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 아딜 1세

 

'''아이유브 왕조의 술탄 '''
3대 알 만수르 무함마드

4대 '''알 아딜 아부 바크르'''

5대 알 카밀
1. 개요
2. 생애
2.1. 살라딘 사후
2.2. 즉위
2.3. 수성 군주
2.4. 죽음
3. 평가



1. 개요


아랍어: الملك العادل سيف الدين أبو بكر بن أيوب‎ [1]
영어: Al Adil
아이유브 왕조의 술탄 (재위 1200 ~ 1218년). 살라딘의 동생으로서, 십자군과의 전쟁 시에 조력자 중 하나로 활약하였다. 형 살라흐 앗 딘이 '살라딘'으로 알려진 것처럼, 알 아딜은 칭호인 사이프 앗 딘 (신앙의 검)이 변형된 사파딘 (Saphadin)으로 서방 세계에 알려졌다.

2. 생애


1145년 6월, 다마스쿠스에서 나짐 앗 딘 아이유브의 아들로 태어난 알 아딜은 누레딘의 군대에서 경험을 쌓았고 형 살라딘과 함께 숙부 시르쿠의 이집트 원정에 종군하였다. 시르쿠와 누레딘이 사망한 후 살라딘이 십자군과의 전쟁에 나서자 알 아딜은 이집트를 맡았고 아이유브 군대의 보급을 맡았다. 1183년까지 이집트를 맡았던 아딜은 1183-86년에 알레포 총독을 맡았다가 다시 이집트로 복귀하였다. 이후 3차 십자군과 협상 중 리처드 1세가 그의 처남이 될뻔하기도 했다. (1190년 리처드는 자신의 여동생 잔과 아딜 간의 결혼을 주선했는데 그녀는 이교도와의 결혼을 거부했고 알 아딜 역시 기독교로의 개종을 원치 않아 무산되었다)

2.1. 살라딘 사후


1193년 3월 4일, 당대의 영웅이던 살라딘이 다마스쿠스에서 세상을 떠나자 그가 이룩한 대십자군 연맹은 곧바로 분열 조짐을 보였다. 살라딘은 장남 알 아프달 알리에게 다마스쿠스, 차남 알 아지즈 우스만에게 카이로, 삼남 앗 자히르 가지에게 알레포를 맡겼다. 동생의 야심을 경계한 그는 아딜이 본래 맡았던 이집트 대신 동북변의 자지라 지역을 맡겨 그가 아들들의 방파제가 되어주길 바랬다.[2] 하지만 알 아딜은 연고가 없던 자지라를 맡고도 이내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며 점점 세력을 키워나갔다. 먼저 살라딘이 죽은 직후 모술의 장기 왕조 군주인 이즈 앗 딘 마수드[3]가 일으킨 반란을 진압, 모술을 재차 복속시켰다. 한편 1194년부터 다마스쿠스와 카이로를 맡은 두 형제는 서로 반목하기 시작하였다. 이는 알 아딜에게 새로운 기회가 되었다.
본래 살라딘은 장남 알 아프달에게 자신이 사랑했던 도시 다마스쿠스를 맡기며, 그가 아이유브 가문의 당주이고 십자군에 대항하는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유조를 남겼다. 그리고 임종 직전에 모인 아미르들로 하여금 아프달에게 충성을 맹세하게 하였다. 하지만 전공도 전무한 알 아프달이 살라딘 사후 왕권 강화를 위해 지나치게 기존 공신들을 배척하자 그들은 반감을 품고 이집트로 망명하였다. 여기에 알 아딜의 부추김까지 더해지자 자신감을 얻은 우스만이 형의 권위에 반기를 들며 다마스쿠스로 진격하였다. (1194년 5월) 이에 알 아프달이 지원을 요청해오자 알 아딜은아직 야망을 드러낼 때가 아니라 판단, 형제 간의 화해를 주선함으로써 이슬람의 내분을 잠재웠다는 명망을 쌓았다.
그러나 이듬해에 우스만은 재차 다마스쿠스를 공격하였고 이번엔 아프달에게 격퇴당하여[4] 이집트로 후퇴하였다. 이에 힘의 균형이 무너질 것을 두려워 한 알 아딜은 본심을 드러내며 남하, 무능한 지도자로부터 아이유브 제국을 구한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부득이하게' 다마스쿠스를 공격하였다.[5] 3년간 내전에 신경쓰던 알 아프달은 그간 세력을 다져온 알 아딜에게 대적하지 못하고 시타델로 후퇴하여 농성하였다. 그러나 급히 후퇴하며 물자가 부족했던 수비군은 얼마 버티지 못하였고 알 아프달은 숙부와 협상에 나섰다. 그 결과 알 아프달은 시리아와 제국의 지휘권을 동생 우스만에게 넘겨준 후 시리아 남부의 살칸드[6]의 영지로 은퇴하였다. 그리고 알 아딜은 우스만에게 충성을 맹세하며 다마스쿠스를 지배하게 되었다. (1196년 7월 3일)

