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 들뢰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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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illes Deleuze'''
'''이름'''
질 들뢰즈
Gilles Deleuze
'''출생'''
1925년 1월 18일
(프랑스 제3공화국 파리)
'''사망'''
1995년 11월 4일
'''국적'''
프랑스 [image]
'''직업'''
철학자, 작가, 문예비평가
1. 개요
2. 생애
3. 철학
3.1. 의미의 논리
4. 영향
5. 저서
5.1. 단독 저서
5.2. 공저
6.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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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들뢰즈라는 번개가 일었다. 아마도 어느 날 20세기는 들뢰즈의 시대로 불릴 것이다.'''

미셸 푸코

프랑스철학자이다. '''차이'''와 '''생성'''의 철학자로 유명하며, 헤라클레이토스, 스피노자, 니체, 베르그송 등 소위 철학사의 비주류적 계보를 탐색하고 발굴하며 그들에 대한 재해석을 통해 자신의 철학을 전개했다. 그는 철학을 넘어 과학, 수학, 회화, 영화, 문학, 건축, 지리학 등 매우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가진 동시에 후대에 영향을 끼쳤다.

2. 생애


들뢰즈는 파리의 보수적인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그의 아버지는 엔지니어이고 어머니는 가정주부였으며 형은 독일군 점령 당시 레지스탕스 활동 중 체포되어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가는 열차에서 사망했다.
10대의 들뢰즈는 파리고등사범학교 진학을 목표로 입시 준비를 했으나 실패한다. 대신 1944년 소르본 대학에 진학해 철학을 공부했으며 페르디낭 알키에, 조르주 캉길렘, 장 이폴리트 등에게서 사사했다. 이 시기 마리-마들렌느 다비가 주관하는 지식인 모임에 참석해 자크 라캉, 피에르 클로소프스키, 장 폴락 등과 교류했다. 이후 1947년, 에 관한 연구를 끝으로 대학을 졸업했으며, 이때 쓴 졸업 논문이 '경험론과 주체성: 흄에 따른 인간 본성에 관한 시론'으로 이후 1953년 책으로 출판된다. 이 책을 뒤로하고 들뢰즈는 8년간의 침묵기를 가진 채 철학사 연구에 몰두하게 된다.
이듬해인 1948년 철학 교사 자격시험을 통과하고 아미앵에서 교사 생활을 시작으로 오를레앙, 루이-르-그랑 고등학교 등 여러 학교를 전전하며 교사로 지내게 된다. 1956년에는 D.H. 로렌스의 불어 번역자이자 영미 문학 연구가인 데니스 폴 패니 그랑주앙과 결혼했으며, 이후 1960년에는 아들 줄리앙을, 1964년에는 딸 에밀리를 얻는다. 1957년에는 소르본 대학에서 철학사학 조교로 일했으며 당시 독특했던 그의 강의가 주목받았다고 한다. 1960년에는 국립과학연구소(CNRS) 연구원으로, 1964년에는 리용 대학 강사로 재직했다.
60년대 들어서 들뢰즈는 그간의 침묵을 깨고 본격적인 활동에 나선다. 독창적인 니체 해석으로 평가받는 "니체와 철학"을 비롯해 "칸트의 비판 철학", "니체", "베르그송주의", "자허마조흐 소개" 등의 저작을 부지런히 출간했고, 미셸 푸코와 교류하며 함께 학생 운동에 가담하고 니체 유고 불역본 총책임을 맡아 작업했다.
1968년, 5월 혁명이 일어난다. 정치적 격변기를 겪으며 이를 계기로 들뢰즈는 동성애자 권리와 팔레스타인 해방 운동 같은 여러 단체와 운동에 적극 참여한다. 동시에 국가 박사 학위 논문인 '차이와 반복'과 부논문인 '스피노자와 표현의 문제'을 제출한다. '차이와 반복'은 들뢰즈의 주저이자 20세기 프랑스 철학의 대표작 중 하나로 그간의 철학사 연구를 벗어나 들뢰즈 고유의 독창적인 철학을 알리는 작품이며, 이듬해 출간하는 또다른 주저 '의미의 논리'와 함께 펠릭스 가타리와의 조우 이전 들뢰즈 단독 저작 시기를 마무리하는 저서였다.
1969년, 들뢰즈는 푸코의 뒤를 이어 파리 제8대학교의 주임교수가 된다. 당시 프랑스 제8대학은 교육 개혁을 위한 지적 실험의 장이었으며, 들뢰즈는 프랑수아 샤틀레, 장 프랑수아 리오타르, 미셸 푸코, 알랭 바디우 등과 함께 이러한 실험의 앞장섰다. 정신과 의사이자 정신분석학자였던 펠릭스 가타리와 처음으로 교류한다. 가타리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공격적인 마르크스주의자였으며 들뢰즈와 만나기 이전에 '정치와 무의식', '기계적 무의식' 등의 단독 저서들을 출간한 적이 있었다. 두 사람은 편지를 통해 서로 의견을 주고받았고 이윽고 공동작업에 착수하게 된다.
1970년 '스피노자: 실천철학'을 출간한다. 1971년에는 푸코, 다니엘 드페르가 창설한 '감옥정보모임(Groupe Information Prisons: GIP)'에 가담해 활동한다. 이 모임은 당시 프랑스 감옥의 열악한 상황을 폭로하고 감옥이라는 체제가 가진 권력의 유형을 연구하는데 목적을 두었다.
이듬해인 1972년, 가타리와 함께한 공저 '안티 오이디푸스'를 출간한다. 이 책은 68혁명의 영향이 짙게 드리운 저서로 특히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을 집중적으로 비판하는데 초점을 맞추었다. 1975년에는 두 번째 공저, '카프카: 소수 문학을 위하여'를 출간한다.
1978년, 오랜 동지였던 푸코와 결별하게 된다. 주된 이유는 테러리즘의 역할과 그에 대한 각 정부에 대처 방식에 대한 정치적 견해 차였으며, 당대의 '신철학자'들에 대한 입장 차이도 한 몫을 했다고 한다. 이후 에이즈에 걸려 죽음을 목전에 둔 푸코와의 재회를 바랐으나 이뤄지진 못했다. 1984년 푸코가 사망한 이후, 푸코의 저서인 '성의 역사2: 쾌락의 활용'의 한 구절을 읽는 것으로 추도사를 대신한다.
1980년에는 가타리와의 세 번째 공저인 '천 개의 고원'을 출간한다. 전작인 '안티 오이디푸스'의 주제 의식을 확장시킨 작품이었으나 전작만큼의 대중적인 성공을 거두진 못했다. 이탈리어판 서문에서 들뢰즈도 이에 대해 '안티 오이디푸스'가 68혁명 영향 아래 있었으나, '천 개의 고원'은 천박한 양상의 침체와 무관심의 시기에 출간되었다고 평가했다.
이후 '프란시스 베이컨: 감각의 논리', '시네마 1, 운동-이미지', '시네마 2, 시간-이미지'와 같은 미학 저서들을 출간한다. 1986년에는 푸코에 대해 다룬 '푸코'를 출간한다. 이 책에서 들뢰즈는 푸코에 대한 철학적, 학문적인 의미에서 뿐만 아니라 푸코에 대한 존경 때문에 책을 저술했다고 밝힌다.
1987년, 교수직을 은퇴한 후 저술 활동에 몰두하며 '주름. 라이프니츠와 바로크', '페리클레스와 베르디. 프랑수아 샤틀레의 철학', 그리고 가타리와의 마지막 공저 '철학이란 무엇인가?'를 연이어 출간한다. 1992년 가타리가 사망하고 이듬해에 들뢰즈 역시 건강이 악화된다. 젊은 시절 폐 수술을 받은 전적이 있었음에도 지독한 골초였고 이 때문에 말년에는 폐암으로 고통받게 된다.
1995년 생전 마지막 글인 '내재성: 하나의 삶...'을 기고하고, 같은 해 11월 4일 자신의 아파트에서 스스로 호흡기를 뗀 후 투신 자살한다.

