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 아지즈

 



아랍어
أبو منصور نزار العزيز بالله‎
아부 만수르 니자르 알 아지즈 빌라
영어
Abu Mansur Nizar al-Aziz Billah
재위 975년 12월 21일 ~ 996년 10월 14일
생몰 955년 5월 10일 ~ 996년 10월 14일
1. 개요
2. 참고 문헌


1. 개요


파티마 왕조의 5대 칼리파. 본래 부왕 무이즈의 차남이었으나 형 압둘라가 요절하며 제위를 계승하였다. 그 과정에서 대장군 자우하르의 도움을 받았고, 아지즈는 즉위 후 그를 중용하였다.
알 아지즈는 칼리파로 즉위함과 함께 부왕이 마무리하지 못한 시리아 전선에 신경써야 했다. 975년 동로마 제국이 시리아를 원정하는 혼란기를 틈타 다마스쿠스의 지도자로 추대된 홈스의 튀르크계 군벌 아프타킨은 시리아 사막의 카라마트와 연대하였고 976년 봄 시리아의 파티마 제국령을 공격하였다. 976년 다마스쿠스에서 가까운 거점인 시돈이 함락된 후 4천의 파티마 수비군이 학살되었고 티베리아스 역시 함락되었다. 이에 자우하르가 출정, 실지를 회복하고 다마스쿠스를 포위하였으나 아프타킨은 시민들의 지지를 얻어 5개월이나 버텼고 이내 카라마트 측이 지원군을 파견하였다. 이를 예상하지 못했던 파티마 군대는 대패하였고 추격을 당한 끝에 라믈라[1]까지 포기한 후 아스칼론에서 농성하였다. 그곳에서 1년 이상 버티던 자우하르는 978년 4월 병사들이 폭동을 일으키자 포로가 되었고 적에게 항복하였다.
사태가 악화되자 알 아지즈는 아프타킨과 협상하였다. 그 결과 파티마 조는 아스칼론 남쪽의 가자까지만 지배하기로 하였고 아프타킨의 시리아 및 팔레스타인 점유가 인정되었다. 그 대가로 그는 카라마트 대신 파티마 조에 충성하기로 하였다. 이로써 알 아지즈는 평화적으로 시리아에 대한 명목적인 영향력 만큼은 회복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집트로 돌아온 자우하르는 패배의 책임으로 재상에서 해임되었고 이집트의 재무 총관이던 유대인 출신의 야쿠브 이븐 킬리스가 재상으로 임명되었다. 익시드 왕조 때에 이미 이집트의 행정을 경험했던 야쿠브는 9세기 이후 붕괴한 자영농 계층의 회복을 위해 힘썼다. 정부는 국영지를 경매의 방식을 통해 농민들에게 분배하였고, 동시에 인도로부터 이모작제를 도입하였다. 이로써 나일 강 유역의 곡물 생산량은 유례없는 풍작을 기록할 수 있었다. [2]
한편 978년 아프타킨은 부와이흐 왕조의 제위 계승 분쟁에서 패배한 이즈 앗 다울라와 그의 다일람 군대까지 받아들였다. 이에 그의 세력이 너무 강대해지는 것을 경계한 알 아지즈는 직접 대군을 소집하여 북상하였고 라믈라 인근에서 치열한 전투 끝에 다마스쿠스 군대를 괴멸시켰다. 한때 파티마 측의 좌익을 맹공하며 기세를 올렸던 아프타킨은 중앙 전열이 붕괴하자 2만의 전사자를 남긴채 패주하였다. 그는 사막을 떠돌다가 아사 직전에 과거의 동맹이던 팔레스타인의 자라흐 부족에게 구출되었는데, 그들은 며칠후 10만 디나르를 받고 그를 알 아지즈에게 넘겨버렸다. (978년 8월) 아프타킨의 능력을 높이 사던 알 아지즈는 그를 용서하고 튀르크 용병대장으로 삼았다. 이는 제국의 중추를 이루던 서부군 (마그리비야)이 시리아에선 잘 통하지 않는 다는 것을 깨달은 칼리파의 대국적인 결단으로 튀르크 병사들을 중심으로한 동부군 (마샤리카)을 창설하여 시리아에서 필요한, 보다 더 강력한 기병대를 키우려는 의도였다. 그러나 지나치게 능력있는 용병대장을 경계한 재상 야쿠브가 그를 독살해버렸다.
