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단 왕조
1. 개요
905 ~ 1004년의 100여년간 모술을 중심으로 모술 (자지라) 지역과 알레포 일대를 통치한 시아파 왕조. 아바스 왕조가 9세기 중반부터 쇠퇴하자 모술 총독 직위를 이어오던 함단 가문이 힘을 키워 세운 왕조이다. 왕조명은 창건자 아부 알 하이자 아브드 알라 (905년 - 929년) 의 부친인 함단 이븐 함단에서 따온 것이다. 제 2의 전성기를 맞은 마케도니아 왕조의 동로마 제국에 맞서 이라크와 시리아를 지켜내는 데에 큰 공헌을 하였다. 핫산의 동생 사이프 알 다울라는 945년 - 967년간 알레포를 거점 삼아 레반트(시리아 + 팔레스타인)를 노리는 동로마 제국과 싸웠다. 타르수스 산맥을 중심으로 치열한 공방전이 이어졌고, 한때 공세로도 나가 아나톨리아 남부를 점령하기도 하는등 이슬람의 방패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며 기독교 세력의 남진을 저지했다.
하지만 동로마 제국과의 국력 차이는 현저했고 결국 10세기 중후반에 로마노스 2세 (959년 - 963년) 와 니키포로스 2세 (963년 - 969년) 에게 차례로 털리며 쇠퇴했다. 962년에는 알레포가 함락되기도 했고 969년에는 안티오키아를 상실했다. 그러다가 10세기 중후반부터 북아프리카에서 세력을 키워온 파티마 왕조가 북진하자 간신히 버텨오던 함단 왕조는 양면전쟁을 감당하지 못하고 979년에 부와이 왕조에게 대패하여 모술을 뺏겼고, 남은 영토는 대부분 두 국가에게 분할되었다. 그리고 990년에 디야르바크르에서 일어난 마르완 왕조에게 1004년에 멸망당했다.티무르 제국이 사마르칸트(트란스옥시아나)와 헤라트(호라산)의 2중 체제로 운영된 것처럼 함단 왕조도 모술(이라크)과 알레포(시리아)의 2중 체제로 운영되었다.
2. 배경
동로마 시대부터 시리아 북부에 거주하던 아랍계 부족 바누 타글립이 있었다. 이슬람 정복 후에도 기독교 (단성론) 신앙을 유지하던 이들은 우마이야 왕조의 친위 세력이 되어 활약하였고 9세기가 되어서야 점차 이슬람으로 개종하였다. 그리고 9세기 중후반 압바스 왕조가 사마라의 혼란기를 겪으며 쇠퇴한 틈에 이들은 자지라 일대에 대한 패권을 쥐었다. 비록 9세기 말엽 압바스 왕조는 안정을 회복하였지만 이미 바누 타글립의 세력은 강대하였고 이에 칼리파 무타미드는 모술에 튀르크인 총독을 파견해 중앙 집권을 시도하였다. 그러자 부족의 유력자 중 한명이던 함단 이븐 함단이 카와리지파와 반란을 일으켰다. 함단 이븐 함단의 반란은 4년간의 격전 끝에 884년 그가 항복하며 진압되었다. 그러나 그의 차남 후세인이 압바스 왕조의 몇 안되는 아랍인 장군이 되어 카와리지, 카르마트, 바누 칼브, 툴룬 왕조 등과의 전쟁에서 활약하자 함단과 다른 아들들은 석방되었다. 911년, 후세인은 모술의 아미르가 되었는데 915년 압바스 조의 와지르 직을 놓고 벌어진 바그다드의 권력 투쟁을 틈타 반란을 일으켰다가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그럼에도 925년 함단의 삼남 압둘라가 바그다드 궁정의 동맹 덕에 재차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3. 성립
929년 압둘라는 칼리파 계승 분쟁에 개입했다가 살해되었고 6년간의 내분 끝에 그의 장남 하산이 모술을 계승하였다. 938년 압바스 왕조의 대장군 (아미르 알 우마라) 바즈캄이 대군과 모술을 점령하였으나 경쟁 군벌이 바그다드를 공격하자 그는 하산의 지배를 인정하고 회군하였다. 그러던 941년 바즈캄이 암살당하자 바그다드는 맘루크 아미르들간의 각축장으로 변하였고 칼리파 알 무타키는 대장군 이븐 라이크와 모술로 피신하였다. 하산과 동생 알리는 그들과 함께 남하해 바그다드와 바스라를 수복하였고 (942년 4월) 구원에 대한 대가로 칼리파 알 무타키는 하산과 알리 형제에게 각각 나시르 앗 다울라 (왕조의 방어자) 및 사이프 앗 다울라 (왕조의 검)이란 라캅을 내려 치하하였다. 이는 와지르가 아닌 바그다드의 외부인에게 라캅이 내려진 첫 경우였다. 특히 하산은 대장군 직위와 칼리파의 사돈이 되는 명예를 얻었다. 한편 알리는 튀르크 장군 투준과 함께 와시트를 수복하였는데 봉급 지불이 늦어진 것에 분노한 후자가 반란을 일으켰고 하산과 알리 형제는 바그다드를 두고 도주하였다. (943년 6월)
