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네치아 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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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탈리아 동북부 해안에 존재했었던 공화국으로, 수도는 베네치아였다. 중세에 제노바 공화국과 함께 서유럽과 중동을 잇는 양대 무역국가로 군림했던 국가다.
2. 역사
2.1. 건국
베네치아 공화국의 역사는 5세기경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뒤 이민족들[4] 에게서 도망치려 했던 사람들이 이탈리아 동북부 아퀼레이아의 석호에 모여서 시작되었다. 7세기 경에 규모가 발전해 자신들의 지도자를 선출하고 동로마 제국의 황제에게 자치를 인정받게 되었으며, 전하는 바에 따르면 697년에 최초의 도제[5] 가 선출되었다고 한다. 이렇듯 주로 서로마 멸망 이후 각종 게르만 이주 세력의 각축장이 되었으며, 카롤루스 대제의 정복을 걸쳐 신성 로마 제국 소속이었다가 중세 성기(High Middle Ages, 11세기-13세기) 이후 하나 둘씩 정치적으로 독립하기 시작했던 다른 북이탈리아 도시 국가들과 달리 베네치아는 애초에 기원이 로마 제국 자체의 인프라와 정통성을 비교적 잘 보존한 동로마 제국의 봉신인 자치 공화국으로 시작했다. '''즉 북이탈리아의 대다수 지역들과는 달리 프랑크 왕국 - 신성 로마 제국의 지배를 받았던 적이 전혀 없다.''' 이런 독자적인 역사적 기원은 먼 훗날 중세의 전성기를 거쳐 근세의 시련과 위기에도 베네치아 공화국이 열강들 사이에서 독립을 유지할 이데올로기적 원천이 되었다.
2.2. 동로마 제국의 몰락
동로마 제국의 몰락으로 8세기 중엽에 이르면 베네치아는 북이탈리아에 남은 유일한 동로마의 거점이 되었다. 이때 베네치아는 친동로마, 친프랑크, 친랑고바르드, 완전한 자주국으로의 독립을 원하는 세력이 나뉘어 있었다. 이들은 끊임없이 경쟁하여 세습왕조가 창건되는 것을 막았다.
베네치아는 이 시기부터 서서히 어촌에서 무역과 교역의 중심지로 탈바꿈 하였다. 조선업 또한 발전하여 후일 베네치아의 강력한 함대의 기반이 되었다. 이렇게 성장하던 베네치아는 노예무역을 두고 교회와 끊임없이 대립하였다.
한편 810년 프랑크의 피핀과 전투하여 승리한 이후 베네치아는 사실상 독립하였다. 9세기 중반부터 베네치아의 해군력은 상당히 강해졌고, 이를 이용하여 이스트라 반도도 영향권 아래에 두게 되었다.
이후 10세기 말부터 내부분열이 완화되자, 베네치아는 아드리아 해로의 진출을 꾀하게 된다. 이러한 진출은 성과를 거두어 곧 아드리아해는 베네치아에 의해 장악되었다. 11세기초 베네치아는 동로마로부터 금인칙서를 받아내었고, 곧 완전한 독립국이 되었다.
베네치아의 독립이 다른 이태리 북부 도시국가들에 비해 늦었던 이유는 아드리아 해 일대의 지리적인 특징에도 있었다. 아드리아 해의 양안, 즉 발칸반도와 남이탈리아를 모두 영토로 삼고 있던 동로마 제국은 베네치아가 약간이라도 반항할 낌새를 보이기만 하면 바로 해상봉쇄를 시행하여 베네치아의 목줄을 죌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1071년 만치케르트 전투로 동방 방어선이 붕괴되어 동로마 제국의 발등에 급한 불이 떨어지고 동시에 로베르 기스카르가 이끄는 노르만 기사들이 남이탈리아 최후의 동로마 거점인 바리를 점령함으로써, 베네치아 공화국은 더 이상 동로마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게 되었다.
2.3. 십자군 전쟁
중세 성기에 베네치아는 동지중해의 무역을 지배하며 부를 축적했고 아드리아해 너머로 확장하기 시작했다.
십자군 전쟁 기간에는 여러 십자군들을 해로로 운송해주고 더 나아가서 우트르메르의 십자군 국가들에게 보급품이나 해군력을 제공해 줌에 따라 상당한 정치적, 금전적 영향력을 얻게 되었다. 12세기 동안에는 베네치아에 대규모의 조선소가 건설되었다.
