯 자신도 그의 죽음을 숨기고 군대를 이끌고 아우레스 산지의 원정에 나섰다. 하지만 본인은 카이라완 서쪽의 알 우르부스 (라리부스)까지만 동행하였고 나머지 원정은 아키르의 총독 지리 이븐 마나드의 아들 불루긴에게 맡긴 후 만수리야로 귀환하였다. 그러곤 승전보와 함께 부왕의 죽음을 공표하며 새로운 시대의 '정당한' 시작을 알렸다. 알 무이즈는 카이라완의 카디 알 누만에게 이맘의 통치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저술을 의뢰하였고 이로써 완성된 '다아임 알 이슬람'은 파티마 측 교리의 핵심 서적 중 하나로 발돋움하였다. 그 공로로 알 누만의 후손들은 세습적으로 파티마 조의 카디를 역임하게 되었다. 960년 경 키타브 알 아크타쉬르, 즉 요약서가 출판되며 파티마 측 교리의 전파가 용이해졌다.
2.1. 모로코 정복
955년 파티마 해군이 안달루스의 알메리아를 습격[2] 하며 기선을 제압한 것을 배경으로 958년 자우하르는 모로코로 출정하여 지리 부족의 도움으로 우마이야 군대를 격파하였고 페즈를 점령하였다. 이로써 탕헤르-세우타 일대를 제외한 모로코 전체가 파티마 조의 영토로 편입되었다.
2.2. 이집트 정복
한편 960년대 들어 이집트는 나일 강의 수위 저하로 흉작과 그로 인한 물가 폭등에 시달렸고 익시드 왕조는 군벌들끼리의 내분으로 혼란에 빠져 있었다. 한편 선대에 파견된 이스마일파 다이[3] 들의 공작으로 이집트엔 이미 952 ~ 964년간 파티마 조의 동전이 부분적으로 유통되는 등 여론도 알 무이즈에 호의적이었다.
969년 2월 16일, 성대한 예복을 차려입은 알 무이즈는 가족들과 문무백관을 이끌고 나와 10만의 정예 기병대를 이끌고 이집트로 향하는 자우하르를 배웅하였다. 그해 5월 나일 강에 다다른 자우하르는 익시드 왕조의 재상 아불 파즐 자파르와 협상하였다. 그는 칼리파의 이름으로 이집트의 모든 백성들의 종교적 자유의 보장을 약속하였고 이에 라우다 섬에서의 저항[4] 을 끝으로 마침내 7월 6일, 파티마 군대는 푸스타트에 입성하였다. 거의 자동적으로 카이로의 총독인 된 자우하르는 푸스타트의 북쪽에 새로운 시가지를 세웠고 알 무이즈의 부왕의 이름을 따 '알 만수리야'로 칭하다가 승리자 알 무이즈의 도시란 뜻의 '알 카히라 알 무이지야'로 개칭되었다. 새로운 도시 한복판엔 알 아즈하르 모스크가 세워졌다. [5]
2.3. 시리아 정복
이집트 정복 이듬해인 970년, 자우하르는 부관 자파르 이븐 팔라를 파견하여 팔레스타인과 시리아에 남아있는 익시드 왕족 알 하산 이븐 우바이드와 대결하게 하였다. 당시 시리아 일대는 아라비아 반도와 시리아 ~ 이라크 사막 지대를 석권한 시아파 세력인 카르마트의 공격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집트가 파티마 영토가 된 이후인 969년 가을에도 카르마트 군이 쳐들어와 알 하산을 패배시켰고 그는 30만 디나르를 바쳐야 했다. 이후 그들은 30일간 라믈라에 머문 후 알 하산의 부탁으로 파티마 군대와 싸울 일부 병력을 남기고 철수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970년 4월, 자파르는 익시드-카르마트 군대를 격파하고 알 하산을 포로로 잡았다.[6]
5월 24일 라믈라를 점령한 자파르는 북진하여 티베리아스에 이르렀다. 그곳에서 알 하산이 요르단을 맡겼던 튀르크 굴람 파티크와 맞섰는데, 그가 내부의 배신으로 살해당하여 요단강 일대 역시 손쉽게 파티마 령이 되었다. 시리아의 권력 변화를 지켜보던 시리아의 카르마트 세력들이 970년 이집트를 공격하였지만 12월 22일 알 카히라 북쪽에서 자우하르에게 격퇴되었다. 이후 974년에서야 파티마 왕조는 그들을 완전히 패배시키고 시리아로 몰아낼 수 있었다. 그러나 이듬해 동로마 제국군이 남하, 예루살렘 인근까지 진군하며 시리아 일대를 유린하였고 공포에 질린 다마스쿠스는 튀르크인 군벌 아프타킨[7] 을 도시의 보호자로서 받아들였다. 다마스쿠스 인들이 자바다니 고개를 봉쇄하자 동로마 군대는 진격을 멈추었다. 그리고 막대한 조공을 요구한 동로마 황제 요안니스에 대해 아프타킨은 그에게 다마스쿠스를 둘러보게 해주고 선물을 주어 무마시켰다.
이로써 파티마 왕조의 시리아 평정은 몇년 후로 연기되었다. 그리고 그해 말, 알 무이즈는 시리아의 완벽한 정복을 보지 못한채 사망하였다.
한편 총독 자우하르의 현명한 통치 하에 이집트의 정세가 안정되어 가던 973년 6월 10일, 칼리파 알 무이즈가 가족들과 대신들을 이끌고 알 카히라, 즉 카이로에 당도 (천도)하였다. 이때부터 카이로는 2세기 동안 제국의 수도로 기능하였고 70여년간 그 본거지였던 이프리키야는 속국인 지리 왕조에게 위임되었다. 말년의 알 무이즈는 공신 자우하르의 명망을 질투, 경계하여 그를 좌천시켜 권력을 빼앗았다. 하지만 얼마 후인 975년 무이즈가 사망하고 알 아지즈가 즉위하자 자우하르는 섭정으로 복귀하였다.
3. 참고 자료
https://iis.ac.uk/academic-article/kinship-camaraderie-and-contestation-fatimid-relations-ashraf-fourth-ah-tenth-ce
[1] 노예 군인. 맘루크와 유사[2] 957년 후우마이야 칼리파 아브드 알 라흐만 3세가 평화 제의, 동로마의 로마노스 2세와도 강화 체결[3] 선교사[4] 그러나 나일강 수위가 낮아지는 바람에 파티마 군대가 도강하여 익시드 군대를 몰살시켰다[5] 여담으로 같은해 시리아 북쪽에선 동로마 군대가 함단 왕조로부터 안티오크를 점령하였다[6] 이후 그는 푸스타트에서 982년 사망한다[7] 부와이흐 조의 바그다드에서 권력 다툼 중 패한 후 시리아로 와서 홈스를 장악한 상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