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로드 모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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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000> '''Oscar-Claude Monet
클로드 모네
'''
'''본명'''
'''오스카 클로드 모네'''
'''출생'''
1840년 11월 14일 프랑스 왕국 파리
'''사망'''
1926년 12월 5일 프랑스 제3공화국 지베르니
'''국적'''
프랑스 [image]
'''직업'''
화가
'''분야'''
인상파
1. 개요
2. 생애
3. 기타
4. 창작물에서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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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대표작이자 인상파의 이름의 기원이 된 그림인 '''<인상, 해돋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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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밭위의 점심식사>'''
프랑스의 인상파 화가.
‘인상주의’ 라는 말 자체가 클로드 모네의 그림 중, 매우 중요한, 위의 <인상, 해돋이>라는 작품에서 시작이 된다. 이 그림은 1874년 모네, 르누아르, 드가를 포함한 일군의 화가들이 개최했던 '앵데팡당 전(展) ( Salon des Artistes Indépendants )' 에 처음으로 선보였는데, 당시 국가 주도의 전통적인 살롱전의 대안으로 마련된 이 전시회 (‘무명협동협회‘의 첫 전시회이며, 이어서 7차례 정도 더 열었다.) 는 화가들이 급진적인 새로운 방식으로 작업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이 전시에 대한 비평문에서 비평가 루이 르루아는 <인상, 해돋이>가 스케치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난했으며, (비평가 루이 르로이는 모네의 <인상, 해돋이> 라는 작품을 보고, ‘날로 먹는 장인 정신이 참으로 인상 깊다고 하였음.) 부정적인 의미에서 이 전시회에 '인상주의자들의 전시회'라는 별칭을 붙였다. 하지만 이들은 인상주의자들이라는 단어를 자랑스럽게 받아들였다.

“카탈로그에 실릴 제목을 나에게 물어보는데. 이 그림을 르 아브르의 풍경이라고 정직하게 말할 수 없어서 그냥 인상이라고 했습니다.”

ー클로드 모네[1]

심지어 다른 인상파 화가들조차 빛의 변화를 포착하는 데에만 집중해서 대상 자체의 형태를 파악하기 어렵고 무게감이 떨어진다는 인상주의의 한계를 자각하고 화풍을 바꿀 때까지도 그만은 끝까지 인상주의 화풍을 고수했다. 인상주의를 시작하고 인상주의를 끝까지 지킨, 실로 인상파의 아버지라고 할 수 있는 인물. 오늘날 인상파라고 말할 때 떠올리는 작품의 대부분이 바로 그의 작품이다.