이후 이라크 대신 시리아로 시선을 돌린 하산은 사촌 후세인을 파견하였는데 그는 익시드 왕조의 동맹인 라흐바의 아미르를 격파하였고 손쉽게 할랍을 점령하였다. (944년 2월) 한편 바그다드의 내분이 지속되자 하산은 바그다드에 재차 파병하였고 칼리파와 와지르는 이들과 함께 재차 모술로 피신하였다. 이에 투준이 북진하여 하산을 두 차례 격파하고 모술을 점령하였다. 하산과 알리 형제는 칼리파를 대동하고 누사이빈을 거쳐 라카로 도주하였다. 투준은 하산에게 이라크 대한 불간섭 및 350만 디르함의 연공을 대가로 모술을 돌려주고 회군하였다. (944년 5월) 이 타협에 분노한 칼리파는 이집트에 도움을 청하였고 이에 익시드 왕조의 무함마드 이븐 투그즈가 북상하자 함단 군대는 라카와 할랍에서 철수하였다. 그해 8월 라흐바에서 칼리파와 만난 무함마드는 그에게 이집트 체제를 청하였으나 거절당하자 회군하였다. 홀로 남겨진 칼리파 알 무타키는 투준의 안전 보장 약속을 믿고 바그다드로 돌아갔다가 실명되고 폐위되었다.
한편 이라크 원정의 실패 이후 잠자코 지내던 하산의 동생 '사이프 앗 딘' 알리는 형의 지원 하에 이집트 군대의 철수 직후 시리아로 향하였다. 익시드 왕조의 알레포 총독 아불 파스 우스만은 동맹인 바누 킬랍의 배신 소식에 저항을 포기하였고 알리는 할랍에 무혈입성 하였다. (944년 10월) 이로써 시리아 북부와 자지라에 걸쳐 형제가 경영하는 함단 왕조가 세워졌다. 한편 알레포, 안티오크, 타르수스, 라카, 디야르바크르, 마야파리킨 등의 영토를 지니게 된 사이프 앗 딘은 모술, 라흐바, 마르딘, 누사이빈으로 구성된 형 하산보다 더 큰 세력을 지니게 되었다. 함단 왕조는 당시 드물었던 아랍인 군주로서 그들의 지지를 받았다. 손쉽게 알레포를 얻은 알리는 자신감을 얻었는지 익시드 왕조를 침공해 홈스를 포위하였다. 홈스의 구원 요청에 아불 미스크 카푸르 휘하 익시드 군대가 출정하였으나 알리에게 격파되었고 이에 홈스가 항복하였다.
이후 시리아 통일에 나선 알리는 945년 초엽 일시적으로 다마스쿠스를 점령하기에 이른다. 비록 시민들의 반발로 후퇴하긴 했으나 이집트까지 위협의 대상이 될까 우려한 무함마든 이븐 투그즈는 그해 4월 친정에 나섰다. 그는 알리에게 알레포 영유 인정 대가 휴전 제안하나 거절되었고 이에 진격하여 여름 무렵 함단 군대를 격파하였다. 이후 알리는 라카로 도주하였다. 무함마드 이븐 투그즈는 알레포 일대를 습격하곤 재차 협상 권하여 기존 제안대로 시리아 분할이 성사되었다. 그해 10월의 협정에서 무함마드 이븐 투그즈는 승리했음에도 알리가 다마스쿠스에 대한 주장을 철회하는 대가로 도시에 대한 연공까지 납부하는 저자세를 취하였다.
다가오는 죽음 이후를 대비해 확실한 국경 안정을 원했던 무함마드 이븐 투그즈는 연공에 더해 알리를 자신의 조카와 결혼시키고서야 안심하였다. 하지만 지극히 관대한 협상에도 불구하고 알리는 946년 7월 무함마드 이븐 투그즈가 사망한 직후 곧바로 침공해 다마스쿠스를 점령였고 팔레스타인으로 남하하였다. 하지만 그해 12월 알리는 카푸르가 이끄는 익시드 군에게 패배하였다. 홈스로 후퇴해 전력을 재정비한 알리는 이듬해 봄 재차 남하하였으나 재차 패하였고 이번엔 익시드 군이 북진하여 알레포를 점령하였다. (947년 7월) 하지만 파티마 왕조의 동진과 함께 다마스쿠스 너머의 지배에 한계를 느낀 카푸르는 다마스쿠스 대한 연공 조항만 뺀 945년의 협정을 갱신하고 귀국하였다. 이때 정립된 이집트-다마스쿠스 / 알레포-자지라의 구도는 향후 맘루크 왕조 때까지 오랜기간 유지된다. 겨우 할랍을 되찾은 알리는 955년까지 바누 칼브 등을 위시한 아랍 부족들의 반란들을 강경 진압하며 내부를 결속하였다.
