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디 개델
1. 개요
전직 메이저 리그 야구선수로, 후술하겠지만 수행했던 포지션은 '''없었고''', 대타 1회 출전이 전부이다.
태어날 때부터 왜소증을 앓고 있었기 때문에 실제로 위의 사진을 보면 얼굴은 분명 성인인데, 키가 겨우 '''109cm''' 밖에 되질 않았으며, 몸무게 또한 '''27kg '''밖에 되질 않아, 메이저 리그 역사상 (아니, 세계 역사상) 가장 작은 야구선수로 기록되고 있다.
본래 그는 왜소증이라는 특성상 제 2차 세계 대전 당시에는 비행기 날개 안쪽을 들어갈 수 있었기 때문에 비행기 날개 수리공으로 복무한 적이 있었으며, 전쟁 이후에는 그 특유의 체형을 이용해 서커스 맨 활동을 해오던 사람이었다.
그러다가 당시 세인트 루이스 브라운스(現 볼티모어 오리올스의 전신 구단)의 구단주였던 빌 빅(Bill Veeck)[1] 의 제안으로 1951년 8월 19일 '''최초의 왜소증 야구선수'''로 데뷔를 하게 되었다. 그 당시 등번호는 1⁄8번[2] 이었다.
당시 상대팀이던 디트로이트 타이거스팀은 거세게 항의했지만, 이미 선수로 정식 계약이 체결되어 있었고, 당일 참가 선수로 등재가 되어 있던 터라 경기는 그대로 속행되었다.
애석하게도 에디 개델은 이 날 배트 한번 휘두르지 않고 볼넷으로 출루하고, 바로 대주자와 교대됨 으로서 그것이 그의 '''처음이자 마지막 등판'''이 되고 말았다.
이유는 구단주 빌 빅이 경기 출전 이전에 압력을 가해 '''절대로 배트를 휘두르지 말라'''는 지시를 내렸고, 당시 유명 야구선수였던 조 디마지오의 웅크리는 타격 자세를 유지하고 있으라고 지시했는데, 이는 왜소증인 개델의 스트라이크 존이 다른 선수보다 훨씬 작았기 때문에 투수의 볼넷을 유도하기 위한 전략을 가한 것 이었고, 더욱이 웅크리는 타격 자세로 더더욱 스트라이크 존을 축소시키겠다는 전략에서 온 것이었다.
결국, 이 날 경기는 브라운스의 승리로 마무리 되었지만, 이후 MLB의 모든 구단이 거세게 항의를 넣은 결과, "왜소증을 가진 사람을 선수로 기용할 수 없다"는 조항을 만들며, 에디 개델은 더 이상 선수로서 필드를 밟을 수 없게 되었다.
에디 개델은 비록 필드 선수로 나가지는 못했지만 세인트 루이스 측은 그의 선수 계약을 파기하지 않았는데, 이는 에디가 상술한 출장 덕택에 전국적으로 유명인사로 자리매김 하면서, 당시 인기도가 높지 않았던 세인트 루이스 브라운스가 그를 각종 프로모션 자원으로 활용시키면서 인기도와 각종 부수익을 짭짤하게 올리는데 공헌할 수 있다는 계산에 의거했던 것으로, 에디 개델이 몇 년간 프로모션을 통해 벌어들인 돈이 자그만치 17,000달러(현 가치로 약 8억 5천만원)나 된다고 한다.
하지만, 결국 장기간 출전하지 못하는 탓에 시간이 지날수록 그의 존재도 잊혀져 가기 시작했다.
2. 단 1번의 출장 이후
이후 개델은 1959년 시카고 화이트삭스의 구단주로 부임하게 된 빌 빅의 제안으로 선수가 아닌 구단 직원으로 잠시나마 일했었지만, 결국 이러한 자신의 생활에 비관하다가 다시 서커스맨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3. 사망 그리고 사후
1961년 6월 18일, 자택 침대에서 심장마비로 숨진 채 발견되었다. 향년 36세.
그의 사망 소식이 알려지자, 미국 전역에서 그의 이름이 다시 한 번 모든 미국인들에게 각인되게 되었고, 현재로서는 '''가장 작은 선수이자, 가장 적은 시간 출전한 선수, 그리고 10할대의 출루율을 기록한 선수'''로 남게 되어서, 결국 사후 전설이 된 선수로 많은 미국인들 가슴에 남게 되었다.
지금도 MLB 프로야구 명예의 전당 실에 그가 생전 입었던 유니폼 1/8번과 더불어 그의 실물 사이즈의 동상과 각종 기념품들[3] 이 놓여지게 되면서, 공교롭게도 사후 전설이 된 선수로 기록되고 있으며, 1999년 ESPN과 MLB 네트워크에서 선정한 "새로운 그리고 잊지 못하는 순간" No.1으로 에디 개델의 유일한 등판을 꼽았다.
에디 개델의 유일한 등판 기록의 상대 투수였던 밥 케인(1924 ~ 1997)은 에디 개델 장례식에 '''유일하게 조문을 왔던 메이저리그 선수'''였으며, 1994년 밥이 69살이었던 해에 빌 빅 구단주의 아들이었던 마이크 빅 미네소타 트윈스의 트리플A 팀 세인트 폴 세인츠 구단주의 요청으로 당시 구단 매니저의 10살 아들에게 피칭하는 이벤트를 선보이며, 1951년 당시 에디 개델에게 피칭했던 당시를 회상하게 해 주었다.
에디 개델의 조카인 Kyle Gaedel이 2011년 MLB 드래프트를 통해 샌디에고 파드레스에 입단했었고, 2015년경까지 더블 A팀에서 선수 생활을 했었다고 한다.
[1]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에도 올라가 있는 메이저 리그 최고의 흥행사이자, 쇼맨십이 뛰어났던 구단주이다. 당시 세인트 루이스 브라운스는 연이은 패배와 선수들의 해이로 인해 구단의 인기가 바닥으로 추락하고 있던 터에 구단의 얼굴(이를테면, 보스턴 레드삭스하면 베이브 루스가 떠오르 듯)이 될 만한 사람을 찾았고, 그 대상이 바로 에디 개델이었던 셈이다.[2] 여담이지만, 이 당시 개델이 입었던 유니폼은 지금은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의 구단주로 있는 윌리엄 O. 드윗 주니어가 당시 9살일 때 입었던 유니폼을 그대로 재탕한 것을 사용했다고 한다.[3] 실제로 베이브 루스의 사인보다 에디 개델의 사인이 더욱 희귀해서 비싸게 팔린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