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6 군사정변

 






'''5·16 군사정변'''
五一六軍事政變 | 5·16 Military Coup d'état

[image]
5월 17일, 정변의 성공을 알리는 조선일보 기사.[한글해석]
'''일시'''
1961년 5월 16일 새벽
'''장소'''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원인'''
박정희를 위시한 정변 세력의 권력 찬탈 의도
'''교전군'''
'''대한민국 국군 (진압군)'''
'''군사혁명위원회 (반란군)'''
'''지휘관'''
윤보선 대통령
장면 국무총리
현석호 국방장관
장도영 육군참모총장
이태희 검찰총장
카터 매그루더 미군 사령관
이한림 제1군 사령관 중장
강영훈 육군사관학교 교장 중장
<^|1>'''박정희 육군 소장'''
김종필 예비역 육군중령[1]
차지철 제1공수특전단 대위
전두환 서울대학교 훈육장교 대위
정봉옥 준장
김신 공군 중장
채명신 준장 등
'''병력'''
<^|1>육군본부
제3야전군사령부
헌병대
약 200여명[2]+ 야전군[3]수도기계화보병사단
제6군관구사령부
33사단
30사단
6군단 포병대 5개 대대
제1공수특전단
해병대 제1여단 약 3000여명[4]
'''피해'''
'''사상자 없음'''
'''사상자 없음'''
'''결과'''
정변 성공, 국회 해산
'''군사혁명위원회 삼권 완전 장악'''
'''영향'''
제2공화국의 몰락과 국가재건최고회의의 등장

당시 대한뉴스 보도[5]
1. 개요
2. 배경
2.1. 끊임없는 정치 불안
2.1.1. 사회의 방종
2.1.2. 급진 좌익 세력의 대두
2.1.2.1. 전후 군부의 대두
3. 박정희 개인의 상황
7. 여담
8.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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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61년 5월 16일박정희 소장을 비롯한 대한민국 육군 장교들이 일으킨 '''정변'''. 제2공화국은 출범 9개월 만에 무너졌고, 박정희를 수반으로 하는 국가재건최고회의가 등장하였다.
당시 국군에는 이승만 정권 때부터 군의 부정부패와 비리, 승진가도 중단에 불만을 품고 4.19 혁명 이후 정군 운동을 벌여 미국과 충돌했던 일군의 장교 세력들이 있었다. 육군소장 박정희[6]와 1961년 2월 강제 예편당한 김종필[7]을 비롯한 육군사관학교 8기생[8]을 중심으로 한 장교들은 이로 인해 1961년 5월 말 강제 예편이 예정되었고, 이에 비밀리에 기획하게 된다.
정변 세력들은 예비사단 병력과 포병단, 해병대공수특전단 등을 동원하여 1961년 5월 16일 새벽 서울을 비롯 대구시, 부산시 등의 방송국 등 주요 시설을 무력으로 점거하였다. 이들은 주한미군주한미국대사관의 공식적인 반대 성명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 육군참모총장 장도영과 통수권자 대통령 윤보선을 회유함으로써 국무총리 장면을 사퇴시키고 봉기 60여시간 끝에 제2공화국을 무너뜨려 행정부, 국회, 대법원의 역할을 포함한 대한민국의 전권을 군사혁명위원회로 가져온다.
이튿날 아침 박정희군사혁명위원회장도영을 의장으로 하고 자신을 부의장으로 하는 국가재건최고회의로 개편하였으며, 1962년 12월 31일까지 전국의 모든 정치인 활동을 일체 불법화하고 언론 사전 검열을 실시함은 물론 정기 간행물 1,200여 종을 모두 폐간시킨 뒤 2년 반 가량 군정을 실시했다.
예전에는 이 사건이 군사혁명(보수계 세력), 군사반란(진보계 세력), 군사정변을 비롯한 여러 이름으로 통했다. 5.16 주체세력이 정권을 잡고서부터 6월 항쟁 이전까지는 '''5.16 군사혁명'''으로[9] ,민주화 후로는 '''5.16 군사정변'''이 공식 표현으로 자리잡았다.