4. 대 로마 전선
한편 934년 말라티야, 949년 에르주룸을 수복하는 등 동로마 '제국의 역습'이 가시화되자 무슬림들 사이에선 '지하드'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모술에 있던 때부터 936년 사모사타 구원 시도와 938년 말라티야 습격, 940년 아르메니아 원정 등의 반격에 나섰던 '사이프 알 다울라' 알리는 할랍을 거점으로 946년 동로마 영토에 대한 습격을 재개하였다. 하지만 반격에 나선 동로마 군은 알리를 연패시키고 안티오크까지 습격하였다. 이에 알리는 950년 대군을 모아 카파도키아를 약탈했지만 회군 도중 동로마 장군 레오 포카스에게 8천의 전사자를 내는 대패를 겪었다. 그럼에도 동로마측 평화 제의를 무시하며 습격을 지속하던 알리는 953년 마라쉬 전투에서 동로마 대군을 격파하였고 부상당한 패장 바르다스 포카스는 은퇴하였다. 이후 2년간 동로마 군의 반격을 막아낸 알리는 국경 성채들을 재건하였다. 한편 955년 바르다스의 장남 니키포로스 포카스가 동로마 사령관으로 부임하였다.
956년 봄, 재차 습격에 나선 알리는 요안니스 치미스케스 휘하 동로마 군의 매복에 걸렸으나 싸워 이겨내었다. 하지만 동시에 레오 포카스가 시리아를 침공해 알리의 사촌 아불 아쉬르를 패배시키고 그를 포로로 잡아갔다. 이듬해 알리가 친로마 세력을 진압하는 동안 니키포로스는 국경의 하다스 성채를 파괴하였다. 958년 요안니스는 다라를 점령, 아미다 근교에서 1만의 함단 군대를 격파하였다. 이에 알리가 반격에 나섰지만 라반 전투에서 패하였다. 960년, 니키포로스가 크레타 수복으로 부재한 틈에 알리는 카파도키아를 습격하였다. 하지만 회군 도중 레오 포카스의 매복에 걸렸고 이어진 안드라소스 전투에서 함단 군대는 전멸당하였다. 알리는 3백의 병력과 도주하였다. 961년 복귀한 니키포로스는 킬리키아를 침공하였고 이듬해 알리는 그곳에서 철수하였다. 현지 무슬림들을 학살 혹은 추방하며 킬리키아를 석권한 니키포로스는 마라쉬를 점령하곤 시리아 정복에 나섰다.
962년 가을, 니키포로스는 7만 대군과 만비즈를 점령하였고 12월 중순 할랍에 이르렀다. 급조된 함단 군대는 괴멸되었고 동로마 군은 할랍에 입성, 저항하는 시타델을 두고 약탈과 학살을 자행한 후 1만의 포로와 회군하였다. 알리는 파괴된 수도에 킨나스린의 난민들을 들이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것이 없었고 이내 부관 카르쿠야에게 할랍을 맡기곤 제2의 수도인 마야파리킨으로 물러났다. 963년 니키포로스가 황제로 즉위하는 틈에 알리는 킬리키아를 수복하고 북진하여 이코니움 (콘야)까지 습격하였다. 하지만 후임 사령관 요안니스는 반격에 나서 킬리키아의 함단 군대를 패배시켰고 965년 두 차례의 포위 끝에 마미스트라를 점령하였다. 이후 타르수스가 항복하며 킬리키아는 동로마 속주로 편입되었다. 같은해 카르마트 군이 시리아를 습격하였고 디즈바리 등 킬리키아 출신 아미르들이 안티오크에서 반란을 일으켜 일시적으로 할랍을 점령하는 등 난관은 이어졌다.
마침내 966년, 막대한 비용을 들여 동로마로부터 포로들을 돌려받은 알리는 들것에 실려 할랍에 귀환하였다. 알리는 바누 킬랍의 도움으로 반란을 잔혹히 진압하였지만 동로마 군이 재차 침공해오자 샤이자르로 도주하였다. 동로마 군은 시리아 북부를 약탈한 후 로마측에 전향한 안티오크 총독과 회군하였다. 그 후에야 할랍으로 돌아온 알리는 그곳에서 병사하였다. (967년 2월)[1] 알리의 유일한 아들 샤라프는 치세의 시작부터 홈스 총독인 숙부 아부 피라스의 반란에 시달렸고 968년 후자가 사망할 때 즈음엔 동로마 군이 침공하였다. 샤라프는 재상 카르쿠야의 조언대로 홈스로 피신했는는데, 후자가 할랍을 차지해버리며 졸지에 수도를 잃어버렸다. 그틈에 모술의 사촌 우다트 앗 다울라는 라카와 마야파리킨을 점령하였다. 역시 기회를 노린 동로마 장군 페트로스는 969년 10월 안티오크를 점령하며 시리아에 확고한 거점을 마련하였다.
