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리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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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지의 전반적인 풍경.
1. 개요
2. 역사
2.1. 고대 (오에아)
2.2. 이슬람 정복 (643, 647년)
2.2.1. 8세기의 혼란
2.3. 중세 (타라불루스)
2.4. 중근세
2.4.1. 스페인의 지배 (1510-30년)
2.4.2. 구호기사단령 (1530-51년)
2.4.3. 오스만 제국령 리비아
2.5. 근대
2.5.1. 카르만리 왕조
2.5.2. 바르바리 전쟁 (vs 미국)
2.6. 근현대
2.6.1. 이탈리아령 리비아
2.7. 현대
3. 갤러리
4. 여담

트리폴리 (리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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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랍어: طرابلس(Ṭarābulus)
영어: Tripoli
리비아수도. 아래에도 나오는 레바논의 트리폴리와 구분을 위해 서트리폴리( طرابلس الغرب 타라불루스 알가르브)로도 불린다. 면적은 약 400㎢. 인구는 2011년 당시 223만명으로 리비아 전 인구 1/3이 여기에 산다. 인규 규모나 역사성에서 서울 혹은 오만의 무스카트처럼 도시가 그 나라를 대표한다고 할 수 있는 지위이다. 다만 20세기부터 제2의 도시 벵가지와 경쟁하게 되었고, 21세기 들어서는 상호 내전으로 치닫게 되었다. 근대사적으로 미국이 독립 후 최초로 맺은 외교조약인 트리폴리 조약과 최초로 외국에서 벌인 전쟁인 트리폴리 전쟁으로 이름을 남겼다.

2.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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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도심의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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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도심의 대표 유적인 로마시대에 지어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개선문[1]
로마 시대에 현 리비아 서부 일대는 사브라타. 오에아. 렙티스 마그나의 세 도시를 묶어 트리폴리스, 즉 세 도시로 지칭되었다. 이는 리비아 서부를 의미하는 트리폴리타니아란 지명의 유래이기도 하다. 다만 중세를 거치며 오에아만이 큰 도시로 유지되었고, 아랍인들은 그 도시만을 트리폴리 (타라불루스)로 지칭하였다. 따라서 타라불루스는 트리폴리타니아 지역을 대표하는 도시인 것이다.

2.1. 고대 (오에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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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니우스 콜로나이아 신전의 정면부 유구. 트리폴리 박물관 소장
기원전 6세기, 항구로써 천혜의 조건을 갖춘 입지에 주목한 페니키아 인들에 의해 지어졌다. 당시 지명은 오야트였고, 현대 구도심 자리에 도시가 지어졌다. 이후 키레나이카의 그리스 인들이 지배하였고, 희랍어인 오에아 (Ὀία)로 지칭되었다. 다만 기원전 4세기 무렵 같은 페니키아 식민도시로 출발했지만 해상 제국으로 성장한 카르타고의 영토가 되었다. 그러다 포에니 전쟁으로 카르타고가 멸망하면서 로마령 아프리카 속주의 일원이 된 오에아는 서쪽 50여 km의 사브라타와 동쪽으로 90여 km 떨어진 렙티스 마그나와 함께 레지오 시르티카 (Regio Syrtica)로 편성되었다. 이는 200년 경에 레지오 트리폴리타니아 (Regio Tripolitana), 즉 세 도시들의 지역으로 불리게 되었다. 그리고 현지 출신 황제인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에 의해 아프리카 속주에서 독립적인 주로 승격되었다.
당시만 해도 세베루스의 출생지인 렙티스가 가장 큰 도시였다. 다만 그가 베르베르 및 반달족의 약탈로 쇠퇴하고, 결정적으로 7세기 이슬람 정복 후 오에아는 트리폴리타니아의 군사/행정의 중심지로 선택되며 중세에 쇠락하여 모래 속으로 사라진 다른 도시들과 달리 일대의 중심으로써 지속적으로 큰 도시로 남을 수 있었다. 한편 그렇게 지속적인 인간 거주로 인해 수세기에 달한 로마 지배에도 불구하고 현존하는 유적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개선문과 작은 신전의 일부가 유일하다. 유적의 기둥과 돌들은 주민들에 의해 후대의 건물들에 재활용 되었고, 그러한 재창조는 과거 유적의 파괴를 수반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현재까지도 발굴이 쉽지 않은 이유이기도 하다. 팍스 로마나 하에 번영하던 '트리폴리타니아'[2]는 5-6세기 서로마 제국의 쇠퇴로 촉발된 혼란 및 반달 족의 침공과 함께 쇠퇴하였다.
430년대부터 일대는 반달 왕국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그러던 533년 봄에 트리폴리타니아 주민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키레나이카의 동로마 군대가 일대를 접수하였고, 이는 동로마 제국의 북아프리카 수복 원정의 시작이었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수복된 오에아에 현지 베르베르 인들을 위한 교회를 건설하고 성벽을 강화하였다. 이로써 도시는 어느정도 안정을 되찾았지만, 트리폴리타니아는 이전처럼 독립된 주가 아닌 동로마령 아프리카 총독부의 일부로 편입되었다. 한편 로마 시대에 베르베르어 등 현지 언어가 섞인 페니키아어를 사용하던 주민들은 6세기 무렵에 이르면 대부분 베르베르어를 사용하게 되었고, 라틴어 사용자는 소수 관리층에만 국한되었다. 그러다 7세기 이슬람 정복 후 아랍어가 빠르게 보편화되었고, 그 결과 9세기부터 오에아는 '트리폴리스'의 아랍어 발음인 타라불루스로 불리기 시작하였다.

