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겁 회귀

 

1. 개요
2. 상세
3. 게오르크 짐멜(1858-1918)의 영겁회귀 반박


1. 개요


프리드리히 니체가 주장한 이론. '영겁회귀'(永劫回歸, Ewige Wiederkunft). '영원회귀'라고도 부른다. 더 정확하게는 'The Eternal Recurrence of the Same'. 즉, '''동일한 것을 영원히 반복한다'''는 것.

이 세상이 일정한 크기의 힘과 일정한 수의 힘의 중심이라고 생각한다면, 존재의 거대한 주사위놀이 속에서 계산 가능한 수의 조합들을 계속 되풀이하는 수밖에 없다. 무한의 시간 속에서 가능한 모든 경우의 조합이 빠짐없이 한 번 씩은 나타나게 될 것이고, 더 나아가 무한히 여러 차례 나타날 것이다. 그리고 각각의 '조합'과 다음 번에 그것이 '다시 되돌아오는 것(회귀)' 사이에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조합들이 일어날 수 밖에 없고, 또 그 각각의 조합마다 전체 조합들이 일어나는 순서에 있어서 똑같은 조건인 만큼, 절대적으로 동일한 순서의 순환이 입증될 수 있을 것이다.


2. 상세


니체는 《이 사람을 보라(Ecce Homo)》에서 '영원 회귀'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기본 개념' 또는 '기본 아이디어'라고 주장했다. 니체 스스로 '영원 회귀'야말로 그의 가장 중요한 생각이라고 말했었지만, 니체는 이를 더 이해하기 쉽게 풀어서 설명해 놓지는 않았다. 문맥적으로 해석해보자면, "세계의 모든 사건들은 일련의 순환을 통해 동일한 순서로 영원히 반복된다"는 아이디어이지만, 정작 니체의 텍스트만으로는 이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를 해석하기란 어렵다. 또한 니체의 책에서 영원 회귀에 대한 표현은 '가설적'이고, '극도로 상징적이고 은유적'이기 때문에, 여러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따라서 니체 사후로, 이를 밝히고자하는 수많은 학자들의 해석과 반박을 통해서 니체의 사유는 계속해서 확장되어왔으며, 이는 곧 포스트모더니즘의 역사가 되었다.
대체적으로 '영원 회귀'에 대한 해석에는 두 가지로 나뉘어진다. 하나는 '시간 또는 운명의 구조에 대한 우주론적 가설을 제시하고 있다'는 것이고, 또다른 하나는 '사고의 실존적 또는 현실적 중요성'에 대해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Nehamas는 영원회귀가 '우주론적 구조와 가설'을 말하는 것이 아니며, 자신의 삶이 좋았는지를 테스트하기 위해 고안된 실용적인 '사고 실험'이라고 주장하였다. Paul Loeb는 이러한 Nehamas의 주장에 반대하여, '사고 실험'이라는 주장에는 헛점이 있으며 영원 회귀는 우주론적 구조를 설명하는 것이라고 반박하였다. 하지만 Reginster는 Nehamas의 주장이 옳다고 다시 반박한다. 즉, 정해진 답은 없다. 굳이 설명하면 아래와 같다.
우리가 욕구하고 욕망할 때 그것을 성취하는 과정 속에서는 우리는 삶의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 하지만, 욕망을 성취하고 나면 권태가 오기 시작한다. 이는 심각한 문제인데, 특수한 것을 성취해서 일상적인 대상으로 변하면, 우리는 거기서 '신선함'을 느끼지 못하며, 지루해진다. 이 지루한 권태는, '삶이 과연 가치있는 것인가'를 회의하게 만들기 때문에, 삶은 고통속에서 허우적거릴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렇게 '일상의 지루한 반복'을 어떻게 긍정할 수 있는 것인가?에 대한 물음이 '영원 회귀'를 이해하는 주된 포인트가 될 수 있다. [1]