2. 배경


수천년동안 신분제도가 이어지던 신생국이 1948년 제헌 헌법으로 민주주의를 도입하고 겨우 12년만에 시민 혁명으로 정권을 몰아내고 국민의 선택으로 선출된 정부가 불과 1년만에 군사 쿠데타가 발생하여 정권이 이어진것은 매우 의아하게 바라보지만 이것은 여러 복잡한 배경이 있었다.
1960년4.19 혁명으로 4월 27일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하자, 대한민국 정부는 당시 외무부 장관이던 허정을 수반으로 하는 과도 내각으로 구성되었다. 이승만 대통령이 물러난 상황에서 부통령이 대통령 권한을 대행해야 했지만 부통령 장면은 대통령의 하야를 촉구하기 위해 4월 23일 이미 사퇴한 상황이었고,[10] 그 다음 대행 순서는 외무부 장관[11]이 1순위였기 때문에 허정이 대통령 권한대행이 된 것이다.
허정 내각은 사회 혼란을 수습하고 각계각층의 의견을 수렴하는 개혁 정책을 펼치고자 했으나, 허정은 궁극적으로 이승만의 사람이었고, 허정 내각이 스스로 내걸었던 '''혁명적 정치개혁을 비혁명적 방법으로 단행한다'''는 슬로건과 같이 개혁은 급격하고 신속하게 이루어지기 보다는 점진적이고 완만하게 이루어졌으며, 어디까지나 이승만의 하야와 국무위원들의 일괄 사직으로 발생한 정부 공백 상태를 일시적으로 해소하기 위해 임시적으로 구성된 과도정부라는 한계가 있었기에, 허정 내각은 사방팔방에서 터져나오는 국민들의 요구에 제대로 부응할 수 없었다.
이후 다시 치러진 총선 결과에 따라 윤보선 대통령, 장면 총리와 민주당이 장악한 의회를 중심으로 제2공화국이 성립되었지만 여전히 사회는 혼란스러웠고 설상가상으로 집권여당민주당의 신, 구파간 갈등이 더 심해졌다.[12] 10여 년 동안 억눌려 온 요구들을 쏟아내는 데모도 연일 끊이지 않았다.. 이후 다시 치러진 총선 결과에 따라 윤보선 대통령, 장면 총리와 민주당이 장악한 의회를 중심으로 제2공화국이 성립되었지만 여전히 사회는 혼란스러웠고 설상가상으로 집권여당민주당의 신파, 구파 간의 갈등이 더 심해졌다.[13] 10여 년 동안 억눌려 온 요구들을 쏟아내는 데모도 연일 끊이지 않았다. 이때 오죽하면 데모를 하지 말자는 데모도 나왔다는 주장도 있다.
한편 당시 육군 장교들의 사정을 보자면, 6.25 전쟁 이후 조직이 비대해지고 그 결과 인사적체가 발생하면서 승진이 막혀버린 '''육사 8기생''' 등 중견 장교들의 불만이 극심했다. 즉, 그 앞 기수들까지는 육군의 비대화 과정에서 대령 이상으로 빠르게 진급했으나, 8기부터 확장에 제동이 걸리며 진급이 적체되어 대령을 못 단 중령들이 대량으로 발생했다. 가령, 당시 대한민국 육군참모총장이던 장도영은 20대에 사단장, 30대에 참모총장이 되었으나 불과 3살 연하의 김종필은 만년 중령 신세였다.
이 시기의 군인들은 질적으로는 한국에서 가장 우수한 시스템에서 커리어를 쌓았지만 대접 자체는 매우 박해서 군인 월급으로 일가족이 건사하기가 어려웠다. 때문에 부정부패, 물자 횡령과 뇌물이 오가는 암담한 상황이었고 뜻있는 청년 장교들이라면 불만과 좌절을 느낄 수밖에 없던 상황이었다.[14]
거기다 6.25 전쟁을 거치며 미군식 행정 시스템에 속해 있던 당시 군인들은 훨씬 뒤떨어진 일제강점기 행정 업무 능력을 가진 당대 정치인이나 공직자들의 삽질에 불만도 많은 편이었다. 4.19 혁명으로 인해 계엄령이 선포되자 대민/대관 업무에 파견된 장교들은 공무원들의 일처리를 보면서 혀를 내둘렀다고 한다. 1953년 기준 대한민국 전체의 미국 민간 유학생이 7백명이 좀 안되는데, 미국으로 유학간 장교들은 1천에 육박한다. 한 마디로 민간 정치인들과 일반 공무원들의 행정 시스템과 업무 처리 능력이 당대 군인들에 비해서 현저히 낮았다는 것이 중론이다.

