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복영

 


성명
오복영(吳福泳)
이명
오성국(吳聖國)·오보영(吳甫泳)
본관
해주 오씨[1]
생몰
1889년 1월 27일 ~ 1963년 8월 3일
출생지
경기도 안성군 양성면 덕봉리[2]
사망지
경기도 안성군
추서
건국훈장 애족장
1. 개요
2. 생애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오복영은 1889년 1월 27일 경기도 안성군 양성면 덕봉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19년 4월 1일 최은식(崔殷植)·홍창섭(洪昌燮)·이유석(李裕奭) 등이 주동이 되어 전개한 안성시 양성면, 원곡면 일대의 독립만세시위에 참여했다. 그는 이날 저녁에 동리에서 독립만세를 외친 뒤, 이희봉(李熙鳳)·김영하(金永夏) 등과 양성면으로 행진하여, 오후 9시경 동항리(東恒里)에 있는 경찰 주재소에 도착하였다. 이곳에서 1천여 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독립만세시위를 벌이고, 해산하여 돌아가던 길에 원곡면장을 선두에 세우고 횃불을 들고 행진해 오던 1천여 명의 원곡면의 시위군중과 합세하여 다시 주재소로 행진하였다.
이리하여 2천 명으로 불어난 군중은 오후 10시경 경찰 주재소 앞에 도착했다. 오복영은 군중과 함께 태극기를 휘두르며 독립만세를 외치고, 주재소와 숙직실을 불태웠다. 이후 양성 우편소로 가서 그곳의 기물과 건물을 파괴, 방화했고, 일본인 토자 토요테(外里與手)가 경영하는 잡화점과 일본인 고리대금업자 타카 히데토모(隆秀知)의 집을 파괴했다. 그 다음엔 양성면 사무소로 가서 서류의 기물을 파괴하고 군중과 함께 뒷산에 올라 독립만세를 외치고 해산했다.
얼마 후 경찰에 체포된 그는 1921년 1월 22일 경성복심법원에서 보안법 위반, 건조물 소훼, 소요 혐의로 징역 3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고향에서 조용히 지내다가 1973년 3월 8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오복영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1] 24세 영(泳) 항렬.[2] 해주 오씨 집성촌이다. 독립유공자 오세경·오세학·오용근·오윤선·오정근·오창문·오창선·오홍근이 이 마을 출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