2.2. 이슬람 정복 (643, 647년)


639 ~ 641년 이집트를 정복한 아므르 이븐 알 아스는 이듬해 실패한 누비아 원정 이후, 다시 서쪽으로 눈을 돌려 리비아를 침공하였다. (알 발라두리에 의하면) 642년 가을, 아므르는 한달 간의 행군 후 키레나이카 (바르카)를 점령하였다. 그의 부관 우크바 이븐 나피가 페잔 지역을 복속시키는 동안[3] 아므르는 천천히 진군해 643년 오에아를 포위하였다. 하지만 이슬람 군대의 규모는 크지 않았고, 공성병기도 가져오지 않았기에 아므르는 뾰족한 수도 없이 도시 앞에서 진을 치고만 있었다. 그렇게 두 달이 흐르던 때에 8명의 무슬림 전사들이 오에아 서쪽으로 사냥을 나섰다. 그후 귀환 여정 중 그들은 강렬한 정오의 태양을 피해 해안을 따라 나아갔는데, 도시 성벽이 바다와 만나는 부분에 이르러 그 방어가 취약하다는 것을 포착하였다. 8명의 숫자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무모하게도 그대로 성내로 진격해 시가전에 나섰는데, 놀랍게도 이는 성공으로 이어졌다.
매우 적은 숫자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일으킨 소요에 놀란 수비대는 이미 다수의 이슬람 군대가 시내로 들어왔다고 여기곤 제대로 싸워보려 하지도 않은 채 항구의 선박에 올라 도주하였다. 소음을 통해 내부의 상황을 직감한 아므르는 총공격을 명하였고, 남은 수비대도 도주하며 트리폴리는 손쉽게 점령되었다. 이는 여태껏 이슬람 군대의 연전연승에 주눅이 든 동로마 군대의 낮은 사기로 인해 촉발된 어이없는 결과였다. 그후 파견된 분견대가 사브라타를 기습 점령하며, 트리폴리타니아 전역이 정복되었다.[4] 자신감을 얻은 아므르는 오에아에 주둔하며 칼리파 우마르에게 더 서쪽으로의 정복을 청하였는데, 이란 정복에 전군을 집중하고 싶었던 칼리파는 불허하였다. 이집트 원정 때와 달리 핑곗거리를 찾지 못한 아므르는 아쉬움을 삼킨 채 푸스타트로 회군하였다. 다만 그전에 오에아의 성벽은 파괴되었고 도시는 연공을 바치게 되었다.
아므르의 철수 이후 도시는 다시 동로마령이 되었지만, 이미 취약해진 상태였다. 그러던 646년 동로마령 아프리카 총독 그레고리오스가 반란을 일으켜 자립하였다.[5]그러자 신임 칼리파 우스만은 젖동생이자 이집트 총독인 압둘라 이븐 사드에게 이프리키야 원정을 명하였다. 메디나에서 2만 대군과 출정한 압둘라는 바르카에서 우크바의 2만 병력과 합류하였다. 그들은 647년 재차 오에아를 점령하였고, 이때부터 도시는 아랍어로 타라불루스로 불렸다. 한편 그후 압둘라는 튀니지로 진군, 수페툴라 전투에서 그레고리오스를 전사시켰고 후임 총독 게나디오스로부터 막대한 연공[6]을 약속받고 회군하였다.[7] 리비아는 670년 시르테가 점령되며 완전히 정복되었고, 비록 683년 우크바의 죽음 시에 바르카까지 밀려나기도 했으나 곧 수복된다.

2.2.1. 8세기의 혼란


이슬람 정복 이후 트리폴리타니아는 제국의 최서방으로써, 무슬림들의 마그레브 정복을 위한 전초 기지였다. 그러던 7세기 말엽 마그레브 역시 정복된 후로는 상대적으로 평온한 시기를 보냈다. 그러던 740년대 베르베르 대항거와 함께 일대는 혼란기로 빠져들기 시작하였다. 741년 바그도우라 전투에서 이프리키야의 우마이야 군대가 반군에게 전멸당하자, 이집트 총독 한달라가 파견되었다. 742년 한달라는 바르카와 오에아에서 병력을 증원받은 후, 엘 아스남에서 반군에 대승을 거두며 혼란은 일시 진정되었다. 그러나 그무렵 우마이야 조는 이미 3차 피트나로 쇠퇴하며 이프리키야에 더이상 관심을 두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던 745년 우크바의 증손인 압둘 라흐만이 한달라를 축출, 아미르를 칭하며 이프리키야에 자치적인 피흐리 왕조를 세웠다. 하지만 동생 일리아스를 트리폴리타니아 총독으로 봉하는 등 압둘 라흐만의 중앙 집권화는 현지 아랍, 베르베르인 모두의 반란을 야기하였다.
특히 마그레브에서 동족들이 거둔 성과에 고무된 이프키리야의 베르베르 인들은 그들 역시 독립국을 세우려 하였다. 그중 제르바 섬과 오에아의 베르베르 인들은 카와리지의 이바디 이맘 하리스의 지도 하에 봉기하였다.[8] 일리아스는 속수무책이었고, 반군은 가베스와 시르테에 이르는 해안을 장악하였다. 압둘 라흐만은 752년에야 일대를 수복할 수 있었다. 나푸사 산지로 피신했던 이바디 세력은 3년 후 압둘 라흐만이 일리아스에게 암살당하며 시작된 피흐리 조의 내분[9]을 틈타 757년 이맘 아부 알 카탑의 지휘 하에 오에아를 점령하였다. (이바디 이맘국) 이듬해 그들은 카이로우안을 점령한 후 학살을 자행하던 카와리지의 수프리 분파를 신봉하는 와르파주마 베르베르 인들을 축출, 이프리키야를 일시 통일하였다. 다만 이맘국은 761년 압바스 조의 세 차례에 걸친 토벌에 미스라타 부근에서 벌어진 타와르가 전투에서 아부 알 카탑이 전사하며 붕괴되었다.
이맘국의 멸망 후에도 765-68년간 총독이 5번이나 바뀔 정도로 이프리키야의 불안은 계속되었다. 768년 총독으로 부임한 우마르 이븐 하프스 알 무할라비가 알제리에 있는 틈에 베르베르 인들이 봉기하여 카이로우안 총독 하빕을 죽였다. 이바디 이맘 아부 하팀 야쿱의 지휘 하에 반군은 오에아 부근에 집결하였다. 도시의 총독의 요청에 따라 우마르는 원군을 보내었지만 격파되었고, 우마르 본인 역시 카이라완 수비를 이끌던 중 전사하였다. (771년) 다만 오에아는 여전히 함락되지 않았으며, 다음 총독으로 부임한 야지드 이븐 하팀 알 무할라비는 그곳을 거점으로 출정해 772년 초엽 아부 하팀 야쿱을 전사시키고 반란을 진압하였다. 773년의 봉기를 끝으로 이바디 세력은 수축되었고, 그 잔당은 서쪽 알제리 방면으로 이동해 777년 루스탐 왕조를 세운다. 무할라브 가문에 이어 이프리키야는 9세기부터 아글라브 왕조의 지배 하에 놓였다.