3. 철학


  • 차이와 동일성 - 들뢰즈는 차이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새로운 관점을 제시했다고 볼 수 있다. 들뢰즈에 따르면 기존의 철학(그리고 아마도 우리의 사고형식)은 진정한 차이 - 즉 '차이 그 자체'-를 발견해 내지 못하였다. 차이 그 자체가 의미하는 바는 동일성의 형식에 종속되지 않은 차이라는 점이다. 우리의 일반적인 사고에서 우리는 차이를 A와 B를 통해서 생각한다. 즉 차이란 A와 B 사이의 어떤 다른 점이다. 이런 맥락에서라면 우리는 어떤 동일한 것 A와 어떤 동일한 것 B를 통해서만이 차이를 생각하게 된다. 어떤 A와 B가 있기에 그로부터 차이가 나오게 되는 것이다. 물론 엄밀하게 말한다면 B가 필요하지도 않다. 왜냐하면 A와 거리만 있어도 B가 유추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마 동일한 것 A는 우리의 통념상 '신'과 같은 것이라고 말해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 (개인적으로 생각한 예:신-인간-동물-무생물로 이어지는 위계;항구적이고 동일한 신이 있었고 그로부터 다른 것들이 파생되었다. 신이 차이를 만들었다. 차이는 신의 창조물인 것이다.) 그러나 아마 들뢰즈는 '신이 죽었다'라는 니체의 격언을 따라서 이를 해체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래서 들뢰즈가 구분하는 것은 개념적 차이와 차이 그 자체이다. 그가 해명하고 싶은 것은 결국 신이 없는 창조라고 생각된다. 차이 그 자체는 차이는 차이화하는 차이인 것이다. 즉 차이를 만든다. 그러나 차이 그 자체는 신이 되어서는 안된다. 다시 말해 차이 그 자체는 어떠한 동일성의 형식도 가지고 있어서는 안된다. 차이를 만들면서 그 자체는 아무런 동일성도 가지고 있지 않은 것. 조금만 생각해보면 이는 일견 모순되는 것으로 들린다. 왜냐하면 차이 그 자체를 '차이를 만드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에 그친다면 '차이를 만드는 것'이라는 신적이고 동일하고 항구적인 어떤 것으로 생각하게 되기 때문이다. 즉 동일성에 종속되지 않는 진정한 차이를 규명하는 일은 그 '동일성에 종속되지 않는 차이'라는 표어가 단순한 것에서 비하면 길고 긴 모험을 거쳐서 다시 도달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이 글을 쓰는 나는 그것이 어떤 길들을 지나치는지를 모르기에 잘 아는 분이 있다면 보충해 주기를 바란다.(#이 부분은 엄밀하게 검증된 내용이 아님)(상기 설에 따른다면, 동일성이라는 것을 정의하는 것 자체가 신을 정의하는 작업과 동치이기에 무의미하다.)
  • 차이와 반복 -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들뢰즈가 동일성을 넘어서기 위해서 제시하는 것이 반복이라고 느껴진다. 즉 차이는 동일성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반복에 의존한다. 물론 여기서 반복에 '의존'한다는 표현은 아주 잘못되었다. 왜냐하면 차이와 반복은 깊은 층위에서는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물론 어떻게 같은지는 아직 알지 못한다.) 아마 추측해 보건데 들뢰즈의 철학이 일의성의 철학으로 나아간다면 차이와 반복을 하나의 존재라고 말할 수 밖에 없는 것은 필연적이다. 일의성의 철학이란 존재란 하나의 의미에서 말해진다는 뜻으로 생각된다. 예를 들어서 '차이가 있다'라고 말하고 '반복이 있다'라고 말할 때 여기서 '있다'는 같은 의미로 사용된다는 것이다. 모든 있음은 같은 의미에서 사용된다. 그런데 이는 우리의 일상적인 사고에서는 이해하기 힘들다. 예를 들어서 '저기 고양이가 있다'라고 말할 때 '있다'는 '고양이의 존재'를 말하고 '저기 강아지가 있다'라고 말할 때 '있다'는 '강아지의 존재'를 말한다고 보통 우리는 생각한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묻게 될 것이다. '고양이의 존재'와 '강아지의 존재'가 같은가? 같지 않다. 그렇다면 '저기 고양이가 있다'와 '저기 강아지가 있다'라고 말할 때 '있다'의 의미는 다르지 않은가? 어떻게 '강아지의 있음'과 '고양이의 있음'이 같다고 말하는가? 물론 우리의 일상적인 사고에서 '있다'의 같음을 이해하는 방식이 있긴 하다. 지칭하는 대상이 같을 때이다. 