2.2. 즉위


1196년, 아이유브 왕조는 명목상으로는 살라딘의 차남 알 아지즈 우스만의 패권 하에 통합된 듯 보였지만 실질적인 권력은 자지라에서 다마스쿠스까지 제국의 절반 이상을 장악한 알 아딜에게 있었다. 그러던 1198년 11월, 우스만이 사냥 중 낙마 사고로 인해 사망[7]하고 그의 12살 난 아들 알 만수르 나시룻딘 무함마드가 술탄으로 즉위하자 정국은 급변하였다. 알 아딜의 야심을 잘 알고 있던 이집트의 아미르들[8]은 살칸드에 있던 숙부 알 아프달을 소환, 아타베그[9]로 삼았다. 1199년, 아프달은 선제 공격을 결심하곤 알레포 총독인 동생 앗 자히르 가지와 연합하여 알 아딜의 다마스쿠스를 포위하기에 이른다. 당시 자지라의 아르투크 왕조와 대결하던 알 아딜은 아들 알 카밀에게 전선을 맡기곤 황급히 회군하였다.
이번에도 알 아딜은 조카들끼리의 내분을 부채질하여 시간을 끌었고, 아들 카밀의 지원군이 당도하자 알 아프달은 포위를 풀고 철수하였다. (1199년 12월) 이 기회에 반대 세력을 일망타진 하기로 결심한 알 아딜은 그를 추격하여 카이로에서 40km 떨어진 빌베이스에서 이집트 군대를 패배시켰다. 카이로로 패주한 알 아프달은 어떤 조건이든 수용하겠다며 협상을 청하였고, 알 아딜은 그를 자지라에서도 외곽인 사모사타와 마야파라킨의 국경 지대의 태수로 봉하였다. 마침내 1200년 2월 17일, 알 아딜은 금요 예배문 (쿠트바)에서 알 만수르의 이름 대신 자신을 언급하게 하며 술탄이 되었다. 폐위된 만수르는 알레포의 숙부에게로 유배되었다.[10] 이후 알 아딜은 아들 카밀을 카이로 총독으로 봉하고 자신은 다마스쿠스로 돌아가 통치하였다.
한편 자지라로 은퇴한 알 아프달은 알 아딜의 아들들 중 하나인 알 아흐와드에게 핵심 도시인 마야파라킨을 부당하게 빼앗기자 그에 반발하여 재차 숙부에 반기를 들었다. (1201년) 재차 알레포의 자히르 가지와 연합하여 다마스쿠스를 공격한 알 아프달은 역시 역부족임을 느끼자 협상에 응하였고, 남은 사모사타의 영지에 사루즈 등의 마을들을 더해준다는 알 아딜의 제안에 승복하였다. 자히르 가지 역시 1202년 봄에 알 아딜의 우위를 인정하며 알 아딜은 살라딘 사후 9년만에 제국의 유일무이한 패권자로 등극할 수 있었다. 살라딘 이상으로 신중한 현실주의자였던 알 아딜은 1198년 7월 십자군과 평화 협정을 맺은 것에도 마음이 놓이지 않았는지 1202년에는 십자군의 운송과 보급을 담당하는 베네치아 공화국과도 불가침조약을 맺어 4차 십자군을 피할 수 있었다.

2.3. 수성 군주


1202년, 57세의 나이로 제국을 움켜쥔 알 아딜은 1170년대부터 지속적으로 전란을 겪은 제국의 회복을 위해 노력하였다. 화폐 및 조세 제도가 개혁되었고, 이로써 살라딘이 성전을 수행하느라 적자로 치달았던 재정 상황은 알 아딜의 치세를 거치며 안정을 되찾았다. 특히 1200년의 지진과 1199-1202년간의 홍수로 피폐해졌던 이집트는 빠르게 회복세로 접어들 수 있었다. 가뭄이 전국을 휩쓸자 알 아딜은 비축해둔 식량을 푸는 것에 머무르지 않고 병사들을 농촌에 파견, 둔전하게 하여 미래까지 대비하는 현명함을 보여주었다. 동시에 하이집트와 레반트에서 서유럽 상인들과의 교류를 활성화시킴으로써 알 아딜은 상업적 수익과 함께 십자군에 대한 서유럽 해상 세력들의 회의감을 불러일으키고자 하였다.
비록 1204년 로제타, 1211년 다미에타 등 소규모의 십자군이 해상으로 이집트를 공격하는 일이 있긴 했지만 대체적으로 그의 치세 동안 아이유브 왕조와 십자군과의 관계는 원만히 유지되었다. 또한 내치에 있어서 알 아딜은 1212년 알레포의 조카 자히르 가지와 딸 다이파 카툰을 결혼시키며 제국의 정치적 안정을 공고히 하였다.[11] 그와 동시에 내우 외환을 우려하여 제국 내의 여러 요새들이 보수되거나 신설되었다. 특히 1203 ~ 1216년의 공사 끝에 재창조된 다마스쿠스의 시타델은 시리아 각자의 제후들도 참여한 대규모 건축이었다. 그외에도 알 아딜은 1207년 아르메니아로 파병하여 반 호수 인근 아흘라트를 정복하는 업적을 세우기도 하였다. 같은 해 바그다드의 칼리파는 알 아딜을 시리아와 이집트의 술탄으로 인정하였다.

