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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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오기수는 1892년 9월 25일 경상도 의성현(현 경상북도 의성군 의성읍 후죽리)의 양반 집안에서 오학순(吳鶴淳)[2] 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912년 12월 경성관립공업전습소를 졸업하고 1911년 1월 18일부터# 1913년까지 조선총독부 임시토지조사국 측량과 기수(技手), 1914년에 제도과 기수로 근무하다가#, 그해 7월 28일 의원면직되었다.# 한때 의성경찰서 순사보로 근무하기도 했으며, 의성에서 형평사(衡平社)를 조직하여 형평운동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1919년 6월경 그는 의성군 의성면에서 마춘성(馬春成)에게 중국 만주로 가서 만주 및 상하이의 조선인들과 연락하여 곧 열릴 파리 강화 회의에 조선독립을 청원하여 참가국의 승인을 얻을 계획을 말하여 이에 가담할 것을 권유하여 그의 허락을 얻어냈다. 그후 기수는 실제로 만주로 건너가 조선독립단에 가입한 후 귀향하였다. 그러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그해 11월 22일 대구지방법원에서 다이쇼 8년(1919) 제령 제7호 위반 혐의로 징역 1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그후 형집행정지로 출옥한 후 다시 독립운동을 계속하여 1920년 3월 19일에는 경북 영천 역 앞에서 양한위와 만나 경성부에서 수집한 『독립신문』과 독립에 관한 경고문을 대구시내에 배포하였다. 또한 그해 10월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원하기 위해 양한위·권태일(權泰鎰) 등과 독립운동 자금 8천여원을 허병률로 하여금 상해로 송금하게 하였다. 그 후 그는 일제 관서를 폭파하고 대구 내의 친일 한인 관리들을 처단하기 위해 폭탄 입수에 힘쓰던 중 경상북도 경찰부에 체포되었고 1920년 7월 24일 대구지검에 송치되었다.#
그해 8월 2일 앞선 마춘성 관련 사건에 대해선 증거불충분으로 불기소처분이 내려졌으나#, 독립신문 배포 및 군자금 모금 건에 대해서는 9월 27일 대구지방법원 형사부에서 소위 제령 7호 위반으로 징역 1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인 1923년 4월 10일 오진문 등과 함께 북풍회(北風會)와 연결된 사회 운동 단체로서의 정의사(正義社)를 조직하였다. 1924년 1월 만주로 건너가 한족노동당(韓族勞動黨)에 가입하였고, 1925년 11월 5일 한족노동당 중앙위원 및 교육선전부장으로 선출되었다. 1927년 2월 상하이로 갔다가 그해 6월 모스크바 공산 대학 속성과에 입학하여 1929년 5월 졸업하였다. 그해 6월 만주로 돌아왔다가 8월 5일경 창춘경찰서 고등계에 검거되어# 1930년 1월 16일 평양복심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을 언도받았다.#
출옥 후 귀향하여 의성 지역의 사회주의 운동을 주도하였다. 1932년 10월 10일 의성면 도서동에 있는 김규복의 양돈장에서 오병수·김규복 등과 비밀리에 만나 사회주의 보급을 위한 지도 기관으로서 의성적색독서회(義城赤色讀書會)를 조직하였고, 그 부서를 지도 겸 조직, 청년, 농민 등 3부로 나눈 후 그는 이 기관의 지도 겸 조직부 책임자를 맡았다.
이어 10월 28일 같은 곳에서 그는 동지인 김진봉(金鎭鳳) 등과 비밀리에 회합을 가지면서 의성체육회에 사회주의 사상을 보급하고 독서회원인 김두칠(金斗七)과 문소준(文小俊)으로 하여금 의성노동친목계의 조직을 맡게 하면서 의성 지역 각 관공서 경비원 및 지방의 근로자, 청소년 등을 모아 의성 적색 독서회의 지도하에 두는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후 체포되어 오기수는 1933년 12월 4일 검사국에 송치되었으며# 1934년 5월 26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예심이 종결되어 유죄로 공판에 회부되었고#, 10월 26일 대구지방법원 형사부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5년(미결 구류 180일 산입)을 받고 복역하였다.# 이 사이 구류갱신결정이 세 차례에 걸쳐 이뤄지기도 했다.1934.3.31934.6.11934.9.3
1935년 7월 20일 대구복심법원에서 1933년 의성공산당사건에 대해 경찰의 고문에 의해 조작된 것이 드러나 무죄를 선고받고 출옥하였다.##2
출옥 후에는 고향 의성에서 신병을 치료하며 조용히 지내다가 해방을 맞았다.#
8.15 광복 후에는 우익으로 전향하여 1945년 11월 5일 미군정청에 의해 경상북도 고문에 선임되었으며 12월 20일 경상북도고문회 서기에 선출되었다. 1946년 3월 9일에는 대한독립촉성국민회 경상북도지부에 가담하였다.
1949년 대구부(현 대구광역시 중구 동인동에서 신흥공업주식회사를 경영하기도 했다.#
1950년 1월 31일 대한청년단 경상북도단부 단장에 출마하였으나 장택상에 밀려 낙선하였지만, 그해 4월 13일에는 경상북도단부 단장에 만장일치로 추대되었다. 그해 5월 30일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대한청년당 후보로 경상북도 의성군 갑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대한국민당 박영출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6.25 전쟁이 발발한 후에는 전시대책위원회 위원, 구국총력도연맹 부위원장 등을 역임하였다.
이후 만촌동에 거주하다가 신천동으로 이주한 후 1959년 2월 20일 그곳에서 별세하였다.#
1977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으며, 이어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3. 선거 이력
[1] 독립유공자 공적조서에는 중리리로 기재되어 있다.[2] 일명 오병소(吳秉韶). 1924년 3월 17일, 자기 소유 토지나 일정한 직업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대서업(代書業)으로 조금씩 저축한 돈 100원을 경비곤란을 겪던 사립 의성학원에 의연금으로 기부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