제4차 십자군 전쟁때는 황위에 오르게 도와준다면 거금을 지불하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은 동로마 황제 알렉시오스 4세를 징벌하기 위해서 도제인 엔리코 단돌로가 직접 앞장서서 콘스탄티노플 공격에 나서기도 했다. 이미 4차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플 안에 주둔해 있었던 덕분에 어렵지않게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는 데에는 성공했으나, 그 당시 이슬람의 유럽 침략을 막는 유럽의 방파제로 기능하던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함락시킨 탓에 정교회 국가들로부터 어그로가 끌리게 되었고 심지어는 교황에게 파문까지 당하게 되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무역이 많이 오가는 콘스탄티노폴리스 무역 지대에 라틴 제국을 세웠던 덕에 서유럽 경제의 중심지이자 동지중해 무역의 독점 국가로 등극하면서 동지중해의 여왕이라고 불릴 정도로 엄청난 부를 과시하게 되었다. 또한 동로마 제국을 무너뜨리면서 크레타, 에우보이아 등 전략적 가치가 큰 영토들을 획득하게 되었으며, 이때 낙소스도 영향권에 두게 되었다. 1221년에는 몽골과도 무역협정을 맺었다.
2.4. 제노바 공화국과의 전쟁
13세기~14세기에는 제노바 공화국과 4차에 걸친 전쟁을 벌였다. 1261년 라틴 제국이 니케아 제국에게 멸망하고 미카일 8세가 동로마 제국을 재건하자 베네치아의 소아시아와 흑해 무역은 큰 타격을 입었고, 베네치아의 빈 자리를 동로마 제국과 손을잡은 제노바 공화국이 빼앗으려고하자 양국은 동지중해에서 대립하기 시작하였다. 베네치아만큼의 해군 역량을 보유했던 제노바와의 전쟁이었기에 때로는 큰 패배를 겪기도 하였고, 특히 4차 전쟁에서는 제노바, 헝가리, 파도바에 의해 도시 전체가 봉쇄되어 멸망의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물론 반격을 가해 재기에 성공했지만 휴전을 조건으로 많은 영토들을 잃고 말았다. 특히 헝가리에게는 달마티아의 대부분을 잃었다.
제노바와의 전쟁을 겪은 후 베네치아는 섬 주위에 육상 영토를 확보할 계획을 세웠다. 베네치아 인근 육상 국가인 파도바가 제노바 편을 들면서 순식간에 도시가 고립되었던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4차 베네치아-제노바 전쟁이 끝난 뒤 베네치아는 평화적인 합병 또는 중상모략을 통해 롬바르디아 내륙으로 진출해 본토 속령들을 넓혀 나갔으며, 1402년에는 밀라노까지 영향권 하에 넣게 되었다. 1410년 베네치아의 함대는 3,300척 규모에 달했으며, 헝가리가 쇠퇴하면서 달마티아도 다시 회복했다.
한편 팔레올로고스 왕조의 기치 아래에서 부활한 동로마 제국은 잦은 전쟁과 막장외교, 내전등으로 말미암아 다시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고 그 틈을 타서 튀르크족이 아나톨리아 서부로 들어와 동로마령 아나톨리아를 갉아먹기 시작했다. 그리고 1299년에는 오스만 1세가 오스만 제국을 세우고 동로마 제국의 잔여 아나톨리아 영토를 잠식해 나가기 시작했다.
2.5. 오스만과의 대립
소아시아 북서부의 조그마한 세력에 불과했던 오스만은 건국 이후 동로마의 영토를 조금씩 잠식하더니 발칸 반도 일대가 내전과 계승분쟁, 자연재해 등으로 혼란스러운 틈을 타 다르다넬스 해협을 건너 유럽까지 진출하였고 발칸 반도와 아나톨리아를 아우르는 강력한 세력으로 성장했다. 오스만 입장에서 볼 때 자신들의 앞바다인 에게 해와 동지중해 일대의 헤게모니를 쥔 베네치아는 눈엣가시같은 존재였고, 이후 베네치아와 오스만은 동지중해의 패권을 두고 수백년간 충돌하게 되었다.
물론 1396년 오스만이 십자군을 격파한 니코폴리스 전투 당시 베네치아는 대 오스만 십자군을 지원하고 있었고, 1413년부터 1419년까지 에게 해와 마르마라 해 일대에서 베네치아와 오스만 해군 사이에 일련의 교전이 벌어지는 등 이전에도 두 세력 간에 대결은 있어 왔다. 그러니까 베네치아와 오스만과의 본격적인 충돌은 1423년 테살로니키 공성전부터였다. 1422년 오스만 군이 동로마령이었던 테살로니키를 포위하자 위기에 빠진 동로마는 베네치아의 지원을 받는 조건으로 테살로니키를 베네치아에 넘겼는데, 자신들이 포위하는 사이 테살로니키가 베네치아 땅이 된 사실을 모르고 있었던 오스만은 나중에 사실을 알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동로마와 베네치아가 맺은 조약이 무효라고 주장하며 테살로니키에 대한 포위를 풀지 않았다. 결국 수년간의 포위 끝에 1430년 베네치아는 테살로니키를 포기하게 되었고 테살로니키는 이때 오스만의 영토가 되었다.