한편 비슷한 시기 할랍의 카르쿠야는 경쟁 아미르에 맞서 안티오크의 페트로스에 도움을 청하였다. 페트로스는 해당 아미르를 격파한 후 할랍을 포위, 970년 1월 할랍에 입성하였고 카르쿠야는 70만 디르함의 연공과 함께 동로마의 봉신이 된다는 협정을 체결하였다.[2] 같은 시기 이집트를 장악한 파티마 왕조는 이제 허울 뿐인 함단 왕조를 두고 동로마와 경쟁하기에 이른다. 동로마 총독으로서 평화를 유지하던 카르쿠야는 975년 부관 바크주르에게 폐위되었는데, 2년 후 샤라프는 바누 킬랍의 도움으로 후자를 패배시키고 할랍을 되찾았다.[3] 979년 샤라프는 모술의 사촌과 대립하던 부와이 왕조에 복속, 실지 일부를 되찾았고 칼리파로부터 라캅 '사드 앗 다울라'를 하사받았다. 이후 샤라프는 동로마에 대한 복속을 철회하려 시도하였지만 981년 동로마 군이 할랍 앞에 당도하자 970년의 협정을 재확인하였다. 이때부터 동로마-파티마 간의 할랍 쟁탈전이 시작된다.
983년 9월 파티마 군이 홈스의 바크주르와 함께 할랍을 공격하였는데 샤라프의 요청에 동로마 장군 바르다스가 개입하자 철수하였다. 내친김에 바르다스는 10월 홈스를 점령하고 샤라프에게 반환하였다. 도망친 바크주르는 파티마령 다마스쿠스 총독이 되었다. 하지만 이후 동로마 군과 함단 군의 충돌이 있었고 샤라프는 연공을 2만 디나르로 올리는 대가로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그러던 986년 파티마 군이 트리폴리를 넘어 발라냐스를 점령하자 샤라프는 동로마에 대한 연공을 거부하였고 이에 동로마 군이 킬리스를 점령하고 아파메아를 포위하였다. 샤라프는 보복으로 할랍 부근 성 시메온 성당을 파괴하였다. 하지만 동로마-파티마 휴전이 추진되자 샤라프는 다시 기존 조건대로 전자에 복속하였다. 한편 그해 말엽 바르다스는 동로마 황제 바실리오스 2세에 반란을 일으켰고 샤라프는 전자를 원조하며 3년간 이어진 내전 동안 평화를 누렸다.
그러던 991년, 다마스쿠스 총독직에서 해임된 바크주르는 라카로 도주한 후 독자적으로 할랍을 공격하였다. 이에 샤라프는 동로마령 안티오크 총독의 도움으로 그해 4월 바크주르를 패배시켰고 포로가 된 그는 처형되었다. 이후 파티마 조를 공격하려던 샤라프는 991년 12월 병사하였다. 그의 아들 사이드 앗 다울라가 계승하였지만 재상 룰루가 실권을 지닌 상태였다.
1002년 알레포의 지배권은 룰루가 차지한다.룰루는 1002~1004년 함단 왕조의 마지막 두 왕인 알리 2세와 샤리프 2세의 섭정으로 있다가 파티마 왕조의 봉신이 되었다.
[1] 사이프 앗 딘 알리는 지하드 전사 이미지 때문에 기독교에 적대적이었을 것이라 오해받지만 그의 신민들 중 절반 이상이 기독교도인 이상 정상적인 통치에 있어 이는 불가능했다. 그가 가장 신뢰했던 비서 역시 기독교도였다. 한편 동생의 죽음에 충격을 받은 모술의 하산은 장남 아부 타글립에게 실권을 맡겼다가 그에게 폐위되어 이듬해 유배지에서 사망한다. 하지만 948년부터 지속된 부와이 왕조의 침공에 결국 979년 정복되고 만다[2] 이때 트리폴리 북쪽까지의 해안 영토가 할양되었고 알레포에는 관세 거둔다는 명목 하에 동로마 관리가 사주했으며 아미르와 카디 임명권 역시 로마 황제에게 있었다. 그에 더해 할랍의 아미르는 다른 무슬림 군대의 일대 통과를 불허해야 했다[3] 이후 둘 모두는 사면되어 바크주르는 샤라프가 머물던 홈스 총독이 되었고 카르쿠야는 재상으로 복권되어 990년 4월 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