2.3. 중세 (타라불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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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세기에 처음 세워진 앗 나가 사원. 1610년 보수를 거쳤지만 옛 기둥은 그대로이다
9세기 중반 압바스 조의 쇠퇴와 함께 이슬람권 각지에는 독립 왕조들이 세워졌고, 기존 제후국들도 자립하였다. 그중 하나인 이집트의 툴룬 왕조의 태자 압바스가 부왕 아흐마드의 부재를 틈타 독단적으로 아글라브 조를 침공[10], 879년 총독 무함마드 이븐 쿠르훕을 축출하고 타라불루스를 점령하였다. 하지만 그 배후의 나푸사 산지에서 웅거하던 이바디 베르베르 인들이 880년 남하하여 툴룬 군대를 격파하였고, 그 틈에 아글라브 조의 아미르 이브라힘 2세는 도시를 수복할 수 있었다.[11] 896년 압바스의 사망과 함께 반격에 나선 이브라힘 2세는 타라불루스에 이르러 압바스 조와의 친분을 이유로 그 총독 무함마드를 처형하였다. 이후 그는 나푸사 산지의 이바디 세력을 절멸시키고 바르카 바로 아래의 아즈다비야까지의 국경을 확립한 후 회군하였다.[12] 하지만 아글라브 조는 이미 쉬아 베르베르 반란으로 쇠약해졌고, 결국 909년 그로 인해 멸망하였다.
타라불루스는 아글라브 조를 타도하고 세워진 파티마 왕조의 영토가 되었는데, 그 주민들은 이듬해 반란을 일으켰다. 이는 911년 진압되었는데, 같은해 파티마 조의 개국공신 알 쉬이의 숙청과 함께 혼란이 재개되어 912년에는 수도 카이로우안에서도 봉기가 일어났다. 재차 봉기하여 베르베르 주둔군을 학살하였다. 이에 파티마 조의 총독은 도주하였고 도시는 자립하였다. 913년 봄, 새 수도 알 마디야의 건설과 함께 신설된 파티마 해군이 출정하였으나 주민들에게 격퇴되는 수모를 겪었다. 같은해 6월, 태자 알 카임이 수륙 양면으로 포위한 끝에야 타라불루스는 함락되었다. 그후 알 쉬이 숙청에 가담한 공으로 타라불루스 총독으로 봉해진 하바사 이븐 유수프는 몇달의 준비 끝에 914년 1월, 도시에서 출정해 키레나이카를 정복하며 이집트 원정에 나섰다. 같은해 8월 알 카임이 타라불루스를 지나 이집트 전선에 합류했는데, 원정은 두 사령관의 대립 끝에 실패로 귀결되었다.
초기 파티마 조의 지배기에 타라불루스는 그의 숙원 사업인 이집트 정복을 위한 전초기지로써 중시되었다. 그러나 이는 동시에 파티마 조의 주력인 마그레브 내륙 출신 쿠타마 베르베르 군대가 항상 도시에 주둔하는 상황을 수반하였고, 주민들은 이질적인 대규모 병력과의 공존을 불편히 여겼다. 따라서 910년대 두 차례의 반란에도 반파티마 기류는 남아있었고, 934년 이맘-칼리파 알 마흐디가 사망하자 타라불루스에선 새로운 이맘을 칭하는 무함마드 이븐 툴라트가 반란을 일으켰다. 이스마일파 쉬아 교리에서 이맘위는 꼭 계승할 필요가 명시되어 있지는 않았기에 이븐 툴라트는 내륙의 베르베르 인들을 규합할 수 있었다. 이에 신속히 대응한 알 카임에 의해 대규모 병력이 파견되었음에도 반란은 이듬해인 935년에야 진압되었다. 이후 재차 이집트 원정에 나섰다가 실패한 파티마 조는 내부를 정비한 후 969년에야 그에 성공할 수 있었다.
이로써 중요성이 격감된 타라불루스는 3년 후 제국의 중심이 이집트로 옮겨지자 이프리키야에 세워진 그 제후국인 지리 왕조의 지배 하에 놓였다. 그러나 11세기 지리 조가 붕괴되자[13] 일대는 베두인들의 무법천지가 되었고, 1140년대 들어 연이은 기근에 시달렸다. 한편 1135년 제르바 섬 점령을 시작으로 해상 팽창을 염두에 두던 시칠리아 왕국의 루지에로 2세는 1142년 지리 왕조를 복속시킴과 함께 트리폴리를 공격하였고, 비록 격퇴되었으나 1146년 6월 18일 포위 끝에 도시를 점령하였다. 이에 가베스 등 여타 도시들의 아미르들이 복속해왔고, 1148년에는 알 마디야가 기습 점령되며 지리 왕조는 멸망하였다. 시칠리아 왕국은 현지 아랍인들을 총독으로 봉하는 간접 통치로 주민들의 반발을 무마시켰다. 이렇게 12년이 지난 후 트리폴리는 마그레브의 무와히드 왕조에게 점령되었다. 고고학 조사에 의하면 11세기만 해도 게파라 오아시스 등 트리폴리타니아 일대에선 둑스 휘하의 자치적인 기독교 공동체가 존재하였던 것으로 확인되었는데, 이러한 '십자군' 전쟁을 거치며 광신적인 무와히드 조에 의해 소멸된 것으로 여겨진다.

2.4. 중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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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타 기사단 시절 건설된 산 피에트로 성채. 현재는 앗 사라야 알 하므라 (붉은 성채) 박물관이다.
12세기 잠시 시칠리아 왕국의 지배를 받았던 도시는 16세기 들어 41년에 걸친 아라곤 왕국 - 성 요한 기사단의 지배를 받게 된다. 다만 그러한 과정을 겪으며 타라불루스는 북아프리카에서 가장 요새화된 도시들 중 하나가 되었다.