2.1. 끊임없는 정치 불안


1960년4.19 혁명으로 4월 26일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하자, 대한민국 정부는 당시 외무부 장관이던 허정을 수반으로 하는 과도 내각으로 구성되었다. 1960년 6월에 국회는 의원내각제로 정부형태를 바꾸는 헌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내각제는 이승만정부에 대항해 온 민주당(1955년)이 처음부터 고수해 온 당론이었다. 민주당은 이승만의 권위주의정치를 비판해왔는데 4.19는 민주당에게 이들이 주장해 온 정치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였다. 새로운 국회에서 지배 정당이 된 민주당 내부에는 구파와 신파의 대립이 있었다. 그들은 무소속 당선자를 자파에 영입하기 위한 경쟁을 벌이고 그해 8월 민주당 구파에 속하던 윤보선을 대통령으로 선출하였다. 윤보선 대통령은 김도연을 국무총리로 지명했으나 국회에서 1표 차이로 인준을 받지 못하고 부득이하게 신파에 속하던 장면을 국무총리에 임명하였고 국회는 아주 근소한 차이로 인준하였다. 장면총리는 국무위원들을 신파 일색으로 구성하였는데, 이는 구파의 큰 반발을 초래하였다. 이후 두 당파는 서로를 근본적으로 불신하였고 신민당(1960년)을 별도로 창당하였다. 2공화국은 10개월 동안 무려 세 차례나 개각을 거듭하였다. 국무위원들은 업무를 제대로 파악하기도 전에 다른 사람으로 교체되기 일쑤였다. 게다가 윤보선은 상징적인 국가원수에만 머물려 하지 않았다. 헌법은 대통령이 정당에 속할 수 없다고 했지만 그는 민주당 내에 남아있는 구파나 신민당의 이해를 대변하였고 헌법을 개정하는 과정에서 즉흥적으로 발의된 이 애매한 규정은 대통령과 총리가 사사건건 대립하는 역할을 하였다. 이렇듯 각료자리를 둘러싼 2공화국의 국정운영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으며 훗날 5.16이 성공하는 주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제2공화국은 자신이 만든 헌법이지만 정파간의 갈등이지만 스스로 실천하지 못했던 본의 아니게 헌법질서를 훼손하였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2.1.1. 사회의 방종


일부에선, 이승만 정부가 무너지고 자연스럽게 민주화라는 과도기라는 단순한 사회적 혼란으로 평가절하 하지만 10개월간의 기간을 살펴보면 전혀 그렇지 않다. 4.19혁명 이후 한국사회는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끝도 없는 시위의 물결로 가득했다. 장면정부 10개월동안 가두데모는 총 2000여건, 데모에 참가한 100만여 명에 달하였다. 매일 평균 7~8건의 데모가 발생한 셈이다. 국민학생들은 교사의 전근을 반대하는 시위를 하거나 어른들은 시위를 그만하라는 시위까지 발생하였다. 경찰국회의원이 뺨을 때렸다고 시위를 하였고, 육군훈련소훈련병들은 장교가 하대를 한다며 시위를 하였다. 이것을 부추긴 것은 무책임한 언론들이었다. 국회는 언론의 무제한적인 자유를 보장하여 수많은 언론 매체들이 창간되어 일간지는 기존의 41개에서 60년 12월 말까지 390개로 증가하고 주간지, 월간지, 통신사도 마찬가지였다. 과도하게 수가 늘어난 언론은 정부나 권력기관을 비난하는 것에만 초점을 맞추었고 이에 정부는 언론규제법을 시행하려다 실패하였다.

장면은 안보와 치안의 핵심세력인 군과 경찰을 숙청과 혁신의 대상으로 삼았다. 장면은 선거 공약으로 군 병력 10만 명 감축안을 내놓았고, 집권 후 감군 정책을 추진했으나 미국의 강력한 반대로 3만여 명을 감축하는 데 그쳤다. 또 잦은 군 지도부 개편으로 1년도 안 되는 재임 기간 동안 국방부장관이 세 번, 육군참모총장이 네 번이나 바뀌는 등 파행을 거듭했다.일제 식민경찰에 복무한 경력이 있던 경찰관들은 4·19를 계기로 숙청의 칼날을 맞았다. 경찰서장 81명을 포함하여 경찰관 1만 7,000명이 해직됐고, 전체 경찰관의 80%를 근무지를 변경시켰다. 민주당 정권 9개월 동안 경찰업무를 관장하는 내무장관이 다섯 번이나 바뀌었다. 그 중 네 명은 각각 한 달 간씩 재직했다. 경찰의 사기가 땅에 떨어져 민주당 집권기간 중 범죄가 두 배로 늘었지만 범인 검거율은 이승만 정부 시절의 90%에서 65%로 낮아졌다. 경찰력이 허약해진 틈을 타고 깡패와 조직폭력배가 활개를 쳤으나 장면 정부는 공권력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했다.

-그렉 브라진스키 지음·나종남 옮김, 『대한민국 만들기 1945~1987』, 책과 함께, 2012, 186p

장면이 정권을 장악한 지 몇 달 후 실시한 여론조사에 의하면 응답자의 3.7%만이 장면을 지지할 정도로 민심이 이반됐다. 미국 정부는 장면의 리더십에 대해 비관적인 전망을 내놓기 시작했다. 매카나기 주한 미국대사는 본국에 보낸 보고서에서 “정치적 리더십 측면에서 볼 때 장면은 적임자가 아니며 한국 정부는 개인보다는 젊고 유망한 지도자 집단이나 조직에 의존하게 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렉 브라진스키 지음·나종남 옮김, 앞의 책 190~191p

1961년 3월 초에는 「팔리 보고서」가 등장했다. 팔리 보고서는 “장면 정부가 4월을 넘기기 어려울 것”이며, 이 사태를 방치할 경우 한국에서는 공산혁명이나 그와 비슷한 사태가 일어날지 모른다고 경고했다.