오스만 제국이 동로마 제국을 공격한 콘스탄티노플 공방전 때, 베네치아는 대규모 함대를 편성해 지원군을 파견했다 . 그러나 교황청과의 협상 등이 발목을 잡은 데다[6] 베네치아 본국에서도 우선 콘스탄티노플로 급히 가라는 명령을 취소하고 에게 해의 섬 곳곳에 있는 함대가 모두 모일 때까지 기다렸다가 가라고 명령하는 바람에, 이후 베네치아 함대는 그리스 근해까지 진출했지만 콘스탄티노플 구원에는 실패하고 말았다.
베네치아 구원 함대가 제때에 콘스탄티노플에 도착했다면 오스만 함대의 포위를 풀었을 가능성이 많았고,[7] 그렇게 되면 공방전 전체의 흐름에 큰 영향을 줄 수도 있었다.[8] 한편 콘스탄티노플의 베네치아 거류구는 자신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베네치아 공화국의 깃발을 내걸고 콘스탄티노플 공방전에서 최후까지 싸웠다.
사실 메흐메트 2세가 이끄는 오스만 제국군은 베네치아 단독으로 육상전을 벌이기에는 너무 강대했다. 육군이 허약한 베네치아가 다른 서유럽 국가들의 도움 없이 콘스탄티노플 공성전에 끼어들었다고 해서 로마의 멸망을 막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오히려 끼어들었다면 훨씬 빠르게 동지중해의 세력권을 상실했을 수도 있었다. 이 때의 동로마 제국은 이미 군사적 방파제로서의 역할을 완전히 상실한 상태였고, 그저 콘스탄티노플과 펠로폰네소스 반도 일부[9] 만으로 오스만 제국에 외교적으로 빌붙으며 간신히 생명만 유지하고 있던 불안한 상태였다. 서유럽 전체가 연합해서 오스만 제국에 대항했다면 모를까, 베네치아 공화국 혼자서 오스만 제국군을 상대하는 건 무리였다.
콘스탄티노플 함락 이후 베네치아는 일단은 동로마 제국 시절의 무역특권을 어느 정도 유지하였으나, 오스만 제국과 동지중해의 제해권을 두고 충돌하게 되면서 이 특권을 잃게 되었다. 하지만 베네치아는 적은 영토를 가지고도 발칸 반도와 소아시아, 서아시아 일대를 세력권에 넣었던 오스만 제국과 수백년을 싸웠다. 이는 오스만 제국을 창건한 투르크인이 본래 유목민족이어서 바다에 강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었다.[10] 그러나 이마저도 오스만 제국에 케말 레이스라는 걸출한 해군 지휘관이 등장하고, 셀림 1세의 치세(1512~1520)에 오스만이 직속 함대의 수를 늘리며 북아프리카의 바르바리 해적들을 해군으로 끌어들이는 등 해군을 크게 강화하면서 유명무실해진다.[11]
1463년 오스만 제국은 아테네의 튀르크인 지휘관에게 속해 있던 알바니아인 노예가 베네치아령으로 도망간 사건을 빌미로 베네치아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베네치아는 알바니아와 헝가리, 백양 왕조 등과 동맹을 맺고 오스만에 대항하였으나, 육지에서 강력한 면모를 보여주는 오스만군을 당해낼 순 없었다. 네그로폰테와 모레아, 알바니아 일대가 오스만의 공세에 무너지면서 결국 1479년 베네치아는 패배를 인정하게 되었다. 네그로폰테와 렘노스, 알바니고, 달마티아 일대를 오스만에게 넘긴 베네치아는 배상금과 연공까지 지불하기로 했다.
1499년 오스만은 베네치아를 상대로 다시 전쟁을 걸어왔다. 케말 레이스가 이끄는 오스만 해군의 맹활약으로 이번 전쟁에서도 베네치아는 패배하고 말았다. 1503년 오스만과 조약을 체결한 베네치아는 알바니아의 거점인 두라초, 그리고 모레아 반도의 코론과 모돈을 오스만에게 할양하였다. 이렇게 베네치아는 4차 십자군 후부터 유지되고 있던 동지중해에 대한 독점적 지배권을 상실하고 말았다. 물론 '독점적인' 지배권을 상실했다는 것이지 동지중해에서의 베네치아의 영향력은 1669년 크레타 공방전이 끝난 후 크레타의 상실 이전까지는 유지되고 있었다.