2.4.1. 스페인의 지배 (1510-3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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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 피리 레이스의 지도에 나오는 타라불루스
16세기에 보강된 구시가지의 성문
1173년 살라흐 앗 딘의 동생 타키 앗 딘에게 점령된 후 아이유브 왕조의 지배를 받던 타라불루스는 13세기 들어 튀니지의 하프스 왕조령이 되었다. 15세기 말엽 그라나다의 멸망 후 북아프리카로 축출된 무어인들은 스페인 일대에 대한 해적질로 보복에 나섰다. 타라불루스는 그 거점들 중 하나였고, 이에 1510년 아라곤 왕국페르난도 2세는 도시의 공격을 결심하였다. 그해 6월 준비를 마친 1만 5천의 병력은 승선하여 페드로 나바로의 지휘 하에 시칠리아를 거쳐 몰타로 향하였다. 그곳에서 5척의 갤리선과 합류하고 몰타인 안내자를 대동한 함대는 7월 20일 몰타를 떠나 4일 후 타라불루스 앞바다에 당도하였다. 성 야고보 축일인 7월 25일 아침, 아라곤 군대는 양분되어 반은 도시를 공격하고 반은 혹시 모를 오스만 함대의 공격에 대비하였다. 6천 병력의 수륙 양면 공격에, 타라불루스 수비대는 3시간의 치열한 시가전 후 항복하였다. 길지 않은 전투였지만 도시가 입은 피해는 막대하였다.
약 2만여 주민들 중 5천여 명이 전투 도중 살해되었고, 5-6천여는 노예로 전락하였다. 특히 상당수의 유대인들이 노예가 되어 시칠리아로 보내졌고, 일부는 기독교로 개종하였다. 일부 주민들은 서쪽의 잔주르, 동쪽의 타주라로 피신하였다. 반면 아라곤 측은 겨우 3백여 전사의 피해만을 입었다. 전투 후 노예로 지내던 170여 명의 기독교도들이 해방되었다. 한편 주민들이 모두 죽거나 떠나거나 노예가 되자 도시는 한산해졌다. 스페인 당국은 각지의 기독교도들에게 이주를 권장하였고, 그게 효과가 없자 인근으로 떠났던 무슬림 주민들에게 복귀를 제안하기도 하였다. 당국은 화해의 뜻으로 시칠리아로 추방되었던 셰이크의 귀환도 허가했으나 그럼에도 도시로 돌아온 이들은 극소수였다. 스페인의 행정력도 도시에서 15km 이상을 넘지 못하였다.
현지인들의 탈환 시도도 이어졌다. 1512년 바르바리 해적들이 공격하였고 3년 후 바르바로사알제를 수복하였다. 당국의 초청으로 돌아왔던 셰이크 역시 1526년 타주라로 도주하였고, 그곳은 스페인에 대한 현지인들의 주요 저항 거점이 되었다. 스페인 인들은 도시의 성벽을 보수했으나 그외에 방어를 위해 큰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 경제적으로도 타라불루스 유지는 득보다 실이 많았다. 무슬림들의 회피로 타라불루스의 교역은 쇠퇴하였고, 타주라가 새로운 교역 중심지로 대두되었다. 노예 수입의 관세를 제외하곤 별 이익을 보지 못하던 스페인 측은 국왕 카를로스 1세 (카를 5세)의 윤허 하에 오스만 제국에게 본거지 로도스 섬을 상실한 구호기사단 (성 요한 기사단)에게 도시를 봉토로써 (몰타와 함께) 할양하였다. (1530년 3월 23일)

2.4.2. 구호기사단령 (1530-5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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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단이 도시 성벽의 강화와 함께 옛 로마 공중 욕탕 자리에 세운 산 피에트로 성채
그에 따라 기사단은 1530년 7월 25일 타라불루스를 접수하였다. 기사단은 몰타 섬의 비르구에 본부를 차렸고, 타라불루스에는 총독을 파견하였다. 첫 총독이던 가스파르 드 상케사는 인근 부족들과 우호 관계를 맺으려 하였으나 그들은 냉대로 일관하였다. 동쪽 타주라에선 1531년부터 오스만 측 기지가 마련되어 지휘관 카이르 앗 딘 휘하의 병력이 주둔하며 현지인들의 저항을 도왔다. 그에 대항하기 위해 1530년대 초엽 피렌체 출신 군사 기술자 피키노가 타라불루스의 방어력 강화를 위해 파견되었다. 그 무렵 타주라의 태수 아이든 레이스가 타라불루스 성벽에서 불과 1.5km 떨어진 곳에 엘 카디 요새를 지었는데, 1536년 경 총독 게오르그 스킬링에 의해 점령된 후 파괴되었다. 1539년 3월 도시에 대한 분석을 위해 파견된 기사 파울 시메오니는 그해 6월 몰타로 돌아와 기사단과 타주라 병력 간의 충돌이 지속되고 있다고 보고하였다.
타라불루스의 방어력 강화를 위한 자금이 부족했던 기사단은 때떄로 성벽을 허물고, 항구를 메운 후 도시를 포기하자는 고민을 하였다. 다만 1540년대 들어 카를로스와 술레이만 1세 간의 휴전이 체결됨에 따라 타라불루스에 대한 오스만 측의 위협도 격감되었다. 1546년에는 후에 몰타 공방전으로 유명해진 노장 장 드 발레타가 총독으로 부임하였다. 트리폴리타니아 전역 지배를 꿈꾸던 그는 도시의 행정을 개혁, 성벽을 보강하곤 기사단의 본부를 타라불루스로 이전할 것을 제안하기도 하였다. 비록 이 제안은 수용되지 않았으나, 중재안으로 몰타가 본부로 남되 타라불루스로 기사들이 증원되었고 그 총독은 기사단장과 맞먹는 권력을 지니게 되었다.[14] 그러나 타라불루스에 대한 원대한 계획은 도시의 새로운 방어 시설 설립을 위한 자금인 7천 스쿠디를 실은 갤리선 라 카타리네타가 오스만 제독 투르굿에게 나포되며 물거품이 되었고, 상심한 장 드 발레타는 1549년 도시를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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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1년 오스만 군대의 트리폴리 정복
그리고 1551년 초엽 술레이만 1세는 타라불루스 점령을 명하였다. 1551년 7월 시난 파샤와 투르굿이 이끄는 오스만 함대는 우선 몰타를 공격, 고초에서 수천의 포로를 사로잡은 후 8월 초엽 타라불루스를 포위하였다. 오스만 육군은 3개의 포대에 12개의 대포를 포위망에 설치하였다. 불과 4달 전에 부임한 총독 가스파르 드 발리에는 30명의 기사들과 630명의 이탈리아-시칠리아 용병들로 구성된 수비대를 이끌고 싸웠다. 한편 포위 도중 프랑스의 대오스만 특사인 가브리엘 다라몽이 2척의 갤리선과 갤리엇을 대동하고 오스만 진영에 합류하였다. 그는 몰타 기사단장의 요청으로 프랑스-오스만의 대합스부르크 동맹에 있어 기사단이 걸림돌이 아니므로 포위 중단을 설득하려 하였다. 하지만 시난 파샤와 투르굿은 기사단을 아프리카 해안에서 일소하라는 명령을 받았다며 거절하였다.[15]
포위는 2주간 지속되었고, 시난 파샤에 의한 6일 간의 포격 끝에 성채의 수비대가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가스파르는 협상에 나섰고, 안전한 철수를 대가로 8월 15일 항복하였다. 프랑스 함대는 가스파르를 위시하여 대부분 프랑스 인이었던 기사단원들을 몰타로 실어날랐다. 나머지 수비대 중에선 2백여 명을 제외하곤 노예가 되었고, 특히 기사단 휘하에서 복무한 무슬림 보조병들은 처형되었다. 몰타로 돌아온 가스파르는 기사단장 후안에 의해 면박당하고 패전의 책임을 뒤집어쓰고 직위해제 당하였다. 오스만 령이 된 타라불루스에는1536년부터 타주라의 오스만 지휘관을 맡고 있던 아가 무라트 파샤가 총독으로 부임하였다. 기사단은 1552년 트리폴리타니아 해안을 습격하는 등 보복하였고, 그 후로도 몇 차례 도시를 수복하려 시도하였지만 성공하지 못하였다. 타라불루스는 1912년 리비아 전쟁 시까지 (가끔은 명목상으로나마) 오스만 제국령으로 남았다.