-김일영, 『건국과 부국』, 기파랑, 2012, 307p


2.1.2. 급진 좌익 세력의 대두


북진통일을 주장했던 제1공화국과 달리 제2공화국은 1948년 UN처럼 인구비례 총선거에 따른 통일을 주장했다. 북한에 대한 태도는 확실히 제1공화국에 비해서는 누그러졌다. 하지만 북한과 교류 및 대화에 있어선 제1공화국과 마찬가지로 회의적이었으며 체제 경쟁 및 대결을 지향했다.
그러나 민주당 구파에 의해 반공임시특례법과 데모규제법이 만들어지게 되며 현재까지도 국가보안법의 일부에 편입되어, 집시법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어 전해지고 있다. 제2공화국 역시 반공주의적 입장에서는 제1공화국과 큰 차이가 없었다.
이와 같은 2공화국 정부의 태도와는 별개로 이 시기에 이승만 정부 시절에 지하에 숨어든 좌익세력이 다시금 대대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인민공화국 만세"와 같은 구호를 외치는 시위대들이 자주 등장하였다.# '''불과 전후 8년이던 시점이었다.'''
1961년 5월 5일에는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결성된 단체인 "민족통일전국학생연맹"은 남북학생 회담을 제의하는 결의문을 발표하고 북한은 즉시 환영을 표하면서 서울과 평양에서 개최하자는 공식성명을 발표하였다. 장면 정부는 남북교류와 학생회담은 위험하여 허가할 수 없다는 입장을 발표하였지만 5월 13일 서울운동장에서 남북학생회담 환영 궐기대회를 여는 데에서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라는 구호가 내걸렸다. 이러한 정세에 장면 정부는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 이렇듯 불과 13년 전에 성립된 신생국의 국가체제에 대한 근본적인 도전을 돌파할 만한 능력을 보이지 못하자 대다수 국민은 깊은 위기감에 휩싸였고 군사정변이 성공하는 요인이 되었다.

2.1.2.1. 전후 군부의 대두

6·25 발발 당시 9만 5,000명 규모였던 한국군은 6·25 남침전쟁을 치르며 휴전 당시에는 49만 2,000명으로 증가했다. 이승만 대통령이 얻어낸 한미상호방위조약에 의해 한국군은 70만으로 급팽창한다. 이 와중에 한국군 장교들은 미군들로부터 새로운 군사지식과 과학기술을 습득했으며, 병사들을 지휘하는 리더십 특별교육도 배웠다. 각종 군사학교를 통해 받은 전문교육으로 장교들은 국가경제에 유익한 프로젝트를 관리할 수 있는 경험을 축적했다. 또 엘리트 장교들의 훈련을 위해 고급 지휘관들을 선발하여 미국에 유학을 보냈다.
군대란 기본적으로 전쟁에서의 승리를 위해 존재하는 집단이다. 적을 제압하고 승리하기 위해서는 최첨단 과학과 기술, 행정력, 지리학, 군수물자의 보급과 통신, 수많은 병력을 먹이고 입히고 재우는 병참능력, 부상자들을 치료하는 의학 기술 등 당대의 최첨단 종합기술이 총동원된다. 군은 일종의 축소된 국가나 마찬가지다. 당시 한국 군부는 미국의 원조를 통해 장거리포, 고속함정, 제트 전투기와 같은 고도의 정밀무기를 운영 유지하는 과학기술적 능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를 효율적으로 가동하기 위해 조직이나 운영 면에서 당시 세계에서 가장 선진화 된 미국의 행정체계를 도입했다. 때문에 한국 사회에서 기술적, 과학적으로 현대화되고 능률적인 유일한 집단이 군이었다. 군이 역사의 전면에 나선 것은 이런 배경 때문이다.
이렇게 미국유학을 다녀오고 귀국한 장교들은 여전히 매우 가난하고 꾀죄죄한 조국의 모습에 매우 실망하고 기성 민간 정치인들에 대한 불신이 가득해졌다. 특히 6.25 전쟁을 거치며 미군식 행정 시스템을 겪은 그들은 일제강점기 행정 업무 능력을 가진 당대 정치인이나 공직자들의 삽질에 불만도 많은 편이었다. 4.19 혁명으로 인해 계엄령이 선포되자 대민/대관 업무에 파견된 장교들은 공무원들의 일처리를 보면서 혀를 내둘렀다고 한다. 1953년 기준 대한민국 전체의 미국 민간 유학생이 7백명이 좀 못되는데, 미국으로 유학간 장교들은 1천에 육박한다. 한 마디로 민간 정치인들과 일반 공무원들의 행정 시스템과 업무 처리 능력이 당대 군인들에 비해서 현저히 낮았다는 것이 중론이다.
당시 육군 장교들의 사정을 보자면, 6.25 전쟁 이후 조직이 비대해지고 그 결과 인사적체가 발생하면서 승진이 막혀버린 '''육사 8기생''' 등 중견 장교들의 불만이 극심했다. 즉, 그 앞 기수들까지는 육군의 비대화 과정에서 대령 이상으로 빠르게 진급했으나, 8기부터 확장에 제동이 걸리며 진급이 적체되어 대령을 못 단 중령들이 대량으로 발생했다. 가령, 당시 대한민국 육군참모총장이던 장도영은 20대에 사단장, 30대에 참모총장이 되었으나 불과 3살 연하의 김종필은 만년 중령 신세였다.
그런 상황에서 미국의 원조만을 기다릴 수 없었던 장면 정부는 이후 시행되는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을 추진하면서[15] 재원의 일부를 국군을 감축하여 조달하려 했다. 당연히 장교들 입장에서는 정부의 정책에 극심하게 반발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처럼 퇴역한 군인에게 직장 자리 봐주거나 우대하던 시절도 아니었으니까.
이 시기의 군인들은 질적으로는 한국에서 가장 우수한 시스템에서 커리어를 쌓았지만 대접 자체는 매우 박해서 군인 봉급으로 일가족이 건사하기가 어려웠다. 때문에 부정부패, 물자 횡령과 뇌물이 오가는 암담한 상황이었고 뜻있는 청년 장교들이라면 불만과 좌절을 느낄 수밖에 없던 상황이었다.[16]