예를 들어서 'Table이 있다'와 '책상이 있다'라고 할 때 우리는 'Table의 있음'과 '책상의 있음'이 같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들뢰즈가 말한 존재의 일의성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일단 이해를 쉽게 하기 위해서 한 가지 우회로를 거치고자 한다. 일단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생각할 수 있다. '강아지'를 말할 때 우리는 세상의 여타 다른 것들과 '강아지'를 구분해서 말한다. 그렇다면 실상 우리가 '강아지'라고 말할 때 우리는 '강아지가 아닌 것들' 역시도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강아지'라고 말할 때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것은 '강아지'와 '강아지가 아닌 것들'이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고양이'라고 말할 때 우리는 '고양이가 아닌 것들'에 대한 이해도 갖고 있기에 우리가 이해하는 것은 '고양이'와 '고양이가 아닌 것들'이다. 그래서 아주 단일하게 말하면 '강아지가 있다'라고 말할 때 '있다'가 함축하는 것은 '강아지의 존재'+'강아지가 아닌 것들의 존재'이며 반대로 '고양이가 있다'라고 말할 때 있다가 함축하는 것은 '고양이의 존재'+'고양이가 아닌 것들의 존재'이다. 그런데 '강아지의 존재'와 '강아지가 아닌 것들의 존재'를 더하면 전체존재가 되며 '고양이의 존재'의 존재와 '고양이가 아닌 것들의 존재'를 더하면 전체존재가 나온다. 다. 논리적으로 쓴다면 (A)+(~A)= 전체가 나온다. (물론 논란의 여지가 아주 큰 주장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식의 주장이 다음으로 나아갈 길은 명료하다. '강아지가 있다'고 할 때도 전체존재를 의미하고 '고양이가 있다'라고 할 떄도 전체 존재를 의미한다. 즉 '있다'는 '항상 전체 존재에 대해서 말해지는 것이다'라는 것이다. 요약하자면 A라고 말할 때 이미 ~A도 동시에 말해지는 것이라면 말해지는 것은 A+~A이며 A+~A는 항상 전체로 귀결되기 때문에 A의 자리에 '강아지', '고양이' 혹은 아무 것이나 넣어도 말해지는 것은 전체존재라는 것이다. 이런 식의 논리를 따른다면 A가 있다고 말하든 B가 있다고 말하든 항상 동일한 전체존재가 지칭되는 것이다.
그러나 들뢰즈가 말하는 존재의 일의성은 위와 같은 방식으로는 절대 이해될 수 없다. (들뢰즈는 너무 모르고 헤겔은 너무 너무 모르지만 헤겔이라면 저런 것과 비스무리하게 연결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들뢰즈는 많은 부분 헤겔에 반대된다는 것이 통설로 알고 있다.) 왜냐하면 들뢰즈에 의하면 존재 속에서 부정적인 것은 없기 때문이다. 들뢰즈는 존재 속에 대립도 없으며 모순도 없다고 말한다. 그렇기에 들뢰즈의 존재 안에는 ~A 같은 것은 없다. 더 나아가 들뢰즈는 존재가 차이 그 자체, 차이화하는 차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A 뿐만 아니라 A조차도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A야 말로 가장 형식적인 동일성의 표현이니 말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들뢰즈가 어떻게 존재의 일의성과 차이를 같이 성립할 수 있게 만드는가에 있다. 다시 말해 '하나의 존재'를 말하면서 어떻게 그 '하나의 존재'의 동일성은 배제하는가이다. 그렇다면 결국 문제는 돌고 돌아 처음으로 돌아다. '차이'가 어떻게 '동일성'에 종속되지 않는가? 더 나아가 그럼에도 '차이가 어떻게 한 가지 존재를 말하는가?
그래서 들뢰즈가 사용한 전략은 차원을 구분하는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서 우리가 앞에 있는 모니터를 본다고 해보자. 이차원적으로 모니터를 표현, 즉 그림을 그린다고 생각해 보자. 우리는 3차원의 모니터를 2차원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런 후에 모니터의 그림의 특정 부분에 같은 크기로 원을 두 개 그려보라. 그렇다면 질문은 이렇다. 두 원의 크기가 같은가? 물론 두 원의 면적은 같다. 그런데 그 원이 쳐져 있는 부분의 부피가 같은지를 생각해보라. 