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익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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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베트남 후 레 왕조의 제9대 황제. 묘호는 없고, 시호는 양익제(襄皇帝), 휘는 레오아인(Lê Oánh, 黎瀠/여영). 성종 여사성의 손자이며, 아버지는 덕종으로 추존된 여빈(黎鑌)이다. 사촌은 위목제이며, 위목제가 폭정을 저지르자 반란을 일으켜 승리한 후 집권하였다. 재위기간 중에 사용했던 연호는 홍투언(홍순, 洪順, 1509 ~ 1516).
폭정을 일삼던 귀왕(鬼王) 위목에게 승리하여 그를 폐위시키고 문묘를 복원, 대월사기전서의 기반이 되는 대월통감(大越通鑑)을 작성하는 선정을 베풀었으나 얼마 못가 자신이 폐위시켰던 귀왕처럼 폭정을 일삼게 된다. 결정적으로 1516년 백 여개의 궁전을 지으라는 강제 노역을 시행하는 등 비정(粃政)이 극에 달하여 동년 신하인 정유산에게 살해당했다.
2. 생애
2.1. 초기
여형은 1495년 여빈의 아들로 태어났다. 여형에겐 형 명종(明宗)[1] , 여영, 여연이 있었다. 여형은 헌종 시기 간수공에 봉해졌다. 아버지는 성종의 5자였기에 황실과 거리가 멀었고, 공의 작위를 받은 일개 황족에 지나지 않았으나 후술할 위목제와의 문제가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게 하였다.
2.2. 귀왕 처형과 집권
당시 대월은 폭군인 위목제의 치세였고, 여형은 위목제의 황족 견제 정책으로 감옥에 갇힌다. 그를 옥에 가둔 위목은 헌종의 둘째 아들로, 숙종의 형인데 숙종이 병에 걸렸고, 후사가 없자 숙종에게 지명받아 제위를 계승하였다. 그런다 위목은 자신에게 반감을 가진 신하들을 처형하고 주색잡기에 빠져 정사에 신경쓰지 않는 폭군이였다. 또한 의심병이 있어 황족들도 가리지 않고 살해했고 그 황족들 중엔 여형과 그의 형제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여형의 형제들은 1509년 위목제의 의심병으로 옥에 갇혔으나 여형은 옥졸에게 뇌물을 주고 감옥을 빠져나와 도주한 후 완문랑에게 우두머리로 추대받아 군을 이끌고 탕롱을 침공한다. 그리고 자신의 지지세력을 끌어들이기 위해 모두에게 이렇게 말했다.
마침내 11월 8일 여형은 서쪽에서 탕롱을 향해 진격했다. 위목제 역시 여형의 반란소식을 듣자 배를 타고 절로 도주해 여형 측의 장군 1명과 병사 20명을 사살했다. 같은 해 23일 조정에 남아있던 여형의 형제들인 여충[2] , 여영, 여연이 처형당했으나 여형은 동요하지 않고 계속해서 진격했다. 위목제의 부장들과 여형의 반군의 전투에서 위목제군이 패해 위목제의 부장들은 처형당했고 위목제의 황후 진씨도 절로 도망갔다.「暴主黎濬,猥以庶孽,濫玷洪圔,因循殆至五年,盈串已成萬狀,傷殘骨肉,沉溺臣僚,寵戚畹而狗尾縱橫,遠骨鲠而魚頭竄伏,爵已盡而濫賞不盡,民已窮而濫取無窮。征賦若錙銖,用財若泥沙,暴虐殆同於秦政,待臣如犬馬,視民如草芥,慢侮有甚於魏整。况又大其宮室,廣其苑囿,驅民種樹,宋花綱之,覆撤相尋,塡海築宮,秦阿房之昏風復踵,土木築而改,改而築,疲勞海陽京北之民,華宗驕而横,橫而驕,騷擾藩鎭四宣之境,居民疾首,率土痛心。」
폭군 여준은 더러운 서자 출신으로 5년동안 죄를 저지른 것이나 다름없으며 신하들을 비탄에 빠트리고 골육상쟁을 벌였으며 백성들을 궁핍하게 만들었다. 재물만 탐했고 그 재물 씀씀이는 진흙과 같고 포악하고, 신하를 짐승처럼 대하며 백성을 지푸라기처럼 대한다. 또한 잦은 토목으로 백성들을 괴롭게 만들고 귀족들은 교만하고 횡포를 저질러 온 백성들이 신음한다.
