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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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 12월 16일(음력)∼
1. 소개
엄재수 명장은 부채를 제작하는 장인인 선자장[1] 이며 부채 명장인 무형문화재 엄주원 선자장의 아들이다. 선대에 이어 2대째 무형문화재를 잇고 있는 최초의 선자장이라 할 수 있다.
계보는 문영득-문준하-엄주원-엄재수 로 이어진다.[2]
2. 생애
엄재수 선자장은 원광대학교 전자공학 출신이다. 80년대에는 전기 및 전자 쪽이 유망주였던지라 엄 선자장도 그 길을 택한 것으로 본다. 그러다가 부채 제작이 운명임을 깨닫고 전주로 내려와 가업을 돕게 된다. 수공예가 그렇지만 부채 만드는 일 또한 예삿일이 아니었다고 한다. 부채 제작에 쓰이는 칼을 제대로 가는 데 10년이 걸렸다고 한다.
역사에도 관심이 많은 엄 선자장은 일이 무르익을 즈음, 지금 만들고 있는 부채가 옛 것과 비슷한가를 살펴보았다. 유물에 보여지는 부채들은 겉대에 거북이 등껍질, 대나무 껍질, 소뿔 등으로 장식하고 속살에 옻칠을 하였거나 부채 머리의 모양이 제각각인, 제각기 개성을 뽐내는 부채들이 많았던 것에 반해 당시 제작 중인 합죽선은 겉대에 대나무 마디만 붙인 다절선 일색이었다. 제작 기법도 실전되었거니와 재료 수급도 여의치 않아 엄 선자장은 어떻게 부채를 복원할 지 막막해했다. 그러다가, 선친의 유품을 정리하던 도중 책 한 권을 발견하였는데 그것은 바로 부채 전시 도록이었다. 조선시대 부채들의 모습이 그대로 실려 있었던 것이었다. 또한 유품 목록 중 깊숙히 숨겨 놓은 소의 다리뼈, 거북이 등껍질 등 이미 선친이 준비해 두었던 재료도 발견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엄 선자장은 여러 부채들을 재현할 수 있었다. [3]
그가 복원한 부채는 수도 없이 많다. 대륜선[4] , 오십살백접선[5] , 반죽선[6] , 우각선(외각선)[7] ], 대모선[8] , 내각선[9] , 죽피선[10] , 나전선, 칠접선 등은 전부 그의 작품이며 다른 무형문화재들은 그의 작품을 따라한 것에 불과하다. 특히 100년 넘게 제작 기법이 실전된 부채의 한 종류인 칠접선을 복원한 의미는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11]
이러한 그의 노고를 인정받아 젊은 나이임에도 2013년 전북 무형문화재에 지정되었다. 다른 사람들이 시샘하는 모양이지만 전혀 개의치 않는다고.
3. 작품 특징
엄 선자장은 일반품을 만들지 않으며 그 모습을 매 년 의도적으로 다르게 제작한다. 때문에 가격은 굉장히 비싸지만 수집가들 사이에서는 없어서 못 살 정도의 품귀 현상을 보이고 있다. 또한 애용자들과 적극적으로 소통하고 있는 드문 장인으로 [12] , 자신이 무조건 옳다고 우기지 않으며 비판을 겸허히 수용해 다음 작품에서 반영하고 있다.
그리고 최신 트렌드가 무엇인지 고민하는 장인이기도 하다. 무조건 옛 모습만 고집하지 않고 현대인이 좋아할 만한 디자인을 계속 고민중이다. 그 과정에서 다른 기술을 접목하기도 하며 과감한 실험작들도 간혹 선보인다.
부채 쪽에서는 그가 워낙 앞서나가는지라 다른 장인들은 그의 작품을 따라하기에 바쁘다. 예술 쪽이 다 그렇지만 2등들은 1등을 모방하기 바쁜데 이 쪽도 다를 바 없는지라, 어느 장인은 부채 상자의 디자인을 똑같이 베꼈다가 크게 혼난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그가 제작한 부채 중 문재인 대통령이 전주에 방문하였을 때 탄소섬유로 속살을 만든 백접선을 선물하기도 하였다.https://www.youtube.com/watch?v=dfBNgrzaFLU 엄 선자장은 갑자기 들어온 요구에 납기일을 맞추느라 꽤 고생했다고.
엄 선자장의 작품을 접하는 데는 약간의 진입장벽이 있다. 자신의 작품을 온라인으로 판매하지 않는다. 엄 선자장의 작품을 구입하려면 전주로 직접 가거나, 자신의 손바닥을 1:1로 스캔해서 보내야 한다. 내 손에 맞지 않는 부채를 데려가게 되면 그 부채는 사용하지 않게 된다는 이유에서다. 또한 사용자가 부채 초심자라면 작품을 내어 주지 않는다. 싼 부채를 일정 기간 동안 쓰면서 익숙해지면 그 뒤에 오라고 말한다. 이런 이유 덕분에 엄 선자장은 그 수가 적지만 매우 굳건한 매니아층을 형성하고 있다.
4. 기타
전주에서 부채박물관을 운영중이다.http://fanmuseum.co.kr/ 다른 부채 박물관인 일준박물관 및 청곡박물관이 문을 닫은터라, 실질적으로 마지막 남은 부채박물관인 셈이다.
[1] 합죽선이나 태극선 등의 부채를 만드는 사람을 뜻하며, 중요무형문화재 및 지방무형문화재에서 그 보유자 - 속칭 인간문화재 - 에 대해서, 공예 분야의 겨우 '기능보유자'로, 공연분야의 경우 '예능보유자'로 칭한다.[2] 무형문화재에 있어서 계보는 상당히 중요하다. 제대로 된 계보가 없으면 무형문화재 등재가 어려울 정도.[3] 처음에는 알게모르게 무시했던 부채계 원로들은 그가 단오전에서 선보인 100 점의 부채를 본 후 입을 다물어 버렸다고 한다.[4] 펼치면 360도로 펴지며 차바퀴처럼 생겼다 하여 이런 이름이 붙었다. 주로 햇볕가리개용으로 사용하였다.[5] 왕이 사용하였다 하는 살 수 50개인 부채로 그 원형은 속살에 옻칠한 접부채다.[6] 겉대가 얼룩덜룩한 반점이 있는 대나무를 겉대에 올린 부채[7] 소뿔을 겉대에 말아 붙인 부채[8] 매부리바다거북의 등껍질을 겉대에 치장한 부채[9] 겉대 안쪽에 뿔이나 뼈를 덧댄 부채[10] 대나무 껍질을 얇게 켜서 겉대에 말아붙인 부채[11] 칠접선은 현재 엄재수 선자장만이 제작 가능하다.[12] 덕분에 무형문화재로서는 드물게 젊은 층이 중심이 되는 팬카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