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미국문화원 방화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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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당시 사진. 위에 부산타워성조기가 보인다.
현재의 모습. 성조기는 태극기로 대체됐다.
영어 : Busan American Cultural Service building arson, 1982 Busan arson attack or Busan American Council Fire Accidents
1. 개요
2. 배경 및 전개
3. 체포와 그 이후
4. 여담
5. 유사 사례
6. 참고/외부 자료


1. 개요


1982년 3월 18일에 부산 지역 대학생들이 부산광역시 중구 대청로 104 (대청동2가)에 있는 당시 부산 미국 문화원(현 부산근대역사관)에 불을 지른 방화사건으로, 줄여서 '부미방 사건'이라 한다.

2. 배경 및 전개


1980년 5.18 민주화운동의 강경 진압을 미국이 묵인함으로써 운동권 내에서 반미 정서가 폭발하게 된다. 그리고 광주 미국문화원 방화 사건이 터졌고, 여기에 영향을 받은 부산지역 대학생들도 똑같은 사건을 계획한다. 당시 참여자는 부산대학교 재학생 최인순, 류승렬, 부산여자대학교(현 신라대학교) 재학생 김지희, 고신대학교 재학생 문부식, 김은숙, 이미옥 등이다.
이들은 1982년 3월 18일 낮 12시경 문화원 문을 준비된 공구로 뜯어내고 준비된 휘발유로 불을 지르고 다른 팀은 동시에 국도극장 및 유나백화점 건물 위에서 <미국은 더 이상 한국을 속국으로 만들지 말고 이 땅에서 물러가라>라는 제목으로 수백 장의 유인물을 살포했다. 이 유인물은 일본 쓰시마 섬까지 날아갔다고 한다.
미국인 피해자는 없었고 문화원 내 도서관에서 공부 중이던 동아대학교 재학생 장모 군이 질식해 숨졌다. 지나친 반미 감정으로 무고한 피해자가 발생했다는 점에서 운동권을 비판하는 여론이 커졌고 5.18 때문에 일어났다는 것은 당시 어디에도 언급되지 않았다. 조선일보는 사설 <누구를 위한 방화인가>에서 해당 사건을 '민족적 수치'라 규정했고, 중앙일보도 사설에서 "반공과 친미는 헌법 이상의 국민적 합의이다"라고 맹비난했다. 심지어 현장검증 중에도 구경꾼들은 관련자들을 향해 "저놈들 죽여라"나 "죽일 놈들"이라고 온갖 욕설을 쏟아냈다.
처음에는 북한테러로 추정했으나 좌익 운동권 대학생들의 반미 목적의 행동이였다는데서 당시 사회에 엄청난 충격을 줬다. 게다가 1980년대 시대가 시대라 이런 '흉악범죄'가 여학생들이 주축이 되었다는 점이 더 충격이었다고 한다. 사실 광주문화원 방화는 당시엔 잘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실제 대중들에겐 이 부미방 사건이 한국전쟁 이후 대한민국에서 반미 정서가 대대적으로 보도된 거의 최초의 사건이다.
그러나 관련자였던 문부식은 대한매일의 주간지 <뉴스피플> 1999년 4월 8일자에서 해당 사건은 "부미방은 영웅적 행위도, 좌경 불순세력의 무모한 반역행위도 아닌, 5공 정권이 주도한 거짓의 역사를 지탱하는 부역의 대열에서 이탈하고자 한 당대 젊은이들의 움직임 중 하나였으며 미국을 싫어해서 저지른 게 아니라 군부독재정권을 지원하고 특수/종속적 한미관계를 지속하려는 미국은 진정한 우방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다"며 "광주학살에 대한 미국과 신군부의 공모행위에 대한 역사적 책임을 밝혀야 한다"는 식으로 심경을 밝혔다.

3. 체포와 그 이후


사건이 터지자 5공 정권은 관련 학생에 대해 현상금 3천만 원을 걸며 수배령을 내렸고 전국 각지 주민들도 반상회를 열어 관련자들을 경찰에 신고하도록 했다. 결국 4월 1일 문부식과 김은숙이 자수했고 뒤이어 이미옥, 유정렬, 이창복 등이 전단지 살포 및 방화 혐의로 검거되었다. 동월 5일에 김현장[1]이 배후조종 혐의로 체포되었고, 가톨릭 원주교육원장 최기식 신부도 범인 은닉혐의로 같이 연행되었다. 관련자들이 다닌 대학 역시 문교부에 의해 관련학생 담당 지도교수 및 학과장, 학장 및 학생처장에 대한 경고장과 징계 요구를 시달받았으며, 지도교수들은 징계처분을 받았다.[2]
관련자들은 국보법 및 집시법 위반으로 법정에서 전원 실형선고를 받았는데, 특히 문부식과 김현장은 1983년 사형이 확정됐으나[3] 1주일 후 무기징역과 20년 형으로 각각 감형되었다가 1988년에 석방되었다.
그러나 문부식은 1989년 '한미문제연구소 사건'으로 2년여 간 복역한 후 저술활동을 해왔고, 전술한 한 학생의 죽음으로 죄의식이 형성되어 민주화운동 보상 신청을 하지 않았다. 김현장은 석방 후 이듬해 결혼한 뒤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 결성에 참여해서 국제협력국장을 맡으며 이철규 의문사 사건 관련 성명서 등을 냈다는 이유로 구속되어 7년형을 선고받고 1993년에 가석방됐으나, 1997년 15대 대선 때 이회창, 2007년 17대 대선후보 경선 때 박근혜를 각각 지지하면서 서서히 보수 인사가 되어갔다. 2013년 박근혜 정권 출범 후 국민대통합위원회 위원, 한국광물자원공사 상임감사위원 등을 지냈다.
김은숙은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가 1987년 석방 후 야학 운동을 하며 1993년 <노둣돌>에서 '김백리'란 필명으로 '갇힌 자의 순례'로 등단해 작가 생활을 하다가 2011년 5월 24일에 암 투병 중 세상을 떠났다.
사건 후 미국문화원 건물은 1996년 폐관되어 영사관으로 쓰다가 1999년 미국이 부산광역시에 기증하고 리모델링을 거쳐 부산박물관 산하 부산근대역사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4. 여담



5. 유사 사례



6. 참고/외부 자료


[1] 1950년 전남 강진군 유지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6.25전쟁으로 집안이 가난해져 젊은 시절 대학을 다니며 온갖 직종을 전전하다 르포작가로 전직해 월간 <대화> 1977년 8월호에 박흥숙 사건의 진상을 특종으로 보도했고 이후 <뿌리깊은 나무> 지에 기생관광 등 유신정권기 사회문제들을 심층적으로 다뤘다. 1980년 5.18 당시 <전두환의 광주살육작전>이란 유인물을 배포했다가 수배되어 강원도 원주 가톨릭교육원으로 은신했다.[2] 원 출처: <국가폭력: 민주주의 투쟁, 그리고 희생> - 조희연 편. 함께읽는책. 2002. p198.[3] 상고심 당시 대법원 판사 중엔 이회창이 있었고, 관련자들의 변론은 황인철 변호사가 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