또는, 같은 것을 영원히 반복한다면 그것은 또한 시간이 없는 세상이다.[2] 시간이 없는 세상은 천국이다. 따라서 같은 것을 영원히 반복하는 현실의 일상이야말로 천국이다. 이렇게 일상은 이미 우리가 목표로하고 있는 '천국'이며, 따라서 우리는 내세를 목적하지 말고, 현세에 집중할 수 있다는 것. 이 또한 영원회귀를 이해하는 다른 방식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영원회귀를 사고실험으로 해석할 수 있다. 우리는 영원한 동일반복 속에서 수많은 선택의 기회를 얻게 된다. 만약 천국이었다면 단 하나의 옳은 가치만 선택할 수 있었으리라. 현실이야말로 동일 반복을 통해 삶을 새롭게 해석할 수 있는 또다른 기회가 되는 것이며, 이 기회는 우리의 현실적인 삶에서 창조의 힘으로 작용하여 우리 스스로를 긍정할 수 있게 만든다.
아니면 바로 위의 의견과는 반대로 이 삶은 단 한번뿐이고, '만약에' 똑같은 동일한 인생을 한번더 살게 된다면 지금 이 삶을 긍정할 수 있겠느냐는 가정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여기서 앞의 의견과 다른 점은 여기서 '미래는 현재에 의해서 영원히 정해진다'는 점이다. 따라서 우리는 현재를 무한 긍정할 수 밖에 없으며, 어떻게든 현재를 의미있게 살려고 노력해야되고, 여기서 도망쳐서도 안된다. 한번 뿐인 인생인 것도 모자라, 이 인생이 박제되어 동일한 인생이 영원히 반복된다면, 이 현재를 최선을 다해 살려고 노력하는 수 밖에는 없을 것이다.
또는 이때까지 논의와 다르게 '현실'만을 강조하지 않고, 현실과 이상을 동등하게 놓아 해석할 수도 있다. 이는 이미 니체가 《비극의 탄생》에서 '그리스 비극'은 '아폴론적 이성'과 '디오니소스적 광기'의 조화를 통해 우리의 생각을 고양시키고 보다더 높은 차원으로 이끈다고 말했던 것에서 착안한 것이다. 즉, '영원 회귀'에 대해서도, '이데아적 측면'과 '현상적 측면'이 서로 상존해 있다는 점을 생각해보자는 것. 그리스 비극에서 '광기'가 '이성'으로 포장되었듯이, '반복되지 않는 현실'은 '반복된 일상'이라는 추상적 개념에 포장되어있다. 우리는 이 반복을 통해 삶을 살아가지만, 또한 내면에 숨어있는 '광기'... 즉, 반복에서 벗어나고자하는 '일탈의 충동'을 통해 '반복'의 지루함을 '긍정'한다. (물론 이 일탈 역시 반복되어져 온 것이다. 하지만 내면의 충동, 반복을 벗어나고자하는 '의지' 자체는, 동일한 반복을 수행하면서도 우리들이 언제든지 꺼낼 수 있는 것이다. 동일한 반복 속에서 이 광기를 꺼내려는 의지자체가 영원한 반복을 해체하는 '일탈'이 되는 셈.)
위의 해석말고도 수많은 해석으로 영원 회귀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프로이드푸코, 들뢰즈 등의 현대철학, 심리학의 대가들도, 니체를 자기방식대로 해석함으로써 자신의 고유한 사상을 발전시켜왔다.

3. 게오르크 짐멜(1858-1918)의 영겁회귀 반박


이 반박은 기술적, 혹은 자연과학적인 수준에서 이루어진다. 크기가 같은 세개의 바퀴가 있고, 같은 축의 둘레를 회전한다고 생각해보자. 세 바퀴의 일정한 부분에 점을 찍어서 표시를 해 두고, 바퀴를 돌린다. 이 때, 두 번째 바퀴는 첫 번째 바퀴보다 두 배 빨리 회전시키고 세번째 바퀴는 1/π의 속도로 회전시킨다. 이 바퀴가 영원히 회전하면서 마찰이 없다고 가정하면, 이 세 점들은 언제 처음과 같은 위치에 올까? π가 만약 3이라면 첫번째 바퀴가 세번 회전하는 순간 같은 위치에 올 것이다. 그러나 π는 무리수이므로 이 바퀴는 영원히 같은 위치로 돌아올 수 없다. 즉, '수학적으로 결코 되풀이 될 수 없다고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세계의 상태가 적어도 하나는 존재한다'라는 결론이 나온다.

