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두아르 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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ÉDOUARD MANET (1832년 1월 23일 ~ 1883년 4월 30일)
1. 유년기
2. 작품


1. 유년기


에두아르 마네는 할아버지도 판사이고 아버지도 판사인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처음에는 아버지가 화가의 길을 허락해주지 않아 17살에 남아메리카 항로의 견습사원이 되었다. 그 뒤 해군사관학교에 지원했다 낙방한 후 1850년에 겨우 쿠튀르의 아틸리에에 들어갔다. 그러나 학구적인 역사화가인 쿠튀르에게 반발, 자유연구로 나아가 루브르 박물관 등에서 고전회화를 모사, F.할스나 벨라스케스 등 네덜란드/에스파냐화파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 사이 이탈리아 ∙ 독일 ∙ 네덜란드 ∙ 벨기에로 여행이 잦았다고 한다.

2. 작품


1859년부터 살롱에 출품해 낙선이 잦았지만, 고티에나 보들레르부터 주목을 받게 된다. 살롱에는 1861년 입상해 겨우 수상한 적이 있으나, 이색적의 수난은 초기부터 계속되었다.
1863년 낙선전[1] 그의 작품인 <풀밭위의 점심식사 (Le Déjeuner sur l’herbe)>는 많은 이들의 관심과 함께 조롱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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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이때까지의 회화와는 다른 관점으로 그림을 그렸는데 ,당시까지만 해도 그림은 명암의 변화를 섬세하게 구분하여 전통적인 방식으로 그렸지만 마네는 쏟아지는 햇볕아래서 밝은 부분을 어둡게 보이고 어두운 부분도 주위 사물에서 내쏘는 반사광으로 인해 어둡게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실제로 그의 작품인 풀밭위의 점심식사는 어두운 부분은 하나의 색채를 가지고 그림 속의 사물들은 입체감을 잃고 평면이 되었다. 또한 논란이 되었던 부분은, 옷을 입지 않은 나체 여성과 옷을 입은 남성을 일상적인 정경 가운데 함께 그렸다는 것이다. 그 이후에도 그의 그림은 여러번 논란의 대상이 되었는데 그의 작품인 올랭피아는 1865년 샬롱에 전시되었지만 신랄한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2][3] 이 두 작품에 대한 비난은 지나쳤지만 훗날에 그의 표현기법의 밝음과 참신성을 이끌어준 계기가 되었다. 이 사건 이래 화단과 문단 일부에서 열렬한 지지자를 얻었고, 자신을 경모(敬慕)하는 C.피사로, 클로드 모네, 알프레드 시슬레등 청년화가들 사이에서 그 후에 대두될 인상주의에의 길을 여는 기연(機緣)을 이루었다. 그러나 마네 자신은 아카데미즘의 공인을 기다려, 인상파그룹의 전람회에 참가하기를 거부하고, 그들과 동일시되는 것을 대단히 꺼렸으나 한때는 인상파기법을 채용하여 제작한 적도 있다.
마네 최후의 걸작이라 할 수 있는 <폴리 베르제르의 술집 (Un bar aux Folies Bergère, 1832)> 역시 많은 논란의 대상이 되었으며 매우 최근까지도 미술학도와 일반인들이 즐겨 씹는 안주거리였다. 이 그림에 등장하는 여성이 매춘부라는 주장부터 이 작품에서 보여지는 구도는 실제로는 불가능한 구도이며 마네는 미술의 기본도 모른다는 등 갖가지 구설수에 시달린 작품. 결국 21세기 들어서야 사진 전문가가 그림 속의 상황을 그대로 재현한 사진을 촬영함으로써 마네의 억울함을 풀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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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리베르제르의 바>. 중앙의 여성의 뒷모습과 그녀 앞에 서 있는 남성의 정면이 거울에 비치고 있는데, 현실적으로 이런 각도가 나올 수가 없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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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사진을 실제로 재현할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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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는 이(즉 사진사)와 모델, 거울의 위치 및 각도를 나타낸 그림. 출처: Manet's Bar at the Folies-Bergère: One Scholar's Perspective, Malcolm Park, 2000.
말년에는 류머티즘 질환으로 고생하여 근육적 피로가 덜한 파스텔화 위주로 그렸지만, <막시밀리안의 처형 (L’Exécution de Maximilien)>(1867), <폴리 베르제르의 술집 (Le Bar Folies-Bergère)>(1882)등 황혼기에 유화의 역작들을 그려내고 51세에 파리에서 생을 마감했다. 세련된 도시적 감각의 소유자로 주위의 활기 있는 현실을 예민하게 포착하는 필력에서는 유례 없는 화가였다. 종래의 어두운 화면에 밝음을 도입하는 등 전통과 혁신을 연결하는 중개역을 수행한 점에서 공적이 크다. 레지옹 도뇌르 훈장의 수훈자 중 한명이다.
여담으로 BBC의 다큐인 빛을 그린 사람들에선 매독으로 사망한다.

[1] 낙선자 미술전시회 또는 '살롱 데 르퓌제(Salon des Refusés)라고도 알려져 있다. 나폴레옹 3세가 개최했으며 파리에서 개최되었다. 관선전시회에서 낙선된 작품들을 모아 전시했는데, 세잔 · 마네 · 모네 · 피사로 · 휘슬러 등 당시의 가장 혁신적인 작품이 일반에 처음으로 전시된 근대 미술사상 획기적인 사건이었다.[2] 비평가曰 :"배가 누런 이렇게 천하게 생긴 모델은 어디서 누가 구했을까?"[3] 이 모델의 이름은 빅토린 뫼랑으로 '올랭피아'나 '풀밭 위의 점심 식사' 등 마네의 그림에 많이 출현한다. 당대부터 매춘부라는 오해와 조롱을 많이 받았지만 원래 화가 지망생이었고, 실제로 입선도 예닐곱번 했을 만큼 실력은 갖추고 있었다. 1879년에는 마네와 그녀의 작품이 같은 방에 전시되기도, 즉 동격의 화가로 잠시나마 인식되기도 했다. 반면 마네는 당시에 낙선과 조롱을 밥먹듯이 받았고 이 때문에 나중에는 열등감 때문에 뫼랑과 멀어졌다. 현재 뫼랑의 작품으로는 <종려주일> 단 한점만이 실물로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