3. 박정희 개인의 상황


박정희여순사건으로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백선엽이나 원용덕과 같은 육군 원로들의 옹호와 남로당 간부들에 대한 정보 제공으로 사형은 면하고 예편되는 것으로 정리되었다. 이후 민간인 신분으로 육군본부 정보국 문관으로 재직했다. 1950년 6월 23일경 박정희는 북쪽에서 사람들이 움직이는 게 뭔가 이상하다고 상부에 보고했으나 묵살되었고 그 결과가...[17] 그래서 사상전향을 인정받아 전시에 장교로 복직하여 군인으로서의 능력이 뛰어나 승진을 거듭하며 군맥을 쌓을 수 있었다.
사실 6.25 직전 박정희는 숙군 연루자로 군부에서 언제 잘려도 모르는 상황이었고, 이화여대생이었던 내연녀 이현란과의 문제로 안 그래도 좋지 않던 결혼 생활도 파탄이 났다. 당시 박정희 주변 인사들의 증언을 들어보면 매일마다 술이나 마시고 인사불성이 되기 일쑤였고, 월급은 술집 외상값 갚기도 바빴다고 한다. 다시 말해 완전 폐인 상태. 이런 상황이었다면 평범한 사람으로 살다갔을 팔자였다.
6.25 전쟁 때 박정희는 포병 소령 계급을 달고 군인으로 복직되었다. 그 후 군 생활을 이어가면서 준장, 소장으로 차례로 진급하였다. 진급 자체는 그다지 순조롭지 않았는데 미국 측은 박정희남로당 전력을 문제 삼았고 준장, 소장 진급 때마다 태클이 들어왔으나 백선엽 장군 등의 적극적인 변호로 무사히 진급할 수 있었다. 박정희는 6군단 부군단장, 군수기지사령관, 육본 작전참모부장 등의 요직을 거치게 된다. 그리고 정변 당시에는 제2야전군사령부(현 제2작전사령부) 부사령관으로 재직 중이었다. 군 생활 동안 박정희는 정권에 의해 '''요주의 인물'''로 찍혀 있었다. 그것은 박정희의 기질 때문이었다.
첫째, 박정희는 남조선로동당 전력이 있었다. 둘째, 1952년 부산 정치파동 당시 이승만이 국회를 장악하기 위해 4개 소대 병력을 육본에 요청했는데 당시 육군참모총장 이종찬 장군은 대통령 면전에서 병력파병을 거부한다. 이때 육군본부 제2작전참모부장이였던 포병대령 박정희는 "육군장병들에게 고함"이라는 훈령(217호)을 기초하여 군의 정치적 중립을 강조하고 현재 자신의 임무에 충실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때에는 9년 뒤의 상황과는 달리 박정희는 계급도 대령으로 많은 상관과 선배들을 제치고 무슨 일을 주도적으로 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았고 그 시대 많은 군인들과 마찬가지로 이승만 정권에 염증을 느끼고 있던 터였다.
1960년 3.15 부정선거가 터지자, 박정희는 자유당 정권을 무너뜨리고 집권을 할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 포항에 주둔한 대한민국 해병대 제1사단해병소장 김동하 장군과 공모하여 쿠데타 계획을 꾸몄지만 4.19 혁명이 터지면서 이 역시 종이 위의 구상에 그쳤다.
하지만 박정희는 1960년 5월 2일, 대한민국 육군참모총장 송요찬 장군을 위시로 한 수뇌부에 3.15 부정선거의 책임을 지고 물러날 것을 요구하기도 했으며 김종필 중령을 필두로 한 육사 8기생 중령들의 연판장이 돌아 수뇌부 불신을 천명하자 박정희에게 이를 갈면서 그를 박살 내려던 송요찬은 실각했고 군 수뇌부는 붕괴했다.
어쨌든 그가 가지고 있던 정치적인 기질은 육본으로 하여금 그를 경계하게 했고 박정희가 정변 등의 소리를 하고 다니자 아예 그를 좌천 또는 예편시킬 구체적인 입안을 하게 된다. 특히 과거 좌익에 가담했던 경력까지 문제 삼아서, 결국 육본 작전참모부장에서 2군부사령관으로 좌천당한다.
즉, 박정희는 대외적으로는 4.19 혁명 이후의 사회 불안 때문에 우국충정의 마음으로 부득이 정변을 일으키게 되었다고 해명했다. 부패한 정권으로 인한 민초들의 고통은 이승만 정권 이후 장면 내각에서도 지속되었으며, 특히 50년대에는 군부대 특히 육군 부대의 보급물자 유출이 심해 겨울만 되면 동사자가 속출했다. 박정희가 맡은 사단은 동사자가 '적어서' 상부의 표창을 받은 적이 있었다.
박정희는 청년 시절부터 야망은 있었던 듯하다. 제자나 친구들의 증언에 따르면 교사 시절 문경의 하숙집에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초상화를 떡 하니 붙여 놓고 숭배에 가까운 태도를 보였다고 한다.[18]
박정희는 만주로 가서 만주국 육군에 입대했다. 당시 만주에서도 민족차별은 있었지만, 동양의 서부라 불릴 정도로 혼란한 곳이라 나름대로 기회를 잡으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군인이 된 후에도 나폴레옹이나 터키케말 파샤에 대해서 많이 이야기 했다고한다.[19]
박정희는 또한 일본육군사관학교에 유학 갔을 때 일본 황도파의 영향을 많이 받은 듯하다. 소령으로 복직한 후 2.26 사건을 거론하며 가까운 장교들에게 "우리도 이런 식의 군사혁명을 해 보자" 등의 이야기를 종종 했다고 한다. 한국전쟁 이후에는 친구인 소설가 이병주에게 "우리도 2.26 사건의 우국 장교들처럼 한번 일어나야 하지 않겠냐"라는 이야기를 대놓고 했다고 한다. 어린 시절부터 일본 역사를 읽으면서 메이지 유신처럼 군인이 나서서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졌다고 한다.