2. 생애


청소년기에는 풍자만화가였다. 고향인 르 아브르에서 풍자화를 그려가며 돈을 벌었는데 당시 모네가 그린 풍자화 한 점의 가격대는 10프랑~20프랑이었다고 한다. 당시 노동자의 일당이 5프랑이었던 걸 감안하면 청소년이 그린 그림이 그림값을 넉넉하게 받은 셈이다.
이대로 풍자만화가로 살았을 모네였지만 어느 날 그의 인생에 큰 변화가 생긴다. 모네의 풍자화를 본 화가 외젠 보댕이 모네를 제자로 삼고 싶다고 한 것. 모네는 처음에는 거절했지만 모네의 가능성을 높이 사고 용기를 준 보댕을 스승으로 받아들인다. 보댕은 제자들을 가르칠 때 자연을 관찰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가르쳤는데 보댕을 사사한 후의 모네가 그린 그림을 보면 오랜 관찰을 통한 섬세한 묘사가 두드러진다.
부모를 비롯한 주변인들은 아카데미에 들어가라고 권유했지만 보댕을 떠난 모네는 한 화실로 들어간다. 그 화실에는 후에 인상파로 불릴 그의 동료들이 있었다.
인정받지 못하던 젊은 시절에는 가난에 시달리다 못해서 자살까지 시도한 적도 있었지만, 세월이 흐르고 인상파의 작품이 인정받기 시작함에 따라서[2] 그 역시도 정원이 딸린 저택을 살 수 있을 정도로 부유해졌다. 그의 유명한 수련 연작도 지베르니에 있는 자택 정원에서 그린 것이다. 이 수련 연작은 날씨, 계절, 시간에 따라 변화하는 수련의 빛과 색채를 1926년 죽을 때까지 27년에 걸쳐 무려 300여 점의 작품으로 그린 것이다. 그는 루앙 성당과 짚더미를 그린 연작에서도 같은 대상이 시간이나 날씨, 계절에 따른 빛과 색채의 변화에 따라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을 그려냈다.
말년에 그린 작품은 대부분 지베르니의 정원을 소재로 한 것이다. 모네는 젊은 시절 지베르니의 풍경에 감탄하면서 "내가 이다음에 큰돈을 벌면 지베르니에 집을 얻을 것이다."라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늙어서도 그 풍경의 아름다움을 잊지 않았는지 모네는 정원사를 여섯 명이나 두었는데도 자기 또한 정원 관리에 참여했다. 젊은 시절부터 바라왔던 곳에 집을 얻고 부유한 생활을 하던 모네였지만 그에게 크나큰 시련들이 닥친다. 가난했던 시절 함께 배고픔을 견뎌냈던 친구들이 하나 둘 세상을 떠나기 시작하고 모네 본인도 백내장에 걸려 다시는 그림을 그릴 수 없다는 선고를 받았던 것이다. 모네는 백내장에 걸려도 자신은 그림을 그려야겠다며 얼마 남지 않은 생명력을 불태웠지만 백내장으로 인한 시력 악화 때문에 말기 회화의 상태는 거의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실제로 백내장이 악화된 1910년대 후반~임종 직전의 수련 그림은 매직아이를 보는 수준으로 집중해서 보지 않으면 그저 수많은 선의 모임으로만 보인다. 그러나 모네는 눈이 잘 보이지 않는데도 빛에 따라 달라지는 정원의 모습을 표현하기 위해 죽기 1년 전인 1925년까지 붓을 놓지 않았다. 죽어가는 노화가의 마지막 투혼인 셈이다. 눈이 잘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그린 그의 말기 회화가 추상화에 영향을 미쳤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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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이분도 당대 프랑스 화단의 유행을 따라서 상당한 수준의 자포네스크 취향을 보여 주었다. 위 그림은 첫 번째 아내 카미유[4]에게 기모노를 입히고[5] 그린 초상화로, 심지어 배경조차도 일본 그림이 그려진 부채로 도배했다. 지베르니의 자택 정원도 당시 유행했던 일본식 정원처럼 꾸미기 위해 일본식 다리를 세워 놓아서, 지베르니의 정원을 그린 작품에서 이 다리를 자주 볼 수 있다. 심지어 일본 귀족들을 집으로 초대해 식사를 대접하기도 했다.

3. 기타


이름 때문에 에두아르 마네와 헷갈려 하는 사람이 많다. 알파벳 철자도 모네(M'''o'''net)와 마네(M'''a'''net)로 한 글자 차이. 사실 모네 생전에도 이름이 유사한 데다가 동시대에 같은 분야에서 활동하던 모네와 마네를 혼동하는 사람이 많았다. 마네는 처음에는 자신보다 한참 후배인 모네와 혼동되는 것을 불쾌하게 생각했지만, 모네를 만나고 가까워진 이후로는 평생 동안 그와 교류했다. 위의 <풑밭위의 점심식사>도 마네의 그림을 패러디 한 것.
그 밖에도 일상을 밝고 아름다운 색채로 그려내 '''행복을 그린 화가'''로 불리는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와도 평생의 절친이었다. 비록 르누아르가 후기에는 인상파 화풍을 버리기는 하지만, 인상파가 인정받지 못하고 가난에 허덕이던 어려운 시절을 동고동락한 좋은 친구 사이였다.
이런 인상파 화가들의 어렵던 시절을 묘사한 3부작 영드 '빛을 그린 사람들 (The Impressionists)'도 있다. 2006년 BBC에서 제작된 드라마로, 마네, 모네, 드가, 세잔, 르누아르 등 주요 인상파 화가들의 젊은 시절을 다루고 있다.
대표작인 수련 연작은 워낙 많이 그려서 외국의 웬만한 네임드 미술관은 하나씩 나눠 갖고 있다. 상설 전시만 일곱 점을 걸어놓고 있는 파리오랑제리 미술관이 독보적이고 , 뉴욕메트로폴리탄 박물관[6], MoMA, 보스턴보스턴 미술관, 시카고시카고 미술관, 도쿄의 국립미술관과 후지미술관, 런던영국 국립미술관도 수련 연작을 나눠갖고 있다. 워낙 많이 그렸기 때문에 흔하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이런 네임드 미술관들이 소장하고 있는 물건들은 모네가 혼신의 힘을 들여 그린 벽화급의 물건들로 상설전시를 위해 아예 방을 따로 만들어서 걸어놓고 있을 정도로 압도적인 물건들이다.[7] 물론 상술했듯이 선명한 수련부터 매직아이 수련까지 있어서 수련만 보고 다녀도 충분하다.

