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토 올렌도르프

 


[image]
오토 올렌도르프 (Otto Ohlendorf)
1907년 2월 4일 생 - 1951년 6월 7일 사망
독일제국의 하노버 호엔에겔센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올렌도르프는 1917년에 힐데스하임의 인문학교에 입학해 1928년에 졸업 후 괴팅겐 대학에 입학하여 법학과 경제학을 전공하여 1931년에 졸업했다. 정치에 관심이 많았던 올렌도르프는 16세에 독일국가인민당에 입당하기도 했는데 <부르주아>정당에 싫증을 느껴 마르크스 주의에 관심을 가지기도 했다. 하지만 나치당의 국가사회주의 이념에 빠져든 올렌도르프는 1925년에 18세의 나이로 나치당에 입당했다. (당원번호 6,531) 올렌도르프는 당시 소규모였던 나치당 조직에서 신문배달과 집회연설 등을 보좌하면서 친위대에 가입했다. 1931년에는 괴팅겐 대학교수였던 경제학자 예센 교수의 추천으로 이탈리아의 파비아 대학에 1년간 유학했다. 그러나 올렌도르프는 이탈리아의 파시즘 운동에는 공감하지 않아 후에 뉘른베르크 재판시 파시즘과 나치즘은 다르다고 역설했다. 히틀러 내각의 탄생 후인 1933년에 올렌도르프는 힐데스하임의 지방재판소에서 견습시보가 되었는데 10월에는 예센 교수의 킬 경제학 연구소에 들어가 조수가 되었다. 하지만 예센 교수와 올렌도르프는 킬의 나치당 조직문제로 격렬히 맞서 1934년에 연구소를 떠나 결혼 후 5명의 자식을 두었다. 1935년에 베를린 대학의 경제학 연구소 주임연구원으로 일하게 된 올렌도르프는 1936년 5월에 친위대 정보부에 들어가 경제부 부장이 되었다. 올렌도르프는 중산층의 보호와 독일 경제산업과 관련하여 일했지만 친위대에서는 한계를 느껴 1938년 6월에 국가상업단 소장으로 부임해 국가경제정책을 연구했는데 1939년 9월에 하이드리히의 추천으로 국가보안본부 제 3국(국내산업부)국장으로 임명되어 나치정권의 경제정책 수장으로 일했다. 독소전쟁이 발발하자 1941년 6월부터 1942년 7월까지 올렌도르프는 동부전선에서 부임하여 제 11군의 특무부대인 아인자츠그루펜 D부대의 사령관으로 취임했다. 여기서 그는 소련 점령지의 주민과 유대인을 정치의 적들이라고 규정한 후 남부 우크라이나에서 9만명 이상의 민간인 학살을 주도했다. 1942년 7월에 독일로 돌아온 올덴도르프는 다시 국가보안본부 제 3국 국장이 되었는데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가 암살되면서 하인리히 힘러가 국가보안본부를 직접 관장하게 되자 올렌도르프는 친위대 소장으로 진급함과 동시에 국가상업정책 추진자로 임명되었다. 1943년 11월에 올렌도르프는 국가재무성의 차관대리로 임명되고 8월엔 내무상을 겸임하며 치안유지임무도 부여받았다. 1944년에 친위대 중장으로 승진한 올렌도르프는 전후인 1945년 5월 23일에 되니츠 정권에서 근무도중 연합군에게 체포되어 뉘른베르크 특수작전집단 재판에서 아인자츠그루펜 사령관으로 재직시 9만명의 학살혐의로 기소되었다. 그는 상관의 명령에 따랐을 뿐이라며 혐의를 부정했지만 결국 1948년 4월 10일에 사형판결이 내려져 1951년 6월 7일에 란츠베르크 형무소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