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천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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吳天錫
1901~1987
1. 개요
2. 일생


1. 개요


교원, 교육 행정가, 교육 철학자. 특히 국립 서울대학교 창설과 6-3-3-4제의 채택 등 정부 수립 초기 대한민국 교육 행정에 큰 영향을 미쳤다.

2. 일생


1901년 평안남도 강서군 함종면에서 목사 오기선(吳基善)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현대식 소학교를 세우고 교장이 되었다가 독립협회신민회에 가담하여 독립운동에 참여하였으며, 서울로 올라가 감리교신학교에서 수학하여 목사가 되었다.
부친의 임지(任地)인 일본 동경으로 가 청산학원 중학부를 졸업하고 1919년 인천 영화여학교에 초등학교 교사로 취임하였다. 이후 미국에 유학하여 코넬대학교에서 학사학위, 노스웨스턴 대학교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하였고, 1931년 콜럼비아 대학교에서 `민족 동화 수단으로서의 교육 : 한국에 대한 일본의 교육 정책 연구`로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그는 이 글에서 일본의 식민 정책이 우리 민족을 동화하기 위하여 교육을 어떤 수단으로 사용하였는가를 폭로하였고, 일본의 교육정책 뿐 아니라 영국, 프랑스 등의 식민지 교육 정책도 다루었다.
1932년 귀국하여 1936년까지 보성전문학교 교수로 재직하면서 영어, 철학개론, 심리학개론 등을 가르쳤다. 후에 그는 백낙준 등 몇몇 미국 유학 동지들과 함께 영자신문 The Korea Times를 발간하였고 그러던 중 미군정 교육 책임자 락카아드 대위의 초청을 받는다. 군정의 문교차장(1945~1947), 문교부장(1947~1948)을 역임하면서 문을 닫았던 학교의 개교, 한글 교과서의 제작 및 배포, 국립 서울대학교 창설, 교육 심의회 구성, 6-3-3-4제의 채택, 그리고 새교육운동의 추진 등의 활동을 하였다.
1950년 대한교육연합회 회장, 1955년 한국교육학회 회장, 그리고 이화여대 대학원장으로 취임하여 교육일선에서 활동하였다. 1960년 제2공화국의 문교부장관으로 다시 임명되어 재임 8개월 동안 교육의 민주화 추진, 교육대학신설, 향토학교운동의 전개, 교과서 개편 등의 활동을 하였다.
5.16 군사정변 이후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 미국 일리노이, 피바디 대학 등에서 비교교육학 강의를 하였고 이후 1964년부터 3년간 주멕시코 대사를 역임한 것을 마지막으로 공직생활을 마치고 <민족중흥과 교육>, <한국신교육사>, <교육철학신강>, <발전한국의 교육이념탐구> 등의 저술을 남겼으며, 1987년 타계하였다.
한국에 노란 리본 이야기를 소개한 인물이기도 하여, 오랫동안 이 이야기를 오천석이 지은 줄 알았다는 후문이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