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소전쟁

 


'''독소전쟁''' (獨蘇戰爭)
독일어: '''Ostfront''' (동부전선), '''Deutsch-Sowjetischer Krieg''' (독일-소련 전쟁)
러시아어: '''Великая Отечественная война''' (대조국전쟁)[1]
영어: '''Eastern Front''' (동부전선)
제2차 세계 대전의 일부
관련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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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age]
바르바로사 작전 당시 진격하는 독일 국방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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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바로사 작전 당시 황폐화된 소련의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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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년 봄 데미얀스크 전선의 독일군과 3호 전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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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년 가을 스탈린그라드 전투 당시 진격하는 소련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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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부전선에서 사용된 3호 돌격포
[image]
쿠르스크 전투에서의 6호 전차 티거와 독일군 병사
[image]
1945년 참호에서 판처파우스트로 무장한 독일 국민돌격대 대원들
[image]
항복 문서에 서명하는 빌헬름 카이텔 원수

'''날짜'''
1941년 6월 22일 ~ 1945년 5월 9일
'''장소'''
동유럽, 중유럽, 북유럽의 동부 지역
'''이유'''
아돌프 히틀러레벤스라움 확보 야욕

'''교전국'''
[image] '''소련'''
[image] 폴란드 동부군
[image]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 (1944~)
[image] 체코슬로바키아 망명정부 (1943~)
[image] 투바 인민 공화국 (~1944)

● 부수적 참여국
[image] 루마니아 왕국 (1944~)
[image] 불가리아 왕국 (1944~)
[image] 핀란드 (1944~)

● 지원국
[image] 자유 프랑스[2] (1943~)
[image] 대영제국[3] (1941)
[image] 캐나다
[image] 미국[4] (1944)
[image] 몽골 인민 공화국[5]
[image] '''나치 독일'''
[image] 이탈리아 왕국
[image] 루마니아 왕국 (~1944)
[image] 핀란드 (~1944)
[image] 헝가리 왕국
[image] 불가리아 왕국 (~1944)
[image] 슬로바키아 제1공화국
[image] 스페인국 (~1944)
[image] 크로아티아 독립국
[image] 러시아 인민 해방 위원회
'''지휘관'''[6]
[image] '''이오시프 스탈린'''
[image] 게오르기 주코프
[image] 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
[image] 이반 코네프
[image] 바실리 추이코프
[image] 로디온 말리놉스키
[image] 세묜 티모셴코
[image] 콘스탄틴 로코솝스키
[image] 알렉세이 안토노프
[image] 세묜 부됸니
[image] 키릴 메레츠코프
[image] 표도르 톨부힌
[image] 니콜라이 바투틴
[image] 니콜라이 쿠즈네초프
[image] 세르게이 고르시코프
[image] 알렉산드르 노비코프
[image] 이반 체르냐홉스키† [7]
[image] 지그문트 베를링
[image] 요시프 브로즈 티토
[image] 루드비크 스보보다
[image] '''아돌프 히틀러''''''†'''
[image] 에른스트 부슈
[image] 하인츠 구데리안
[image] 에발트 폰 클라이스트
[image] 발터 폰 브라우히치
[image] 귄터 폰 클루게
[image] 빌헬름 리터 폰 레프
[image] 빌헬름 리스트
[image] 에리히 폰 만슈타인
[image] 발터 모델
[image] 프리드리히 파울루스 [image]
[image] 막시밀리안 폰 바익스
[image]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
[image] 페도어 폰 보크
[image] 페르디난트 쇠르너
[image] 발터 폰 라이헤나우
[image] 알베르트 케셀링
[image] 헤르만 호트
[image] 게오르크 폰 퀴힐러
[image] 프란츠 할더
[image] 요제프 디트리히
[image] 파울 하우서
[image] 테오도어 아이케
[image] 에리히 폰 뎀 바흐
[image] 헤르만 페겔라인
[image] 빌헬름 몽케
[image] 쿠르트 마이어
[image] '''베니토 무솔리니''''''†'''
[image] 이온 안토네스쿠
[image] 페트레 두미트레스쿠
[image] 칼 구스타프 에밀 만네르헤임
[image] 호르티 미클로시
[image] 보리스 3세
[image] 시메온 2세
[image] 페르디난트 차틀로시
[image] 아구스틴 무뇨스 그란데스
[image] 에밀리오 에스테반 인판테스
[image] 안드레이 블라소프
[image] 브로니슬라프 카민스키
'''결과'''
'''소련의 승리'''
'''영향'''
''' 나치 독일 멸망
소련의 초강대국 등극
동유럽의 공산화'''[8]
'''병력'''
총 3450만 명
총 1800만 명
'''피해규모''' [9]
[image] '''소련'''
- 총 피해 1,060만 명
- 전사 및 실종 760만 명
- 포로 520만 명
- 수감 중 사망한 포로 260만 ~ 360만 명
[image] 폴란드 망명 정부
- 총 피해 2만 4천 명
- 전사 및 실종 2만 4천 명
- 포로 수 미확인
[image] 루마니아 왕국
- 총 피해 1만 7천 명
- 전사 및 실종 1만 7천 명
- 포로 8만 명
- 수감 중 사망한 포로 미확인
[image] 불가리아 왕국
- 총 피해 1만 명
- 전사 및 실종 1만 명
- 포로 수 미확인
[image] '''나치 독일'''
- 총 피해 430만 명
- 전사 및 실종 310만 명
- 포로 330만 명
- 수감 중 사망한 포로 37만 명 ~ 120만 명 추산
[image] 러시아 해방운동[10]
- 총 피해 21만 명
- 전사 및 실종 21만 명
- 포로 100만 명
- 수감 중 사망한 포로 미확인
[image] 루마니아 왕국
- 총 피해 28만 명
- 전사 및 실종 8만 명
- 포로 50만 명
- 수감 중 사망한 포로 20만 명
[image] 헝가리 왕국
- 총 피해 30만 명
- 전사 및 실종 10만 명
- 포로 50만 명
- 수감 중 사망한 포로 20만 명
'''민간인 피해'''
소련 민간인 2,000만 명 사망
독일 민간인 200만 명 사망
1. 개요
2. 배경
2.1. 4자 안보 체제
2.3. 전쟁의 징조
2.4. 히틀러의 판단과 의도
2.5.1. 스탈린은 전쟁의 징후를 알고도 무시했다
2.5.2. 스탈린에겐 그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3. 참전국
5. 독소전쟁의 특징
6. 전쟁이 남긴 것
6.1. 엄청난 인명 피해와 잿더미가 된 두 나라
6.1.1. 소련
6.1.2. 독일
6.2. 초토화된 동유럽
6.3. 초강대국으로 등극한 소련과 스탈린 신격화
6.4. 독일의 분단과 영구적 영토 상실
6.5. 소련의 위성국으로 전락한 동유럽 국가들
6.6. 전쟁범죄와 피의 보복
6.7. 번외: 독소전쟁 시기의 동물들
6.8. 의의
7. 연표
7.1. 1941년
7.2. 1942년
7.3. 1943년
7.4. 1944년
7.5. 1945년
7.6. IF 시나리오
7.7. 독소전쟁 연구의 변화
7.7.1. 냉전 이전까지의 소련 측 연구
7.7.2. 냉전 이전까지의 서방 측 연구
7.8. 냉전 이후
8. 매체
8.1. 영화
8.2. 게임
8.3. 만화
8.4. 기타
9. 어록
10. 관련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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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나치 독일소련 사이에 벌어진 제2차 세계대전의 한 전선으로 '''인류 역사상 최대 규모의 단일전쟁'''이다. 1941년 6월 22일 독일이 소련과의 불가침조약을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선전포고 없이 소련을 대규모로 침공한 바르바로사 작전이 펼쳐지면서 발발했다. 독일군은 소련의 수도인 모스크바까지 불과 30km 앞둔 힘키까지 진격했다. 베를린에서 모스크바 까지의 거리는 무려 '''1,500km'''에 육박하므로 독일군은 정말로 지척까지 갔던 셈이다. 이 전쟁은 1945년 5월 9일 소련이 베를린을 함락시킬 때까지 약 4년간 지속되었다.[11]
하나의 '전선'으로 치기에는 그 규모가 어마어마한 인류 역사상 최대 규모의 단일 전쟁으로 제2차 세계대전의 대부분의 군인들이 독소전쟁에 동원되었으며, 사상자의 비중도 독소전쟁이 대부분이다. 전투 목록에 포함된 유사 이래 모든 전투들의 규모 순위를 매기면 '''상위 10개 중 7개, 1위부터 5위가 전부 독소전쟁에서 일어난 전투들'''이다. 승자인 소련이 냉전 시기에 공산권의 수장 국가였다는 점과 서구권 위주의 전쟁관, 그리고 여기에 영향을 받은 각종 매체들의 파급력으로 인해 서부전선 등이 조명받는 경우가 많지만 실질적으로 투입된 규모와 인력만큼, 2차 대전에서 동부전선의 중요성은 결코 무시되어서는 안된다.
다만, 그렇다고 동부전선은 중요하고 나머지는 부수적이라는 식으로 다른 국가의 기여를 무시해서도 안된다. 동원한 인력의 규모가 다른 전선에 비해서 훨씬 거대한건 사실이나 이는 지상전 위주의 독소전과 공중전과 해전이 중심이 된 다른 전선의 차이를 감안해야 한다. 하지만 유럽 서부 전선도 지상전이 중심이었으며 전쟁 초기부터 후기까지 미국영국의 파워가 없었다면 당시 소련이 이길수 있었을지는 절반의 확률이었다는게 중론이다. 공중전과 해전은 지상전에 비해서 사람보다 장비의 비중이 커지니 동원한 '인력''은 당연히 더 적다. 대표적인 예시로 2차대전 전 기간 동안 소련 공군이 격추시킨 독일 공군기는 높게 잡아도 전체 격추수의 20% 미만에 불과했고, 반대로 소련 공군과 독일 공군의 전술기 교환비는 전쟁이 끝나는 순간까지도 독일측이 더 우세했다. 이건 해군도 마찬가지.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자면, 독소전쟁 직전까지는 중일전쟁이 그나마 가장 넓은 판도에서 치러진 전쟁이었지만 중국은 병력 동원력이 영 좋지 않아 거대한 인구에 비해 의외로 병력 동원이 얼마 안 되었다. 또한 일본 제국중국군과 싸우는 동시에 미국과 태평양 전쟁이 개전되면서 태평양 전선과 동남아시아 전선에까지 병력을 투입하였기 때문에 중국 본토로 생각보다 많은 병력을 동원하지 못한 관계로 중일전쟁에서 일어난 양군 간 교전의 규모는 비교적 작았다. 제2차 상하이 사변, 우한 방어전 등 가장 큰 전투들도 양군 합쳐서 100만 명도 동원되지 않았다. 그 전투들의 규모가 결코 작다는 건 아니지만.
게다가 중국군은 대규모 회전을 치룰 능력이 부족했고, 일본군도 중국 본토의 거점을 점령하는 데만 집중했지 주력을 포위 섬멸하는 것에는 성공하지 못했기 때문에 각각 전투에 큰 사상자는 발생하지 않았다. 가장 거대한 인명 피해가 나왔던 대륙타통작전이 양군 합쳐 60만 정도의 사상자가 나왔으니 상당히 큰 규모에 해당한다. 이러다 보니 중국의 희생은 대부분이 중일전쟁의 여파로 기아한파, 전염병으로 죽은 민간인이었고, 군 병력의 손실은 그래도 군인인지라 일본군의 3배가 조금 안되는 수준이었다.
서부전선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프랑스 침공 당시만 하더라도 양측은 총 300만 이상의 병력을 동원했으나 이 모든 병력들이 동원된 전투는 없었으며 주요 전투마다 사단-군단급 위주의 규모로 치루어졌다. 독일군의 전광석화 같은 전격전에 의해 연합군의 다른 전투병력들이 제대로 싸워보기도 전에 파리가 함락되었다. 노르웨이 침공에서도 1개 군단급 병력이 맞붙었으며 북아프리카 전역에서도 양측이 군단급에서 야전군급 병력 정도만 동원했다. 그 이상 대규모로 병력이 동원되는 전투는 노르망디 상륙 작전 이후에도 아르덴 대공세 정도 외에는 거의 없었다.
하지만 독소전쟁은 양 국가, 나아가 고대 이후로 동부 유럽에서 세력 다툼을 해오던 게르만족슬라브족, 히틀러스탈린이라는 두 독재자, 나치 독일을 대표로 하는 파시즘소련을 대표로 하는 공산주의흥망을 건 '''총력전'''이었으며, 양측 모두 '''집단군 단위의 수천만에 달하는 병력이 동원되어''' 치뤄진 전투가 끊임없이 벌어졌다. 극도로 치열한 전쟁이었던 만큼, 어지간한 강대국의 총 병력 숫자에 맞먹을 정도인 100만 정도의 군인이 전투 하나의 사상자인 경우도 있었다.
그리고 총력전이라는 말이 결코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듯 이 전쟁의 패전으로 인해 독일 민족은 민족 중흥의 발흥지라고 볼 수 있는 동프로이센 지역을 통째로 상실했을 뿐 아니라 독일어권이나 범게르만 계열로 표현되는 언어·민족적 그룹 자체가 '''동유럽에서 소멸하게 되었으며''', 히틀러와 파시즘, 그리고 동게르만 민족과 프로이센주의 전통들이 완전히 도태하고 스탈린과 공산주의가 지구의 절반을 정복하고 지배하게 되었다.
이 전쟁이 소련의 승리로 끝남에 따라 냉전이 시작되고 바르샤바 조약기구를 필두로 한 제2세계라는 동맹 블럭이 성립되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이후의 세계 판도를 결정한 현대 세계사의 결정적 전쟁이다.

2. 배경


전쟁의 원인에 대해서는 논란이 분분하지만 대체로 아돌프 히틀러 총통게르만-아리아인 인종의 '동방생존권'인 레벤스라움(Lebensraum)을 확보하기 위한 목적, 유대-볼셰비즘(Judeo-Bolshevism)을 제거하고 '열등인종(Untermensch)'인 슬라브족을 정복 후 추방, 노예화시켜 버림으로서 최종적인 '천년제국'을 확립하기 위한 것이라는 이데올로기적 목적과, '소련을 격파하여 굴복시킴으로서 끈질기게 저항하는 영국을 굴복시킨다.'라는 히틀러 특유의 전략적 사고방식이 동시에 작용한 것으로 보이며, 히틀러의 의중에서 어느 쪽이 더 비중이 컸는지는 알 도리가 없고 자료가 밝혀질수록 논란만 가중되고 있다.
히틀러는 집권 전부터 공공연히 공산주의제1차 세계 대전의 패전 원인 중의 하나라고 주장했으며, 공산주의 종주국인 소련에 대해서 대단히 적대적이었다. 어처구니가 없는 것은 막판에 궁지에 몰린 독일 제국은 '오히려' 공산주의자인 레닌러시아로 가도록 도와주는 대가로 레닌이 정권을 잡으면 전쟁에서 발을 빼기로 약속했고 진짜로 레닌은 전쟁에서 발을 뺐다. 그 덕에 독일은 그나마 남아있던 여력을 서부로 집중시킬 수 있었다. 히틀러의 주장과 다르게 1차 세계 대전 때의 소련은 도리어 다 죽어가던 독일이 조금이라도 더 버틸 수 있던 단초를 제공해준 셈이다.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에는 독일과 소련의 밀월 관계가 있었다. 러시아 혁명 당시 소련 인사들은 독일의 도움을 받아 혁명을 성공시킨 적이 있으며 레닌도 독일 제국 측이 제공한 열차를 타고 스위스에서 러시아로 밀입국했다. 그들도 독일 공산주의자들봉기를 지원하려 하기도 했다. 리처드 오버리의 '스탈린과 히틀러의 전쟁'에서도 말하듯, 제1차 세계 대전을 일으킨 전범 국가이자 베르사유 조약으로 군사력 확장을 크게 제한받고 국제 사회에서 평판이 추락한 독일과, 세계 각국의 집권층이 전혀 환영할 수 없는 이념인 공산주의의 종주국인 소련은 어느 면에서는 동질성을 지녔던 것이다.
위협을 느낀 소련은 영국-프랑스-폴란드-소련 4자 안보 체제를 구상하게 되었다. 그러나 소련의 의도를 의심한 서방 측의 불신에 의해 이는 난관에 봉착했다. 소련은 겨우 체코슬로바키아와 군사 협정을 체결하였으나, 체코슬로바키아는 1938년 나치 독일에 의해 합병되었다. 소련은 체코슬로바키아라는 동맹국을 상실해 버렸고 유럽에는 전운이 감돌고 있었다.

