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택-안성 전투

 



1. 개요
2. 전투 전 상황
3. 전투 경과
4. 여담


1. 개요


오산 전투가 개시된 1950년 7월 5일부터 7월 6일까지 미 24사단이 평택과 안성 일대에서 전개한 지연전.

2. 전투 전 상황


7월 1일 오전 3시 미 24사단 선발대인 21연대 1대대(스미스 특수임무부대, 속칭 스미스 부대)가 부산 수영 비행장에 도착했으며, 이후 7월 4일 후속 도착한 사단의 주력이 대전으로 진출하였다.
한편 미 24사단장 윌리엄 F. 딘(William F. Dean) 소장은 스미스 부대를 오산 죽미령으로 보낼 때까지만 해도 북한군의 전력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으며, 스미스 부대가 저들을 지연시킬 동안 34연대를 안성-평택선에 전개하면 적의 남진을 충분히 막아낼 수 있으리라 판단했다.
7월 4일 오후 미 34연대 1대대가 연대의 선발대로 먼저 대전에 도착하자, 딘 사단장은 이들에게 스미스 부대의 철수를 엄호 및 수용하라는 임무를 부여한 뒤 평택으로 먼저 올려보냈다.
7월 5일 새벽 3대대와 연대본부도 후속 도착했으며, 34연대장 제이 B. 러브리스(Lovless)대령은 1대대는 이미 평택으로 향했다는 소식과 함께 3대대는 안성으로 보낼 것, 연대 지휘소는 성환에 설치할 것을 지시받는다. 그리고 병력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3대대 L중대는 연대 예비로서 성환 연대본부에 잔류하게 된다.