2.4.3. 오스만 제국령 리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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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디 드라굿 모스크. 트리폴리의 첫 오스만 양식 사원이다.
포위를 주도했던 투르굿 레이스는 1556년 3월 타라불루스의 베이 (후에는 파샤)로 봉해졌다. 그는 성벽을 보강하고 포대 (다르 엘 바루드)를 세웠고 항구의 산 피에트로 성채를 투르굿 성채로 명명, 보강하였다. 같은해 12월 투르굿은 현 튀니지 중남부의 가프사, 1558년 타라불루스에서 남쪽으로 50여 km 떨어진 가르얀을 점령하였다. 그후에는 예니체리 부대를 이끌고 베니 울리드를 격파, 제르바 섬과 미스라타를 영지에 더하였다. 투르굿의 노력으로 도시는 아프리카에서 가장 잘 요새화된 항구 중 하나이자 바르바리 사략선의 주요 기지가 되었다. 한편 1557년 기사단장으로 부임한 장 드 발레트는 자신이 아끼던 도시의 수복을 위해 노력하였다. 1559년 타라불루스 원정군이 조직되었고, 기사단의 사주로 도시에선 봉기가 일어났다. 하지만 투르굿은 신속히 이를 진압하였고, 메시나에서 나포한 기사단 선박의 포로들로부터 원정 계획을 알아낸 후 타라불루스로 돌아와 방어력을 보강하였다.[16]
몰타 기사단은 이듬해 스페인 군과 함께 제르바를 공격했으나 투르굿의 반격에 대패하였다. 이로써 타라불루스 원정도 흐지부지 되었고. 투르굿은 도시를 근거지 삼아 이탈리아 해안에 대한 습격을 이어갔다. 그는1565년 몰타 공성전에서 부상을 입고 사망할 때까지 총독위를 유지하였다. 사후 그의 유해는 1560년 기사단 시절 교회를 개조한 시디 드라굿 사원에 안장되었다. 투르굿 파샤는 재임 기간 동안 많은 건축을 통해 타라불루스를 북아프리카 해안에서 두드러진 도시로 변모시켰다. 비록 그의 궁전은 사라졌지만 근처의 시디 드라굿 사원 및 영묘와 부속 하맘 (욕탕) 단지는 밥 알 바흐르 부근에 현존한다. 9년에 불과한 재임기에도 불구하고 투르굿은 타라불루스는 반세기 간의 침체기에서 벗어나 경제적 활력을 회복할 수 있었다. 그 후임인 울루츠 레이스[17] 때에 오스만령 트리폴리타니아는 제르바에서 바르카 (벵가지 고원)의 영역으로 확정되었고, 이는 현대 리비아의 밑바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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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인 학자 존 셀러가 묘사한 1675년의 트리폴리
오스만 정복 이후 타라불루스는 재차 바르바리 해적들의 기지와 기독교도 노예 무역의 거점이 되었다. 이를 근절시키기 위해 1675년 존 나르보러의 영국 해군이 항구를 공격했지만 큰 효과를 보지 못하였다. 타라불루스의 파샤들은 해적들의 공격에 대한 면제를 대가로 유럽 상선들로부터 세금을 받았다. 한편 외부에서 임명된 파샤들 대신, 전반적인 행정의 집행을 담당하며 현지화 되어가던 예니체리 부대의 장교 (베이)들이 종종 실권을 행사하기 시작하였다. 그에 따라 점차 파샤들은 예니체리 군부의 꼭두각시로 전락하였고, 16세기 말엽 내전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그러던 17세기 중반 사키즐리 오스만 파샤가 1631년부터 무려 41년간 재임하며 안정적으로 통치하였다. 그러나 1672년 이후로 39년간 19명의 총독들이 난립하는 더 큰 혼란기를 겪었다. 한편 대튀르크 전쟁 이후 쇠퇴기에 접어든 오스만 제국은 북아프리카에 개입할 여력이 없었고, 18세기 들어 내분은 오히려 더 심해졌다.

2.5. 근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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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36년 아흐마드 1세에 의해 지어진 카르만리 모스크. 멀리 19세기 말엽 지어진 터키식 시계탑이 보인다
오스만 시대에 들어 도시에는 많은 건물들이 세워졌다. 투르굿의 통치 후에도 1604년 이스칸다르 파샤 하맘이 세워졌고 1610년 후에는 7세기 전에 지어졌으나 쇠락했던 낙카 자미 (낙타 사원)이 재건되었다. 사키즐리 오스만 파샤는 1654년 자신의 이름을 붙인 마드라사를 세웠고 1670년에는 시디 살렘이 재건되었다. 그 이듬해에는 투르굿 터키탕이 세워졌다. 1680년에는 마흐무드 카즌다르 사원이, 1699년에는 무함마드 파샤 모스크가 세워졌다.