원으로 표시한 부분의 모니터의 두께가 두껍다면 부피가 더 클것이고 모니터의 두께가 얇다면 부피가 더 작을 것이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사실이 도출된다. 2차원에서 원은 같은 크기이다. 그러나 3차원에서 원의 부피는 같지 않다. 다시 말해서 2차원에서 보이는 부분이 동일하다고 해서 3차원에서 동일한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2차원에서 동일한 것은 사실이다. 즉 원은 (2차원에서) 동일하고 (3차원에서) 동일하지 않다. 그러나 만약에 우리가 이러한 시점차이를 잘 구분 하지 못한다면 때 원은 동일하면서 동일하지 않다는 것을 모순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그리고 논쟁의 방향은 이상한 곳으로 흘러 모순이 가능하냐 불가능하냐를 두고 싸우게 된다. 그러나 한 차원 높은 곳에서 바라본다면 모순따위는 없는 것이다. 그러한 모순은 우리의 무지의 결과이다.
어찌되었든 이러한 차원을 구분한다면 차이와 동일성의 관계에 대해서 이해할 여지가 생긴다. 쉽게 정식으로 말하자면 '깊은 차원에서 차이가 있으며 낮은 차원에서 동일성은 차이의 효과로써 나타난다'이다. 이는 역학적으로 이해되어야 하는데 차이가 더 깊은 차원이라고 부를 수 있는 명목이 있다면 그것은 차이는 능동적이며 동일성은 수동적으로 차이에 의해서 드러나는 효과일 뿐이기 때문이다. 차이는 오로지 차이만을 생성할 뿐인데 거기에서 동일성이 효과로써 나타난다는 것이다. 즉 들뢰즈에 따르면 '존재'라는 것은 차이들의 생성이고 모든 있다라는 것은 '차이들의 생성'을 의미할 뿐이다. 왜냐하면 '차이들의 생성'이라는 능동적인 힘이 없었다면 아무것도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강아지가 있다' 이건 '고양이가 있다' 이건 그것이 있을 수 있는 것은 차이들의 생성이 있기 때문이다. 즉 내 생각에는 들뢰즈가 존재의 일의성을 말할 때 그것은 역학적인 관점에서 받아들여 져야 될 것 같다. 맞는지 모르겠지만 '모든 존재는 차이의 힘으로부터 나오며 그렇기에 역학적 관점에서 존재란 차이일 뿐이다'라고 정식화할 수 있지 않을까? 아마 역학적 관점은 세계를 설명하는 것에 있어서 더욱 적합할 것이다. 오히려 기존의 철학과 지금의 어떤 철학들은 역학, 작용, 수동-능동을 잊고 있는 것이 아닐까?
앞서 쓴 글이 맞는 말인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맞는 말이라고 해도 아직 해명되지 못한 것이 있다. 동일성이 차이의 힘의 효과이고 그래서 모든 존재가 한 가지 의미로 말해지는 것이 사실이라고 한다면 우리가 경험하는 수많은 동일성은 어떻게 설명되어야 하는가이다. 즉 차이가 그렇게 본래적인 힘이라면 우리는 왜 동일성을 통해서 자신과 세계를 이해하는가가 설명되어야 한다. 즉 동일성과 순수 차이가 다른 차원이고 심지어 차이가 능동적이고 동일성이 수동적인 것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동일성을 통해서 경험을 하는가가 설명되어야 한다. 그래서 들뢰즈의 철학은 재현의 위상을 떨어뜨리고 감각의 위상을 높이는 것일까?(잘 모르겠다.) 즉 다시 말해 동일성이라는 것은 우리의 개념적인 사고에서만 존재한다는 것이다. 개념적이지 않은 즉자적인 감각에 동일성은 결여되어 있지 않을까? 예를 들어서 '고통'이란 개념말고 우리가 실제로 느끼는 진짜 고통이란 감각에 동일성이 있을까? 물론 동일성이 있으니 우리가 서로 소통가능한 '고통'이란 개념을 갖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 상식적이다. 그래서 결국 돌고 돌아 다시 동일성이 선행하지 않는가하는 문제로 돌아왔다. 차이의 우위를 도대체 무엇으로 확증할 것인가? (스피노자는 모든 일의 원인을 신이라고 말한다. 마치 들뢰즈가 모든 것은 차이의 힘의 효과라고 말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우리가 경험하는 개별자들은 어떻게 설명해야하는가가 문제로 남는다. 신이라면 신이 세계를 만들었다는 것이 왜 이렇게 세계를 만들었는지를 설명해주지는 않는다. 물론 신을 믿는 어떤 사람이라면 신의 전선함을 근거로 이게 가장 좋은 세계니까라고 사유를 댈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스피노자에게서 좋은 것은 최대의 힘이었던 걸로 알고 있다. 그리고 최대의 힘이란 가장 많은 것들을 창조해내는 것이다. 그래서 이 세계는 신이 최대한으로 구현해 낸 그런 세계이다. 이는 선과 악이라기 보다는 순수질량의 문제일지도 모른다. 가장 많은 양이 최선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스피노자를 좋아했던 들뢰즈로에게서 차이는 가장 많은 것들을 만드는 방식으로 세계를 구성해냈고 우리의 경험은 그러한 조건에 따라서 종속된 것일까? 그래서 모든 것은 필연이고 우리에게 자유는 없는 것일까?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스피노자가 자유를 말했듯이 들뢰즈도 우연을 긍정한다.)