세 바퀴가 형성하는 상태는 무한하지만 시간이 무한하다면 원래 상태와 무한히 가까운 상태가 반복되는 것은 가능하다. 이는 푸앙카레의 순환정리(Poincare recurrence theorem)에 의한 것으로 사실 니체가 한 얘기와는 별 상관 없다...
사실 순환에 의한 영원이라는 개념은 니체가 처음으로 제시한 것도 아니고, 니체에게서만 발견되는 것도 아니다. 이미 고대 그리스의 아리스토텔레스가 쓴 '자연학'에서도 이와 비슷한 개념은 발견되고 있다. 또한 일본 문단에는 그럭저럭 알려져 있지만 한국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작품으로, 오귀스트 블랑키가 쓴 '천체에 의한 영원'이라는 작품도 있다. 이건 위의 반박에 대한 재반박이 되기도 한다.

우주 전체는 수많은 별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를 창조하기 위해 자연은 겨우 100종류의 원소밖에는 갖고 있지 않다. 이 자원을 훌륭하게 활용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또 이러한 자원이 자연의 번식력이 허용하는 무수히 많은 방식의 조합임에도 불구하고 결과는 그러한 원소들 자체의 수가 유한한 것처럼 필연적으로 유한하다. 따라서 자연은 넓이를 메우기 위해 원초적 조합 또는 유형이 하나하나를 무한대로 반복해야만 한다. 따라서 모든 천체는 어떠한 것이든 시간과 공간 속에서 무한한 수로 존재하는데, 그것의 한 측면에서만 그러한 것이 아니라 탄생에서 사멸까지 존속하고 있는 매초마다 그러하다. ……지구는 이러한 천체 중의 하나이다. 모든 인간은 존재하는 매초마다 영원하다. 나는 이 순간 토로 요새의 감옥 안에서 쓰고 있는 것을 영겁에 걸쳐 써오고 있으며 앞으로도 써나갈 것이다. 책상에 앉아, 펜으로, 지금과 똑같은 옷을 입고, 지금과 동일한 상황에서 말이다. 이것은 누구에게나 마찬가지이다. ……우리와 똑 닮은 사람들은 시간과 공간 속에 무수히 존재한다. 양심상 이보다 더 많은 것을 요구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들 분신들도 살과 뼈가 있으며, 바지나 외투 또는 크리놀린 스커트를 입고 머리를 묶어 올리고 있다. 이들은 결코 유령이 아니다. 영원화된 현재인 것이다.

알기 쉽게 풀어서 말하자면 이렇다. 우주는 유한한 가짓수의 원소들로 유한한 유형의 조합을 만든다[3]. 그런데 우주의 시공간은 무한하다[4]. 따라서 그러한 유한한 원소들의 조합은 무한히 반복될 수밖에 없다. 이것은 26개의 알파벳으로 문장을 만드는 것과 비슷하다. 사람들은 유한한 알파벳의 조합을 통해 무수한 문장을 만들 수 있지만, 고를 수 있는 알파벳의 수가 유한하기 때문에 모든 문장은 결국에는 반복된다. 이것이 '천체에 의한 영원'이 제시하는 기본적인 아이디어다.
물론 이것은 어디까지나 하나의 아이디어고, 과학적인 검증 등은 또 별개의 문제일 것이다.

[1] 물론 들뢰즈는 이렇게 이해하는 것을 반대한다. 이렇게 이해하는 것은 니체의 사상을 너무 단순히 보는 것이라는 것이 들뢰즈의 생각. 들뢰즈의 이러한 생각은 니체의 '동일한 것의 반복'을 넘어서서, '차이나는 것의 반복'을 말하는 근거가 되기도 한다.[2] 끊임없이 '변하는 것'이 현실세계이고, 그 속에서 '변하지 않는' 진리가 있다는 것이 이데아의 세계이다. 하지만 '동일반복의 세계'를 곰곰히 생각해보면, 그것은 결국 '변하지 않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닌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은 곧 시간이 없는 이데아의 세상인 것이다.[3] 사실 사용할 수 있는 원자의 개수가 무한하다면, 가산 무한개의 조합이 만들어지기는 한다.[4] 블랑키의 시대에는 뉴턴의 절대시간/절대공간 관념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졌고, 우주는 시간적으로도 공간적으로도 끝이 없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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