2.1. 4자 안보 체제


소련 외무장관 막심 리트비노프는 영국-프랑스-폴란드-소련으로 이어지는 4자 안보 체제 구축을 위해 여러모로 노력했으나, 영국과 프랑스는 이에 대해 진지하게 고려하지 않았다. 1939년 5월 3일 리트비노프는 해임되었고, 뱌체슬라프 몰로토프가 외무장관이 되었다. 리트비노프 해임의 표면적 이유는 외교적 실패였으나, 유대인이었던 리트비노프가 해임된 것은 독일에 우호적인 제스쳐를 보낸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1939년 4월 17일, 소련은 '발트해-지중해까지 모든 나라의 영토 보전을 보장하고, 그 나라 중 어느 한 나라라도 독일의 공격을 받을 경우 영국, 프랑스, 소련이 모두 전쟁에 돌입한다'는 내용의 동맹 관계를 제안하는 내용을 적은 문서를 영국, 프랑스에 전달했다. 그러나 6주가 지나서야 영국에서 답신이 왔으며, 그나마도 동맹 관계를 구축하자는 것이 아니라 예비 회담을 열자는 데 동의하는 것이었다. 몰로토프는 7월 17일, 영-프-소 외교 회담에서 군사 협약이 반드시 고려되어야 한다는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그러나 8월 10일이 되어서야 영국, 프랑스 협상단은 비행기가 아니라 여객선 시티 오브 엑서터(City of Exeter) 호를 타고 레닌그라드에 입항하여 소련 측에 매우 나쁜 인상을 심어 주고 말았다.
8월 12일이 되어 겨우 협상이 시작되었는데, 소련 측 협상단장은 이오시프 스탈린의 최측근이자 친구, 클리멘트 보로실로프 원수였다. 스탈린의 최측근을 협상단장으로 임명한 데서 소련이 이 협상에 얼마나 진지하게 임했는지를 알 수 있다. 또한 협상 자리에는 당시 육군참모총장 보리스 샤포슈니코프 원수 등 소련군 고위 사령관들이 다수 참석하였다. 보로실로프는 스탈린에게 보고할 필요 없이 바로 군사 협정에 서명할 수 있는 권한을 지니고 있었으며 이를 증명하는 문서를 영-프 협상단에게 보여주었다.
반면 영-프 협상단장의 자격은 소련에 비해 상당히 떨어졌다. 프랑스 협상단장은 프랑스 제1군관구 사령관 조제프 두망(Joseph Doumenc) 장군이었는데 보로실로프와 마찬가지로 협상 서명권을 지니고 있었기는 하나 당시 프랑스군 내 서열 40위 정도밖에 차지하지 못하는 인물이었다. 영국 협상단장은 조지 6세 직속 해군 장교인 레지널드 드락스 경(Reginald Drax)[12]이었는데, 그는 일개 함장 출신인 데다 영국 정부에 보고만 할 수 있을 뿐 협상 권한이 없었다. 자국의 쟁쟁한 거물급들을 협상단으로 내세운 소련으로서는 매우 불쾌할 것이 당연했다.
소련 협상단은 매우 당황했으나 계속 협상을 이어나갔는데, 소련군이 독일로 진군할 수 있도록 동유럽 국가, 특히 당시 영-프와 동맹국이었던 폴란드가 길을 내 줄 수 있는지에 대한 협약을 양국 정부와 맺었는가를 질문했다. 그러나 폴란드는 절대로 소련군을 영토에 들일 수 없다고 강경한 자세를 굽히지 않음에 따라 그런 협약은 존재할 수가 없었고, 그게 밝혀진 시점에서 이미 다자 안보 체제는 결렬된 상태였다.
참고로 냉전 당시 같은 동구권 국가였으며 민족 구성도 슬라브족으로 비슷한 면 때문에 가끔 오해하지만 폴란드와 러시아는 이란-이라크 관계급으로 사이가 좋지 않으며 그 역사도 유구하다. 1772년, 1793년, 1795년 프로이센-러시아-오스트리아 3국에 의해 영토가 3번이나 강제 분할된 역사를 지니고 있으며, 러시아 또한 폴란드 기병대 윙드 후사르 때문에 심한 골치를 앓던 적도 많다. 여기에 1919년-1921년, 러시아가 러시아 혁명을 겪어 국내적으로 아주 혼란하던 시기를 틈타 영토 수복을 위해 폴란드가 선제 공격을 날려 소련-폴란드 전쟁까지 겪어 두 나라는 사이가 극도로 좋지 않다. 이러니 당시 폴란드가 독일과 홀로 싸울지언정 러시아와는 손 안 잡는다는 반응이 나올 만했다.
전쟁이 발발할 시 각국이 동원할 수 있는 병력 수치를 밝힐 때 소련 협상단은 120개 사단, 야포 5천여 문, 전차 9천여 대, 항공기 5천여 대를 투입할 것이라고 밝혔다. 실제로 소련은 독소전쟁 때 수백 개의 사단을 동원했으니 120개 사단을 동원할 수 있다고 한 소련의 호언장담은 결코 빈말이 아니었다. 참고로 독일 국방군은 독소전쟁을 개시할 당시 소련군이 유럽 전선에 동원 가능한 병력을 '''180개''' 사단 정도로 추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180개 사단을 모조리 전멸시킨 독일군 앞에는 새로운 소련군 '''360개''' 사단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에 프랑스는 110개 사단, 전차 4천여 대를 파병한다고 답했다. 그런데 영국 협상단은 16개 사단이라고 밝혀 보로실로프가 "통역을 잘못한 것 아닌가?"라는 반응을 보였다. 황당한 소련이 세부 사항을 캐묻자 영국은 사실은 단 4개 사단만이 전투 가능하다고 실토했다. 회담 종료 후 스탈린이 영국 대사에게 구체적으로 더 묻자, 사실 4개 사단 중에서도 2개 사단만이 제대로 된 사단이었고 나머지 2개 사단은 좀 더 시간이 지난 뒤에야 완편된다는 것이었다.
물론 섬나라인 영국이 몇십 개 육군 사단을 유럽 본토에 투입할 수 있다고 보는 것도 웃기기는 하다. 섬나라면 당연히 해군의 비중이 클 것이다. 독소 불가침조약 항목에서도 확인할 수 있지만,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프랑스는 독일과의 전쟁에서 엄청난 피해를 입었으며 영국은 1907년 맺은 삼국협상이 영국의 참전을 강제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동맹국인 프랑스가 두들겨 맞고 있으므로 어쩔 수 없이 참전하게 된 것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영국은 유럽 본토전에 대규모 파병을 굉장히 꺼릴 수 밖에 없으며, 1939년은 세계 대공황의 여파가 아직 가시지 않은 때여서 영국이나 프랑스 둘 다 경제적으로 넉넉한 처지도 아니었다.
뮌헨 협정을 맺은 것에도 알 수 있듯 영-프는 독일을 자극하고 싶지 않았다. 제1차 세계 대전의 아픔을 기억하고 있는 두 나라로서는 소련의 다자 안보 체제를 소련만큼 진지하게 고려하지 않는 것이 당연했다. 물론 소련으로서는 '독일이랑 싸움 붙이고 니들은 손 떼려고?'라고 강하게 의심하기에 충분했다. 자세한 건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의 협상 과정 문서 참조.
어쨌거나 영국-프랑스가 이런 식으로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자 소련은 자신들이 계획한 대 독일 4자동맹 안보체제가 성립할 가능성이 크지 않다는 것을 실감하며, 독일의 침략에 홀로 맞설 수도 있다는 위기감에 몰리게 되었다.

2.2. 독소 불가침조약


이때 스탈린의 마음을 흔든 것은 다름 아닌 독일이었다. 독일 또한 침략 전쟁에 소련이 개입할 것을 우려하고 있었으며,[13] 계획의 스타트를 끊게 될 폴란드 침공에 소련이 개입하면 초장부터 만사를 그르칠 수 있으므로 소련에게 추파를 보내기 시작했다. 8월 2일, 독일 외무장관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가 소련에게 발트해에서 흑해까지의 지역의 결산을 제안했다. '스탈린과 히틀러의 전쟁'에서는 이를 유럽에서 옛 차르 제국을 재건할 가능성이라고 표현했으며, 스탈린은 리벤트로프를 만날 때 어린애같이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고 기록했다.
1939년 8월 17일 몰로토프는 리벤트로프와의 회담에 동의했고, 같은 해 8월 19일 양국은 독소 신용 협정(German-Soviet Credit Agreement)를 체결하였다. 히틀러와 스탈린이 전보를 교환한 후, 8월 23일 리벤트로프를 위시한 독일 외교단이 소련으로 비행기를 타고 갔다. 당시 모스크바 공항에는 하켄크로이츠 깃발들이 장식되어 있었고 크레믈린에서는 스탈린이 직접 외교단을 맞이했다.
이로써 1939년 8월 23일, 독일과 소련은 독소 불가침조약을 체결했다. 독소 불가침조약과 독소 신용 협정에 의해 소련은 폴란드를 독일과 나눠먹고, 독일과 소련은 상대방이 약소국(발트 3국, 루마니아 등)을 침략하는 것을 묵인했으며, 독일은 소련에 기계류를, 소련은 독일에 자원을 공급해 주기로 약속했다.
1939년 9월 1일,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인해 제2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었고 9월 17일부터는 소련이 참전해 폴란드 동쪽을 침략함으로써 폴란드 제2공화국은 멸망하고, 독일과 소련이 폴란드를 분할 통치하게 되었다. 1940년 6월에는 소련이 발트 3국을 강제 합병하였다. 소련은 1939~41년 사이에 독일의 전쟁에 대체로 협조적인 태도를 보였고 같은 슬라브족 국가인 유고슬라비아가 공중분해되거나 자국의 영향권이라고 인식한 핀란드불가리아에 독일이 손을 뻗어도 침묵하는 등 우호적인 자세를 유지했다.

2.3. 전쟁의 징조


그리고 1941년부터 독일의 소련 침략 징후가 서방 세계와 추축국에서 곳곳에서 전해지기 시작했다. 영국에서는 독일측 암호해독해 내서 윈스턴 처칠 당시 영국 총리스탈린에게 직접 경고하기도 했고, 1941년 봄에만 180건이 넘는 독일 항공기의 소련 영공 침범 사례도 있었으며, 일본 제국에 상주하던 전설적인 간첩 리하르트 조르게가 구체적인 수치까지 들어가며 소련에 독일의 침공이 곧 개시될 것을 알렸지만, '''스탈린과 소련 방첩국, 정보국은 그것들을 모두 무시했다.''' 그리고 공산주의자였던 독일의 인쇄업자가 독일군에 납품한 숙어집을 소련 영사관에 보냈는데 여기에는 "항복하라", "손들어", "집단농장 의장이 어디 있나", "공산주의자냐?", "발포한다" 따위의 러시아어 표현이 실려있었다고 한다.[14]
6월 16일 베를린에 파견된 소련 측 간첩들도 독일의 공격이 임박했음을 지속해서 알리고, 심지어 바르바로사 작전 개시 '''하루 전'''인 6월 21일 독일군 탈영 병사였던 알프레트 리스코프(Alfred Liskov)는 독일군 내 숨어 있던 공산주의자였는데, 그가 "독일이 내일 공격할 것이다"라고 털어놓기도 할 정도로 징후는 있었다. 리스코프는 소련측의 프로파간다에 사용되다 감옥에 수감되었다 풀려나지만, 그의 최후는 알려지지 않았다. 스탈린이 독일군 탈영병을 역정보 제공 혐의로 사형시키라는 명령을 내린 기록은 있는데 그것이 리스코프인지 아니면 다른 탈영병인지는 확인 불가.
영공을 침범하는 독일 항공기에 대해서도 공격하지 말고 특별한 지시가 있기 전까지는 어떠한 행동도 하지 말라고 강력히 명령했으며, 이는 전쟁 초기 소련 공군이 루프트바페의 공습이 임박했음에도 손 놓고 있다가 이륙조차 해 보지 못한 채 대거 궤멸되는 참극을 초래하고 말았다.
물론 스탈린도 히틀러가 쳐들어 올 것에 대비를 하긴 했는지, 폴란드 점령 후 스탈린 선을 뜯어다 앞에 짓기도 했다. 하지만 1937년쯤 스탈린의 대숙청으로 많은 장군들이 숙청되었고 미하일 투하쳅스키 등 유능한 장군들도 숙청의 칼날은 피하지 못했다. 이는 안그래도 부족한 장교진의 인력난을 부추겼고 살아남은 이들도 스탈린이 무서워 소극적인 태도로 일관하는 등 유무형의 피해는 독소전 초기 소련의 발목을 잡는 요소였다.
참고로 소련은 독일이 서부에서 영국과 전쟁을 치르는 내내 독일에게 물자를 제공했는데, 전쟁이 시작되기 불과 '''하루 전에도''' 물자를 가득 실은 열차가 독일 국경을 넘었다.
여담으로 물자를 실은 기차말고 또 하나의 기차가 베를린-모스크바 선로를 왕복했는데 그 기차에는 독일, 소련 민간인이 타고있었다. 이걸 보고 안토니 비버는 '평화와 전쟁은 정말 한끝 차이다'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2.4. 히틀러의 판단과 의도


1940년 12월 18일 소련에 쳐들어가기로 결정을 내리고 전쟁령을 승인하면서 히틀러는 돌이킬 수 없는 전략적 선택을 했다. 전쟁의 주도권을 빼앗겨서는 안 된다는 조바심에서 히틀러는 몇 달 안에 소련을 무력으로 완전히 궤멸하고 소련이라는 정치 체제를 없애버리는 쪽에 목표를 두고 독일의 전쟁력을 온통 거기에 쏟아부었다. 군 지휘관들도 사석에서는 딴소리를 했을지 모르지만 히틀러의 제안에 정색을 하고 반대하는 사람은 없었으니까, 군부의 지지도 얻은 셈이었다.

돌이켜보면 참으로 어리석어 보인다. 당시 독일의 장성들이 반론을 제기하지 않은 것은 히틀러처럼 소련의 군사력과 역량을 턱없이 얕잡아보았기 때문이었다. 나중에 생각해보면 도대체 왜 그랬을까 싶지만, 그들이 정말로 염려한 것은 소련이 아니라 영국이었다. 세계의 패권국 영국미국이 무한한 자원으로 지원할 가능성이 점점 높아져서였다. 이런 도박을 대부분의 군사 전문가들이 군소리 없이 따랐다.

레더는 예외였지만 괴링도 처음에는 의구심을 보이다가 금세 돌아섰다. 도박이 성공하려면 넉 달에서 다섯 달 안에 소련을 때려눕혀 유럽의 패권을 잡아야 했다. 영국은 동남아시아에서 영국 영토를 노리는 일본에게 발이 묶여 있으므로 소련만 무너뜨리면 독일에게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다는 계산이었다. 미국도 태평양에서 일본을 상대해야 할 테니 유럽까지 넘볼 여력이 없을 것이라고 히틀러는 내다보았다. 독일은 전쟁에서 이겨서 유럽을 장악할 것이다. 미국과는 어차피 나중에 한번 붙겠지만, 그렇게 되면 한결 유리한 입장에서 미국을 상대할 수 있다.