2.6. 이탈리아 북부 진출
베네치아는 해상 영토의 상실을 만회하기 위해 진출 방향을 이탈리아 반도 내부로 돌려 이탈리아 북부로 진출했으나, 체사레 보르자와 교황 율리오 2세에게 저지당했다. 특히 율리오 2세가 신성로마제국, 스페인, 프랑스를 끌어들여 결성한 캉브레 동맹과 벌인 1509년 5월 아냐델로 전투에서 베네치아는 처참히 패배하고 그동안 얻은 이탈리아의 영토를 다 토해내게 되었다.
그후 스페인과 신성로마제국 세력에 의해 북이탈리아 영토를 잃은 데 불만을 품고 있던 프랑스와 다시 동맹을 맺은 베네치아는 1515년에 이르러 아냐델로의 패배로 인한 피해를 만회하고 영토를 회복하였다. 하지만, 그 이후 북이탈리아에서 더 이상 영토를 크게 확장하지는 못했다.
2.7. 쇠퇴
동로마 제국의 멸망 이후 콘스탄티노폴리스 무역 경로를 독점하게 된 오스만 제국에 의해 동지중해 독점 패권을 잃게 되고, 16세기초에는 스페인과 포르투갈 등이 대서양을 이용하는 무역 루트를 개척하면서 전통적인 베네치아 무역의 영향력은 감소하기 시작했다. 그간 베네치아가 독점해오던 향료가 포르투갈에 의해 더 싼 가격으로 유럽에 들어오기 시작하자 1521년에는 포르투갈에게 그 향료 전량을 구매하겠다고 절박하게 부탁했으나 거부당하기도 하였다.[12]
하지만 곧 오스만 제국이 인도양 함대를 창설하여 포르투갈을 견제하기 시작한 데다 인도인들의 저항도 있어, 알렉산드리아-베네치아를 통한 향신료 교역은 다시 증가했다. 포르투갈 측 첩보 문서에 그냥 인도 제국을 포기하고 베네치아에서 향신료를 사는 게 이익이라고 쓰여 있기까지 했던 시기도 있었다.[13] 그리고 범선 시대에 아프리카를 왕복해야 하는 비용은 절대 적지 않았던 만큼, 동지중해 무역은 여전히 수익성이 있었다.[14] 당시 베네치아는 바다에서 여전히 매우 강했고, 갤리가 사용되던 1600년대 전까지는 유럽 최강의 해군국 중 하나였다.
1571년 베네치아는 스페인, 교황령과 함께 신성 동맹 함대를 구성하여 레판토 해전에서 오스만 해군을 신나게 두들겨 팼다. 그러나 영토면에서는 오히려 키프로스를 상실했고,[15] 전염병으로 도시 인구의 30%가 죽어나가기까지 했다.
그리고 레판토 해전 전후로 나폴리 왕국과 관계가 나빠져 곡물을 수입할 수 없게 되자[16] 어쩔 수 없이 오스만 제국과 무역 협정을 체결하였는데, 당연할 수도 있지만 기독교 국가들, 특히 스페인은 엄청나게 반발했다. 이후로 지브롤터 해협을 못 건너게 되어 주요 수출 대상이었던 영국에 가지 못하게 되었고, 외교 관계가 나빠져 조선소에 필요한 나무를 충분히 공급하지 못하게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레판토에서 패한 오스만 제국이 서지중해로의 진출을 포기하는 대신 해적들에게 더 큰 힘을 실어 주어 진출을 방해하기로 결정해 베네치아의 청년들이 선원이 되는 전통을 유지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점점 고립되어가던 베네치아는 교황과의 다툼 끝에 파문까지 당하고 말았다. 이후 베네치아는 예전의 부와 힘을 잃게 되었다. 그래도 1600년 베네치아 공화국의 수도였던 베네치아의 인구는 14만명에 달할 정도였고 이후에도 한동안 무역 대국으로 행세했으나 오스만 제국에 의해 무역 거점들을 하나둘씩 빼앗겨나가는 사태까지 해결하지는 못했다.
17세기에는 베네치아 최후의 무역 거점인 크레타를 두고 무려 20년 넘게 오스만 제국과 싸웠다. 이 전쟁에서 오스만은 수많은 병사와 무기로 크레타를 맹공격했지만, 베네치아는 당대의 부국답게 엄청난 보급으로 대항했다. 그러나 결국 이 전쟁은 양국의 재정을 파탄 상태로 만들었고, 더 이상의 전쟁은 조국에 해가 된다고 판단한 베네치아 수비대 측 사령관 프란치스코 모로시니(1619~1694)가 1669년에 항복함으로써 크레타는 오스만 제국에 넘어가게 되었다.