결국 패배한 위목제는 28일 여형군에게 잡혔고 1510년 1월 10일 짐독을 먹고 자살했다. 이로써 폭정을 일삼던 귀왕은 사망했고 여형은 귀왕을 제거한 영웅이 되었다. 그 해 1월 22일 황제로 즉위했고 자신의 절일을 천보성절(天保聖節), 스스로를 인해동주(仁海洞主)라 칭했다. 폭군을 스스로 제거한 용기있는 황족이 황제가 되었기에 신하들의 기대는 매우 컸다.
2.3. '홍순성세'
양익제는 스스로 폭군을 제거하고 올랐기에 어느 곳에서 나라가 망가졌는지 잘 알고 있었다. 전 황제의 만행을 그만이 수습할 수 있었기에 신하들의 기대도 컸다.
앞서 말했듯 왕조의 영광을 재현시키기 위해 성종의 업적을 계승, 문묘를 복원시켰으며 대월통감을 작성했고 경제적인 부분에도 귀왕의 폐해를 수습하여 다시 안정시켰고 새로운 화폐인 홍순통보(洪順通寶)를 발행하였다. 1511년 과거 시험을 다시 열었고 많은 유학생들이 양익제의 공덕을 기리는 글을 썼다.
하지만 여기까지였다. 얼마 못가 양익제 역시 자신이 폐위시켰던 귀왕처럼 폭정을 일삼게 된다.
2.4. 저왕(猪王)
양익제는 어느 순간부터 일을 놓고 매일 밤 과도한 음주를 즐겼고 술에 취하면 궁전의 사람들을 아무 이유없이 죽였다. 그의 폭정은 더욱 심해져 1512년엔 나라가 기근에 처했고 전국엔 굶어 죽은 시체들이 널려있었다.
1511년 산서부 지방에서 진순(陳珣)이 반란을 일으키자 백성들이 그에게 합류했고 군관들은 지레 겁먹고 모두 도주하였다. 양익제는 정유산을 보내 반란을 진압하게 했다. 양익제는 당시 거리를 통제했고 아무도 왕래가 없게 하였다. 하지만 정유산 역시 궤멸하여 남은 군인의 수가 30명밖에 안남는 상황까지 처했다. 하지만 정유산은 포기하지 않고 30명의 군들을 데리고 진순의 초소로 들어가 진순을 암살했다. 지휘관을 잃은 진순군은 순식간에 와해되어 반란은 기적적으로 진압되었다.
황실의 군이 궤멸 위기까지 간 반란이 일어났는데도 양익제는 폭정을 그만두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본 명나라의 사신 반희증(潘希曾)은 허천석이 위목제를 귀왕(鬼王)이라 평했던 것처럼 양익제의 폭정을 보고 '''저왕(猪王)'''이라 평하였다. 그 별명처럼 자신이 폐위시켰던 귀왕처럼 무리한 토목 공사와 사치를 부렸으며 신하의 불확실한 말만 듣고 황족 15명을 죽였고 전 왕조의 비빈들을 불러 간통하였다.
저왕은 1516년 수 천개의 널판지를 제조시켜 넓은 강에 다리를 놓았고 황제의 권위를 과시하기 위해 100개의 궁궐을 세우게 하였다. 무리한 강제 노역으로 인해 역병이 퍼져 많은 사람들이 죽었고 국고가 낭비되었다. 이런 상황에도 양익제는 사치를 심하게 부렸고 놀기만 하였다.
