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송회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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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전개
2.1. 시집에서 시작된 사건
2.2. 고문으로 완성된 조작
2.3. 사건 이후
3. 참고 자료


1. 개요


1982년, 공안당국이 군산 지역의 고등학교 교사들을 반국가단체 구성 혐의로 몰아 처벌한 허위 조작 사건

2. 전개



2.1. 시집에서 시작된 사건


1980년대 초 군산제일고등학교에 다니던 교사들은 조그마한 모임을 하나 가지고 있었다. 여기서 교사들은 시국에 대해서 토론하기도 하고 4.195.18에서 희생된 사람들을 추모하는 행사를 간략하게 하기도 했다. 또 시집 등 여러 권의 책들을 서로 돌려보곤 했다. 이들이 보던 책 중에는 월북시인 오장환의 시집 <병든 서울> 필사본이 있었다. 모임에 있던 교사 중 한 명이었던 이광웅은 이 책을 또 다른 교사 박정석이 복사하도록 했다. 헌데 이 복사한 필사본을 박정석의 제자가 빌려갔다가 버스에 놓고 가는 일이 발생했다.
버스에 홀로 놓여진 필사본을 본 버스안내양이 신고를 하는 바람에 경찰은 수사를 시작했고 모임을 가지던 교사들은 모두 체포되었다. 처음에 수사를 한 경찰은 시집 복사본을 가진 사람이 국어교사라는 점을 알고는 가볍게 처리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성과에 급급하던 경찰은 '''이 사건을 부풀려 이들이 반국가단체를 조직하여 활동했다는 엄청난 죄목을 갖다붙인다.'''

2.2. 고문으로 완성된 조작


"4.19 정신을 본받아 의로운 일이 무엇인가 생각해보고 그것을 실천할 수 있는 사람이 되자." - 이광웅

"일상에 연연하여 사회정의와 양심에 따르지 못하고 우물쭈물 살고 있는 내가 부끄럽다." - 박정석

"약하고 용기 없이 살아왔다." - 전성원

"한 일도 없고 하고 싶은 일도 못하고 살아온 비겁한 삶이었다. - 황윤태

"살아남을 권리도 없는 비겁한 놈이었다. - 이옥렬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 사건은 그 목적이 미국에 경종을 울리기 위한 것일 뿐 공산주의자의 행동은 아니다."

"농민들이 저곡가에 시달린다."

"북한에도 지하철이 있다."

"빈익빈 부익부야말로 우리나라의 구조적 문제다."

"월남자유중국의 패망은 그 정권의 비민주성과 부정부패 때문이었다."

당시 교사들이 모임에서 한 말[2]

하지만 그들의 죄목은 터무니없었다. 검찰 공소장에 적힌 교사들의 말은 4.19와 5.18에 대한 존경심, 그리고 그 때 희생된 사람들처럼 용기 있게 살지 못함에 대한 죄책감과 부끄러움에서부터 나온 것이었다. 게다가 정작 북한을 옹호하거나 대한민국을 부정하는 말은 하나도 없었다. 그리고 시국에 대한 대부분의 말은 사회에 대한 건전한 비판의식에서 나온 것이나 사실 확인에 불과했다. 즉, '''반국가단체 결성과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
그런데도 경찰은 막무가내로 이들을 반국가행위자로 몰았다. 그들이 소위 ''''오송회(五松會)''''[3]이라는 이름으로 반국가단체를 결성하고 북한과 연결되어 간첩행위를 했다는 것이었다. 이런 혐의를 붙이기 위해 고문이 자행되었다.

1982년 11월 2일, 전주 대공분실 지하로 끌려가, 얼굴에 칼자국으로 보이는 흉터를 가진 신갑생이라는 고문기술자 등으로부터 '''육신과 영혼을 갈가리 찢기는 체험을 겪었다.''' 통닭고문, 전기고문, 물고문을 무려 40일간이나 반복하여 받았다. 그들이 결백을 주장하면 할수록, 그 때마다 고문의 강도는 높아갔다.