3. 전투 경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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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자료
7월 5일 오전 5시 헤럴드 B. 에이리스(Ayres) 중령의 미 34연대 1대대는 평택으로 진출해 국도변의 민가에 지휘소를 개설하고 A, B 중대를 4km 전방에, C중대를 예비로 두었다. 그리고 이 무렵 조지 B. 바스(George B. Barth) 준장이 사령관 대리(정황상 부사단장)로 찾아와서는 오산 죽미령의 상황을 전달하면서 "곧 적의 전차가 들이닥치니 전방 경계를 강화하며 로켓포를 추진 배치하라"고 명령한다. 이에 예비인 C중대 1개 소대를 차출해 2.36인치 로켓포를 주고 찰스 E. 페이에(Charles E. Payne)중위의 지휘 하에 차량으로 추진시키는 한편 A중대에게도 대전차 차단진지를 구축하게 만든다.
이후 페이에 중위는 서정리 부근에서 전차가 선회한 자국을 발견했고, 뒤이어 말을 탄 한국군이 남쪽으로 내려오며 "전차다! 전차! 물러가라!" 를 외치는 걸 목격한다. 직후 북방 1.5km 지점에서 전차를 발견하고 로켓포를 쏘았으나 별 피해를 주지 못했고, 이 과정에서 샤드릭 일등병이 전차 기관총에 맞아 전사했다.
한편 미 24사단 내에선 오산의 스미스 부대와 계속 연락이 안되는 것에 불안해 했고[1] 이에 딘 사단장도 이날 밤 평택의 34연대로 향했으나, 가장 가까운 아이레스 대대에서도 이들의 행방을 모르긴 매한가지였다. 게다가 적 전차가 서정리까지 왔다는 보고에 "그렇다면 스미스 애들은 어떻게 된 거지?" 하고 물었지만 그 뒤에도 아무런 소식은 들려오지 않았다.
7월 6일 오전 1시 딘 소장은 대전 지휘소로 돌아오면서 저들이 너무 앞에 있어서 전멸했다고 짐작한다. 그리고 얼마 뒤 스미스 부대의 낙오병들이 아이레스 대대로 남하하며 오산 쪽의 상황을 알려주었으며, 안성 방어선에도 52포병대대장 페리 중령이 도착함으로서 오산이 뚫렸다는 게 확실시됐다. 이에 아이레스 대대장은 부하들에게 "현 위치를 고수하되, 스미스 부대처럼 포위당해 궤멸당하진 마라"며 지침을 하달했다.
그러나 이 와중에 바스 준장은 러브리스 34연대장에게 평택의 1대대가 교전 직전이라며 연대를 천안 부근까지 철수하라고 명령했다. 비록 딘 사단장으로부터 직접 얘기를 듣지 못했고, 그것만으로 철수할 이유가 되는지 알 수 없었지만 이에 항명할 수도 없었다. 이에 러브리스 연대장은 연대 예비로 둔 L 중대에게 평택 남쪽의 고지를 점령시켜 전방 배치된 1대대의 철수를 엄호하며 함께 철수하도록 조치시킨다. 그리고는 아이레스 대대장에게도 "바스 준장께서 평택-안성선을 포기하라 하였으니, 철수 시기는 대대장이 알아서 하라"고 지시한다.
아침이 될 무렵 아이레스 1대대장은 A중대 지휘소가 있는 고지로 향했는데, 이 무렵 전차 13대가 안개 속에서 나타나 조그만 교량이 끊긴 걸 보고 멈춰섰다. 그리고는 전차 위에 타고 있던 보병들이 하차해 도섭하기 시작했는데, 이에 아이레스 대대장은 박격포 사격을 지시한다. 그러나 포격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살상하는데 실패했으며, 전방 관측병까지 전차포 폭발로 공황상태가 되어 후속 포격도 불가능했다.
오전 9시 아이레스 대대는 지휘소를 철수해 L 중대의 엄호 속에 퇴각하는 작업에 착수했다.[2] 이후 일선 중대 모두가 평택 이남으로 내려오자 한국 교량폭파조가 평택 통복천 교량을 폭파했고, 천안으로 철수하는 과정에서 스미스 부대 잔존병들과도 합류했다.
오후 천안으로 물러난 이들은 바스 준장의 명령대로 스미스 부대 잔존병들은 국도 동쪽, 아이레스 대대는 서쪽을 맡아 방어선을 형성했고, 이 뒤로 3대대와 연대 본부를 위치시켰다. 그 뒤에도 스미스 부대의 잔존병들은 계속해서 천안으로 몰려들었고, 이에 딘 사단장은 전멸한 줄 알았던 스미스 부대의 피해가 의외로 경미한 걸 파악하게 된다.[3]
오후 4시 딘 사단장은 34연대장 러브리스 대령으로부터 "평택-안성선을 포기했다"는 보고를 수신받고 '대체 왜 안성천을 두고 방어선을 형성하지 않았는지' 짚차를 타고 63km나 떨어진 천안으로 향했다. 그리고는 "대체 누가 평택에서 철수해도 좋다 했는가?" 하며 책상을 내리쳤는데, 잠시 뒤 아이레스 1대대장이 "제가 책임을 지겠습니다" 라고 말했다. 직후 딘 사단장은 이 연대를 평택으로 돌려보낼까 생각했으나 야음 속에서 기습당할 우려가 있어 러브리스 대령에게 내일 일출 후 중대 하나를 북진시키고, 별도의 명령이 있을 때까지 현 위치를 고수하라고 명령한 뒤 대전 지휘소로 돌아갔다. 바스 준장 역시 본 소속인 미 25사단으로 돌아갔으며, 그 다음날인 7월 7일부터 천안 전투가 시작된다.

4. 여담


  • 이 전투가 시작되기 전날인 7월 4일 아군 오사 사건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호주군으로 추정되는 유엔 공군기가 평택 성동초등학교 쪽으로 날아와 기총사격을 가한 뒤 시내 간선도로와 군수물자가 산적해 있는 평택역에도 집중 폭격을 가한 사건으로, 이 과정에서 폭발물을 실은 차량이 폭발해 폭심지 1km 이내에 있던 사람들이 사상당했다. 심지어 수원 신병훈련소에 입대해 후송 중이던 장병들도 여기에 휘말렸으며 대략 101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1] 이는 오산 전투 초반 남하하던 전차들이 전화선을 뭉갰고, 또 민간인으로 위장한 게릴라들이 곳곳에서 전화선을 절단한 것도 이유가 됐다.[2] 하지만 대대원들은 철수 과정에서 멋대로 대열을 벗어나 장비, 탄약, 옷을 버려 무게를 줄이려 했고, 이는 L 중대도 마찬가지라 엄호 도중 아무 보고 없이 멋대로 천안으로 철수해 버렸다.[3] 하지만 이들이 상대한 전차가 T-34란 것은 천안 전투가 본격화된 8일 때까지 모르고 있었던 듯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