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한위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양한위는 1883년 4월 12일 충청북도 옥천군 청성면 산계리에서 양제안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1919년 9월 경북 영천역 부근에서 권태일(權泰鎰)과 만나 독립쟁취를 위한 방법을 모의하였다. 이들은 국내에서의 무장투쟁과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위한 군자금 모금을 벌이기로 결정하고, <독립신문>과 경고문 등을 허병율(許秉律)·조선규(趙善奎) 등 부호 앞으로 발송하고 대구 시내에 경고문을 살포했다. 또한 그들은 일제 관서를 폭파할 계획을 세우고 대구 남문시장에서 폭탄을 제조하다가 경찰에 발각되어 피신하기도 했다.
1920년 10월, 양한위는 오기수, 권태일 등과 함께 군자금을 모집하여 허병율로 하여금 8천원을 상해 임정으로 송금토록 하였으며, 조선규를 설득하여 독립운동조직에 가담시키고 군자금을 헌납케 하였다. 1921년 1월 하순경 대구에서 동지인 권충락과 만나 군자금 모집을 위해 달성의 부호인 최재교(崔在敎)를 협박하여 3만원의 헌납을 요구하고 그중 일부를 수령했다. 그러나 1922년 5월 27일 경북 지방에서 모금 활동을 하던 중 경찰에 체포되었고, 그해 12월 22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이후 옥천군에서 조용히 지내다 1950년 7월 10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0년 양한위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2007년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