그래서 반복이란 것이 아마 차이의 구현을 말해줄 것이다. 세계가 이렇게 실현되는 바로 그 까닭을 설명해 줄 개념(혹은 이념)이 반복이 아닐까? 즉 차이의 힘이 구현되는 방식을 설명해줄 키워드가 반복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그리고 역시 반복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잘 모르겠다.(쓰고보니 제대로 알고 쓰지 않았다는 것을 스스로 느끼며 언젠가 제대로 수정되기를 바란다.)
위의 내용들을 굉장히 길게 썼지만 차이와 반복의 구도에 대해서 들뢰즈는 내재성과 리좀적 증식 등으로 그저 일원화된, 그러면서도 비체화된 혼효면적인 존재론을 펼친다. 들뢰즈는 라캉적 개념을 일부 들여왔다가 폐기시키고 정신분석의 친족적 삼각형에 대한 과감한 비판들로 유명한 안티-오이디푸스의 유명한 첫 문장 역시 슈레버의 태양의 항문, 즉 편집증 환자에 대한 서술이 있다. 들뢰즈는 정신분석학, 라캉의 비-주체성을 대타자적 개념이 아닌 나의 방향으로 선회시킨 것에 가깝다. 이러한 태도에서 들뢰즈가 차원을 구분하기 보다는 멜라니 클라인이나 라캉적 개념에서의 '증환', 환상의 이후인 증환(결국에는 라캉은 증환 이후의 전에서 끝나기에, 라캉 혹은 프로이트적 태도들은 시간-이미지 등이 거짓역량이더라도, 의미와 논리의 잠재태들은 사건 그 자체라는 것을 이야기하게 되는 철학적 도구로서만 사용된 이후 철저히 폐기된다.) 을 말하며 소녀가 커가면서 욕망들을 가지며 무엇이 되고 싶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들뢰즈의 페미니즘 등은 사실상 이러한 태도에서 파생되는 것이고 ...들뢰즈는 이러한 리좀적 증식에서 모든 것이 잠재태로서, 의미와 논리의
준-원인적 태도로서 나아가는 태도에 대해서(준-원인은
그저 비체적 태도이지 주체적 태도가 아니다. 지젝은 이를 주체적 태도로서 파악하며 들뢰즈를 파시스트적 태도라고 비판하기도..이로 인해 지젝은 안티 오이디푸스를 인정하지는 않지만 이게 비체적이라는 한에서 이해된다면 안티 오이디푸스는 더없이 훌륭한 들뢰즈의 저서다.) 시간-이미지가 기억을 재현하지 않고 감각적으로 나아가는 것과 같은 태도에는 베르그송의 므니모시네에 대한 변주 이외에도 시간은 그저 흘러간다는 비체적
태도를 동반하기도 하고..정신분석학적 언어는 들뢰즈 철학 전반에서 꽤나 중요하게 사용된다. 의미와 논리의 시간성과 잠재태들에 대한 태도는 결국 정신분석학적 언어들이다. 이는 후술된 시간론에서 나타난다. 아무튼 들뢰즈는 차이와 반복을 위해서 내재성이라는 개념을 도입하는데 이러한 이중삼중 무장된 이론의 중심부인 내재성은 들뢰즈 스스로 1995년의 텍스트에서 찰스 디킨스의 죽어가는 건달에 대해 언급하며 다른 사람에 대한 대타자적인 이해들처럼 라캉적 증환 이후의 호모-아르투스적 태도를 이야기하는, 차이와 반복에 대한 도구이자 동시에 차이와 반복을 도구로 이용하는 다소 귀족주의적 태도이다. 차이와 반복에서 내재성이라는 이름으로 일자화되고 비체적인 존재론 안에 그 개념을 통속시켜 버린다. 차이들은 리좀적 증식으로 잠재태로서, 여러 철학들에 대한 들뢰즈의 변주로서 생성되지만 반복은 정신분석학적 언어에 대한 변주로서 잠재태로서
반복되며 지속적으로 쌓여나가며 증식되는 태도로서 파악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를 설명해버리는 데우스-엑스 마키나적 존재인 내재성에 대한 귀족주의성은 바디우 등이 이전부터 비판한 기호에 대한 소피스트적 태도를 보이기도 하며 애초에 마르코프 체인에 대한 해석이나 언어학적 태도가 아닌, 가령 제임스 조이스의 <사자>라는 소설에서 "관리인의 딸 릴리는 문자그대로 바빴다."라는 포괄적 분리에 대한 구문론적 태도들이 아닌 스스로 시네마와 의미와 논리에서 지속적으로 구축해놓은 사건-그 자체로서 파악하는 태도라는 정치적이고 사밀적으로 보일 수 있는 태도이다. 들뢰즈의 개념에서 차이와 반복이 우위선상에 서있을 필요는 없다. 스스로 ABC라는 대담에서 소수가 다수 위에 존재한다는 말을 했을 정도로 그의 철학들은 여러가지 변주에서 시작되어 결국 지루한 변증으로 나아갈 수 있는 존재론에 대한 태도로 귀결되기에..