4. 과정 및 주요 인물




5. 결과 및 반응




6. 평가




7. 여담


  • 수도권 북쪽의 경기도 김포 최전방을 경계, 방어하는 임무를 지닌 해병대 제1여단[20] 병력 1,500명을 쿠데타를 위해 서울로 빼돌리고 전방쪽을 비워둔 건, 북한의 남침을 야기할 수 있는 매우 위험한 행위였다. 이렇게 전방 부대를 빼돌려 쿠데타에 동원하는 행위는 이후 12.12 군사반란제9보병사단 29연대에 의해 다시 일어난다.
  • 박정희가 한강다리를 건널 때 이미 술에 취해 있었다는 증언이 있다. 박정희에게 이것저것 보고를 하러 간 전속부관의 말에 따르면 이미 그의 몸에서 술 냄새가 상당히 풍겼다고 한다. MBC에서 방영했던 드라마 제3공화국 5.16 군사정변 관련 에피소드를 보면, 박정희 외 1명이 쿠테타가 실패했다고 스스로 자포자기하여 대포집에서 술을 마시고 있고, 정변 지휘부들은 박정희가 안 보인다며 당황하다가 술에 취한 듯한 박정희를 부하들이 찾아서 데려오는 대목이 있다. 하지만, 5.16 정변 당일 정명환을 필두로 한 진압군을 박정희가 직접 말로 돌아가게 만들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술을 한두 잔 했을 수는 있어도 몇몇 증언처럼 정말 자포자기 상태로 술에 만취해 있었는지는 의문이다.[21] 단순히 한두 잔 정도는 아니고 술 냄새가 풍길 정도로 많은 술을 마셨더라도 말이 안 되는 것은 아닌 게, 박정희는 술이 상당히 셌다. 훗날 박정희는 태국푸미폰 아둔야뎃 국왕과 만난 자리에서 육영수 여사와 태국 외무장관이 기겁할 정도로 술을 많이 마셔서 좌중의 불안한 시선을 받았지만,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고 연설까지 마친 일화가 있다. 김종필은 회고록에서 명백히 박정희가 쿠데타 당시 술에 취하지 않았음을 말한다. 그런데 이 당시 김종필은 박정희 근처에 없었기 때문에 근거로는 의미가 없다. 해당 시점에서 김종필은 이미 이전에 강제전역 당한 민간인이었기 때문에, 병력도 무기도 직급도 없어서 당시 박정희 근처에는 가지도 않았다. 대신 혁명공약 인쇄한다고 인쇄공들 재촉하고 있었으며, 이건 김종필 스스로 인정한 내용이다.[22]
  • 차지철전두환은 이 쿠데타에 대위 계급으로 가담했으며 둘 다 말년 대위 상태였는데 쿠데타가 성공하는 바람에 소령은 거의 생략하다시피할 정도로 짧게 진급한 후 바로 중령으로 진급했다. 차지철은 그렇게 중령으로 제대한 후 국회의원이 된 반면 전두환은 계속 군대에 남아 소장까지 진급한 이후 박정희의 이 짓과 똑같은 짓을 저질러 박정희와 똑같이 권좌에 오르게 된다.