2.5. 반란과 최후
결국 1516년 신하 진고와 그의 아들 진병(陳昺)이 반란을 일으켰고 무려 반군의 규모가 만 여명이 넘었다. 양익제는 친정하여 진고와 대치했고 승리해 진고를 몰아냈으나 양익제가 보낸 신하들이 진고에게 패배, 일부 지휘관은 붙잡혀 살해당했다.鄭惟㦃弒帝於太學門。先是惟㦃以數諫帝忤旨被杖,惟㦃乃與黎廣度、程志森等同謀廢立,整飭船艘器械,在太極津聲言討賊。初六日夜二更,將金吾護衛三千餘人入北辰門,帝聞之,疑有賊,乃出幸寶慶門外。七日昧爽,有承旨阮瑀從帝間行過太學門,至碧溝坊朱雀池,帝遇惟㦃,問曰:「賊在何方?」惟㦃不答,顧他大笑。帝揮馬而西,惟㦃使武士名幸者橫矟刺帝,墜馬,弒之。阮瑀亦死之。
정유산은 태학문에서 황제를 시해했다. 이전에 황제에게 간언을 해도 매를 맞자 여광덕, 정지삼 등과 함께 폐립을 꾀하여 배를 정돈했다. 이후 태극진에서 반군을 토벌하고 6일 밤 금오 호위병 3천여 명을 북진문으로 들여보냈는데, 황제(양익제)가 이를 보고 반군으로 의심하여 7일날 보경문 밖으로 나가 정유산을 만나자 적들은 어느 편인가? 라 물었는데 대답하지 않고 웃기만 하자 황제는 말을 휘둘러 서쪽에서 내려오려 했으나 유산의 무사가 황제를 죽였다.
대월사기전서 中 - 양익제의 최후
진고의 반군과 어느정도 균형을 유지하는 실력을 보여줬지만 그의 폭정으로 조정은 망가질 채로 망가졌다. 그의 충신이였던 정유산은 군 3천여 명을 보내 궁궐 문으로 들어가게 하여 변을 꾀하였다. 양익제는 정유산의 군대가 반군인 줄 알고,
라고 물었으나 정유산은 무시하고 다른 곳을 보며 폭소하였다. 양익제는 말을 휘둘러 내리려 했고 동시에 정유산의 무사(武士)가 칼을 휘둘러 양익제를 시해한다. 폭군을 제거하고 왕조의 영광을 재현하려 했으나 결국 자신도 귀왕의 행보를 걸었던 영웅이자 폭군의 비참한 최후였다. 동시에 그가 시해되자 폐위된 황후 완씨도 불속에 뛰어들어 자살했다.「賊在何方?」
적들은 어느 편인가?
3. 평가
양익제는 귀왕(鬼王)이라 평가되던 폭군을 죽이고 왕조의 폐단 수습에 성공한 명군의 자질을 갖춘 인물이였다. 또한 위목제를 폐위시키기 위해 군대를 일으켰고 승리하여 제위를 계승하였단 점과 진고의 반란을 직접 친정하여 제압하였다는 점에서 군사적 자질도 충분했었다.
바로 앞의 폭군을 제거하고 왕위에 올랐기에 위목제에게 반면교사를 느꼈겠지만 정작 양익제 본인도 재위 중반에는 방심하여 이유없이 신하들을 죽이고 정사를 신경쓰지 않았으며 비정이 극에 달해 전임의 위목제처럼 비참하게 시해당했다. 사후에도 황제의 시호가 아닌 민려왕(愍厲王)이라는 악시(惡諡)가 붙었고 이는 그가 폭군임을 단번에 나타내는 칭호이다. 그의 잔혹함은 위목제 못지 않아 위목제의 별명은 귀왕(鬼王)에 대응하는 저왕(猪王)이란 악평이 붙었을 정도이다.
4. 사후 복권
그 후 조카인 소종 때 1517년 6월 16일 자신이 폐위시켰던 위목제와 같이 황제의 시호를 받아 귀왕은 위목황제(威穆皇帝), 저왕은 양익황제(襄翼皇帝)로 추증되었다.
5. 가계도
- 부모
- 부황: 덕종(德宗) - 양익제 추존.
- 모후: 휘자태후
- 후비
- 흠덕황후
- 황녀
- 보복공주(여수숙)
- 여수원
- 여수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