- 이언 커쇼, 히틀러 2권 (p. 426)

히틀러가 영국이라는 강적을 앞에 두고 소련 침공을 개시해 독일의 전쟁 수행 양상을 양면전쟁 구도로 만든 것은 전략적으로 치명적인 실수였다. 그러나 히틀러도 바보가 아닌 이상 나름대로 이유는 가지고 있었고 경제적, 이념적 이유 외에도 군사적인 이유도 나름대로 있었다.
육군 강국인 프랑스가 버티고 있어 서부전선을 형성해 줄 수 있었던 제1차 세계대전 때와는 달리 프랑스가 무너진 상황인 데다가, 영국은 섬나라라는 특성상 육군이 약했으며 그나마 보유하고 있던 장비의 상당수를 영국 원정군으로 파병했다가 프랑스 침공날려먹고 그 이후 영국 본토 항공전이 벌어지면서 자원을 대부분 공군 강화에 투자해야 했던 상황이라 영국 혼자서는 유럽 대륙에 상륙해 독일 육군을 상대하기는 역부족이었다. 비록 1944년에 노르망디 상륙 작전 이후 미국과 더불어 서유럽의 양대 주력이 되기는 하지만 당장은 육군의 장비조차도 부족한 형편이었다.
그러나 영국이 건재했기에 독일은 안 그래도 부족한 전력을 분산해야 했으며, 이 때문에 미국에서 소련으로 보내는 항로에 대한 견제가 어려워졌다. 반대로 독일이 영국을 확실히 제압해 놓았더라면 미국이 유럽에 전선을 전개하는 것 자체를 불가능하게 만들 수도 있었다. 물론 당장 영국 본토를 제압할 능력이 없었다는 건 부정할 수 없지만, 바다에서의 U-보트 작전과 북아프리카중동에서의 작전에 시간을 들여가며 공을 들였다면 중기적으로 영국을 굴복시키거나 협상을 이끌어낼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못한 채 후방에서의 생산과 보급이 전세를 결정짓는 현대전에서 상대방의 보급 능력을 두 배 이상 향상시키고, 아군의 후방 생산 기지를 상대의 항공 세력으로 위협할 수 있는 영향권 내에 남겨둔 것만으로도 전력 약화를 야기했다고 봐야할 것이다. 이미 북아프리카 전역이 진행 중이었던 데다가, 바다에서도 싸움이 계속되고 있었기 때문에 양면전쟁이 아니라는 건 말도 안 된다.
전해에 독일군은 영국 본토 항공전에서 패했는데, 그 결과 영국의 정복을 위해서는 보다 훨씬 강력한 해군이나 공군이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히틀러는 수십 개 사단을 해체하고 그 돈으로 해군과 공군을 증강할 계획을 세웠지만, 당장 400만의 상비군을 보유하고 유사시 천만 이상의 병력[15]을 동원할 수 있는 소련을 앞에 둔 상황에서 육군을 줄이기는 너무나 부담스러웠다.
게다가 당시 독일과 소련의 인구비는 1:3였으므로 유사시 동원 능력도 큰 차이가 났다. 물론 독소전쟁 발발 직후 독일군과 소련군의 병력 손실 차이는 1:5 였지만 소련군은 전쟁이 길어질수록 물량뿐만 아니라 전략과 전술의 성공과 같은 많은 측면에서 독일군을 따라잡으면서 독소전 양측의 총 손실 비율을 1:1.5 정도까지 줄여 버린다. 독일군무장 친위대가 점령지에서 벌인 학살로 민간인+포로 등의 소련의 사망자는 독일의 몇 배에 달했다.
독소 불가침조약이 체결되었을 때 전 세계가 놀랐던 이유가 절대 손을 잡을 것 같지 않았던 두 나라가 손을 잡은 데 있었을 만큼 독일과 소련은 결코 서로 간에 믿을 만한 국가가 아니었고 언젠가는 서로를 침공할 것이라는 예측을 이미 상호간에 하고 있는 상태였다. 따라서 미국이 참전하기 전에 소련이라는 폭탄을 제거해 두지 못한다면 영미를 막느라 상당히 약화된 상태에서 소련의 침공을 받는 최악의 시나리오에 봉착할 가능성이 농후했기에, 이는 어느 정도 필연적 선택이 아닐 수 없었다.
게다가 제1차 세계 대전동부전선에서 독일에 쭉쭉 밀리다가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으로 거대한 땅덩어리를 떼주고 전쟁에서 이탈해 사실상 패배한거나 다름없었던 제정 러시아의 무능함도 한몫했다. 만일 소련이 제정 러시아만큼 무능해 또 다시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과 비슷한 결과를 이끌어낼 수 있다면, 추후 있을 대 미국전에서 배후를 노릴 수도 있는 소련이라는 폭탄을 제거함과 동시에 독일의 고질적 문제였던 자원문제도 해결할 수 있으리란 기대감도 있었다. 동시에 이념, 정치적 목표인 레벤스라움을 동시에 확보할 수 있었으니 히틀러 입장에서는 참기 어려운 유혹, 아니 도박이었을 것이다.
이중 자원 문제는 중요한 것으로 특히 이 전쟁을 승리로 이끌기 위한 석유가 독일엔 항상 부족했다. 미국이 1941년~1945년 까지 유럽과 북아프리카 전선연합국에 제공한 석유는 60억 배럴이었는데, 이탈리아와 독일은 13억배럴도 채 되지 않았다. 이 부족한 석유를 동부 지역을 침공함으로써 얻어내고 싶었던 것이다.
폴란드와 프랑스를 기갑 부대를 이용한 최소한의 희생으로 1달 정도의 단기간에 정복했듯이, 한창 물이 오를 대로 올라 있는 육군을 동원하여 기습 공격을 한다면 소련을 쉽게 정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도 있다. 당시 독일군 육군 참모본부도 소련은 '''10주의 작전(!)'''으로 정복할 수 있다는 작전을 내놨는데 이는 히틀러의 결심을 더욱 확고하게 했다. 브렌하르트 폰 로스부르크(Bernhard von Lossberg) 중령알프레트 요들 포병대장이 이른바 로스부르크 연구(Lossberg study)를 통해 작전을 입안했다.
물론 에리히 폰 만슈타인, 프란츠 할더, 하인츠 구데리안,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 등 독일군의 주요 상급 지휘관 및 참모들은 '''"영국과 전쟁 중인 마당에 굳이 우리를 건드리지는 않을 것으로 생각되는 소련을 상대로 불필요한 전쟁을 벌여서 군을 소모시킬 필요는 없다"'''라는 의견이었지만 적극적으로 반대하지는 않았다. 물론 잘못될 경우 1차 대전의 악몽이 재현될 수도 있었지만, 당시에는 그 누구도 실제로 전쟁이 개시되면 소련이 길게 버티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독일군 장성들은 소련군의 역량을 얕잡아 봤다. # 모스크바 공방전 당시 독일군의 동계장비가 허술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결과적으로 1차 대전의 악몽이 재현됨과 동시에 한 술 더 떠서 본토까지 탈탈 털려 버렸다.
설령 영국이 협상에 나섰다 한들 소련과의 전쟁은 어느 시점에 가서는 히틀러가 염원하던 조건으로 이뤄졌을 것이다. 히틀러가 정치에 입문하고 20년 가까이 히틀러의 머리를 지배한 것은 전쟁이였고 전쟁의 중심 입안자는 누가 뭐래도 히틀러였다. 제2차 세계대전 초기에 히틀러는 전쟁을 상상하는 단계가 아니라 결전 계획을 구체적으로 짜는 단계에서도 상당히 개입하였고, 소련 공격의 구심점 역할을 하는 육군 지도부를 비롯한 국방군 수뇌부는 히틀러가 하자는 대로 했다. 그들은 히틀러를 말린 적이 없었고 말리긴커녕, 이미 독일 내에서 공산주의에 대한 반감이 워낙 큰 데다가 소련의 군사력을 턱없이 얕잡아보는 바람에 군 수뇌부는 소련을 무너뜨리는 것은 식은 죽 먹기라고 히틀러와 똑같이 낙관했다.[16]
그리고 퀴힐러, 회프너를 비롯하여 수많은 장군이 히틀러가 독소전쟁 개전하자는 주장을 묵인한 것은 순종하는 버릇이 몸과 머리에 밴 점과 이념에서도 나치 지도부와 겹치는 점이 상당히 많았다는 점도 부인할 수 없다. 장군들 또한 히틀러와 마찬가지로 동방에 제국을 세우자는 공감대가 있었고 소련과 볼셰비즘을 쳐부숴야하는 대상으로 여기는 이념적 공감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착각하지 말아야 할 것은 이 독소전쟁은 히틀러가 억지로 국민에게 강요한 전쟁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나치건 나치가 아니건 독일의 모든 엘리트가 수긍했고 심지어 정도와 이유는 저마다 달랐지만 환영한 전쟁이었다. 나중에 전선에서 하급 병사로 싸우는 수백만 명의 군인을 비롯하여 대다수의 독일 국민도 이것을 '볼셰비즘과 겨루는 성전'이라는 나치 선전기관이 주입한 논리를 받아들였으며, 광적인 나치 당원들은 볼셰비키 무리가 서양 문화를 파괴하는 것을 막으려는 예방전쟁이라는 해석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들은 '유대 볼셰비즘'을 발본색원하지 않는 한 유럽의 해방은 기대할 수 없다고 철썩같이 믿었으며, 이러한 믿음은 나치와 나치 지지자들에게 볼셰비즘을 제거하기 위한 절멸 계획 홀로코스트의 시작이였다.[17]
히틀러는 일단 쳐들어가기만 하면 강압적인 공산 통치에 염증을 느낀 소련 국민들이 독일군을 환영하여 소련 체제는 공격하는 즉시 붕괴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히틀러가 소련을 두고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문을 박차고 들어가기만 하면, '''저 엉터리 건물은 스스로 무너진다.'''"#

(We have only to kick in the door and '''the whole rotten structure''' will come crashing down.)

히틀러가 생각한 것처럼 직접 소련과의 전면전을 겪은 일본을 제외한 대부분의 국가는 소련이 금방 망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사실 우크라이나, 발트 3국 등은 처음에는 독일군을 스탈린의 학살, 숙청, 공포 정치에서 해방시켜 준 군대로 환영했다. 하지만 그에 대한 독일군의 보답은 학살, 파괴, 약탈. 독일이 이러한 행위들을 저지른 것은 열등한 슬라브족을 멸살시키기 위해 취한 학살이며 문제는 전쟁이 장기화되고 본토 방어전으로 밀려서 학살 대상자들이 자신들의 영역에서 벗어난 이후에야 이런 끔찍한 행위가 멈췄다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독일군의 잠재적 협력자가 될 뻔했던 우크라이나인이나 발트 3국인도 모두 독일군에 등을 돌렸고 후방에서 빨치산을 하든지 소련군에 앞장서 입대했다. 히틀러와 독일군은 이 침공 작전에 대해 낙관적이었는데, 소련이 비록 거대한 육군을 보유하고 있지만 서방에서 육군력이 강했던 프랑스도 수도인 파리가 함락되자 바로 무너졌던 전례가 있는만큼 소련도 그렇게 되리라 여겼기 때문이다. 또 대숙청으로 소련군이 반고자가 된 상태인 데다가 소련 체제가 막장이기 때문에 소련군이 군사 작전을 펼쳐 봤자 그 범위만 컸지 결과는 프랑스와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히틀러는 소련군이 전세를 뒤집고 반격을 개시해 전쟁 막판에 베를린 전투가 벌어져 베를린이 함락되기 직전에는 오히려 "독일인이 소련인보다 약해서 이 지경이 되었으니 독일인은 모두 멸종되어야 한다"는 개소리를 지껄였다.
이렇듯 당시의 독일은 소련을 매우 과소평가하고 있었다. 사실 독일만이 아니라 다른 국가들도 소련의 역량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 영국과 미국 등의 많은 나라에서도 바르바로사 작전 당시에 소련군이 막대한 병력을 잃자 소련은 얼마 못 가서 무너지게 될 것이라고 이야기할 정도였다. 왜냐하면 스탈린만이 군대에 대한 정보와 지휘권을 가지고 있었고 이러한 정보에 대한 보안을 철저하게 유지한 결과 외부에서 소련이 정확히 어느 정도의 군대를 보유하고 있는지는 알 수가 없었고, 정보의 부족 때문에 소련 정복은 쉬울 것이라고 예상되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후방에 배치된 공업 시설의 생산능력이 제대로 증명되고 극동에 남아있던 정예 병력이 대규모로 집결하기 전까지는 소련군이 연전연패하긴 했다. 독일은 후방 병력 견제는 일본해 줄 거라고 생각했지만 기대와는 달리 일본은 소련을 공격하지 않았다. 일본도 소련과 상호 간에 불가침 조약까지 체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독일의 태도가 이러한 일본의 행동의 원인 중 하나가 되었는데, 일전에 독소 불가침조약을 맺을 때 일본과 아무런 의논없이 체결했기 때문이다. 당시 일본 정부는 외교무능에 대한 책임을 지고 총리와 내각이 총사퇴를 할 정도로 충격이 엄청났다. 그런데도 이후 바르바로사 작전에 대해서도 히틀러가 일본에 알리지 말라고 지시해 아무런 언질이 없었다. 일본 외무장관이 조약을 맺기 한달전에 베를린을 방문해 불가침조약을 추진중이라는걸 알리기까지 했는데 말이다. 이러니 일본 입장에선 그렇게 필요했으면 상의라도 하지 그랬냐고 불만이 나올 수 밖에 없는 상황.
결과적으로 초반의 무지막지한 대패에도 불구하고 소련은 상상을 초월하는 저력으로 저항하여 무너지지 않았다. 게다가 1941년 12월에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독일은 미국에도 선전포고를 해 버렸는데 독일의 3국 동맹이 있었다지만 진주만 공습은 일본이 먼저 시작한 공격이기 때문에 독일이 굳이 미국에 선전포고를 안 해도 되었다.
물론 선전포고를 안 하고 무시했다고 쳐도 아마 미국이 먼저 선전포고를 때리고 전쟁에 착수했을 가능성이 크다. 미국은 이미 유럽 전선에 참전하기로 영국에 비밀리에 약속했기 때문이다. 다만 이 경우에는 진주만에 대한 국민적 분노가 높은 상황에서 정부가 유럽 전선에 우선적으로 전력을 집중하는 상황을 국민들에게 납득시키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당시 미국 내의 여론은 2차 대전을 유럽내에서 일어나는 즉 이웃동네 싸움 정도로만 간주하고 있었기 때문에 미국 내의 직접적인 위협이 되지 않는 한 참전할 이유가 없다는 식이었고 이는 먼로 독트린을 바탕으로 한 방임주의의 영향이 컸다. 즉 히틀러의 미국에 대한 선전포고는 미국 정부의 정치적 부담을 덜어줬고 나아가 미국이 일치단결해서 전쟁을 수행하는데 큰 도움을 준 셈이다.
사실 이 선전포고에는 일본이 중국 그만 공격하고 소련으로 발 돌리길 요구하는 의미도 섞여있었다. 어쨌든 일본 제국 때문에 불과 6개월 전까지만 해도 해상 보급에 연명하는 영국이 독일의 유일한 상대였으나, 물량이 승패를 결정하는 현대전에서 세계 1, 2위의 공업국을 상대로 자진해서 전쟁을 벌이는 자살적인 모양이 되었고, 히틀러가 물량의 의미를 깨달았을 때 이미 전세는 돌이킬 수 없었다. 물론 소련은 초반의 기습으로 공업 역량을 상당히 빼앗긴 반면에 독일은 유럽 전역의 공업력과 자원을 끌어다 쓸 수 있었다. 미국이 본격적으로 지원을 해 준 것도 1943년에 들어서의 이야기이다.