  • 훗날 박정희의 심복이자, 박정희를 저격한 김재규는 5.16 정변에 가담하지 않았다. 당시 김재규는 준장 계급으로 국방부 총무과장을 맡고 있었는데, 5.16 정변 직후 반혁명 분자로 몰렸으나 박정희의 보증으로 풀려났다. 김재규는 군대의 정치 중립을 매우 강조한 이종찬과 매우 밀접한 관계였고 그 영향을 받아서 쿠데타에 가담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 이 사건 발생 3일 전인 1961년 5월 13일재보궐선거가 열렸는데 이때 당선된 의원들은 취임한 지 12시간 만에 국회가 해산되어 의원 자격이 박탈되는 진기록을 세웠다. 그리고 그중엔 4번의 좌절[23] 끝에 강원도 인제군에서 당선된 사람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김대중이었다. 이것도 어찌 보면 악연이다.
  • 이정재, 유지광, 임화수 등의 정치깡패들과 그들의 조력자였던 곽영주 등의 친 자유당 경찰 세력은 복역 중 5.16 정변 소식을 듣고, "아싸! 민주정권이 물러났으니 이제는 다시 우리 세상이다!" 하며 좋아서 쾌재를 부르며 날뛰었다고 하지만 그들은 불과 4일 후에 자신들이 "나는 깡패입니다. 국민의 심판을 받겠읍니다."라는 피켓을 들고 서울 시내에서 조리돌림을 당하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아래는 육군 공수특전단 대원들에게 끌려 다니며 공개적으로 조리돌림을 당하는 정치깡패 두목 이정재를 포함한 동대문파의 화랑동지회. 결국, 갑종장교 출신에 대학 나온 인재라고 살려준 유지광을 제외하고 모두 처형된다. 자세한 내용은 3.15 부정선거4.19 혁명, 그리고 혁명재판 문서를 참고.
  • 본래 5.16을 추앙하는 측에서 구국의 결단이라는 용어가 사용되었다. 링크 과정은 쿠데타지만, 결과를 보면 혁명이라고 볼 수도 있다는 것이 그들의 입장이다. 하지만 당시 용어의 사용이 일종의 화 되면서 구국의 결단이라는 용어의 의미가 확대되었고, 굳이 5.16이 아니더라도 특정 정치적 이슈에 대한 정치인의 판단이 엇갈리는 결정을 구국의 결단으로 표현하는 용례가 늘어나고 있다. 링크
  • 묘하게도 51년 7개월 후 열린 제18대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의 딸인 박근혜가 대통령 후보로 출마하여 51.55%[24]의 득표율로 대통령에 당선됐다.
  • MBC 드라마 왕초에서는 마지막 회에 악역들이 일제히 몰락하는 사건으로 비춰진다. 이 정변을 통해 적폐를 척결한다는 모습이 상당히 긍정적으로 그려졌다. 김춘삼과 아는 사이였던 어리버리한 중대장은 혁명재판부의 검찰로 출세했다고 좋아라 한다. 나중에 케이블에서 재방송을 할 때는 서울 시내에 진입한 계엄군이 친일반민족행위자 경찰들과 이정재 등을 잡아가는 장면을 삭제해서 방영했다.

8. 관련 문서


  • 국가재건최고회의
  • 3.15 부정선거
  • 4.19 혁명
  • 12.12 군사반란
  • 자유당
  • 혁명재판
  • 수도방위사령부[25]
  • 제1경비단