  • 시간론 - 들뢰즈는 시간론적 층위에서 시간을 층위로서 나누고 그 층위를 다시 포개는 과정에서 시간을 얻는다 말하는데 이 내재성이 죽음욕동을 일으키는 자아의 나르키소스적인 태도가 자아 내부에 타자와 같은 소임을 하는 타자성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는 이러한 차이의 강도에서 절대적인 내재성을 내재성의 평면이라는 의미로서 타자성과 같이 차이의 분출에서, 차이를 생성하고 그리고 존재의 일자를 말하게 한다. 그는 비물질적/사물의 흐름의 구분 없는 생성을 말한 철학자로서 들뢰즈는 내재성을 통해 카오스가 아닌 '카오스모스'를 규정한다.
  • 잠재화와 이미지- 들뢰즈는 영화에 관해서도 무지하게 많은 영향을 끼친 철학자이다. 그는 이미지를 통한 주체의 시뮬라크르적임을 이야기하는데 역시 내재성의 평면이라는 공허에서 분출되는 잠재화-이미지를 통해 존재-일자의 변형과도 같은 주체의 시뮬라크르적임을 이야기한다. 내재성의 평면이라는 이 이미지를 서로를 환원하는 '긍정'이고 여러 겹이기도 하다. 전체적으로 들뢰즈가 사유를 이야기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들뢰즈는 생성되는 사유를 내재성의 평면으로 본 것이다.
들뢰즈는 이미지나 존재의 일의성을 규정할 때 잠재화적인 부분에서 그저 내재성의 평면을 이야기했다며 귀족주의적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하지만 그는 적어도 일관적인 이미지-잠재화와 생성과 같은 이론을 동일하게 주장했고 그는 개체화에서 차이의 강도에서의 이원론적인 주체를 이야기하지 않고 내재성의 평면으로 존재-일자성을 이야기했다. '''그가 긍정,생성의 철학자로 불리는 까닭이다.'''