2.5. 스탈린


1941년 바르바로사 작전 당시의 독일군의 공격이 어떻게 그처럼 놀라운 정치적, 군사적 기습의 효과를 달성했는지에 대해서는 상당한 의문이 남는다. 사실 공격이 임박했음을 알리는 조짐은 상술하였듯이 충분히 많았다. 스웨덴에 있는 공산주의자 철도 노동자나 폴란드 저항군, 그리고 많은 정보원들이 동쪽에서 독일군이 독-소 국경 지방에 대규모로 집결하고 있음을 알려 왔다. 그리고 독일군이 고도 정찰 비행 중에 소련 영공을 침범한 사례가 300회를 넘었고, 외교적인 항의가 반복되었으나 독일 측은 별다른 대응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또한 독일 정보원과 독일의 후원을 받는 우크라이나 게릴라들이 1941년 봄에 소련 서부를 교란시켰으며, 모스크바 주재 독일 대사관은 6월 16일에 필수 인원을 제외한 모든 인력을 본국으로 후송했으며, 6월 21일에는 소련이 지배하는 항구에 독일 상선이 '''단 1척도''' 정박하지 않았다. 일단 이러한 파멸적인 상황이 스탈린의 완고하면서도 맹목적 사고 때문이었다는 일반적인 해석을 받아들이기는 쉽다. 그가 종종 적의 공격 의도에 의심을 품었기 때문에 스탈린은 적의 공격 능력을 보여주는 증거들을 무시하는 지도자의 전형으로 언급되어 왔다.

2.5.1. 스탈린은 전쟁의 징후를 알고도 무시했다


후대의 많은 연구자들은 스탈린은 '진심으로' 히틀러가 '양면전쟁'을 벌이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다고 생각한다. 당시 영국 공군이 소련의 바쿠 유전에 대해 폭격을 검토할 정도로 소련은 독일에게 많은 전쟁 자원을 공급했다. 아마도 스탈린은 소련이 독일에 전쟁 물자를 계속 공급하는 한 독일이 소련을 공격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또한 스탈린은 히틀러에게 독일 경제에 없어서는 안 될 희귀 광물을 제공하면서, 소련과의 전쟁이 임박하면 독일에게 중요한 인센티브를 박탈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소련은 1939년부터 독일이 침공한 1941년 6월까지 94만여 톤의 석유 및 석유 제품을 보냈고, 16만 톤의 망간 단괴와 2만 3천 톤의 크로뮴 광석과 여타 대량의 자원을 독일에 제공했다. 2차출처 실제로 최후의 화물 열차는 독일이 공격을 개시하기 불과 몇 시간 전에 국경을 넘어갔다. 독일 점령 하의 유럽과 일본에 산재한 소련 간첩들은 독일의 공격 징후를 1년 전부터 계속 보고했지만, 스탈린은 이런 정보가 오히려 독일의 역공작이 아닐까하고 의심했다.[18] 게다가 무솔리니의 삽질로 독일의 공세가 이집트, 그리스-유고슬라비아 쪽으로 확대되자 스탈린은 히틀러의 의중은 소련 공격이 아니라 수에즈 운하 확보라고 확신하고 말았다. 이때는 히틀러가 대놓고 소련에 대한 증오를 드러내면서 유고슬라비아의 쿠데타도 유대-볼셰비키들이 수작을 부린 것이라 주장하고 있었는데도 그러했다.
히틀러는 소련 공격 준비 명령을 이미 내린 후에도 소련을 안심시키기 위해 여러가지 낚시를 내걸었다. 전쟁 1년 전 소련 외무장관 뱌체슬라프 몰로토프가 베를린을 방문했을 때, 히틀러는 몰로토프에게 "대영제국은 이미 망했소. 소련이 독일/이탈리아/일본 3국 동맹에 가입하면 인도 제국을 나눠 주겠소."라고 제안한다. 이때 이미 히틀러는 소련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린 상태였으며, 따라서 이는 단순한 낚시라고 보는 게 타당할 듯하다. 영민한 몰로토프는 이에 관심을 보이지 않고, 오히려 독일의 동유럽 동맹 세력 확장에 대해서 항의했다. 특히 당시 막 끝난 겨울전쟁으로 소련에 영토를 빼앗긴 핀란드몰도바를 빼앗긴 루마니아가 독일 측에 붙었다. 또한 하필이면 그날 영국 공군베를린폭격하여 몰로토프는 독일 외무장관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와 함께 방공호로 대피했다. 그때 몰로토프가 한 말이 걸작이다. 몰로토프: '''"대영제국이 망했다고 한다면 지금 떨어지고 있는 폭탄은 누구의 것이오?"'''[19]
스탈린의 문제는 히틀러를 너무나 '정상'으로 생각한 것이다. 게다가 사실 영국에 남은 마지막 희망을 꺾어버릴 의도에서 소련을 굴복시킨다는 히틀러 자신만의 논리는 사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믿기 힘들 만큼 복잡했던 것 또한 사실이다.[20] 평범한 사람이라면 영국을 공격하는 편을 택하지 소련을 공격하는 생각을 하는 사람은 '''굉장히''' 적기 때문이다.[21] 그래서 스탈린은 단지 독일에게 자원을 공급해 주고 독일 정찰기가 소련 위를 날아다녀도 자극하지만 않으면 전쟁을 일으키지는 않을 것이라고 판단하였다. 스탈린은 독일이 전쟁을 일으킬 명분을 주지 않기 위해서 굉장히 고심했고, 그래서 전쟁의 명분을 주지 않기 위해서 전쟁 1달 전부터는 독일의 침공 징후가 확실했는데도 소련군에 경계경보를 내리는 것을 주저했다. 게오르기 주코프의 회고록을 보면 당시 국방장관세묜 티모셴코 원수총참모장인 자신은 계속 경계령 발동을 요청했으나, 스탈린은 그게 오히려 전쟁의 빌미가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결국 하루 전인 6월 21일에야 경계령을 내렸으나, 그때는 이미 독일군 특공대들이 소련군 제1선 부대들의 통신망을 절단하여 명령이 전달조차 되지 않았다. 이것만 봐도 스탈린은 히틀러가 정상적이라는 기본 전제에 너무나 집착한 나머지,[22] 전쟁의 빌미가 될 수 있는 명분이나 우발적 충돌만 억제하면 히틀러가 전쟁을 일으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음을 알 수 있다. 심지어는 위에서 말했던 대로 월경해서 정찰 활동을 하는 독일의 정찰기나 정찰 부대에 대한 대응도 하지 말라고 했기 때문에, 독일군은 마음대로 국경을 넘나들며 소련군 상황을 정찰할 수 있었고, 이는 소련군의 초반 참패를 초래했다.
물론 스탈린처럼 히틀러가 양면전쟁을 벌이는 일에 도전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 게 오히려 정상이다. 비록 2차 대전 초반에 프랑스를 항복시키면서 적어도 육군은 소련 쪽으로 집중할 수 있을 듯이 보였지만 이탈리아 왕국 덕분에 북아프리카 전역이 개전했고 이탈리아군을 보조하면서 영국군을 격퇴하라고 보낸 에르빈 롬멜은 아예 공세로 돌아서 지원병력을 요청했다.
그러나 다들 알다시피 '''히틀러는 1000년에 한번 나올까 말까 한 희대의 또라이였고 스탈린만 그걸 모르고 (혹은 믿지 않으려 하고) 있었다.''' 사실 스탈린뿐만 아니라 영국의 네빌 체임벌린이나 프랑스의 에두아르 달라디에도 앞서 있었던 오스트리아 병합이나 뮌헨 협정주데텐란트 강탈 등에서 히틀러가 희대의 전쟁광이라는 것을 모르고 협상에 임하다가 피를 봤다.
스탈린은 독일이 소련을 침공했다는 소식을 듣자 그럴 리가 없다며 현실부정을 하는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23] 나중에 가서는 정신을 부여잡고 소련을 지휘하긴 하지만 노발대발 화를 내기도 하고 독일이 왜 침공하겠냐며 전전긍긍한 것을 보면 이전까지는 정말로 히틀러가 소련과 전쟁을 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철썩같이 믿고 있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2.5.2. 스탈린에겐 그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스탈린은 절대로 히틀러를 과소평가하지 않았다. 그는 히틀러가 단시간에 독일 민족들을 통합하고, 독일 내에서 상당한 세력을 유지하던 독일 공산당을 완전히 전멸시킴과 더불어 유럽의 거의 대부분을 순식간에 정복하는 광경을 보면서 히틀러를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라고 판단하고 개인적으로는 히틀러를 존경하기까지 하고 있었다.
게다가 히틀러도 자신과 비슷해서 남의 뒤통수를 후려갈겨도 전혀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인물이라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 원래 동족이 서로를 잘 파악하는 법. 스탈린도 정치판에서 구르고 구르다 못해 대숙청까지 저지른 인간인 만큼, 히틀러에 대한 대비를 하긴 했다. 위에서 말한 '스탈린 선'이 바로 그것. 바르바로사 작전 직전까지만 해도 (그리고 그 이후도 잠시 동안이나마) 독일에 대항할 만한 강력한 육군력을 보유한 적수는 없었으며, 영국 본토 항공전에서 패배했다고 해도 영국이 딱히 상륙할 것도 아닌 이상 독일의 패권을 위협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즉, 독소전이 개시되어도 딱히 양면전쟁이라고 말하기 뭣하다.
게다가 소련과 겨울전쟁으로 맞붙은 다음 이를 빠득빠득 갈고 있는 핀란드추축국으로 붙었으니 장기적으로 뭔 생각인지 아주 뻔히 보이는 상황. 유럽의 최강국이자 패권 국가가 된 독일을 앞에 두고, 또한 보여준 전쟁 실력을 보고, 거기에 핀란드 등의 움직임을 보고 그 의심 많은 스탈린이 전쟁이 터질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한 것이나 전쟁에 대한 준비를 안 하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다. 그래서 스탈린은 자신의 이름을 직접 딴 스탈린 선을 독일 앞에다 구축하려 했다.
그런데 '스탈린 선'은 독소전 최대의 오산 중 하나로 꼽힌다. 일단 폴란드 함락 이후에 만들어졌으니 만들 시간이 부족해서 미완성이었다. 또한 원래 폴란드 국경에 짓고 있는 방어선을 포기하고 새로 만들게 되면서 대숙청 이후의 빈약한 장교단으로 새로운 방어 작전을 짜야 했다. 뿐만 아니라 여기에 주둔하게 된 소련군들은 그동안 훈련하던 지역이 아니라 새로운 지형으로 오게 되었으니 당연히 역량이 감소했다.
만약 스탈린 선이 계획대로 완성되었다면 독일이 맞닥뜨릴 소련은 대숙청 이후로 시간이 흘러 어느 정도 복구된 군대와 스탈린 자신의 이름을 딴 강력한 방어선과 그곳에 있는 패권 국가인 독일에 대응할 만한 (나름 정예) 병력이었을 것이다. 여기에 원래 짓던 폴란드의 방어선까지 탄탄하게 2중으로 갖추었을 수도 있다. 스탈린 또한 전쟁을 싫어하는 인물도 아니며, 독소 불가침 조약은 누구나 있을 수 없는 조약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학자들 중에서는 독소전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오히려 '준비된 소련의 선제 공격'이 발생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보는 사람도 있다. 최소한 미국에게 털리는 중에 뒤치기는 했을 듯하다. 이 경우에는 서부전선에서 미국과 영국에게 털리는 와중에 양면전쟁이 개시된다.[24]
당연히 소련 입장에선 대 독일 전쟁 계획이 없다고 하면 약화된 군과 없다시피 한 방어벽을 가진 채 떠오르는 태양인 독일과의 전쟁은 극구 피해야 할 것이다. 대 독일 전쟁 계획이 있다면 이쪽도 당연히 시간을 끌어야 한다. 이건 많은 시간도 아니고, 겨우 3~5년 정도만 있으면 대숙청의 여파에서 벗어나 안정을 찾을 가능성이 크다. 실제로 몰로토프가 회상한 바에 따르면 스탈린은 전쟁 준비를 하고 있었으며 "1943년에는 전쟁을 할 준비가 마련된다."라는 스탈린의 말을 들은 적이 있다고 한다.
스탈린이 독일에 선제 공격 가능성을 내 주는 한이 있더라도 최대한 전쟁을 피한 것은 이러한 까닭일 것이다. 소련에게는 좀 더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전쟁을 피하고 어떻게든 장기적인 계획을 가지고 가는 수밖에 없는 상황이니 스탈린 입장에서도 별 수 없었다. 물론 이런 상황 자체가 대숙청을 벌여서 어쩔 수 없던 거지만. 그리고 말 그대로 소련은 군수산업이 1943년부터 정점을 찍기 시작하면서 독일군을 압도적인 물량으로 파쇄시키기 시작한다.[25] 다만 예상치 못한 변수가 생겼는데 독일군이 동유럽에서 저지른 학살로 그 장비들을 이용할 군인 수 자체가 감소해버렸다(...).
스탈린이 보여준 우유부단함에 대해서는 또 다른 이유들도 있다. 우선 스탈린은 독일의 다른 적인 영국과 프랑스의 레지스탕스, 그 외에 폴란드와 같은 저항 조직들이 '''소련을 전쟁에 끌어들이려 거짓된 정보를 제공한다고 우려했다.''' 게다가 대숙청으로 인해서 소련의 중요 인재들이 쓸려나가서 소련의 정보 작전 능력은 굉장히 축소되었으며, 소련의 정보 장교들은 만약에 스탈린의 생각에 거슬리는 보고를 하게 될 경우에는 죽을 것이 빤히 보였다. 거기다 보고가 스탈린이나 히틀러를 자극할 것을 지나치게 우려했기 때문에 '''전쟁 발발 가능성을 담은 보고서들을 주작질로 왜곡시켜 스탈린에게 보고'''했다. 한마디로 스탈린이 원하는 보고서만을 보낸 것이다. 이는 독재정권의 고질적인 문제로 스탈린뿐만 아니라 히틀러와 역사적인 독재자들이 모두 그랬으며, 중요한 상황에서 패착을 맺는 요인이 된다.
게다가 독일 측의 기만책도 스탈린의 결정을 주저하는 데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우선 바다사자 작전이라는 영국 침공 계획은 바르바로사 작전을 가리는 바람잡이 역할로 사용되었는데, 독일 국방군 총사령부가 동부에서 창설된 부대는 사실은 영국의 정보부를 기만하기 위한 것이며, 독일은 바다사자 작전을 실행하기 위해 영국 폭격기와 정찰기가 닿지 않는 공간이 필요하다는 내용의 정보를 소련 측에 보란 듯이 알렸다. 특히 1941년 6월의 신문 기사에는 선전 장관이였던 파울 요제프 괴벨스가 영국 침공이 임박했다는 거짓 정보를 흘렸다. 물론 괴벨스는 배포된 신문을 바로 마치 소련이 보란 듯이 회수해 버렸는데, 이 행동의 목적은 이것으로 자신들이 정말로 영국을 공격하려 한다는 역정보를 흘리기 위해서 이러한 행동을 했던 것이다. 그리고 괴벨스는 자신이 저지른 일을 중요 군사 정보를 실수로 흘린 것처럼 위장하여 나치당 내에서 불명예를 얻은 것처럼 행동하였다.
한편 유고슬라비아 침공그리스 침공 또한 스탈린의 오판에 기여했다. 이는 그 동안 동부에서 독일의 새로운 부대가 편성된 이유를 그럴 듯하게 설명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바르바로사 작전 자체를 연기시킨 원인이 되었다. 그래서 원래 독일의 계획이었던 1941년 5월 15일에 독일이 침공할 것이라는 올바른 정보를 제공했던 정보원들이 이야기했던 날에 공격을 감지할 만한 어떤 낌새도 없이 그냥 지나가 버렸다. 그러자 스탈린은 제대로 낚여서 정보원들을 신뢰하지 못하였다. 이전부터 스탈린은 크고 작은 독일 침공 징후 보고가 계속되자 히틀러한테 전보를 보냈다. 대표적으로 1941년 3월 8일 "귀국이 소련을 친다고 하는 첩보가 들어오고 있고, 귀국 군대가 자꾸 동쪽으로 오는데 우리가 뭘 잘못했습니까?"하고 스탈린이 히틀러한테 전보를 보냈다. 히틀러는 3월 10일 보낸 답신에서 "우리가 동쪽으로 군대를 보내는 것은 그리스 및 유고슬라비아쪽을 ‘정리'하기 위함이며 소련이 우리의 계획을 도와준다면 발칸 반도에서 소련의 영향력이 될만한 장소를 제공하겠다."며 역으로 스탈린 입이 귀에 걸릴 페이크를 쳤다. 그리고 4월에 히틀러가 유고슬라비아-그리스 침공을 감행했고, 문제의 5월 15일은 아무 일도 없이 지나갔다. 그러자 스탈린은 히틀러의 말을 믿어버리게 됐다.
6월 하순이 되자 '''그 동안 보고되었던 수많은 위험 징후가 거짓으로 판명되면서''' 정보원들은 더 이상 스탈린과 그의 참모들에게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게 되었다. 이러한 정황을 보면 스탈린이 전략적 관점에서 허를 찔렸다는 사실이 보다 확실하게 이해가 된다. 그리고 1년 전부터 리하르트 조르게를 비롯한 스파이들이 정보를 보내왔다는 것 때문에 스탈린이 고집이 세고 무식한 지도자로 보이지만 저 말은 다르게 생각해보면 '''스파이들이 1년 동안 보내왔던 정보들은 거의 대부분 틀렸다는 이야기가 된다.''' 사실 엄청나게 많고 어지러운 징후들 사이에서 눈앞에 닥친 위험을 가려내는 것은 말이 쉽지 실제로는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그리고 나폴레옹러시아 원정에서 알 수 있듯이 러시아를 침공하려고 했을 때에는 러시아의 라스푸티차동장군을 우려하여 봄, 아니면 아무리 늦어도 초여름에는 러시아를 침공해야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하지만 독일군이 유고슬라비아 침공으로 발칸 반도에서 이미 시간을 허비해서 봄과 초여름이 지나 한여름이 되어 버리면 독일군이 들어오지 못한다는 것으로 판단하였다. 마침 1941년 이 해의 봄에는 유난히 비가 많이 오는 등 라스푸티차가 오래 지속되었다. 이 때문에 스탈린을 비롯한 소련군도 '만약 독일이 침공한다면 라스푸티차가 끝나는 즉시 공격을 행할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앞서 말한 유고슬라비아-그리스 침공 등으로 인해 소련 침공 자체가 연기되고, 곧바로 여름이 되자 스탈린은 '''"적어도 이번 해에는 들어오지 않겠지"'''라는 생각으로 독일군이 소련 내로 들어오지 못할 것이라고 안심해서 마음을 놓아 버린 것도 상당한 영향이 있었다.
게다가 1941년의 소련의 육군과 공군은 이제 막 전환기를 맞고 있었다. 조직과 지휘부, 장비, 훈련 병력 배치, 방어 계획 모두가 바뀌던 중이었다. 이 시기에는 괜히 공격에 나섰다가는 불안정한 상태의 군대가 공중분해되기 십상이기에 군이 완성될 때까지 시간을 벌어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허나 스탈린에게는 운이 나쁘게도 히틀러는 자신의 군대가 최상의 전력에 근접하고, 맞닥뜨리는 적이 가장 취약한 시점을 선택했다.
이런 점들을 생각하면 오히려 독일의 선제공격은 비교적 탁월한 선견지명이라고 할 수 있다. 언젠가 한 판 붙어야 할 적이 최고의 상황을 스스로 마련해 준 것.
요약하자면 스탈린이 대숙청이라는 희대의 삽질로 소련의 군사력 역량을 잔뜩 날려먹긴 했지만 뒤늦게나마 정신을 차린 스탈린은 언젠가 한판 붙을 것을 예상은 했고 나름 대응하려 했다. 그러나 독일의 노련한 교란 작전에 속아넘어갔고 독일군이 라스푸티차동장군을 우려하여 겨울에는 오지 못할 것이라 여겼기에[26] 1941년 가을에 쳐들어올 것을 예상하는 데 실패했다. 또한 대숙청의 여파에서 벗어나기 위해 스탈린은 시간이 필요했고 이 때문에 독일에게 최대한 배려하는 길을 택했으나 이는 커다란 재앙이 되었다. 만약 전쟁이 터지지 않거나 몇 년 늦게 터졌다면 스탈린의 도박은 성공했을 것이다. 그러나 히틀러는 독소전쟁을 1941년이라는 이른 시기에 시작해 버렸고, 스탈린에게 시간이 필요했다는 약점을 놓치지 않았다.
전쟁 초기 소련의 도박은 실패했고, 독일의 도박은 성공'''하는 것으로 보였다.'''