이 전쟁에서 양국은 엄청난 자금을 썼는데, 항복 당시 베네치아 공화국이 크레타 1년 방어에 사용한 자금은 이미 베네치아의 1년 세입을 초과했다. 이후 모로시니는 2차 빈 공방전에서 오스만이 패배하자 결성된 신성 동맹에 베네치아가 참가하자 복귀, 베네치아군을 이끌고 그리스에서 오스만군과 싸웠으며 1688년에 도제로 선출되었고 1694년에 사망했다. 1699년에 신성 동맹이 승리하면서 체결된 카를로비츠 조약에서 베네치아는 크레타를 수복하지 못했지만 보상으로 모레아(펠로폰네소스 반도 남부)와 일부 영토를 오스만에게 할양받았다. 그 후 베네치아는 모레아를 다시 오스만에게 잃었지만 본토 속령[17] 에서의 농업, 무라노 섬의 유리공예와 가공기술, 그리고 관광업으로 국가를 유지했다. 베네치아는 자신들의 앞마당이라 할 수 있는 아드리아 해에 다른 세력을 들이지 않는 데 주력했고, 1716년 코르푸 섬을 성공적으로 방어하며[18]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다.[19]
2.8. 멸망
1797년 당시 북이탈리아에 깊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제국을 저지하기 위해 나폴레옹이 이끄는 프랑스군이 북이탈리아를 침공하여 이탈리아 전쟁이 벌어졌다. 이때 베네치아 공화국은 합스부르크 제국 편에서 싸웠다. 그 결과 나폴레옹에 의해 점령당했고 베네치아 공화국은 멸망했다. 이 당시 베네치아의 해군력은 전성기의 모습을 완전히 상실해서, 전투함이라고 부를 수 있는 함선이라곤 갤리선 7척을 포함한 11척에 불과했다. 이 때문에 프랑스군이 압류한 함선이라곤 조선소에서 건조 중이던 프리깃 2척이 전부였다. 이 프리깃 2척은 나중에 이집트 원정에서 나폴레옹이 프랑스 본국으로 탈출할 때 사용한 선박이기도 하다.
나폴레옹은, 베네치아를 관통하는 거대한 Z자(혹은 S자) 형태의 대운하를 보고 경탄하여 극찬했다고 한다. 이탈리아 전쟁 결과 맺어진 캄포포르미오 조약(1797년)으로 프랑스는 합스부르크로부터 밀라노 공국, 만토바 공국 등을 획득하여 북이탈리아에 프랑스의 괴뢰국인 치살피나 공화국을 세웠다. 대신 보상 차원에서 베네치아를 합스부르크에 할양했다. 그리하여 베네치아는 합스부르크의 통치 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멸망할 당시였던 1800년 베네치아의 인구는 140,000명으로 과거보다 늘어나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상당한 인구였다.
3. 베네치아인
베네치아인들은 자신의 국가에 대한 자부심이 굉장히 강하였다고 한다.[20] 그런 이유로 달마티아인[21] 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식민지의 주민들을 가혹하게 대했는데, 어느 정도였냐면 오스만 제국에게 키프로스인이 몰래 오스만제국으로 가서 쉴레이만 1세에게 키프로스를 정복해 달라 했고, 키프로스가 함락당할 때 기독교도들이었던 키프로스인들이 공화국의 혹독한 지배 때문에 오스만 제국군을 환영할 정도였다 한다.[22]
이 차별은 식민지 주민들 뿐만 아니라 섬 위의 도시에 사는 사람들과 이탈리아 본토에 사는 사람들 사이에도 존재하였고, 때문에 후기에 베네치아 출신이 아닌 본토 출신의 귀족이 도제가 되자 망조라며 불안해하기도 한다. 베네치아인들의 우월주의는 이와 같이 식민지 주민들의 반발을 사 문제가 되기도 했다. 이런 애국심 덕분에 키오자 전투 같은 상황에서 평범한 시민들이 나라에 돈을 기부하고 군에 입대해 결국 승리한 경우도 있었지만, 마지막 순간에 나폴레옹에게 멸망 당하고 끝내 재건하지 못했던 원인 중 하나기도 했다.
도시내에서도 차별이 심했는데, 도시 거주자중 실제로 시민권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은 10%도 안되었고, 다수는 외국인 노동자나 노예였다. 그 위에는 주변 지역이나 외국에서 이주해온 상공 이민자들이 있었는데 특히 독일계 이민자들은 주로 베네치아의 모직 작업장에서 생활했다한다. 그 위에는 관료로 선출될 수 있는 소수의 시민권자들이 존재했다. 계급 피라미드의 맨 위에는 베네치아의 핵심 가문들이 모여 만든 대평의회(Maggior Consiglio)가 자리했으며 이 대평의회에 참여할 수 있는 권리는 일부 가문에 제한돼 상속됐는데 이들은 전체 인구의 3% 정도인 소수였다. 악명높은 유대인 게토도 베네치아가 처음 실시.