3.1. 의미의 논리


1969년 발간한 들뢰즈의 저서
의미의 논리의 핵심구도는 의미의 발생이라는 문제이다.
들뢰즈는 기존의 의미에 대한 해석 세 가지를 모두 비판한다.
1.의미는 지시작용이다. - 의미란 지시된 바의 사태이다. 예를 들어 A가 B를 사랑한다의 의미는 A가 B를 사랑하는 현실적인 그 사태를 지시한다.
2.의미는 현시작용이다. - 의미란 주체의 상태를 통해서 나타난다. 예를 들어 A가 B를 사랑한다는 의미는 A의 내적인 감정, 의욕 욕망 등을 통해서 드러난다.
3.의미는 기호작용이다. - 의미란 개념들의 연관을 통해서 나타난다. 예를 들어 A가 B를 사랑한다는 의미는 A가 B를 많이 생각한다. A는 B를 위해서 희생할 수 있다 등 다른 개념과의 연관을 통해서 드러난다.
들뢰즈가 세 가지 이론을 비판하는 이유는 세 가지 이론이 서로를 전제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세 가지 이론은 순환한다. 그래서 한 가지가 최종적인 근거가 되지 못하는 것이다. 지시는 현시를 전제하고 현시는 기호작용을 전제하며 기호작용은 지시를 전제한다는 식이다.(정확히는 기억이 안난다.) 어찌되었든 들뢰즈는 이 세가지 모두를 동시에 가능하게 하는 층위를 도입할 필요가 있지 않냐고 묻는다. 네번째 담론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 네 번째 담론은 의미에 관한 담론이고 그것이 의미의 논리를 끌고 나가는 긴 이야기의 시작이다.
그렇다면 의미의 층위는 어떻게 규명되어야 하는가? 의미의 논리에서의 들뢰즈의 유명한 삼 분할 이론이 나온다. 들뢰즈에 의하면 우리의 세계는 세 가지 구분해서 파악할 수 있다. 상층, 표면, 심층
상층 - 상층은 양식과 상식이 지배하는 곳이다. 잘 분배된 세계 속에서 동일성을 가진 주체가 의미작용을 한다. 여기서 의미작용이란 지시, 현시, 기호작용을 뜻한다. 상층이 우리가 일상적으로 거주하는 세계이며 우리는 여기서 일상적이고 상식적인 의미작용을 한다. 예를 들어서 이것은 컵이다, 나는 기분이 나쁘다, H2o는 물을 뜻한다 등.
표면 - 왜 안정적인 상층을 떠나서 표면을 발견해야 하는가? 왜냐하면 상층의 의미작용은 실존한다는 것은 분명하나 그것의 원리 혹은 발생의 근거를 상층에서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좀 더 깊게 들어가야 한다. 들뢰즈는 표면을 특이성들의 장소로 삼고 특이성에서 우리의 일상적인 인식 및 의미부여 작용의 발생을 탐구한다. 특이성이란 사건이다. 사건이란 동사인데 예를 들어서 '푸르러지다'라는 동사-사건-특이성이 있으면 이를 통해서 나무가 나온다. 그리고 나무는 '푸르다'라는 술어를 갖게 된다. 이것이 특이성에서 개체의 발생이며 의미의 효과화의 첫번째 층위이다. 효과화의 두번째 층위는 인칭의 발생이다. 인칭은 여러 세계에 공통된 것이다. 예를 들어서 A가 있다고 할 때 A가 사랑에 성공한 세계가 있고 실패한 세계가 있다고 해보자. 이 때 우리는 두 세계의 A 모두 동일한 A라고 생각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개체의 경우 사랑에 실패한 것은 A이고 성공한 것은 A`이기 때문에 둘은 동일하지 않다. 그러나 인칭의 경우 여러 세계에서 A는 동일한 무엇이다. 들뢰즈는 인칭이 발생할 수 있는 조건으로 세계의 여백에는 객관적으로 미규정인 영역이 공통적으로 있다는 것을 든다. 다시 말해서 모든 세계에는 여백인 무의미가 발생적 원리로, 들뢰즈의 용어대로라면 우발점으로 존속, 재속하기 때문에 그 누구도 아닌 인칭이 모든 세계에 공통적이라는 것이다.
심층