3. 참전국



3.1. 연합국



3.2. 추축국



4. 경과


[image]
[image]
히틀러 : "용서하시게, 동무. 하지만 놓치긴 너무 아까운 기회인걸 어쩌겠나!"[27]
프랭클린 루스벨트 : "눈물 좀 아끼라고, 아돌프, 그건 그냥 맛보기니까 말이야."[28]
히틀러 : (스탈린에게 얻어터지며) "아악! 이 살인마야!"
문서 참조.

5. 독소전쟁의 특징


  • 유례가 없는 대규모의 병력 동원 - 서부전선의 경우 가장 유명한 노르망디 상륙작전만 하더라도 연합군과 독일군 양측에서 야전군 병력들을 동원했고 아르덴 대공세 때가 되어서야 1개 집단군 규모의 병력들이 서로 맞붙었다. 그 유명한 사막의 여우 에르빈 롬멜도 몇 개 사단 규모의 아프리카 군단을 지휘한 수준이었다. 반면, 독소전쟁은 집단군 단위의 군 병력들이 총동원되었으며 특히 소련군은 어마어마한 피해에도 끊임없이 사단을 편성해 10개 전선군(집단군)을 투입했을 정도였다. 조공이나 기만 작전만 하더라도 몇 개 야전군 단위에서 1개 집단군 병력들이 동원되어 전투를 치렀을 정도로 독소전쟁의 규모는 차원이 달랐다.
  • 대규모 기동전 - 독일군은 대부분의 전차와 항공기들을 동부전선 방면에 투입했으며 소련은 어마어마한 공업 생산력 그리고 랜드리스로 마련한 수 많은 전차와 항공기들을 전부 독일 전선 방면으로 투입했다. 이러한 상황이다보니 중일전쟁이나 서부전선에선 꿈도 못꿀 수천대 단위의 전차들이 동원되는 대규모 전차전이 여러 번 벌여졌으며 또한, 기동 전력들이 총동원되다보니 병력의 기동 범위도 크게 넓어졌다. 그 덕에 독일군이 독소전쟁 이전에 보여주었던 전격전과는 차원이 다른 기동전이 벌여졌다. 바르바로사 작전 당시 독일군은 300만 명의 소련군을 섬멸하며 1500km의 거리를 진격해 모스크바 코앞까지 도달했으며 바그라티온 작전 당시 소련군은 단 2개월 만에 집단군 단위의 독일군 병력들을 갈아버리며 700km를 주파했다. 이러다보니 지휘관들의 작전 역량도 크게 발달했다. 독일군의 경우 임무형 지휘체계를 통해 하위 지휘관들이 자유롭고 창의적인 전술을 구사해 소련군의 반격을 격퇴했으며[29] 소련군은 대숙청 이후 사실상 마비된 미하일 투하쳅스키가 심혈을 기울여 연구한 작전술을 부활시켜 대규모의 병력들이 전선을 돌파해 독일군의 종심으로 침투할 수 있었다.

  • 대규모 화력 - 소련의 경우 포병을 중시하는 탓에 수 많은 카츄샤 다연장로켓과 곡사포들이 공세 이전에 독일군 방어선에 준비 포격을 가했고 포병사단까지 편제되어 각 제대에 연대급 단위 하위부대가 배속되는 형태로 운용되기도 했다. 이러다보니 독일군은 소련군의 어마어마한 포격에 큰 피해를 입어야 했다. 독일의 경우도 소련의 주요 대도시를 점령하기 위해 전투를 할 때 가용가능한 항공기들을 총동원해 초토화시켰고 그래서 레닌그라드스탈린그라드를 비롯한 소련의 주요 도시들은 완전히 폐허가 되었다. 서부전선과는 차원이 다른 고화력의 전투가 벌여지다보니 주요 전장이었던 독일 동부 도시와 폴란드, 소련의 주요 도시들이 완전히 쑥대밭으로 전락했다.
  • 역사상 유례가 없는 총력전 - 양측의 지도자들은 권위주의적인 독재자였고 자신의 목숨과 정권을 위해서라도 승리하기 위해 그야말로 국가의 모든 것을 쏟아부었다. 소련은 '어머니 러시아'와 조국을 지키기 위해 모든 인민들이 나서야 한다고 선전했고 자기 가족과 자기 땅을 침범한 적은 막아야 한다는 인식이 강했던 대다가 독일군의 학살 만행을 본 소련인들은 너도 나도 조국을 지키기 위해 나섰다. 대도시에서 벌여진 주요 전투마다 소련 인민들이 나서서 방어진지 공사를 도와주었으며 시골의 경우 청야전술을 실시해 그동안 수 백년 동안 대를 이어 살아오던 마을들을 스스로 불태워 없애버려 독일군이 물자를 현지 조달하지 못하도록 막았다. 일부 민간인들은 총기를 들고 파르티잔이 되어 독일군을 괴롭히고 다녔다. 우랄로 이전된 군수공업단지에선 모든 노동자들이 총동원되어 군수무기들을 생산했고 여군들은 100만 이상이 동원되어 단순히 지원 부대 뿐 만 아니라 저격수, 전차병, 조종사 등 일선 전투병과에 배치되어 맹활약했다. 심지어 범죄자들도 형벌부대에 배치되어 독일군의 총알받이가 되었다. 독일의 경우 강탈한 프랑스의 열차 3분의 2를 동부전선 방면에 투입했고 비시 프랑스로 부터 막대한 전쟁자금을 뜯어 냈다. 다른 점령지에서도 해당 점령지의 자원과 국부를 몽땅 동부전선에 투입했고 그 과정에서 점령지들은 경제적 타격을 입었다. 전쟁 막바지가 되자 장애인과 노인, 심지어 어린이까지 몽땅 동원해 히틀러 유겐트, 국민돌격대에 집어넣어 소련군을 어떻게든 막으려고 했다.

6. 전쟁이 남긴 것



6.1. 엄청난 인명 피해와 잿더미가 된 두 나라


'''거의 60년 동안 전 세계에 참사들이 더 쌓인 뒤에도 여전히 소련인들이 겪었던 고통을 그저 듣기만 해도 상상력이 마비되어 보잘것없게 된다.'''

- 리처드 오버리, <스탈린과 히틀러의 전쟁> p.385

소련은 세계 2위 경제대국이자 공업대국이었고 독일 역시 세계 3위 경제대국이자 고도화된 공업 국가였다. 이렇게 모두 국력이 강한 강대국이었고 당시 양국지도자 모두 인명경시 사상이 강한 상태에서 총력전이 벌어졌으니 당연히 막대한 인명 피해가 발생하였다.
매년 독일의 한 위원회는 구 동독 지역과 서부 러시아를 방문하여 매년 3~4만명 가량의 독일군 유해 발굴을 하고 있다. 관련기사 독소전에서 독일군은 300만명이나 죽었지만 아직 그 1/4도 안 되는 71만명의 유해밖에 돌아오지 못했다.
러시아에선 민간 봉사자를 중심으로 소련군 유해를 발굴 중인데, 2014년에 600개의 발굴 그룹이 참여하여 50만명의 병사를 찾아 다시 이장했다.관련기사 하지만 아직까지 13.7%밖에 되지 않는 유해밖에 돌아오지 못했다.

6.1.1. 소련


  • 소련 측 피해
A: 군인 피해
동원군인 총수
29,574,900
동원군인 총수(기타 정부부처 포함)
34,476,700
총 손실(사망/전쟁포로/행방불명)
11,444,100
전사, 부상으로 인한 총 사망자 수
6,885,100
행방불명/전쟁포로 총수
4,559,000
1941~1945년 사이의 사망자 총 수
8,688,400
의학상
사상자 총수
18,344,148
부상/심리장애
15,205,692
질병
3,047,675
동상
90,880
B: 민간인 인명 손실 추산
소콜로프(Sokolov)
민간인 사망자 총 수
16,900,000
코롤(Korol)
민간인 사망자 총 수
24,000,000
코즐로프(kozlov)
인구학적 총 손실
40,000,000
쿠르가노프(Kurganov)
인구학적 총 손실
35,500,000
소련은 전쟁 중 공식적인 수치로 '''2,900여만 명'''이 사망했으며[30], 이는 공식적으로 인정되는 2차 세계 대전 사망자 5,000만 명의 60%에 달하는 수치다.[31] 인구가 적지 않았던 40년대 일제강점기하의 한반도 인구가 2,500만 명, 세계 인구는 25억 명 정도였음을 감안하면 일반적인 인구를 가진 국가가 소멸할 정도의 인적 피해를 입은 것이다.
소련에서 동원된 남녀 3,450만 명 중 약 84%가 죽거나, 다치거나, 사로잡혔다. 민간인 약 2천만 명, 군인 약 1,128만 명이라고 하는데[32] 이 수치라면 바르바로사 작전이 개시된 1941년 6월 22일부터 베를린이 함락되어 사실상 독일이 끝난 45년 4월 30일까지 '''하루 평균 민간인 약 1만 4천명,[33] 군인 6,500명이 죽었다. 하루 평균 2만 명이 넘는 수치다.
역사학자 제프리 A. 호스킹(Geoffrey A. Hosking)에 따르면, 소련인은 높은 사망률로 인해, 1940년대 말의 젊은이는 적었고, 1939년 이후 소련이 예측한 인구인 4,500만-5,000만 명보다 적을 정도로 전체 손실은 높았다. 또한 전쟁으로 인해 여초 현상이 대단히 심각하게 발생했는데 종전 후 소련 인구 중 10대 후반~40대 남녀 성비가 4:7이었다, 인구손실은 1950년대 베이비붐으로 대강 해결했지만[34] 영향이 꽤나 오래 갔으며, 1930년대-40년대에 출생한 사람 가운데서 한창 자랐을 때 아버지 없이 자란 경우도 많다. 물론 오랜시간이 흐르며 여초현상은 대강 해결되었지만, 음주문화의 영향으로 현재도 러시아는 상당히 심각한 수준의 여초국가이다.
게다가 소련은 전쟁으로 모스크바 서쪽의 거의 모든 기간 설비와 공업 시설이 파괴되었으며, 농지와 마을, 인프라의 파괴도 심각했다. 도시 1,710개, 촌락 70,000여 개, 2,508개 교회, 31,850개 산업 시설, 4만 마일(64,373.76km)의 철도, 4,100개 철도역, 4만 개의 병원, 8만 4,000개 학교, 4만 3,000개 도서관이 초토화되었다. 집을 잃은 인원은 2,500만 명 정도였고, 약 국부의 1/3 이상이 손실되었다. 가히 멸망되지 않은 것이 정말로 기적인 나라 같다.
이처럼 나치독일은 소련에서 민간인 학살, 강간을 넘어 아예 그들의 공동체를 파괴하고 절멸을 시키려고 했다. 독소전쟁 동안 민간인만 하루 평균 1만 4천명, 도합 2천만명 이상 독일군에 의해 학살당했고, 심지어는 학살된 사람들이 한 곳에 묻혀서 해골과 시체로 지층이 만들어질 정도였다. 독일의 전쟁범죄는 심하고 차원을 달리 했는데 이는 단순히 나치독일슬라브 민족을 지배하겠다는 것이 아니고, 그들 모두를 없애버리는 것을 목표로 삼았기 때문이다.[35]
또한 수많은 소련의 여성들이 독일군에게 강간을 당했는데, 이런 소련군의 범죄를 다루는 독일 영화 베를린의 여인에서는 "독일군이 소련에서 한 일의 1/10만 소련군이 해도 독일인은 다 죽는다"는 대사가 있을 정도다.
소련군의 군사적 피해도 막대했다. 전차, 돌격포, 자주포만 '''9만 6500대를 손실했으며''' 3만 7000여대의 기타 기갑 차량도 손실했다. 항공기도 10만 2600대를 손실하는 어마어마한 피해를 입었다. 그럼에도 소련은 어마어마한 생산력으로 무기들을 계속 생산하고 거기다가 미국과 영국의 랜드리스를 통해 군사력과 전투력을 금방 회복할 수 있었다. 특히 우랄로의 산업 이전을 통해 소련 군수공장들은 안전하게 대규모의 전쟁 장비들을 생산할 수 있었고 연합군에게 전략 폭격을 두들겨 맞아 초토화되가는 독일의 군수 공업 역량보다 당연히 우위에 있을 수 밖에 없었다. 결국 이러한 역량을 기반으로 소련군은 나치 독일에 대한 반격을 성공하다 못해 나치의 심장부 베를린까지 점령할 수 있게 되었다.