2.5.1. 카르만리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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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50년대 알리 파샤에 의해 지어진 카르만리 궁전. 1990년대 보수 공사 후 박물관으로 전환되었다
파샤 정권의 내분이 극에 달하던 1711년 7월, 옛 카라만 왕가의 후예인 예니체리 장교 아흐마드 파샤가 현지인들의 지지와 함께 쿠데타를 일으켰다. 그는 집권한지 25일 밖에 되지 않은 총독 아부 우마이스 마흐무드를 살해하고 스스로 총독위에 올랐다.(아흐메드 1세) 비록 매년 오스만 조정에 세금을 바쳤지만 카르만리 조는 사실상 독립 국가였다. 혼란을 종식시킨 아흐메드 파샤는 사략선 습격과 보호세 수납을 통해 타라불루스의 경제를 회복시켰다. 34년간의 재위 기간동안 그는 페잔과 키레나이카 등을 정복하였고, 리비아의 첫 세습 왕조를 정착시킨 후 1745년 사망하였다. 그후 알리 1세의 길지만 부패한 통치 (1754 ~ 93년)를 지나 하메트 파샤가 집권했는데, 1793년 5월 장교 알리 벤굴이 그를 폐위하고 오스만 제국의 직접 지배를 회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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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카라만르 조 간의 트리폴리 조약. 아랍어로 작성되었고, 미국의 첫 대외 조약이었다.
그로써 1800년 파샤에게 연공을 바치는 바인브릿지
튀니스로 망명한 하메트와 동생 유수프는 1795년 1월 튀니스의 베이 하무다의 도움으로 타라불루스를 되찾을 수 있었다. 그후 하메트가 복위했는데, 그해 6월 동생 유수프에게 폐위당한 후 축출되었다. 이렇게 집권한 유수프 파샤는 1832년까지 37년간 장기 통치하였다. 그는 사략선을 동원해 상선들을 위협하여 보호세를 얻어내는 것으로 부를 축적했는데, 이를 수행하는 바르바리 해적들은 당대 세계 최강의 함대를 지니고 있던 영국 선박들은 넘보지 않았다. 본래 영국 국적으로 지중해를 안전히 왕래하던 아메리카 선박들은 1783년 독립 이후 해적들의 주요 희생양이 되었다. 이에 1795년 3월,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은 데이비드 험프리에게 알제와 타라불루스 간의 '우호 평화 조약'의 협상을 맡겼다. 그중 후자의 트리폴리 조약은 1796년 11월 4일 유수프 파샤에 의해 비준되었고, 이듬해 2월 리스본에 있던 험프리의 서명 이어 6월 신임 대통령 존 애덤스 정부에 의해 비준되었다.

2.5.2. 바르바리 전쟁 (vs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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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타는 USS 필라델피아 (1804년)
미 해군과 바르바리 해적 간의 전투
1796년의 조약으로 미국은 리비아 해역에서 자국 선박이 해적들의 공격 대상이 되지 않는 조건으로 파샤에게 8만 3천 달러의 보호세를 납부하게 되었다. 그러나 1801년 돈이 필요해진 유수프 파샤는 미국의 3대 대통령 토마스 제퍼슨의 취임식 직후 22만 5천 달러 (현재 350만 달러에 해당(에 이르는 연공을 요구하였다. 1797년부터 해군에 주력하던 제퍼슨은 터무니없는 요구라며 단칼에 거부 의사를 밝혔다. 분노한 유수프 파샤는 그해 5월 10일 기존 관례대로 미국 영사 면전에서 영사관의 성조기가 걸린 깃대를 베어버리며 '''미국에 선전포고'''하였다. 이에 제퍼슨은 그간 양성해온 미해군이 출동을 발진시켜 타라불루스 항구를 봉쇄하게 하였다. 다만 본토 방어전이 아닌 명분상의 문제로 의회와의 협상을 거쳐 1802년에야 군사 작전이 승인되었고, 이듬해부터 미 해군은 타라불루스 봉쇄에 나섰다. 이에 1799년 건조된 미국 함선 USS 필라델피아는 1803년 8월 말 지브롤터에 당도하였다.
그후 항구 3km 밖에서 봉쇄를 수행하던 USS 필라델피아에 대해 10월 31일 바르바리 함대가 함포를 앞세워 공격해왔다. 비록 그들의 포격 중 명중한 것은 하나도 없었지만, 강한 역풍에 부딪힌 USS 필라델피아는 해안 모래톱 쪽으로 밀려났다. 선장 윌리엄 바인브릿지는 대포와 물통 등 짐을 버려가며 선박을 안정시키려 했지만, 모든게 실패하자 (적에게 넘겨주지 않기 위해) 선체 바닥에 구멍을 뚫게하곤 항복하였다. 선원들은 포로가 되었고, 바르바리 해적들은 USS 필라델피아를 수리한 후 미군에 대한 해상 포대로 개조하였다. 다만 이듬해 2월 소령 스테판 데카투르의 별동대가 밤을 틈타 그를 전소시키고 빠져나갔다. 그후 1804년 7월 프레블 제독의 함대는 리처드 소머스 대위의 주도 하에 폭약을 가득 실은 자폭 선박을 통해 타라불루스에 정박 중이던 바르바리 함대를 폭파시키려 하였다. 하지만 이는 현지 포대와 함대의 포격으로 항구에 진입하기 전에 파괴되었고, 소머스 대위 역시 폭사하였다.
타라불루스 자체에 대한 공격이 실패한 후 미국은 유수프 파샤에 밀려 망명 중이던 하메트와 접촉, (즉위한다면) 미국의 모든 조건을 수용하겠다는 뜻을 밝히자 그를 복위시킨다는 명분 하에 1805년 봄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로부터 육상으로 진군하였다. 이전 영사 윌리엄 에톤 휘하의 미군과 그 그리 스 및 (하메트 휘하의) 튀르크-아랍인 보조병은 2주 간의 격전 끝에 리비아 해안 중앙부의 데르나를 점령하였다. 이는 미국이 독립 후 외국에서 치른 첫 지상전이었다. 유수프 파샤는 탈환을 위한 병력을 파견하였고, 이는 일시적으로 총독 관저를 탈환할 뻔 했으나 미국의 화력에 밀려 철수하였다. 그후 윌리엄 에톤은 사막을 횡단하여 타라불루스 공격에 나섰으나, 이미 협상에 나선 유수프 파샤는 6월 3일 미국과 휴전에 합의하였다. 보호세를 기존 규모로 유지하고 USS 필라델피아의 선원들의 몸값으로 6만 달러가 추가 지급되는 조건으로, 데르나를 빼앗긴 것 치곤 파샤에게 좋은 괜찮은 결과였다.[18]
다만 1812년 미영전쟁을 틈타 해적질이 성행하자 미군은 1815년 이번엔 알제를 침공하여 파샤를 패배시켰다. 그후 윌리엄 바이브릿지와 스테판 데카투르의 함대가 항구에 나타나자 타라불루스의 파샤 역시 아무 조건 없이 미국 선박을 건들지 말라는 그들의 조건을 수용하였다. 이후 보호세에 기반한 수익이 격감하며 타라불루스는 경제적으로 쇠퇴하게 되었다. 그러던 1817년 9월 유수프 파샤는 종종 연공 중단과 반란 문제를 일으키던 알 자와지 부족을 벵가지에 있는 자신의 성채로 초대, 참석자들을 처형하고 나머지를 추격해 약 1만여를 학살하였다. 그리고 1825년 8월 유수프 파샤는 사르데냐 왕국에게 보호세 인상을 요구하였다. 이에 파견된 제독 프란시스코 시보리는 처음에는 협상을 시도했으나 파샤의 기고만장한 태도에 4시간의 유예기간을 준 후 타라불루스 항구를 공격하였다.
사르데냐 함대는 불과 4척이었지만 포화를 뚫고 3척의 큰 적함을 격침시키면서도 겨우 2명의 전사자만을 내었다. 그후 부두까지 진출하여 바르바리 함선들에 방화한 후 우선 물러난 시보리는 다시 4시간의 시간을 주었고, 정신을 차린 유수프 파샤는 네덜란드 선박 및 영국 영사관의 중재로 협상에 나섰다. 그 결과, 사르데냐 측은 금화 7천닢을 일시불로 내는 대가로 추후 보호세 없이도 상선들의 안전을 보장받게 되었다. 1820년대 들어 사략선으로 인한 수익의 급감으로 카라만리 조는 재정 위기에 봉착하였다. 유수프 파샤는 사하라 횡단 노예 무역으로 적자 만회를 시도했지만 그마저도 서유럽의 계몽 사상과 산업혁명으로 별 효과를 보지 못했다. 1817년을 시작으로 1824년, 1826년 연이어 왕공들의 반란이 일어났고 1832년 7월 왕족 메흐메드가 3번째로 반란을 일으켰다. 유수프 파샤는 이를 진압한 후 아들 알리 2세에게 양위하였는데, 그마저도 3년 후 또다른 메흐메드의 반란에 직면하였다.