4. 영향



5. 저서



5.1. 단독 저서


  • 경험주의와 주체성 (Empirisme et subjectivité) (1953)
  • 니체와 철학 (Nietzsche et la philosophie) (1962)
  • 칸트의 비판철학 (La philosophie critique de Kant) (1963)
  • 프루스트와 기호들 (Proust et les signes) (1964)
  • 니체 (Nietzsche) (1965)
  • 베르그송주의(Le Bergsonisme) (1966)
  • 자허마조흐 소개 (Présentation de Sacher-Masoch) (1867)
  • 차이와 반복 (Différence et répétition) (1968)
  • 스피노자와 표현의 문제 (Spinoza et le problème de l'expression) (1968)
  • 의미의 논리 (Logique du sens) (1969)
  • 스피노자: 실천 철학 (Spinoza : Philosophie pratique) (1970)
  • 프란시스 베이컨: 감각의 논리 (Francis Bacon. Logique de la sensation) (1981)
  • 시네마 이미지-운동 (Cinéma I : L'image-mouvement) (1983)
  • 시네마 이미지-시간 (Cinéma II : L'image-temps) (1985)
  • 푸코 (Foucault) (1986)
  • 주름: 라이프니츠와 바로크 (Le pli : Leibniz et le baroque) (1988)
  • 페리클레스와 베르디: 프랑수아 샤틀레의 철학 (Périclès et Verdi: La philosophie de Francois Châtelet) (1988)
  • 대담 (Pourparlers) (1990)
  • 비평과 진단 (Critique et clinique) (1993)

5.2. 공저


  • 안티-오이디푸스 (Capitalisme et Schizophrénie 1. L'Anti-Œdipe) (1972)[1]
  • 카프카: 소수문학을 위하여 (Kafka: Pour une Littérature Mineure ) (1975)[2]
  • 디알로그 (Dialogues) (1977)[3]
  • 중첩 (Superpositions ) (1978) [4]
  • 천개의 고원 (Capitalisme et Schizophrénie 2. Mille Plateaux) (1980)[5]
  • 철학이란 무엇인가? (Qu'est-ce que la philosophie?) (1991)

6. 기타


푸코, 데리다와 함께 포스트모더니즘 철학 및 현대 프랑스 철학의 대표자로 자주 꼽히는 사람이다. 셋 중에서 두드러지는 특징이라면 들뢰즈가 가장 전통적인 의미의 철학자에 가깝다는 것. 푸코는 철학자이면서도 동시에 사회학자로 더 잘 알려져있고, 데리다가 문예비평과 비교문학 분야에서 더 주요하게 다루어진다면, 들뢰즈는 스피노자와 니체에 대한 주석 및 해설로 유명하다.

[1] 펠릭스 가타리와 공저[2] 펠릭스 가타리와 공저[3] 클레르 파르네와 공저[4] 카르멜로 베네와 공저[5] 펠릭스 가타리와 공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