6.1.2. 독일


* 독일 측 피해 - 정확한 검토 및 근거 게시 요망.
독일 국방군 인명 손실(1939년~1945년)
영구 손실(사망, 실종, 영구 장애)
1939년 9월 ~ 1942년 9월 1일
922,000(총 인원 중 14%)
1942년 9월 1일 ~ 1943년 11월 20일
2,077,000(총 인원 중 30%)
1943년 11월 20일 ~ 1944년 6월
1,500,000(추정 인원)
1944년 6월 ~ 11월
1,457,000
1944년 12월 ~ 1945년 11월
2,000,000
총 손실
1945년 4월 30일까지 총 손실
11,135,800
(부상자 포함,
동원된 총 병력의 75%,
1939년 당시 남성 인구의 46%) [36]
'''나치 독일에게는 이 전쟁은 말 그대로 파멸로의 행진이었다.''' [37] 전체적으로 보면 약 320만 명으로 추산되는 독일군 전사자 및 기타 사망자 중에 280만여 명이 소련과의 전쟁에서 전사하거나, 포로 수용소에서 죽었다.
후술되는 전쟁범죄 항목에 소련측 만행도 독일이 까발린게 아니라 나중에 미국, 영국의 역사학자들이 밝혀낸 것들이며 소련측의 만행은 정작 독일도 굳이 꺼내려고 하지 못했던 민간사안이었던만큼 조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채 묻어갔기에 조사하면 더 나올 가능성도 적지 않다.
하지만 이 모든 비극의 시작은 독일이 소련을 침공하면서 생긴 비극이라 당시 연합군측에서도 소련군의 범죄에 동조적이었다. 나치패망 얼마전 힘러가 휴전 특사로 소련군의 만행을 연합군에게 알리며 소련군 통제를 부탁했으나 당시 영국군 몽고메리가 독일이 소련에 저지른 만행을 언급하며 힘러의 제안을 비웃으며 거절했을 정도.
서독 정부 통계청에선 1958년, 조사 결과 '''222만의 독일 민간인이 소련군의 군사작전, 전쟁범죄, 강제노동으로 인해 사망'''했다고 발표했다. 다른 공식 통계 자료에서도 최소 200만 이상의 독일 민간인이 소련군에 의해 살상당한 것으로 추산되었다. 이는 연합군이 독일 본토 항공전으로 살상한 독일 민간인 63만명보다 훨씬 많은 수치이다. 이외에도 전후 NKVD가 운영한 정치범 수용소에서 4만 3000명의 독일인이 사망했다. 거기다가 연합군의 전략폭격으로 인해 이미 초토화되었던 베를린을 비롯한 동부의 주요 독일 대도시들은 소련군의 어마어마한 준비 포격 세례와 공습 그리고 소탕 작전에 의해 완전히 무너져내렸다. 쾨니히스베르크는 도시의 90%가 파괴되고 소련군에 의해 독일 주민들이 쫒겨나야했다. 베를린은 도시의 80%가 파괴되고 인구도 반토막이 나야 했다. 이외에도 슈테틴은 도시의 65%, 산업시설의 95%가 파괴되고 다른 동부 독일 도시들도 연합군의 폭격과 소련군의 군홧발 아래에 전체 도시의 50~80%가 초토화되었다.
군사적 손실도 막대했다. 소련 측 통계자료에 의하면 독일군은 전차 4만 2000대와 자주포/대전차포/박격포 37만 9400문, 항공기는 7만 5000대를 상실해야 했다. 독일측의 공식 자료에서도 1941년 부터 1944년 까지 3만 3000대의 기갑 차량이 손실되었다. 이는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 장비 손실량의 '''3분의 2에 해당하는 수치였다.''' 이러다보니 안그래도 비효율적이고 소련에 비해 다품종 소량 생산 일색이었던 독일의 전쟁 수행능력에 일격을 가했으며 거기다가 연합군의 전략폭격으로 군수공업 단지가 초토화되면서 수 많은 장비를 잃어도 또 그만큼 생산해 회복하는 소련과 달리 독일의 장비 손실은 결코 회복되지 않았다. 결국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 작전이 성공하고 서부전선이 형성되자 독일은 양면 전쟁을 감당하지 못하고 몰락할 수 밖에 없었다.

6.2. 초토화된 동유럽


독소전쟁은 독일과 소련 뿐 만 아니라 동유럽 지역 일대에도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특히 폴란드의 경우 주로 독일에 의해 '''580만 명의 민간인이 학살당했다.''' 카틴 학살 외에도 바그라티온 작전바르샤바 봉기,비스와-오데르 대공세로 인해 전국토가 전쟁터로 전락했다. 폴란드 최대 도시이자 수도인 바르샤바는 도시의 85%가 파괴되었고 다른 대도시들도 철저히 파괴되었다. 주요 공업지대들도 연합군의 공습과 소련군의 공격으로 초토화되었다. 현대 미화로 환산할 시 '''8500억 달러(한화로 928조원)의 경제적 피해를 입었을 것으로''' 추산된다. 체코슬로바키아도 32만의 민간인이 살상당했다. 에스토니아는 12만 명의 사망자, 라트비아는 13만 명의 사망자, 리투아니아는 24만 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유고슬라비아에선 크로아티아 독립국우스타샤 그리고 세르비아계 체트니크에 의해 벌여진 조직적인 인종 학살로 인해 50만에서 최대 100만이 넘는 민간이 살상당했다. 독소전쟁의 주요 전장 중 하나였기에 전국토가 전쟁터로 전락했으며 소련군이 점령한 이후엔 소련군이 현지 주민들을 마구잡이로 약탈하거나 강간, 학살을 자행하기도 했다. 경제적 피해도 470억 달러(1938년 미화 기준)으로 막대했다.

6.3. 초강대국으로 등극한 소련과 스탈린 신격화


종전 후 소련은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전공으로 미국과 대등한 위치에 올라서면서 세계를 반분한 초강대국으로 인정받았다. 또 1차대전-적백내전을 거치며 상실한 옛 러시아 제국의 영토를 대부분 수복한 것은 물론, 독일 및 추축국에게서 영토를 할양받아 병합했다. 그리고 승전국의 위치로 인해 국제연합에서 상임이사국의 지위를 획득할 수 있었다.
스탈린은 승전을 이용해 자신을 완벽히 신격화하는 데 성공했다. 심지어 초반의 패배도 "스탈린 동지께서 저 얍삽한 나치 놈들을 함정에 빠뜨린 것"으로 포장할 정도. 스탈린의 공과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도 의견이 갈린다. 스탈린 격하 운동을 주도한 니키타 흐루쇼프는 "스탈린이 있었음에도 우리는 승리했다." 고 주장하며 스탈린의 역할을 매우 축소했다. 스탈린의 독재 체제를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들도 이런 식으로 말할 때가 많다.
그러나 대체로 러시아인들은 스탈린이 초반에 여러 심각한 병크를 저지르기는 했으나 소련의 승리에 기여했다고 보는 사람들이 많다. 게오르기 주코프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스탈린의 고집으로 인한 여러 병크들인 대독 경계령 발동 금지, 키예프 후퇴 불허, 모스크바 공세 이후 무리한 반격 작전을 지시하여 전력 낭비를 야기한 것들을 나열하기는 했지만, 여러모로 볼 때 스탈린이 독소전의 승리에 크게 기여한 것은 틀림없다고 밝혔다. 예로써 공장을 통째로 뜯어서 우랄산맥 근처로 옮겨버린다던가, 인민을 끝없이 징병한다던가하는 무지막지한 명령들은 총력전 승리의 밑바탕이 되었다.
특히 전후 처리에서 영미와 유리하게 흥정을 하여 소련이 초강대국으로 나설 수 있게 된 것은 스탈린의 공이 분명했다. 물론 실제로 전쟁에 참전한 장성들에게 돌아가야 할 공들을 스탈린이 가로챈 것은 사실이며, 정치적 야심을 의심받은 주코프는 한직을 맴돌았다.[38] 전쟁 전부터 우상화가 진행되고 있었던 스탈린은 전쟁 후에는 여기에 군사적 커리어까지 더한 완벽한 위대한 영도자로 숭배 받게 됐으며 그의 이름은 소련에서 신과 다름없게 되었다.

6.4. 독일의 분단과 영구적 영토 상실


[image]
분홍색 부분이 폴란드 영토로 귀속된 독일 영토이다.
[image]
소련 영토로 귀속된 쾨니히스베르크. 칼리닌그라드로 개명되었다.
[image]
뮌헨 협정으로 독일 영토로 귀속되었으나 다시 체코슬로바키아 영토로 회복된 주데텐란트 지방과 보헤미아,모라비아 지방.
[image]
연합군 점령하 오스트리아
나치스는 비단 자신들만의 정권뿐만 아니라, 역사적 독일이 동유럽과 가지고 있던 깊은 관계와 유산마저 날려버렸다. 예를 들어, 과거 제1차 세계 대전 패전 후에도 유지했던 동프로이센과 동부의 몇몇 주를 상실했다. 전승 국가인 소련은 독일의 폴란드 침공 당시 집어삼킨 폴란드의 동쪽 영토를 그대로 차지하고, 대신 폴란드를 달래기 위해서 오데르-나이세 선을 국경으로 설정하여, 독일의 동부 영토를 폴란드에 넘겨 주었다. 이에 따라 오데르 강 동쪽의 독일 영토 서프로이센, 슐레지엔, 포젠, 포메른동프로이센이 폴란드 영토로 귀속되고, 이 지역에 거주하던 대다수의 독일인들은 추방당했고 남은 소수의 독일인들은 폴란드계로 흡수되었다. 그리고 동프로이센의 중심 도시 쾨니히스베르크는 소련의 칼리닌그라드가 되었다. 이 중 쾨니히스베르크, 슈테틴, 스톨프 같은 도시들이 위치한 동프로이센, 동부 포메라니아 지방 같은 곳은 역사적으로 중세부터 독일계 국가의 땅이었거나, 그단스크 같이 딱히 한 나라가 독점적으로 영유권을 주장하기 힘든 지방도 적어도 독일계 상인, 지식인들이 큰 영향력을 발휘하던 지방이었다.
직접적으로 폴란드에게 영토를 뜯긴 것 뿐만 아니라 애초에 2차 대전 자체의 서곡을 장식한 현대 체코주데텐란트 지방, 중세 독일기사단령 시절부터 독일계 국가들이 지배하거나, 적어도 사회-경제적 엘리트로 군림했던 쿠를란트 등의 발트 3국, 역시 수백년 동안 독일인들의 집중 이민으로 큰 독일계 영향력이 있던 트란실바니아의 독일인 등, 천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독일인들이 동방으로 진출하며 일구어 왔고 문화적, 사회적 영향력을 짙게 발휘했던 지역 모두에서 일괄적으로 독일인들이 싸그리 추방당하여 종전 이후의 독일은 아예 자신들의 지정학적 역사와 뿌리째 단절돼 버린 절름발이 정체성을 가지게 되었다.
전후 독일은 철저히 나뉘어, 상당한 수의 독일계가 살고 있고 나치 독일과 합심하여 연합까지 한 오스트리아는 아예 다른 살림을 차리면서 나가게 되었고 독일 본토도 동독과 서독으로 분단되었다. 온 유럽을 만신창이로 만든 대가로 본인들도 갈래갈래 찢기게 된 것. 동서독 분단 이후 동유럽 공산권에 강경한 태도를 취하던 서독은 오데르-나이세 선을 인정하지 않고 바이마르 공화국 당시의 국경선을 주장했으나, 1970년대 동방정책 과정에서 폴란드와 외교 관계를 수립하면서 이 주장을 철회하였다. 결국 1990년 독일 재통일시 구 영토를 포기하기로 결정하여 이 지역을 영구 상실하였다.
결국 독일은 패전 이후 소련, 미국에 의해 국가가 분단되어 서독동독이 45년간 대립하는 초유의 경험을 하게 되었다. 나치와 전혀 관계 없는 1차 대전을 넘은 이전 프로이센의 군사적, 역사적 전통마저 굉장히 껄끄러워 하는 현대 독일의 내셔널리즘에 대한 컴플렉스는 결국 나치에 의한 역사적 경험이 근간에 자리잡고 있다.

6.5. 소련의 위성국으로 전락한 동유럽 국가들


나치 독일 뿐 만 아니라 독일 편에 서서 소련을 공격했던 헝가리 왕국, 루마니아 왕국, 불가리아 왕국, 핀란드 공화국은 물론 폴란드 제2공화국이나 체코슬로바키아, 유고슬라비아 왕국 등 소련군한테 점령당한 동유럽 국가들도 영 좋지 못한 신세가 되었다.
  • 루마니아 왕국은 헝가리에게 빼앗겼던 북부 트란실바니아 지역은 돌려받았지만 소련한테 빼앗겼지만 독소전쟁 때 소련에게 잠시 되찾았던 몰도바,베사라비아와 북부 부코비나 지역을 소련에게 영원히 잃어버렸다. 또한 왕정이 붕괴되고 소련의 위성국인 루마니아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체제가 바뀌어야 했다. 인명 피해도 적지 않아 30만의 군병력이 전사하고 20만의 민간인이 살상당했다.
  • 핀란드 공화국은 그나마 위성국 신세는 면했지만 겨울 전쟁 때 잃어버린 영토를 되찾지 못한 것은 물론 페첸가 일대의 영토를 소련에게 추가 할양하면서 겨울 전쟁 이후보다 영토가 작아지게 된다. 그리고 냉전 시절엔 친소 중립국으로 소련의 눈치를 보며 지내야 했다. 군병력 9만 4000여명 전사, 민간인 2100명 사망으로 겨울전쟁부터 5년 넘게 전쟁을 치러왔다는 점을 고려하면 다른 추축국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인명피해가 적었지만 370만 명에 불과한 당시 핀란드의 인구를 생각하면 인명피해가 작은 것은 절대 아니다.
  • 폴란드폴란드 침공으로 독일과 소련한테 분할되어 점령당한 후 두 나라가 저지른 전쟁범죄의 희생양이 되었고 전쟁 후반 소련군이 서쪽으로 진격해오면서 전장으로 전락해 전 국토가 초토화되었고 그 과정에서 민군 합쳐서 인구의 17%에 달하는 600만 명이 사망하면서 제2차 세계 대전의 최대 피해국 중 하나가 되었다. 런던으로 망명한 폴란드 망명정부와 폴란드 국내군이 서방 연합군 측에 가담하여 추축국에 맞서 싸웠으나 카틴 학살을 계기로 폴란드 망명정부와 사이가 틀어진 소련은 폴란드를 점령한 후 망명정부를 무시하고 위성국인 폴란드 인민 공화국을 세웠다. 또한 소련은 전후 질서 재편을 이유로 폴란드의 국경을 임의로 바꾸어 버렸는데 칼리닌그라드를 제외한 오데르-나이세 선 이동의 독일 영토를 선심 쓰듯 넘겨주고 커즌 라인 이동의 폴란드 영토를 모조리 합병한 후 그곳에 살고 있던 폴란드인을 모조리 추방시켜 버렸다.
  • 이탈리아 왕국의 경우 애초 소련과 거리가 멀기도 했고 소련은 이탈리아에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 전후엔 당당한 NATO의 한 일원이 되었다. 그래도 이탈리아의 독소전쟁 참전 과정에서 이탈리아 군병력 3만 명 전사, 5만 4000여명의 포로가 수감 중 사망 등으로 이탈리아군 전체 사망자의 4분의 1 수준의 군 병력 사망자와 부상자, 포로 등이 발생하면서 결국 이탈리아 전선 붕괴에 적지 않게 이바지되었다.