2.4. 죽음


[image]
다미에타 공방전
1212년, 알 아딜은 세번째로 십자군과 평화 협정을 맺은 후로 다마스쿠스의 궁정에서 안정적인 말년을 보냈다. 그러나 1217년 9월, 휴전이 끝나기가 무섭게 아크레엔 헝가리 국왕 언드라시 2세가 이끄는 5차 십자군이 집결하였고 72세의 술탄은 황급히 팔레스타인으로 군대를 보냈다. 11월 요단강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아이유브 군대는 패배하였고 이에 각지의 요새에서 방어전으로 전환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한편 예루살렘의 성벽이 허물어지고 시민들이 피난가는 소동이 벌어졌음에도 십자군은 그를 향해 진군하는 대신 각지의 요새들을 공격하는 우를 범하였다. 게다가 그들은 공성병기가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시간을 지체했고 그동안 언드라시 2세가 병에 걸렸고 성물 수집만 행한 채 1218년 2월 귀국해버렸다.
이에 알 아딜은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하지만 1218년 5월, 이번엔 독일 각지에서 모인 십자군이 요새화된 팔레스타인 대신 비옥한 이집트로 향한다는 소식이 들렸다. 그들은 심지어 전통적으로 십자군과 대립하던 룸 셀주크와 연합하였고 이에 튀르크 군이 시리아 북부를 공격하는 상황에서 이집트의 알 카밀은 다미에타에서 수만의 십자군과 맞서야 했다. 그해 8월 25일, 카이로의 전령 비둘기가 다미에타 수비의 핵심인 외곽 요새가 함락당했다는 소식을 가져오자 노쇠한 술탄은 쓰러졌고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였다. 다만 알 아딜의 뒤에는 그가 술탄을 지낸 햇수 만큼 이집트를 다스려온, 노련하고 영민한 아들 알 카밀이 든든한 후계자로 성장해 있었다.

3. 평가


역사가 험프리는 그를 '공식 석상에선 청교도적이었고 신중한 경제가였으며, 공공 사업에 열정적이었다'고 평가하였다. 제국의 회복을 위해 최선을 다했던 알 아딜은 19년간의 치세 동안 단 한차례만 십자군을 공격하는 등 '정면 승부로는 이기기 힘든' 프랑크 인들과의 공존을 택하였다. 이러한 태도는 한발리 학파의 분노를 샀지만 술탄의 권위에 도전하지는 못하였다. 하지만 그의 관용에도 불구하고 십자군은 지속적으로 아이유브 왕조를 노렸고 결국 5차 십자군의 이집트 공격으로 이어졌다.


[1] 알 말리크 알 아딜 사이프 앗 딘 아부 바크르 이븐 아이유브[2] 다른 자료에는 요르단의 케라크를 맡았다고 되어 있다 추가 요청[3] 이마드 앗 딘 장기의 손자이자 누르 앗 딘의 조카. 1180년부터 모술 총독이었다가 1181년 알레포 역시 물려받았는데, 살라딘의 성장으로 지키기 어렵다고 판단되자 동생인 이마드 앗 딘 장기 2세에게 그의 영지인 신자르와 알레포를 바꾸었다. (1182년) 이듬해 알레포는 살라딘에게 점령되었고 1186년 이즈 앗 딘은 살라딘에게 복속하여 영토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곤 7년 후 살라딘이 사망하자 자립을 시도한 것.[4] 이때 아프달이 부왕 살라딘의 권위를 앞세워 이집트 군대에 호통을 치자 그들 중 상당수가 전열을 이탈했다고한다[5] 결국 우스만이 유리할 때는 아프달을 돕고, 아프달이 유리해지자 우스만의 편에 서서 시리아로 진격한 것을 보면, 알 아딜이 대단한 지략가임을 알 수 있다. [6] 고대 로마 군단기지인 부스라 인근에 위치[7] 파라오의 저주라는 말이 있었다. 그가 이교도의 상징물인 피라미드의 파괴를 위해 그 첫 대상이었던 멘카우레의 피라미드 북쪽 면에 구멍을 뚫었기 때문[8] 사실 그들도 살라딘의 맘루크인 살라히야와 아사드 앗 딘 시르쿠의 맘루크인 아싸디야로 분열되어 있었다. 전자는 살라딘만큼 능력이 있는 알 아딜을, 후자는 정통성에서 앞서는 알 아프달을 지지하였다[9] 터키어로 큰아버지란 뜻. 셀주크 제국 때부터 섭정이란 의미로 쓰였다. 아이유브 가문은 쿠르드계이긴 튀르크화 된 군벌 출신이다[10] 1216년 앗 자히르 가지는 만약 자신의 아들들이 조카 만수르보다 요절한다면 그가 계승하게 하라는 유언을 남겼는데 이후로 만수르에 대한 기록은 전해지지 않는다[11] 살라딘 가문과 알 아딜 가문 간의 화합을 꾀한다는 면에서 상징성이 지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