오스만 제국과 오랜 세월동안 대립관계였지만 오스만 황제의 후궁들 가운데 베네치아 출신도 있었다고 전해진다. 셀림 2세의 애첩인 누르바누 술탄[23] 과 무라트 3세의 애첩인 사피예 술탄이 이들이라고 하는데, 오늘날에는 누르바누의 경우 유대계라는 주장도 있는데다 사피예는 알바니아 출신이라는 학설이 유력하다. 하지만 누르바누는 기록에 따라 베네치아를 싫어했다고도 하지만 오스만 제국 내 베네치아 상인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고도 하며, 사피예의 경우 확실히 친베네치아적이어서 콘스탄티노플 주재 베네치아 대사가 본국에 '이 여자 잘 구슬리면 우리 공화국에 유리할 듯요' 하는 식의 보고서를 써 보내기도 했다.
참고로 공화국의 재기를 주장하는 정당의 조사에 따르면 독립을 원하는 주민의 수가 무려 89%라고 한다. 위 투표는 온라인 투표라서 실제 여론과는 어느정도 차이가 있다는 점은 감안해야 한다. 그럼에도 베네토 지역이 다른 북부 지역에 비해서도 독립을 원하는 목소리가 강한 것은 사실이다. 물론 이탈리아 정부가 허락해줄 리는 없겠지만 만에 하나 경제난이 심화되어 주민들의 반발이 현재보다 과격해진다면 몇 세기만에 부활하는 공화국을 볼 지도 모를 일이다.
4. 정치 체제
베네치아 공화국의 정치체제는 유력 인사들 간의 집단지도체제인 과두 공화정이었으며 그리스의 아테네 못지 않은 폐쇄적인 체제였다. 사실상 야당이 없는 일당 독재[24] 였다.
그러나 명색이 '공화국' 이라는 간판이 걸린 이상,[25] 베네치아는 이념적으로는 도시를 시민들의 공공재산으로 여겼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자면 베네치아 공화국은 소수의 가문이 통치하는 과두정적 요소가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네치아 공화국이 궁극적으로는 많은 시민들의(최소한 당시의 기준으로는 '많은') 정부와 주권에 대한 참여를 지향하는 체제였다는 사실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대 공의회'''(Mazor Consegio)의 회원들이 투표를 통해 지도자인 도제를 선출했으며, 일단 선출된 도제의 임기는 종신이었다. 하지만 실제 국가 최고 권력은 도제와 그 보좌관 6인, 그리고 임기 1년의 위원 10명으로 구성되는 '''10인 위원회'''(Consejo de i Diexe)에 있었으며 도제도 10인 위원회 내에서는 다른 위원들과 동등하게 단 1표만을 행사할 수 있었다. 심지어 친위 쿠데타를 일으키려다 10인 위원회에게 체포되어 사형당한 도제도 있었다. 이러한 정치형태로 인해 메디치 가문이 권력을 장악한 피렌체 공화국같이 특정 가문이 장악한 공화국이 출현했을때도 베네치아 공화국은 공화정을 유지하였다.
'''시뇨리아'''(Serenissima Signoria) 역시 국가 권력의 중추를 담당했다. 오죽했으면 도제의 장례식날에서조차 공화국 시민들이 상복도 입지 않고 도제는 죽었지만 시뇨리아는 살아있다며 노래할 정도였다. 이 시뇨리아는 10인 위원회와는 별개로, 도제와 그 보좌관 6인, 그리고 40인 위원회의 지도자 3인으로 구성되어 대평의회에서 10인 위원회의 위원 10명과 함께 총 스무 개의 권좌에 도제를 중심으로 앉아 대평의회를 주도했다.
베네치아 도제는 동로마 제국의 봉신으로서 달마티아 공작을 겸하고 있었다. 실제로 8세기~9세기까지 베네치아는 명실상부한 동로마의 위성국가였으나, 9세기 이후 아랍과 노르만의 침입으로 남이탈리아의 동로마 거점들이 무너지자 베네치아는 명목상의 봉신으로만 남게 되었다. 하지만 이 지위는 베네치아가 서유럽 세력[26] 으로부터 정치적, 종교적 독립을 지키는 적당한 명분은 될 수 있었다. 베네치아는 강력한 상업을 통해 이룬 재력과 군사력과 서유럽 최고의 외교력으로 이것을 충분히 활용했다.
