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산 전투

 



1. 개요
2. 전투 전 상황
3. 전투 경과
4. 여담


1. 개요


북한군이 남진이 한창인 1950년 7월 5일 미 24사단 21연대 1대대(스미스 특수임무부대, 속칭 스미스 부대)가 경기 오산시 죽미령에서 북한군을 상대한 전투로, 고개 이름을 따 '오산 죽미령 전투'로도 불린다.

2. 전투 전 상황


한반도의 정세가 일촉즉발이 되자 미국 대통령 트루먼은 6월 30일 극동군 사령관 맥아더에게 지상군 투입과 38선 이북의 군사 목표를 폭격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고, 이에 일본에 주둔중인 미 24사단 21연대 1대대가 7월 1일 부산에 도착해 북한군이 남진중인 경부국도로 북상하였다.

3. 전투 경과


7월 5일 새벽 3시 오산 북방 죽미령에 도착한 스미스 대대는 일대에 B, C 중대에게 진지공사를 시킨 뒤 75미리 무반동총 4정, 4.2인치 박격포 4문도 배치했고, 이를 미 52포병대대가 지원하기로 했다. 이 무렵 이들은 북한군이 자신들을 보면 '미군이 참전했다' 며 물러설 것이라는 낙관적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오전 7시경 쏟아지는 비 속에서 이들은 수원 부근에서 북한군을 목격했고, 이후 8시경 북한군 4사단 보병들과 107전차연대 전차(T-34)들이 이들이 있는 곳으로 몰려오기 시작했다. 이에 관측장교가 포격 요청을 해 오전 8시 16~18분 경 포탄 두발이 선두 전차를 향해 떨어졌다. 하지만 전차들은 이에 개의치 않았고, 이에 스미스 중령은 적 전차가 700 야드 내에 들어오자 무반동총과 로켓포를 집중적으로 쏘아댔고, 미군 포병들도 직사포격해 이를 지원했다. 이 과정에서 선두 전차 2대가 멈추었고, 이 중 한대에서 튀어나온 승무원들이 미군과 교전했는데, 이들 중 한명이 미군 기관총 부사수를 쏴죽였다.[1] 하지만 후속 전차들은 이들을 무시하고 남진했으며, 이렇게 총 33대의 전차가 미군 방어선 밑으로 내려갔다.
이 와중에 진지 내의 미군들은 여전히 "아마 저 친구들이 우리들을 못봤기에 지나갔지, 미군이 왔다는 걸 알면 되돌아 갈 것이다." 는 희망 속에서 후방의 포병에게 적 탱크가 우리 진지를 지나갔다고 알려 주었다.[2] 하지만 포병들도 이 전차들을 감당할 수 없었고, 이 중 한대의 궤도를 파괴해 멈춰세우긴 했으나, 안에서 튀어나온 승무원들에 의해 밀러 O. 페리 미 52포병대대장이 다리에 총상을 입는다.
오전 11시경 북한 4사단의 주력이 전차 3대와 함께 죽미령 방향으로 내려오고 있었고, 이에 미군들은 박격포와 기관총을 선두 트럭에 집중해 트럭 안의 보병들을 살상시켰다. 그러나 뒤따라오던 전차 3대가 가세해 3시간 가량 교전한다. 하지만 후방의 포병대로부터 아무런 응답이 없고,[3] 탄약까지 고갈되자 스미스 대대장은 오후 2시 30분 경 C중대부터 황급히 철수시켰으나, 워낙 다급하게 진행된 탓에 B중대는 철수 명령을 듣지 못했으며, 전장에 남겨진 낙오자와 부상병들은 그대로 북한군들에게 전사했다.
한편 스미스 중령은 포병대대장과 합류, 패주병들을 수습했으나, 남쪽 오산 시내가 점령당한 걸 알고 안성을 거쳐 7월 6일 천안까지 내려갔으며, 이 과정에서 보병 540명 중 150여 명, 포병 31여 명이 전사하거나 실종되었다. 북한군 역시 약 5,000명 중 150여 명이 전사하거나 실종되었다. 그리고 미군의 참전으로 북한군이 진격을 멈추리란 맥아더와 딘 미 24사단장의 기대 또한 이 전투로 깨어지게 되었다.
또한 남쪽의 미 34연대와 상급부대인 미 24사단은 이들로부터 연락이 두절되자 어떻게 되었는지 전혀 알지 못했으며, 그 다음날 6일 잔존병들에게 전해듣고서야 상황을 알게 되었으며, 곧바로 평택-안성 전투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4. 여담


  • 이 당시 미 24사단은 2차 세계대전 후 군축의 영향으로 우리의 향토사단 수준으로 쪼그라든 상태였고, 스미스 대대 역시 완편 상태가 아닌 B, C중대 두 개 중대만 있었다.#
  • 게다가 이들은 개전 초기 국군 내 미 고문단과 마찬가지로 대전차 로켓을 너무 과신했고,[4] 이는 이 전투의 패배에 한 몫을 했다.#
  • 오산 죽미령 전투는 미국 육군사관학교의 스테인드 글라스에 기록되어 있다.
이 스테인드 글라스는 역사적으로 미군에게 교훈을 주는 전투들이 기록되어 있다.
[1] 이는 한국전쟁 최초의 미군 전사자다.[2] 하지만 이 희망도 후속 전투에서 북한군들이 미군임을 알고도 쏴재낌으로서 깨어진다.[3] 사실 이는 앞서 지나가던 선두 전차들이 전화선을 뭉개고 가는 바람에 끊어진 것이다.[4] 정확히 말하면 경사장갑 때문에 신관이 작동하지 않고 그대로 미끄러지거나 부족한 관통력 때문에 뚫지 못했다. 참고로 t-34의 전면장갑은 정면에서 봤을때 80~90mm 수준이라 바주카로는 간당간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