2.6. 근현대


오스만 술탄 마흐무드 2세는 내전이 이어지던 트리폴리타니아에 안정 회복을 명분으로 파병하였다. 그 지휘관 무스타파 네기브 파샤는 1835년 5월 타라불루스를 장악하며 트리폴리타니아에 대한 오스만 직접 지배를 회복하였다. 5년 전 프랑스에게 알제리를 빼앗기고, 2년 전 이집트의 메흐메드 알리 파샤에게 패하고 시리아를 넘겨준 오스만 제국에게 리비아의 손쉬운 재정복은 소중한 수확이었다. 당시 인구는 약 1만 5천여 명이었다. 주민들은 1842년과 1844년 반오스만 봉기를 일으켰으나 진압되었다. 1865년 행정 개혁이 시작되고 2년 후, 파샬리크는 트리폴리타니아 빌라예트로 개편되었다. 빌라예트는 키레나이카 산작 (바르카 고원) 및 페잔까지 관할, (동남부 쿠프라 지역을 제외한) 후의 리비아 공화국 영토에 근접하였다.
75년에 걸친 오스만 조의 2차 직접 지배 기간 동안 무려 33명의 총독들이 거쳐갔고, 비록 일부는 사실상 자치를 누렸지만 지배력은 1911년까지 이어졌다. 한편 1871년 4월 메흐메트 할레트 파샤는 우호의 뜻으로 미국 측에 USS 필라델피아의 닻을 반환하였다. 1881년 프랑스의 튀니지 점령 후 오스만 제국은 타라불루스 수비대를 증원하고 그 방어를 강화하였다. 하지만 오랫동안 자국의 남쪽에 위치한 리비아에 대한 지배권을 주장하던 이탈리아 왕국은 마침내 1911년 9월, 타라불루스의 이탈리아인 공동체에 대한 보호를 명분으로 오스만 제국에 선전포고 하였다. 9월 28일 밤 이탈리아 함대가 앞바다에 나타났고, 10월 3일부터 도시에 대한 포격이 개시되었다. 10월 5일, 타라불루스는 이탈리아 군에게 점령되었다. 당시 주민은 3만명이었다.

2.6.1. 이탈리아령 리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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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지배기의 트리폴리 대성당 (1932년 완성)
카다피에 의해 자말 압델 나세르 모스크로 개조됨 (1970년)
이듬해 전쟁 역시 이탈리아의 승리로 끝났고, 리비아는 이탈리아의 식민지가 되었다. 식민 당국은 이제 이탈리아어 발음인 '트리폴리'로 알려지게 된 도시의 로마 유적에 대한 보존, 보수 작업에 착수하였다. 대표적으로 이탈리아인 건축가 플로레스타노 디 파우스토가 1930년대에 마르쿠스 아우렐리아누스 개선문 일대를 정비하였다. 근대화와 적극적인 식민 정책으로 인해 1938년 인구는 10만 8천으로 늘어났고, 그중 이탈리아 인은 4만여에 달하였다. 이탈리아 당국은 많은 유럽식 건물들을 세웠고 1927년부터 무역 박람회 (Fiera internazionale di Tripoli )를 개최하였다. 그외에 1920년대를 걸치며 도시 주변에는 기차역과 공항. 공군 기지, 자동차 경주장 등이 건설되었다. 1941년 이탈리아 당국은 1040km 에 달하는 트리폴리-벵가지 철도 공사에 나섰는데, 곧 2차 세계대전이 북아프리카에도 엄습하며 중단되었다.

