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낙준

 


'''역임 지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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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대학교 총장'''
설립

'''초대
백낙준'''

2대
고병간



'''대한민국 초대 참의원의장
백낙준[1]
白樂濬 | George Paik
'''
<colbgcolor=#580009><colcolor=#CFA547> '''출생'''
1895년 3월 9일
평안도 정주군 관주면 관삽동
(現 평안북도 정주시)
'''사망'''
1985년 1월 13일 (89세)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신촌동 세브란스병원
'''본관'''
수원 백씨 인주공파[2]
'''호'''
용재(庸齋)
'''재임기간'''
제2대 문교부 장관[3]
1950년 5월 4일 ~ 1952년 10월 29일
초대 참의원의장[4]
1960년 8월 8일 ~ 1961년 5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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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580009><colcolor=#CFA547> '''부모'''
아버지 백영순
'''형제자매'''
4남매 중 막내
'''배우자'''
최이권
'''자녀'''
아들 백순익, 백성익, 백관익, 백찬익
'''학력'''
신성중학교 (졸업)
미국 파크대학교 (역사학 / 문학사)
프린스턴 대학교 (신학 / 학사)
예일대학교 대학원(철학 / 박사)
'''종교'''
유교(성리학) → 개신교(예장통합)
'''약력'''
초대 연희대학교 총장
제2대 문교부 장관
제5대 후반기 국회의장

1. 개요
2. 일생
3. 평가
4. 선거 이력
5.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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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교육자, 정치인 그리고 친일반민족행위자, 이명은 백성빈(白成彬)이다. 영어 이름을 쓸 때는 조지 백(George Paik)을 썼다.

2. 일생


1895년 평안북도 정주군 관주면 관삽동#에서 빈농 백영순(白永淳)의 아들로 태어났다.
1910년 봄에 평안북도 선천군의 신성중학교에 입학하였다[5]. 1913년 신성중학교를 졸업하고 중국에 유학, 톈진 신학서원에서 3년 과정을 거쳤다. 1916년 선교사의 도움으로 미국에 건너가 고학으로 파크 대학교,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역사학, 신학을 공부한 뒤, 1925년 예일 대학교 대학원에서 종교사 연구를 시작하여 1927년 <조선신교사>로 철학박사학위를 받았다. 예일대 최초의 한국인 박사다. 귀국 직전 목사 안수를 받기도 했다. 귀국한 뒤 연희전문학교(현 연세대학교) 교수로 후학지도를 하는 한편, 조선기독교서회 이사, 조선어학회 회원, 영국황실아주학회 한국지부 이사, 진단학회와 조선민속학회 발기인, 조선기독교청년회 이사 등 다채로운 활동을 하였다. 특히 연희전문학교 문과 과장을 지내면서 정인보, 최현배, 백남운 등의 조선학 운동을 지원하고 조선어, 조선사 수업을 개설했다. 해방 후에도 동방학 연구소(현재의 국학 연구원)를 설치해 국학 연구를 계속했다.
그 뒤 외국에서 국제적 학술, 교육활동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내선일체 지지 및 학병 모집 선동, 신사참배 장려 등 친일반민족행위자로서 활발히 활동하였다. 특히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 엄청나게 많은 기고를 하였다. 태평양 전쟁을 아시아인의 해방을 위한 성전이라고 했을정도다.
1945년 8월 22일 서울대학교의 전신인 경성대학 법문학부장에 취임했으며 경제학부 학부장을 겸하며 사실상 총장의 역할을 수행했다. 또한 미군정에 의해 세워진 조선교육위원회 자문위원을 지냈으며, 정부수립후 한국교육위원회로 개편된 후에도 자문위원직을 유지했다. 이때 홍익인간을 한국 교육의 이념으로 채택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1946년 연희대학교(현 연세대학교) 초대 총장에 취임하였다.
1950년 5월 제2대 문교부(현 대한민국 교육부)장관을 지냈다. 재임 중 경북대, 부산대, 전남대, 전북대를 설치했다. 그 해 11월 국무총리에 잠깐 임명되었으나 단명 국무총리였다.
1960년 참의원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입후보하여 전국 최다 득표로 당선, 이후 초대 참의원의장으로 선출되었다. 윤보선이 아직 대통령으로 취임하지 않은 상황이었기 때문에 입법부 수장의 자격으로 대통령 권한을 닷새 동안 대행하였다.
1961년 5.16 군사정변 이후 정계에서 교육계로 돌아와 연세대학교 명예총장으로 일하였다.
이후 1970년대에는 반(反)유신운동에 뛰어들어 민주화운동에 투신도 하였다. 대표적으로 1974년에 민주회복국민선언 서명에 동참하였고, 야당인사들을 지지하기도 했다.
1969년부터 국토통일원 고문, 1980년 국정자문회의 운영위원으로 만년까지 학계·교회·사회·국제관계 전반에 걸쳐 다채로운 활동을 하였다. 여러 대학에서 명예박사를 받았으며, 1970년 광복절에 대한민국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았다. 90세로 죽었으며, 사회장으로 국립묘지 애국지사 묘역에 묻혔다.
[image]
연세대학교 본교에는 그의 동상이 있다. 그의 이름을 딴 용재관이라는 건물[6]도 있었으나 노후화로 인해 철거되었다. 철거 이후 2015년, 경영관이 자리했으며, 해당 건물 지하 1층에는 용재홀[7]이 있다. 국제캠퍼스의 기숙사에는 12개의 하우스가 있는데 이 중 하나의 이름도 '용재'이다. 오늘날의 교명으로 초대 총장을 지낸 인물이라는 점을 반영한 것이겠지만, 그의 친일행적 때문에 학생들이 철거를 주장한 일이 있다.[8] 라이벌인 고려대에서 인촌 김성수가 받고 있는 논란과 비슷한 셈. 여기에 백낙준의 호를 딴 용재상이라는 상이 있고, 수상자는 용재석좌교수에 임명한다. 그런데 백낙준의 친일행적을 비판한 서중석 성균관대 명예교수가 선정되자 이를 문제삼아 번복한 적도 있다.

3. 평가


일제강점기 말기의 행적 때문에 김동인, 이광수, 최남선, 김활란, 김성수, 유진오, 모윤숙 등과 더불어 전시체제기 대표적인 친일파라는 비판을 듣는다.
연세대학교 학보사 연세춘추에서 백낙준의 친일 행적을 논하는 글을 기고하기도 했다.#

4. 선거 이력


연도
선거 종류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1960
제5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특별시 제1부 참의원)
무소속

'''당선'''
[9]

5. 관련 문서



[1] 일제강점기 당시 사용했던 창씨명은 시라하라 라쿠준 (白原樂濬)[2] 인주공파(仁州公派) 27세손 낙(樂)◯ 항렬[3] 국무총리 서리 수행 (1950년 11월 3일 ~ 1950년 11월 15일)[4] 대통령 권한대행 수행 (1960년 8월 8일 ~ 1960년 8월 12일)[5] 안양의 신성중, 신성고는 이 학교의 후신을 자처하기도 했다. 설립자가 이 학교 출신이기도 했고. 다만 현재는 학교의 한자표기도 바꾸는 등 현재는 이에 대한 의식은 거의 없다.[6] 중앙도서관과 교육과학대학 건물로 사용.[7] 강당식 강의실[8] 여담으로 연세대에는 똑같은 친일매국노인 유억겸의 이름을 딴 유억겸기념관까지 교내에 있다. 연세대 동문 출신인 저항시인 윤동주 선생이 지하에서 무슨 생각을 할지...[9] 1961년 5.16 군사정변으로 인한 국회 해산으로 의원직 상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