5. 무역
6. 여담
로마인 이야기의 작가이자 로마 제국 빠순이로 유명한 시오노 나나미가 로마 다음으로 빠심을 드러내는(즉, 편애하는) 국가다. 그녀의 저작으로는 <바다의 도시 이야기>가 있으며, 다른 중세 지중해 관련 책에서도 베네치아의 이야기는 빠지지 않고 나오며 비중은 상당히 높다. 그러니까 적당히 필터링해서 읽자.
진지하게 베네치아사를 읽고 싶다면 존스홉킨스 대학의 F. C. Lane 교수가 쓴 <Venice: A Maritime Republic>을 읽어 보는 것도 좋다. 시오노 나나미도 이 책에서 도움을 많이 받았다고 하며, 내용도 한 권에 베네치아사의 많은 것을 담고 있다. 흠이라면 한국어로는 번역이 안 되어 있다는 것과, 페이퍼백판은 인쇄 상태가 그리 좋지는 않다는 것이다.
문명 5의 확장판 멋진 신세계에서 최초의 플레이어블 도시국가로 등장한다. 자세한 내용은 문서 참조.
코에이 대항해시대 온라인에서도 7대 국가(선택 6+망명 1) 중 하나지만... 문제는 그 위치가 구석인데다 아드리아 해의 영원한 역풍 때문에 유저 수가 극히 적다.
베네치아 공화국의 수호 성인은 복음사가 마르코이지만 원래부터 그런 것은 아니었고 아마세아의 성 테오도로를 수호성인으로 모셨다. 당시 성 마르코의 유해는 알렉산드리아에 있었는데 알렉산드리아가 이슬람의 손으로 넘어간 이후 베네치아의 상인들이 유해를 돼지고기 사이에 숨겨서 밀수해 왔고 그 이후 성 마르코에 봉헌된 산 마르코 대성당이 지어졌다. 그 과정에서 베네치아의 상징 역시 성 마르코의 상징인 사자로 정해졌다.
1104년 경에 아르세날레 디 베네치아[27] 라는 지금으로 치면 군수 조선 복합산업단지라고 할 수 있는 시설을 만들고 운영했다. 이곳을 통해 베네치아는 함선과 무기의 규격화, 표준화 등을 이룩하였다. 문명6에 베네치아군수창고라는 이름의 불가사의로 등장한다. 이 아르세날레 디 베네치아는 현대에는 이탈리아 해군 기지와 베네치아 비엔날레 전시장, 고선박 보존 시설 등으로 활용되고 있다.
7. 연표
8. 관련 문서
[1] '가장 고귀한' 이라는 명칭은 국가의 주권을 의미하며 유럽 여러 국가의 호칭이었다. 대표적으로 제노바 공화국과 베네치아 공화국이 '가장 고귀한 공화국' 이었으며 현재는 산마리노가 유일하게 '가장 고귀한 공화국' 을 쓴다. 해당 공화국의 국가원수는 '가장 고귀한 자'(Most Serene Highness) 라고 호칭한다. Serene의 뜻이 고귀와 함께 고요가 있다 보니 이를 가장 고요한 공화국으로 오역하기도 한다.[2] 전성기의 베네치아 공화국은 말 그대로 '''동지중해의 여왕'''이었다. 그래서인지 '아드리아 해의 여왕' 이라는 별칭을 갖고 있다.[3] 미승인국까지 포함하면 북키프로스 터키 공화국도 해당한다.[4] 일설에는 아틸라의 침공을 피하기 위해서였다고도 한다.[5] doge, 지도자의 명칭으로 한국어로는 '총독', '통령', '원수' 등으로 다양하게 번역되었으나 총독은 다른 나라의 식민지의 통치자라는 뜻이므로 틀린 말이다. 최근에는 그냥 도제라고 음역하기도 하며, 수공업자 길드의 도제(徒弟, apprentice)와는 다르다.[6] 당시 교황은 자기네들도 구원 함대를 모으고 있다면서 함께 보내자고 제안했지만, 교황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자신의 말을 들을 것으로 예상했던 이탈리아의 중소 도시 국가들이 비협조적인 태도를 취하여 끝내 함대를 결성하지 못했다.[7] 당시 오스만은 육군 강국이었지만 해군은 연안해군 수준이었다. 차라리 당시 오스만 출신 해적들이 출전하는 게 나았을 정도.[8] 오스만 제국이 에게 해와 마르마라 해 사이에 위치한 다르다넬스 해협의 양쪽 해안에 요새를 세웠기 때문에 베네치아 구원 함대가 접근하기 어려웠을 것이라 보기도 한다. 그러나, 공방전 초기이기는 했지만, 제노바의 함선 3척과 크레타에서 군량을 구입하고 돌아가던 동로마 함선 1척 등 4척이 오스만 함대의 포위를 뚫고 콘스탄티노플에 입성하기도 했다. 물론 오스만 요새의 대포에 맞아 적잖은 타격을 입었겠지만, 접근 자체가 불가능인 상태는 아니었다.