이후로도 북진 정책을 지속한 알 아지즈는 982년 마침내 다마스쿠스를 정복할 수 있었고 983년 자라흐 부족으로부터 라믈라를 점령하였다. 988년에는 파티마 조의 튀르크 장군 무니르가 홈스의 폭군 바크주르를 축출하였다. 하지만 3년 후 무니르는 바그다드의 칼리파 및 부와이흐 조에 충성을 맹세하며 자립을 시도하였는데 아프타킨의 후임인 망구 테킨이 출정하여 그를 패배시켰다. (991년) 이후 알 아지즈는 알레포를 점령하고 그 너머의 동로마 제국과 대결하기로 하였다. 992년 봄, 동로마 제국의 속국인 함단 왕조의 사드 앗 다울라가 사망하고 동로마 황제 바실리우스 2세가 불가르 원정에 나가 있던 틈을 타 망구 테킨은 알레포 정복에 나섰다. 홈스, 하마, 샤이자르를 접수하고 아파메아에서 함단 군대를 격파하며 중부 시리아를 평정한 파티마 군대는 5월경 알레포를 포위하였다. 이에 함단 조의 사이드 앗 다울라는 즉각 동로마 측에 도움을 청하였다.
알레포를 구원하기 위해 동로마 제국의 안티오크 총독 미하일 부르치스[3]가 접근하였고 이에 망구 테킨은 포위에 필요한 군대를 남기고 나머지를 이끌고 시데로피곤 (Siderophygon)에서 그와 맞섰다. 이어진 전투에서 파티마 군대가 승리하였고, 망구 테킨은 기세를 타고 동로마 영토로 진격하였다. (992년 6월) 그는 미하일의 조카가 지키던 임므 요새를 함락, 3백의 포로를 취한 후 북진하여 게르마니케아 (카라만마라쉬)까지 습격한 후 알레포 포위망으로 복귀하였다. 하지만 이후로도 도시를 함락시키지 못하고 물자가 부족해지자 파티마 군대는 992년 말 다마스쿠스로 후퇴하였다. 한편 파티마 군대의 북진과 함께 안티오크의 항구 도시인 라오디케아의 무슬림 주민들이 봉기하였지만 미하일에 의해 진압된 후 소아시아 서부로 이주되었다.
알레포에 비해 따뜻한 다마스쿠스에서 겨울은 보낸 망구 테킨은 993년 9월 출정하여 안티오크 인근의 동로마 영토를 약탈한 후 회군하였다. 그리고 994년 봄, 망구 테킨은 재차 알레포를 포위하였다. 이에 사이드 앗 다울라는 재차 동로마에 원군을 요청하였고 바실리오스 2세는 군사령관 레오 멜리세노스를 파견, 안티오크의 미하일과 합세하여 알레포를 구원하게 하였다. 하지만 알레포의 배후인 아파메아로 향하던 그들은 오론테스 강가에서 파티마 군대의 습격을 받았다. 동로마 본대는 어느정도 버텨내었으나 함단 왕조의 동맹군이 붕괴되자 그들은 포위되었고 결국 5천의 전사자를 내고 패주하였다. (9월 15일) 이후 망구 테킨은 알레포에서 북으로 30km 떨어진 아자즈를 점령한 후 도시에 대한 포위에 박차를 가하였다. 알레포의 아미르 사이드 앗 다울라는 항복 협상에 나서려 했으나 재상 룰루가 이를 만류하고 수비대를 독려하며 부족한 식량 상황에도 계속 버텨내었다.
995년 4월, 사태를 지켜보던 동로마 황제 바실리우스 2세는 미하일을 총독에서 해임하고 친히 군대를 이끌고 무려 16일만에 아나톨리아를 가로질러 알레포로 향하였다. 그 사실을 전혀 모른채 기병들을 목초지에 풀어 놓았던 망구 테킨은 진지를 불태우곤 서둘러 후퇴하였다. 이후 바실리우스는 남진하여 트리폴리타르수스를 점령, 요새화시킨 후 아르메니아 인들을 이주시켰다. 동로마 군대가 시리아에 깊숙히 남하하자 그와 정면 대결을 하기로 결심한 알 아지즈는 대군을 편성하여 친정에 나서려 하였다. 하지만 996년 10월, 그는 시리아로 향하던 중 이집트의 군사 기지인 빌베이스에서 담석증으로 사망하였다. 치세 초반부터 그가 신경 쓰던 시리아 문제는 그의 사망 시에도 완전히 해결되지 않은채 어린 알 하킴에게 넘어갔다.

2. 참고 문헌


https://iis.ac.uk/ru/node/254591

[1] 팔레스타인 주의 치소[2] 서구 학자들은 이를 'Fatimid miracle'로 평하기도 한다[3] 이에 파티마 측 사절이 그에게 시리아 문제에 간섭하지 말 것을 요청했으나 미하일은 사절을 투옥시키며 망구 테킨의 분노를 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