6.6. 전쟁범죄와 피의 보복


전쟁범죄와 그에 따른 보복 측면에서도 독소전은 최악을 달린다. 나치독일은 점령 지역에서 소련군 포로[39] 소련 영토에서 살고 있던 주민들을 대상으로 끊임없이 학살을 자행했고, 그 지역의 유대인을 대상으로 한 홀로코스트 역시 꾸준히 자행되었다. 게다가 아인자츠그루펜은 똑같이 학살과 전쟁범죄를 저지른 독일 국방군무장SS 사단들에게도 '독일군의 수치'라는 말을 들었을 정도다. 물론 그걸 열심히 도와주고 자기들도 열심히 똑같은 짓을 하고 다닌 국방군이나 무장친위대가 할 말은 절대 아니지만. 이렇게 처절한 전쟁범죄 때문에, 지금도 벨라루스를 비롯한 동유럽 일대에는 전쟁 당시 학살당한 사람들의 유해로 지층이 이루어진 곳도 있다.
독일군에 의해 체계적으로 행해진 소련 영토내의 초토화 작전 또한 대표적인데 빨치산 토벌, 소련내 저항 세력 약화라는 전략적 목적으로만 알려졌으나 이후 연구가 진행되면서 슬라브인 말살이라는 나치 독일의 홀로코스트적인 목적도 있었음이 밝혀진다. 한마디로 나치 독일은 슬라브인을 제거해야 하는 말살 대상으로 본 것이다.
물론 소련군 또한 전쟁 초반부터 독일군 포로들에 대한 잔혹한 보복이 있었으며[40] 소련이 주도권을 잡고 독일 국내에 진입한 후에는 지휘부의 통제에도 불구하고 아예 민간인들을 대상으로 한 다수의 약탈 및 강간과 같은 보복성 범죄 행위가 발생하였다. 베를린 공방전 당시 모든 희망을 잃고 항복만을 선택할 수 밖에 없었던 독일군이 저항한 원인 중 하나로, 소련군의 보복을 피해 민간인들과 잔존 병력이 상대적으로 훨씬 안전한 서방 연합군 점령 지역으로 탈출할 때까지 킹타 5대와 국민돌격대와 같이 한 줌도 안 되는 병력, 장비로 승리가 아닌 시간을 벌기 위해 싸워야만 했다.
실제로 소련에 포로로 잡힌 독일군의 사망률은 서방 연합군에 잡힌 포로의 사망률보다 훨씬 높았다. 민간인을 대상으로 범죄를 저지르는 것도 점령 초기에 제대로 통제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2000년대와서도 소련의 포로 대우가 굉장히 나빴다는 내용의 주장이 미국, 영국, 독일 등의 학자들로부터 제기되고 있는 상황이며 어느 정도의 논란도 있지만 그래도 한 번은 참고할 만 하다. 하지만 러시아에서도 부정하기도 하지만 '그래 맞아, 하지만 나치 독일놈들이 러시아에서 벌인 학살과 온갖 약탈 등에 견주면 저런 포로 대우는 차라리 낫다.'나 '싸그리 죽이지 않은 것만으로도 고마워해야 할걸?' 같은 방식의 반발적인 태도도 많다. 사실 전쟁 기간에도 독일 민간인들이 전쟁의 고통을 호소할 때 영미연합군은 어느 정도 죄책감을 느끼기도 했다는 묘사도 있는 반면 소련군은 "먼저 쳐들어 와서 우리 가족들을 다 죽여놓고 뭐가 어쩌고 어째?"라는 반응도 많았다. 그럼에도 소련의 약탈들이 나치의 약탈에 비해 잘 조명되지 않았던건 소련의 약탈들은 대부분 조직적이라기보단 우발적이고 감정적으로 발생한 것들이 많았으며, 나치의 학살과 약탈들의 목적도 규모도 더 잔혹하고 대부분의 학살이 공식적인 명령 체계들로 인해 수행되었기 때문에 주목을 받기 힘들었던 측면도 있다.[41]
가령 스탈린그라드 전역에서 항복한 9만명 가량의 독일군 포로들은 수용소로 끌려갔으며 포위 도중 질병, 굶주림에 시달리고 제대로 치료받지 못한 부상병들이 많았다. 상처 악화, 악화된 전시경제로 인한 배급 부실, 학대, 특히 1943년 봄 유행한 티푸스로 대부분이 사망했다. 이 포로들 가운데 살아서 독일로 돌아온 자는 6,000여 명에 불과했다.[42]
이외에도 '''독일 여성 200만 명이 소련군에 의해 강간당했다.''' 베를린에서만 10만 명이 넘는 독일 여성들이 소련군에 강간당했고 동부 유럽 일대에서도 100만 이상의 독일 여성들이 소련군에 의한 조직적인 성폭행을 당했다. 1945년~1946년 사이 전시강간으로 태어난 독일-러시아 혼혈 신생아가 3.7% 수준일 정도였다.
  • 바르샤바 봉기 당시의 학살
    • 볼라 학살 - 독일군이 폴란드인 4만-10만여 명 학살한 사건
    • 오호타 학살 - 독일군이 폴란드인 1만여 명 학살한 사건
  • 리디체 학살 -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의 암살에 대한 보복으로 체코슬로바키아 리디체에서 체코 민간인을 학살한 사건
  • 벨라루스 초토화작전
  • 슬로바키아 민족 봉기 당시의 학살
  • 볼히니아 학살 - 1943-45년에 걸쳐 친독 우크라이나계 조직이 폴란드계 민간인 10만여 명을 학살한 사건
  • 정치장교 지령 - 독일군에 붙잡힌 모든 소련군 정치장교들의 즉결 처형 명령
  • 집시 대학살 - 포라이모스(Porajmos)라고 불리며, 유럽 전 지역에서 진행된 집시인 대량학살로, 약 30만 명[43]의 집시가 나치 독일과 그 동맹국(우스타샤, 루마니아 등)에 의해 학살된 사건. 유대인들은 학살 직후 관심이라도 받았지[44], 집시는 전후에도 사회적 위치도 낮은데다 규모도 상대적으로 작아서 묻혀버렸다.
  • 나치 독일의 소련군 포로 학대 - 서방연합군 장병이 포로가 된 경우 제네바 조약에 따라 보호와 대우를 받았지만, 소련군 포로에 대해서는 소련 정부가 제네바 조약을 비준하지 않은 것을 명목으로 학대가 행해졌다. 러시아인용 수용소(Russenlager)의 대부분은 수용 시설 자체가 존재하지 않고, 평야철조망과 감시탑으로 분할한 것이 전부였다. 비바람과 혹서, 혹한에 노출된 포로들은 구멍을 파고 견디는 수밖에 없었다. 경비병에 의한 폭력, 학대는 다반사였고, 하루 식량은 수백 칼로리에 불과했으며, 모두 영양실조로 고통받았다. 최악의 경우는 아예 학살되거나, 강제 수용소와 절멸 수용소(특히 유대계)로 끌려갔다. 아직까지도 그 수치는 미상으로 남아 있지만 기본적으로 백만 단위 이상이 희생당한 것은 확실하다. 그 참상을 옆에서 보다 못한 미군 포로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몰래 이들을 돕기도 했다
  • 홀로코스트
  • 페오도시야 학살 - 1941년 12월 29일 소련 해군 보병대가 크림 반도 페오도시야에 상륙해 독일군 병원을 점령, 포로 160명을 죽인 사건. 저체온증으로 죽을 때까지 중상자들에게 물을 쏟아붓거나, 창문으로 내던지고 심지어 성기를 훼손시키는 등 끔찍하게 죽였다. 1983년 서독 라디오에서 이 사건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방영하였다. 헤르베르트 브루네거의 자서전에서도 이 사건을 목격한 장병의 증언담이 서술된다.
  • 네멜스도르프 학살 - 소련군이 독일로 진입하면서 동프로이센 국경에 있던 굼비넨 남서쪽의 네멜스도르프 마을 주민 72명, 프랑스 및 벨기에 포로 50명을 학살한 사건. 나중에 독일군이 마을을 탈환하면서 발견됐고, 괴벨스가 소련군의 악랄함을 선전하기 위해 프로파간다로 사용했다.[45]
  • 폴란드 주민 강간 - 독일과 소련 양국이 저지른 문제. 독일이 점령기간 동안 적지 않은 수의 폴란드 주민들을 동원·학살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으나, 독소전쟁 후반기 폴란드에 진주한 소련군이 현지 주민들을 강간하거나 약탈한 사건들도 규모가 크다. 당연히 폴란드의 역사서들에서는 양측 모두의 범죄를 자세히 기술하며 규탄하고 있으나, 구 소련이나 현 러시아에서는 군인들의 일탈이라는 이유로 침묵하는 중이다.
  • 부다페스트 약탈 - 부다페스트 공방전이 끝나고 소련군과 루마니아군이 저지른 강간, 약탈 사건.
  • 프라하 학살 - 1945년 5월 10일 프라하에서 체코인들이 독일 민간인들을 대상으로 벌인 보복 학살.

6.7. 번외: 독소전쟁 시기의 동물들


독소전쟁은 동물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사람만 죽은 것이 아니었다. 말 700만 마리, 염소 1700만 마리, 돼지 2000만 마리, 양 2700만 마리도 식량 용도로 도살되었고, 중앙유럽 ~ 러시아권의 침엽수림 등지에서 서식하던 수많은 야생 동물들도 영향을 받았다. 독일군과 소련군의 공세에 앞선 포격에 수 많은 나무들과 동물들이 휩쓸려나갔고 이를 피해서 수 많은 동물들은 그나마 분쟁이 덜한 중앙 아시아 지역과 유럽의 안 쪽 지역으로 도망갔다. 1939년부터 시작된 소련의 서부 진출부터 시작하여 1943년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부터 시작된 소련의 서부 공세로 인해 러시아와 동유럽의 '킬링 존' 지역에 있던 늑대 무리들은 유럽 내로 도망을 갔고, 1968년 도버 해협까지 진출하면서 점차적으로 서유럽으로 이주하였다.[46]

6.8. 의의


독소전쟁 초 처칠을 포함한 연합국 지도자와 추축국 지도자는 소련이 기껏해야 3개월 안에 나치 독일에게 패배한다고 예상했다. 그러나 쉽게 무너질 것처럼 보였던 소련은 나치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방어하였고, 급기야는 반격에 나서다 마침내 유럽전선의 마침표를 찍어 소련의 국력이 제정 러시아와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특히 이 전쟁은 국가의 모든 기능을 투입한 총력전이라는 단어를 현실화한 전쟁이다. 그리고 냉전 시기 내내 미국과 서유럽은 소련의 불굴의 투쟁 정신과 무지막지한 기갑 웨이브에 공포를 떨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 전까지 한동안 유럽 본토에서는 서부전선은 섬에서 버티는 영국과 스위스 등의 중립국을 제외하고는 추축군이 다 장악해 버렸고, 북아프리카를 제외하면 동부전선만이 유일하게 지상전이 벌어지는 장소였다.
그래서 러시아인들은 일개 야전군 수준의 수만 명이 맞붙었던 서방의 엘 알라메인 전투 승리나 동부전선의 승패가 거의 결정된 후 벌어진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제2차 대전의 전환점이었다는 서방 연합국 측 주장에 대해 코웃음을 치고 있다. 주코프 회고록에서도 전후 화기애애한 분위기의 연합국 지도자 간 회동에서 버나드 로 몽고메리가 소련의 스탈린그라드 전투와 함께 엘 알라메인 전투가 전쟁의 전환점이었다고 말하자 자기는 화가 나서 그것을 반박했다고 나와 있다.
1980년대 한국에서 공식적으로 전쟁사를 연구하는 거의 유일한 기관인 육군사관학교가 펴낸 '세계전쟁사'에서는 냉전을 의식해 소련군을 의도적으로 깎아내리기 위한 서술이 많이 보인다. 예를 들어 소련군의 승리는 추운 겨울이나 히틀러의 전략적 오판 때문에 어부지리로 얻어졌다는 식이다. 물론 추운 겨울은 병력의 운용에 지장을 주지만 독일군만 추위를 타는게 아니라는걸 간과하고 있다. 결국 추위 때문에 졌다는건 상대는 거기에 대비했지만 자신들은 거기에 대비하지 않았다는 이야기일 뿐이다. 그리고 히틀러의 오판은 맞는 말이지만 독일군 내에서 히틀러만 오판을 저지른것도 아니고 그런식으로 따지면 독일의 초반 승전의 공로를 스탈린의 트롤링으로 돌려야할 판이다. 이런 설명은 소련군의 기량 상승이나 2천만에 달하는 희생 등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는 것.[47] 다만 무조건 그렇지만도 않은 게 소련군의 손실 부분은 오히려 현대 사가들이 주장하는 1천만 명 사상보다 좀 더 낮춰서 잡았고, 1944년 이후로는 소련군에 대해 칭찬 일색이다.[48] 다만 독소전쟁 초반부에는 아무래도 소련군을 폄하하는 서술이 많다. 그러나 최근 조사에 따르면 나치 독일 전력 80%를 증발시킨 소련군의 기여를 인정하는 추세다.
어쨌든 제2차 세계 대전의 연합국 승리에 소련과 소련군이 큰 기여를 했다는 사실 자체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또한, 기나긴 역사 동안 있었던 영국의 세력과 러시아 세력의 상호 견제가 종국에는 러시아 세력(소련)의 승리로 끝나게 된 계기이기도 했다. 전간기 영국 총리 네빌 체임벌린의 대독 유화정책 배경의 주 요인에는 소련 견제가 있었을 정도로 20세기 이후에도 영국은 소련의 진출을 견제하기 위해 각별히 신경썻다. 영국의 보수파 각료들은 나치 독일을 키움으로써 소련의 부상을 저지하고 대영제국으로서의 자국의 위신을 지키고 싶어했다. 그러나 그들의 바람과 달리 히틀러는 상상 이상으로 망상에 가득찬 인물로 결국 그 화살은 영국에게도 돌아가게 되었다. 영국은 비록 해상전과 공중전에서 나치를 꺽어버리고 다수의 지상군들이 독일 본토로 진주하는데 성공하는 엄연한 승전국이었다. 그러나 경제는 파탄나서 많은 사람들이 배급을 받아야 했고 대영제국도 결국 해체되어버렸다. 반면, 소련은 어마어마한 피해를 입었음에도 서구의 상상을 뛰어넘는 생산량과 동원력 그리고 미국의 전폭적인 렌드리스에 힘입어 독일 동부를 포함한 동유럽 전부를 자국의 세력권 안으로 편입하는 데 성공한 상황이었다. 전쟁 말기 영국은 언싱커블 작전을 구상하는 등 여전히 소련을 몰아내고 싶어했지만 이 시기의 소련군은 크림 전쟁, 제1차 세계 대전 시기의 허약한 러시아 제국군이 아니라 전선군 단위의 막대한 기갑군 그리고 독소 전쟁 기간 중 습득한 경험을 바탕으로 체계적으로 짜여진 제병합동술을 기반으로 한 작전술로 무장한 상태였다. 결국 영국은 세계 질서를 주도하는 국가는 더 이상 자국이 아니라 미국과 소련임을 인정하고 파이브 아이즈,NATO에 가맹한 뒤 미국 및 유럽,영연방 국가들과 협력해 자국의 안보를 지키는 방향으로 선회해야만 했다.