4. 창작물에서



4.1. 핑크레이디 클래식 에서의 모네


절친 르누아르와 더불어 67화에서 등장한다. 자기네가 새로이 창조한 인상파 화풍을 두고서 혁명이라고 자화자찬하지만 현실은 시궁창, 당장 끼니를 때울 도 없어서 아사 직전에 처하다가 때마침 지나가던 한겨울, 윤현석에게 음식을 얻어 먹는다.

4.2. 개그만화 보기 좋은 날에서의 모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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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 오른쪽의 인물. 졸라맨을 닮았다.
개그만화 보기 좋은 날 애니메이션 4기 1화에서 르누아르세잔의 그림시합에 카미유 피사로, 알프레드 시슬레, 에드가 드가와 함께 심사위원으로 출연한다.
알프레드 시슬레와 마찬가지로 비중은 적다. 심지어 실타래 혹은 회전초로 나온 에드가 드가보다도 존재감이 없다.
작위적인 연출인지 모르지만 애니메이션에서 오류가 있다. 맨 처음 인물 소개를 할 때 일장기를 든 인물이 모네라고 나오지만 이후 심사위원으로 나왔을 땐 피사로가 졸라맨을 닮은 인물을 모네로 소개한다.

4.3. 음악 판타지 꿈에서의 모네



2:26부터
프레데리크 쇼팽녹턴 두 번째 파트에서 모네 작품들이 나오는데 하루를 보여주며 유화들이 움직이는 모습을 보여 준다.

[1] 르 아브르 항구는 당시 지내던 모네의 집 창문을 열면 바로 보이는 풍경이었다.[2] 모네는 복권에 당첨된 적이 없다. 그의 유명세는 실력이다. 아르망 기요맹이라는 화가만 복권에 당첨되었다.[3] 정확히 말하면 1923년에 백내장 자체는 제거에 성공했다. 다만 어딜 어떻게 깎은 건지 수술 이후부터는 자외선을 보기 시작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백내장 환자는 색채를 볼 때 적색을 더 강하게 느끼는데, 수술 이후 모네가 일부 수련 그림들을 덧칠하면서 유독 파란색을 강조한 경우가 여럿 있었기 때문.[4] 모네의 영혼의 뮤즈. 모네와는 화가와 직업 모델로 만난 사이이며, 서로 빠르게 사랑에 빠졌다. 모네 집안에서는 천한 직업 모델과의 결혼을 반대했지만, 모네는 기어코 카미유와 결혼하고 그녀를 죽을 때까지 사랑했다. 모네와 어려운 시절을 함께 이겨내었으나 몸이 약해 병에 걸려 1879년 둘째를 출산하면서 32세라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이 그림처럼 카미유를 모델로 한 그림을 자주 그렸던 모네는 그녀가 세상을 떠날 때도 그녀의 마지막 모습을 그림으로 남겼다. 클로드는 평생 카미유를 사랑하여 그녀의 그림을 많이 그렸지만 카미유를 찍은 사진은 한 장밖에 남아 있지 않다. 모네의 두 번째 아내인 알리스 오슈데가 카미유를 질투하여 그녀의 사진을 불태워버렸기 때문이다.[5] 이는 모네가 경제적으로 힘들었던 시기 당시 사람들의 취향인 화려한 색감을 따라 그림이 팔리게끔 한 것으로, 다소 억지로 카미유에게 기모노를 입힌 이 일을 두고두고 미안해했다.[6] 수련 뿐 아니라 많은 수의 모네 작품이 초기부터 후기까지 고루 있다.[7] MoMA에서 전시중인 그림의 사이즈는 가로 '''12m''' 세로 2m의 압도적인 크기로 감히 모마의 하일라이트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 모네가 수련 연작을 기증하기로 한 뒤 이를 전시하기 위해 맞춤 설계를 한 오랑제리는 말 할 것도 없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