2.7. 현대


1943년 1월 이집트 주둔 영국군이 도시에 진주하였다. 전후 1947년 이탈리아는 리비아에 대한 모든 권리를 포기하였고, 1951년 영국으로부터 리비아 왕국이 독립하자 타라불루스는 그 공식 수도가 되었다. 다만 실질적인 수도의 지위는 벵가지와 알바이다가 맡고 있었다. 1969년 무아마르 알 카다피의 쿠데타 이후 타라불루스는 다시 리비아의 중심이 되었다. 하지만 그의 독재와 반서방 정책은 때때로 미국의 공습으로 이어졌다. 1986년 4월 엘도라도 캐년 작전에선 15명의 민간인 사망자가 나왔는데, 그중엔 카다피의 양녀 한나도 있었다.
2011년 리비아 혁명 당시 카다피는 시민군을 폭격했다가 NATO군에 의해 공습을 받았다. 결국 시민군이 타라불루스를 점령했고, 카다피는 남은 정부군 잔당을 이끌고 싸우다 죽었다. 다만 그후 트리폴리의 통합 정부와 토브룩 정부 간의 동서 갈등으로 2차 리비아 내전이 발발했고, 2019년 동부 군대가 도시를 점령할 뻔 했으나 정부군이 반격에 성공하였다. 그러다 2021년 들어서야 동서 통합 정부 구성을 위한 선거가 치러진다고 한다. 따라서 10여 년간 전란에 시달린 타라불루스에도 희망의 빛줄기가 드리우고 있다.

3. 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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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엽서 사진. 구시가지의 성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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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성채의 풍경. 원래 사진 찍힌 곳은 바다였으나 20세기에 간척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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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초엽 구르기 모스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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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르만리 모스크 내부

4. 여담


대항해시대 2에서는 오스만제국 암시장 면세증 구입을 위해, 대항해시대 온라인에서는 조선스킬 랭작을 위해 자주 들르는 도시 중 하나. 조선스킬 랭작의 정석으로 알려진 테크의 선박들을 건조할 수 있으면서도 조선소와 항구와의 이동거리가 매우 가까운 것이 이점. 참고로 알제리 수도인 알제의 도시구조가 트리폴리와 똑같다.
트리폴리 다음으로는 리비아의 제 2의 도시인 벵가지가 있다.
자마히리야 박물관에서는 무아마르 카다피의 사치품을 전시한다.
여담으로 대한항공 '''DC-10을 한건 했다.'''

[1] 160년대 무렵 파르티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하는 개선문이다[2] 남쪽 산악 지대에 리메스 트리폴리타누스라는 일련의 요새들이 지어져 해안 도시들을 사막 유목민들의 습격으로부터 보호하였다[3] 다만 그 지역은 너무 가난했기에 그 지즈야의 상당 부분은 현지 개발에 쓰였다고 한다[4] 아므르는 소규모의 원정대를 서쪽으로 파견하였고, 그들은 사브라타에 이르러 주민들이 아침 목축에 나서는 틈에 도시를 점령 후 약탈하곤 귀환하였다.[5] 아랍 측 사료에 의하면 그는 황제를 칭하고 동전을 주조했다고 한다[6] 매년 33만 노미스마타, 즉 금 2톤을 상납하기로 함[7] 또한 동로마 군이 각처의 성채들에서 수성에 전념하자 물자가 부족해진 것도 후퇴의 요인이었다. 대승을 거둔 후에도 수페툴라가 항복하지 않았고, 압둘라 이븐 주바이르의 지원군이 당도한 후에야 도시를 점령할 수 있었다. 그리고 665년, 반란을 시도했다가 축출된 게나디오스의 요청으로 파견된 우크바는 게다니오스가 665년 말엽 알렉산드리아에서 사망했음에도 진격을 지속. 시칠리아의 니키포로스가 파견되었으나 패하고 해상으로 도주. 이후 이슬람 군대는 아프리카 속주 약탈하고 회군, 리비아 일대 재정비함[8] 719년 바스라의 카와리지 공동체에서 카이로우안으로 선교사 살마 빈 사드가 파견된 것을 시작으로 카와리지파는 베두인들 사이에서 빠르게 퍼졌다[9] 초반의 싸움 끝에 일리아스가 트리폴리타니아, 압둘 라흐만의 아들 합빕이 가프사, 일리아스의 동생 아므란이 튀니스를 나눠갖기로 하였다. 하지만 일리아스가 협정을 어기고 영토를 독점하려 하자 하빕이 재차 봉기, 일대일 대결에서 일리아스를 죽이고 집권하였다. 그러나 일리아스의 동생 와레트 등 그 잔당이 남쪽 와르파주마 베르베르인들에게 도움을 청하였고, 하빕이 원정에 나섰으나 대패하였다. 이후 그들은 카이로우안을 점령했고, 하빕은 그를 탈환하려 시도하다가 전사하였다 (757년 7월)[10] 부친의 허가도 없이 감행. 침공 직전 바르카에서 스스로 압바스 칼리파로부터 이브라힘 2세의 폐위가 하달되었고 (놀랍게도 이는 23년 후 실현됨) 및 자신이 이프리키야 총독으로 봉해졌다고 주장했으나 묵살되자 진군함[11] 또한 패주한 툴룬 군대의 보급품으로부터 큰 약탈물을 얻음[12] 잔인함으로 악명이 높았던 그는 나푸사 산지의 이바디 포로들을 자신의 왕좌 앞에 늘어세워 한명 한명 직접 창으로 찔러 죽였는데, 그런 식을 5백여 명이 살해된 후에야 아미르가 피곤함을 느낌으로써 이 기행은 끝이 났다. 아즈다비야에서 그는 적 15명의 머리를 요리해 먹는 기행을 선보였다[13] 해당문서 (지리 왕조) 참고. 쉬아 파티마 칼리파 대신 순니 압바스 칼리파를 인정하며 자립하려다가 바누 힐랄과 술라임의 보복성 공격을 당하였다[14] 그외에 총독은 기사단의 8개 언어권에 따라 숙소를 세울 수 있었다[15] 이에 다라몽은 코스탄티니예로 향하여 술탄을 직접 만나야겠다고 겁박, 이에 그들은 포위가 끝날 때까지 일대를 떠나지 못하도록 막음. 그럼에도 카를로스와 교황은 그가 오스만 측을 부추겼다고 비난. 실제로 승리 만찬에 참여하긴 함. 당시 이탈리아 전쟁이 벌어진 터라 더 민감한 것도 있었음[16] 같은해 그는 이탈리아의 레지오를 공격, 전 주민을 노예로 삼아 귀환하였다[17] 본래 투르굿의 유해를 안장하러 타라불루스에 들렸다가 그대로 파샤로 눌러 앉았고, 쉴레이만 대제의 책봉을 받는다. 다만 3년만에 알제로 전근되었다[18] 당시 나폴레옹 전쟁이 진행 중이었기에 지중해에서 더 오래 머무는 것은 아직까지 강대국이 아니었던 미국에게는 부담이 되는 일이었고, 따라서 비교적 빠른 휴전을 맺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