[9] 그나마도 직접 지배가 아니라 황족이 다스리는 신하국 영토였다.[10] 콘스탄티노플 공방전 때를 예로 들면, 오스만의 30척 함선이 제노바와 동로마 함선 4척을 상대로 쩔쩔 맨 끝에 패한 일도 있다.[11] 다만 베네치아는 말이 도시 국가지, 당시 기준으로 결코 작은 국가가 아니었다. 영토도 일반적인 도시 국가에 비하면 컸고, 인구도 1557년에는 215만 명에 달해 역시 무척이나 많았다. 이탈리아의 도시 국가답게 도시화율도 엄청나게 높았다.[12] 사실 베네치아 입장에서는 절박했겠지만, 포르투갈이 들여온 향신료를 싸게 사서 되팔겠다는 것은 독점을 지속하겠다는 의미였다. 포르투갈의 입장에서는 자기들이 그냥 팔면 되는 걸 굳이 베네치아를 통해 팔 이유가 없었다.[13] 그러나 이런 상황은 네덜란드라는 효율적인 상인 국가가 등장하면서 막을 내리게 되었다. [14] 다만 베네치아가 오스만이랑 정치적으로 대립하는 중이라...[15] 당시 콘스탄티노플 주재 베네치아 대사에게, 오스만 제국의 재상이었던 소콜루 메메드 파샤가 한 말에서 인용. 다만 그는 본래 전쟁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던 데다 레판토에서 패한 책임을 자신에게 묻는 관료들이 있었기에, 본심보다 조금 강경한 발언을 한 것 같기도 하다.[16] 당시 나폴리는 스페인에서 파견한 부왕(副王), 즉 총독이 다스리고 있어서, 사실상 스페인 영토였다. 그리고 신성동맹을 결성했을 당시만 하더라도 스페인과 베네치아의 이해관계가 어긋나고 있었기 때문에, 나폴리와의 사이도 틀어지는 게 당연지사.[17] 본토를 제외한 이탈리아 지역을 말한다. 베네치아 공화국의 본토는 어디까지나 섬이었다.[18] 결정타는 당시 불었던 태풍으로 오스만 군이 심각한 피해를 입었고 퇴각하게 된 것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3년 후, 극강의 방어력을 보여준 코르푸 섬의 요새는 낙뢰가 화약고 위로 떨어져 대파되고 만다.[19] 18세기 베네치아의 바이올리니스트인 안토니오 비발디의 전기를 보면 비발디가 활약하던 당시의 베네치아는 쇠퇴 국면에 처해 있었다는 표현이 굉장히 많다. 17세기 이후로 전쟁이 자주 일어났기 때문에 전쟁 고아가 급증했고, 천주교 사제 시절 비발디의 주 업무가 이런 고아들을 돌보면서 바이올린을 가르치는 일이었다.[20] 이 때문에 라이벌이였던 제노바 공화국이 밀라노 공국과 프랑스 사이에서 부침을 겪으며 코르시카 섬을 프랑스에 넘길 때, "우리 공화국에서는 상상도 못할 일" 이라며 그들을 비웃기도 했다. 그러나 막상 베네치아도 그 프랑스에게 멸망하게 된다.(...)[21] 앞서 언급했듣이 달마티아 공작을 겸임한 도제의 특성상 달마티아인을 차별한다면 그건 자아부정에 가까울 것이다. 자다르를 비롯해 달마티아 해안지역은 비교적 일찍 베네치아에 편입되었다.[22] 사실상 노예 제도에 가까웠으며, 키프로스만 그런 것이 아니라 크레타나 모레아도 마찬가지였다. 베네치아는 식민지를 효율적으로 활용은 했지만 민심은 전혀 얻지 못했던 것이다.[23] 레판토 해전에서 베네치아 함대를 지휘한 사령관이자 베네치아의 국가원수로 선출된 세바스티아노 베니에르의 혈육이라고 한다. 다만 오스만 제국이 부리는 해적들이 납치한 것이라, 누르바누가 황후가 되는 과정에서 세바스티아노가 관여한 바는 없다.[24] 물론 베네치아 역시 정치적 파벌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25] 공화국이라는 말에서 군주의 부재는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이 아니다. [26] 교황청, 신성 로마 제국 등.[27] 영어식으로는 아스날 오브 베네치아, 즉 베네치아의 병기창이라는 뜻이다.[28] 원래 중심지는 헤라클레아[29] 크로아티아계 슬라브 해양 세력[30] 콘스탄티노플의 무역 특권 장악[31] 1171년에 회복[32] ~ 1530년[33] ~ 1606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