[한글해석] 군부 무혈쿠데타 완전성공
혁명위서 3권을 장악
16일 하오부터 정식시무
[1] 김종필은 1960년에 정군 운운하다가 항명 파동에 걸려서 중령 계급으로 강제 예편된다. 5.16 이후에 중령 계급으로 복귀한다.[2] 장도영이 보낸 헌병대와 한상국 준장 휘하의 30사단 병력.[3] 야전군의 수는 후방부대도 수만이었지만 거의 무용지물이었다.[4] 말이 3천명이지 채명신의 5사단까지 하면 후에 합류한 부대까지 수만명이고 대구에 있던 2군 사령부의 지방 담당 지원군까지 합하면 많긴하다. 당일 참가한 병력은 3000여명이 맞다.[5] 3분 8초경 왼쪽에 박정희가 보인다.[6] 여순사건 직후 남조선로동당 비밀당원 신분이 들통나서 사형 선고를 받았다는 전력에 이어 정군 운동의 배후로 지목됨으로써 미국으로부터 예편 압력을 받아왔다. 장도영이 도움을 주어 당장의 예편은 면하고 한직#s-2.32군 부사령관으로 좌천되었으나, 1961년 1월 육군본부 개인보안심사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결국 1961년 5월 말에 강제 예편조치될 예정이었다.[7] 2인자 김종필 또한 정군 운동으로 1961년 2월 예편당했다.[8] 대부분은 영관급 장교였다. 정부 수립 초기였기에 1기생은 절반 가량이 입대 5년만에 별을 달았다. 그러나 그보다 4년 늦게 시작한 8기생들은 12년이 지나도록 준장조차 배출하지 못했고, 선배들이 아직 은퇴하지 않았기에 대령 승진자도 10%가 채 되지 않았다고 한다.[9] 아예 개헌 때 헌법 전문에 혁명으로 명시해두었다.[10] 부정선거에 따른 부통령 당선자였던 이기붕은 임기 시작이 8월 15일이었으니 권한 승계의 자격이 없었다. 물론 이기붕 역시 4.19의 풍파에 벗어날 수 없었고, 이승만이 하야한 직후 4월 28일 아들의 총격에 가족과 함께 사망했다.[11] 당시에는 사사오입 개헌으로 국무총리 제도가 폐지된 상태였다. 현행 헌법법령에서는 대통령 궐위시 국무총리, 부총리, 기타 국무위원 순으로 대행하게 된다.[12] 장면정부는 9개월간 3차례의 개각을 단행했는데, 그 사유는 모두 비리나 정책실패 따위가 아니라 신파와 구파간 균형 맞추기였다. 당시 장면정부 각료들의 평균임기는 2개월. 이러니 정책이 제대로 연속성을 가지고 굴러갈 수가 없었고, 계파간 밥그릇 다툼으로 장관들이 바뀌는 모습을 국민들이 좋게 볼 리도 없었다.[13] 장면정부는 9개월간 3차례의 개각을 단행했는데, 그 사유는 모두 비리나 정책실패 따위가 아니라 신파와 구파 간 균형 맞추기였다. 당시 장면정부 각료들의 평균임기는 2개월. 이러니 정책이 제대로 연속성을 가지고 굴러갈 수가 없었고, 계파간 밥그릇 다툼으로 장관들이 바뀌는 모습을 국민들이 좋게 볼 리도 없었다.[14] 여기에 의외로 대중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백선엽-정일권-이형근 파벌의 독식 및 경쟁이라는 막장 상황도 한몫 단단히 했다.[15] 다만 박정희 정부는 1964년에 수출주도 산업화로 근본적으로 뜯어고쳐 한강의 기적이 시작되었다.[16] 여기에 의외로 대중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백선엽-정일권-이형근 파벌의 독식 및 경쟁이라는 상황도 한몫 단단히 했다.[17] 한편 김종필도 발발 당시 육군본부 상황실에서 당직을 서고 있었다.[18] “어느 일요일 동무들 몇 명과 함께 새로 오신 선생님의 하숙집을 찾아갔다. 호기심을 가지고 선생님 방을 살펴봤더니 책상 위에 커다란 사진 액자가 걸려 있었는데 배가 불룩 나오고 앞가슴 양편에 단추가 죽 달려 있는 사람이었다. ‘저 사람이 누구냐?’고 물었더니 선생님은 ‘영웅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라고 하시며 나폴레옹에 대하여 자세히 이야기해주셨다.”(이낙선 비망록, 1962)[19] 다만 대통령이 되고 나서는 '참 군인' 이순신을 많이 존경하고 강조했다. 실제로 당시 CIA한국지국장이었고 훗날 주한미국대사를 역임하는 도널드 그레그가 박정희에게 ‘각하께서 터키의 케말파샤와 비교된다는 걸 아십니까?’라고 물은 적이 있었는데, 이때 박정희는 케말 파샤를 잘 모른다고 대답하기도 했다.#[20] 현재는 해병대 제2사단[21] 특히 박정희가 만취했다고 회고한 박치옥 같은 경우는 초기에 정변에 가담했다가 나중에 반혁명 혐의로 숙청된 인물이라서 박정희를 부정적으로 묘사할 수밖에 없다.[22] 김종필은 자신이 5.16을 계획했으며, 박정희에게 실행을 제안했다고 해서 5.16의 주역을 자처하지만, 실행단계에서는 한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도 인정했다.[23] 세 번 낙선, 한 번은 방해 공작으로 등록도 하지 못했다.[24] 반올림하면 51.6%이다.[25] 정변 직후 정변 세력 보호를 목적으로 창설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