사건 피해자 박정석의 증언

경찰에 의해 잡혀온 8명의 교사(이광웅, 박정석, 전성원, 황윤태, 이옥렬, 채규구, 엄택수, 강상기)들은 대공분실과 여인숙 등에 불법으로 감금되어 고문을 당했다. 또 경찰은 현직 교사는 물론이고 전직 교사이자 KBS 남원방송총국 부장이었던 조성용을 끌어들여 그를 '수괴'로 조작했다. 잡혀온 교사들과 그저 친분이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도 경찰에게 잡혀와 다른 교사들처럼 불법 구금되어 고문을 당했다.
게다가, 시집을 가지고 온 제자 등 관련학생 4명도 끌려와 경찰서에서 폭행을 당했다. 이 학생들은 자기 학교 선생님들이 하지도 않은 '이적행위'를 고발해야 했다. 이들 중 하나는 법정에까지 끌려나와 검찰 측 증인으로 서서 선생님들에게 불리한 증언을 하기도 했다.[4]
경찰은 이들을 고문하면서 북한과의 관계를 계속 캐물었다. 체포된 전현직 교사들과 북한과의 연결고리를 만들기 위해 경찰은 전남운동권의 중요한 인물이자 당시 5.18로 인해 수배 중이던 윤한봉을 여기에 끌여들었다. 마침 이광웅이 옛날에 윤한봉을 만난 적이 있는지라 경찰은 이것을 통해 이광웅에게 윤한봉의 지시를 받았다는 자백을 받아내려고 했다. 그러나 후에 윤한봉이 미국으로 망명한 사실이 밝혀지자 '''사실관계가 맞지 않는다며 자기들이 만든 시나리오를 바꾸는(...) 추태'''를 벌이기도 했다.
결국 이들은 반국가단체를 결성한 혐의로 법정에 섰다. 교사들은 고문 사실을 밝혔지만 전주지방법원에서 열린 1심 재판에서는 9명 중 3명이 징역형을 받고 6명은 선고유예를 받았다. 교사들은 이 형량도 인정할 수 없다며 항소했다. 당시 전두환은 이 오송회 사건을 예로 들며 "사회 불안, 정치 불안요소에는 과감히 대처하라" 면서 대법원장 및 대법원 판사들을 불러 질책을 했고 그 뒤에 광주고등법원에서 열린 2심 재판에서 이재화 판사는 "잘못을 뉘우치는 기색도 없이 변명만 한다"며 9명 모두에게 더 높은 형량을 선고했으며 상고 후의 3심도 2심의 형을 그대로 확정하면서 관련자 9명 전원 법정 구속되었다. #

2.3. 사건 이후


이 사건으로 관련자 교사들은 억울한 형을 받아야 했고 군산제일고는 교장, 교감이 파면되었을 뿐 아니라 전북지역의 교육청 직원들도 적지 않은 수가 징계를 받아야 했다. 한편 이 사건으로 수감되었다가 풀려난 교사 이광웅은 1992년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사건이 발생한 지 25년이 지나고 2007년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가 이 사건을 조사하여 이 사건이 무리하게 조사하여 억울한 사람을 처벌했다는 결론을 냈으며, 다시 1년이 흐른 2008년에는 재심이 이루어져 '''사건 관련자 9명에게 모두 무죄를 선고'''했다.# 주심이었던 이한주 부장판사가 피고인들에게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통해 사죄했다.

법원에 가면 진실이 밝혀지겠지 하는 기대감이 무너졌을 때 여러분이 느꼈을 좌절감과 사법부에 대한 원망, 억울한 옥살이로 인한 심적 고통 등에 대해 많은 고민을 했다. 그동안의 고통에 대해 법원을 대신해 머리 숙여 사죄드린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재판부는 좌로도, 우로도 흐르지 않는 보편적 정의를 추구하겠다. 어떤 정치권력이나 이익단체로부터도 간섭받지 않고 오로지 국민의 자유와 재산을 보호하는 책무에 충실할 것을 다짐한다.

2010년에는 국가가 피해자에게 207억여원을 배상하라는 판결도 나왔다.#

3. 참고 자료


그 시절 그 사건 - 오송회 사건
[오송회와 이광웅] 진실과 정의는 너무 늦다
오송회 교사를 '고발'한 제자들
[1] 이 사건으로 구속된 전현직 교사 9명의 사진이다.[2] 이 말들은 검찰 공소장에서 '모의 내용(!)'의 일부로 나와 있다.[3] 이 이름을 붙인 의미는 '소나무 밑에서 5명의 교사가 모였다'는 뜻이다.[4] 나중에 이 사건의 재심에서 그 학생은 "워낙 겁에 질려서 검사가 하라는 대로 했습니다. 저는 죄인입니다. 고개를 들 수가 없습니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