6.8.1. 승리의 날


이후 소련과 소련에서 분리된 러시아, 우크라이나CIS 국가들은 매년 승리의 날(День Победы: 덴 빠볘디)이라는 거창한 이름을 붙이고 승리를 기념하며 수십만 명의 군사들과 신형 무기들을 공개하고 국력을 과시하는 기념일로 자리 잡았다.
1990년대부터는 독일의 정상들까지 초청받고 있다. 일단 현대 독일인들도 나치와 히틀러를 아주 부정적으로 평가하기에 나치를 물리친 것을 함께 기념한다는 것에 의의가 있다. 이 날에 대한 자세한 것은 승리의 날 문서 참조.
"소련군이 전쟁에서 승리한 이 날은, 게오르기 주코프 원수의 말에 따르면, '소련 인민의 삶에서 '영광의 순간'이 되었다. 이는 소련 역사상 사람들이 조국의 승리와 자유를 위해 감당한 상실의 의미가 명약관화했던 유일한 시기다." 역사학자이자 라디오 방송 '베스티 FM'의 정치 평론가인 안드레이 스베텐코의 말이다.
사실 소련 붕괴 이후 러시아가 소련 시절보다 더 성대히 기념하는 기념일이다. 단순한 기념일을 넘어 현대 러시아인들의 국가적 자긍심, 긍지의 원천이다. 단순히 러시아 민족주의로 과거 초강대국의 승리를 추억하는 추억팔이라고 비난할 수도 있지만...피할 수 없는 적과의 생사를 건 결전에서 승리했고, 아주 큰 희생을 치르며 승리했다. 바르바로사 작전벨라루스 초토화작전 등에 의해 상상 이상의 피해를 입었고, 모스크바 공방전 당시에는 거의 패배 직전까지 갔지만, 스탈린그라드 전투레닌그라드 공방전의 어마어마한 피해에도 무너지지 않고 쿠르스크 전투 등에서 반격하여 기적적으로 역전해 결국 바그라티온 작전으로 대반격에 나서 베를린 전투를 끝으로 적의 수도를 함락시키며 완벽하게 승리했기 때문에 더없이 찬란하게 빛나는 감격스러운 승리가 되었다.
이 날은 많은 러시아인에게 특별한 날이다. 어마어마한 희생을 치른 국가적 총력전이었기 때문에 전쟁의 상실을 겪지 않은 가족은 러시아에서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며, 전쟁에 참가한 사람들도 아직까지 일부 살아 있다. 5월 9일이 조국 러시아에 자긍심을 느끼는 계기가 된다고 인정하는 러시아 사람들이 많이 있다.
세계적으로 봐도 역사상 최대 규모의 전쟁이었고 러시아 역사를 봐도 역사상 비견할 예가 없는 가장 위대한 승리였다. 나폴레옹을 막기는 했지만 완벽한 승리는 아니었고 크림 전쟁부터 열강에 얻어맞기만 했다. 이 때문에 러시아인들은 러시아 역사에서 가장 자랑스러운 순간이 언제냐는 질문에 압도적으로 대조국전쟁에서의 승리라고 답한다.[49]
소련 시절 붉은 광장을 지나는 군사 퍼레이드10월 혁명 기념일(11월 7일)에만 매년 실시되었고 승리의 날에는 1965년, 1985년, 1990년에만 실시되었다. 스탈린 시대와 흐루쇼프 시대에는 공휴일도 아니었다. 역사학자인 데니스 바비첸코에 따르면, 이오시프 스탈린과 그 사후 소련을 이끈 니키타 흐루쇼프는 대조국전쟁을 승리로 이끈 군사령관들이 정치적으로 강해지는 것을 두려워했다. 그때문에 군사령관들과 참전용사들의 공적을 치하하는 일에 인색했다. 1965년에야 승전기념일은 공휴일로 지정되었고 군사 퍼레이드가 실시되었다. 승전기념일을 국가적 차원에서 전국적 규모로 성대하게 기념할 수 있도록 한 최초의 소련 지도자는 레오니트 브레즈네프였지만 그의 재임기에도 군사 퍼레이드는 혁명 기념일에만 매년 실시되었고 승리의 날에는 1965년에만 치러졌다. 소련 해체 이후 10월 혁명 기념일은 없어졌고 1995년 승리 50주년 퍼레이드 이후 매년 5월 9일에만 군사 퍼레이드를 실시한다.[50]

7. 연표



7.1. 1941년



7.2. 1942년



7.3. 1943년



7.4. 1944년



7.5. 1945년



7.6. IF 시나리오


독소전쟁을 포함해서 2차 세계대전 자체가 '''선택지 하나'''만으로도 그 국면이 엄청나게 바뀔수 있었던데다가 2차 세계대전이 가지는 영향력까지 포함해서 역사학자나 역사덕후들 사이에서도 진지하게 의논되는 경우가 많다.
전쟁 자체가 단순한 숫자놀음으로 끝나지만은 않기 때문에 전쟁 시작 시점에서 한 쪽이 일방적으로 불리하다고 해도 불리한 측이 무조건 패배하기만 하는건 아니며 경우에 따라 반대로 대역전승을 거두는 사례도 많다. 당장 2차 세계 대전 자체가 폴란드 침공때 영프가 독일의 태도에 겁먹고 버로우타지만 않았어도 2차 세계대전이 유럽내를 벗어나 세계적인 파급력을 가져오진 않았을 것이라는 말도 나올 정도였다.[51]
반대로 항상 독일이 소련에게 승리한다는 것이 아닌 이미 독일이 밀리기 시작한 후에서의 국제 정세에 관한 시나리오들도 빼놓을 수 없다. 예를 들어 독일이 방어전으로 나왔다든가, 티토를 암살했다든가 반대로 소련이 선공을 가했더라든지 말이다. 이런 경우들은 보다 현실성 있는 시나리오라서 학자들 사이에서도 꽤나 진지하게 토의되고 있는 내용들이다.
◆ 1941년 독일이 소련을 침공하지 않았더라면?
독소전쟁으로 나치가 폭락한 현실을 고려하면 '''제일 희망적인 IF'''다. 직전까지만 해도 소련측은 독일과 '''손잡고''' 타국가를 노렸을 정도였기 때문에 독일이 난데없이 뒷통수를 후려치지만 않았어도 그대로 날라온 반격에 나치의 모가지가 순식간에 날아갈 일도 없었을 것이다. 이당시 대략적인 전황으로 보면 영국은 처칠의 주도 하에 '''바쿠 유전 지대 폭격 작전'''을 검토하고 있었으며 소련은 독일과 손잡고 회담에서 말한대로 인도 제국을 침공하고 있었을 것이다. 독일-일본만해도 막는데 벅찼던 연합군이었던 만큼 소련이 독일과 적대하지 않고 가담했다면 현실에서보다 더 순조롭게 상황을 끌고갔을 가능성이 높다. 소련이 추축국 가입까진 가지 않는다해도 불가침조약만 계속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동부전선으로 갈 물자와 병력을 아프리카영국으로 돌릴 수 있게 되므로 훨씬 여유가 있는 상황이다.
그 외에 존 키건 교수는 소련 침공에 동원한 병사들을 소련이 아닌 중동 전선으로 투입했을 경우의 수도 이야기 했었는데 이 당시 미국, 독일과 같이 국력 정상을 달리던 소련과 치열하게 싸웠던 수준의 독일 병사들을 북아프리카나 서아시아로 보내기만 했어도 간단하게 밀어버릴수 있었을 것이다.[52] 아프리카까지 먹힌다면 유럽은 동쪽 해로를 통해 아시아로 가는게 몹시 힘들어지므로 아시아에서도 유럽의 영향력을 상관하지 않아도 됐을 것이다. 심지어 중동, 아프리카를 독일이 먹는다면 이후 만에 하나 침공할 가능성이 있는 소련의 측면을 노릴 수단이 생기므로 억지력 역할을 해줄수도 있었을 것이다.
다만 이 경우 미국의 행방이 제일 문제가 된다. 미국이 제2차 세계 대전에 적극적으로 나서게 된 계기는 일본의 진주만 공습인데 이는 어디까지나 추축국의 수뇌격인 독일과 1도 상의 안한 '''일본의 독단'''이었기 때문이다. 독소전쟁이 안일어난다면 그만큼 유럽내에서 영향력은 높아지겠지만 독일 소련 합쳐봤자 해군/공군력이 영미에 비해 압도적으로 뒤떨어지므로 결국 일본은 미군에 의해 제압당하고 일본이 맞을 을 대신 독일이 맞고 끝날 가능성도 있다. 아이러니하게 독일이 얼마나 흥하든 일본의 병크에 따라 행방이 바뀔 여지는 여전히 존재하는 셈.
미국무기대여법이 없었다면?
소련 학자들과 군인들도 인정한 부분인데 '''미국의 어마어마한 양의 무기대여법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소련은 도저히 독일을 몰아낼 방법이 없었다.'''[53] 1963년에 한 대화에서 쥬코프 원수는 원조가 없었다면 소련이 "전쟁을 계속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견해를 지지했다. 도청된 그 대화 내용은 30년이 지난 다음에야 해제되었다.[54] 이렇듯 무기대여법은 많은 역할을 하였다. 일단 산업 시설들이 시베리아로 이동되었기에 각종 무기류만이라면 소련도 충분히 생산이 가능했다. 그러나 우크라이나의 곡창 지대는 이미 상실한 상황이었기에 미국의 막대한 식량 지원이 소련 자체의 능력으로는 무기를 만들더라도 전선까지 보급할 수송력도 없었다. 소련이 민간부문에 대한 투자를 하지않고, 군수물자 생산에만 집중하여 엄청난 물량을 뽑아낸것은 무기대여법 덕분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특히 500,000대가 넘는 차량은 독일본토로 진군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물론 1944년 하반기 이전까지 유럽 대부분의 공업지대를 차지하고 헝가리, 루마니아, 등 동맹국의 지원과 스웨덴, 스페인 등 우호적인 중립국의 지하자원을 수입하는 등 총력전을 하는데 소련보다 훨씬 유리한 위치에 있었는데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여 전쟁패배로 이어진 독일보다 더욱 돋보이는 것은 사실이다. 하여간 미국 정치권의 상황이 다르게 흘러가 소련에 대해 어떤 지원도 하지 않았다면 실제 역사에서처럼 독일군이 레닌그라드-모스크바-스탈린그라드까지 도착한 뒤 뻘짓을 시작했다고 하더라도 소련은 현상유지면 모를까 독일군을 몰아낼 수는 없었을 것이다.
실제로 이와 비슷한 양상이 전개된 것이 이란 이라크 전쟁이었다. 이란은 이라크보다 훨씬 막강한 국력을 지니고 있었음에도 미국과 서방의 무기 금수제재와 혁명으로 인한 이란군의 전반적 전투력 약화가 겹쳐서 이란군의 공세 능력은 전쟁 후반기에 극도로 약화되었다. 거기다가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이란군의 주요 장비들의 가동률도 악화 일색이었고 혁명수비대를 비롯한 이란군 병사들은 보급품 부족으로 그저 소총만 든 채 맨몸으로 돌진해야 했다. 심지어 소년병까지 총알받이로 동원되었다. 그렇기에 끝내 서방과 아랍 국가의 지원으로 가동되는 강력한 기계화부대로 무장한 이라크군을 밀어내지 못하고 막대한 희생자만 배출한 채 티그리스 강 장악은 커녕 전쟁 이전 영토만 겨우 유지할 수 있었다.
레닌그라드의 완전 점령
리처드 오버리의 명저 스탈린과 히틀러의 전쟁(Russia's War)에서 심도 있게 다루고 있는 주제. 약 100만의 북부집단군이 900일간의 레닌그라드 포위전을 치르는 대신 레닌그라드를 완전 점령한 이후 모스크바 전투 시 북부에서 양익 작전을 실시했거나 무르만스크, 아르항겔스크 등의 무기대여법 북극해 항로를 마비시켰다면 41년의 소련은 도미노처럼 무너졌을 것이다. 상기 서적에서는 '''러시아의 옛 수도의 결사 항전이 새로운 수도의 목숨을 살렸다.'''라는 평을 하고 있을 정도. 그래서인지 오늘날 상트 페테르부르크 기차역에는 영웅도시(ГОРОД ГЕРОИ)라는 칭호가 붙어있다.
모스크바 전투에서 독일군이 승리했다면?
'''독소전쟁의 결정적 전환점 중의 하나'''이다. 모스크바 전투를 가장 상세하게 다룬 서적인 '세계사 최대의 전투'에 따르면 스탈린은 모스크바 점령에 대비하여 시가전을 준비하는 등 독일군이 모스크바 점령 이후에도 계속해서 피를 보았을 것이 확실하나, 전쟁은 짧아도 몇 년은 더 끌었을 것이고 최악의 경우 모스크바의 상실로 유럽 러시아의 모든 교통로가 마비되어 보급이 절단 나는 상황이 왔었을 것이다. 물론 독일군도 보급선 등 여러 문제가 있지만 이를 극복하고 모스크바 점령 후 보급이 절단된 소련 주요 도시들로 진격을 계속했더라면 말 그대로 도미노처럼 무너져 내렸을 것이다. 그래도 소련이 바로 항복했었을 가능성은 없으나, 스탈린에겐 히틀러와의 강화를 생각하게 했을지도 모른다.[55] 또 무엇보다도 일본이 모스크바가 넘어가는 것을 보고 소련 침공을 감행했을 것이고 진주만 공습이 이루어지지 않음으로써 미국의 참전도 뒤로 늦추어지는 결과를 가져왔을 것이다. 모스크바 함락 이후 소련 서부 지역 대부분이 독일에게 점령되고 일본이 몽골연해주를 기습했다면 전세가 어떻게 되었을지는 모른다. 추축국의 세력 확장을 우려한 미국이 참전했었을 가능성이 있는데 '''문제는 그게 언제 일어날지는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다.''' 게다가 미국이 참전하기로 마음을 굳혔을 즈음엔 이미 독일과 소련 사이엔 휴전 협정이 이루어졌고 영국이 포위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다만 미국은 진주만 공습 이전에도 참전하기로 약속을 했기에 시기가 늦춰지기는 했어도 참전했을 것이다.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독일군이 승전했다면?
'''독소전쟁의 결정적 전환점 중의 둘'''이다. 모스크바 전투 다음으로 중요한 전투인 만큼 그에 대한 파급력도 상당했을 것이 확실하다. 당시 일본은 독일이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승리할 경우 소련을 공격하겠다고 독일과 밀약을 체결한 터라 일본이 독소전에 참전하여 연해주와 북사할린, 캄차카 반도 등이 공격받았을지도 모른다. 물론 미국과 이미 전쟁 중인 터라 소련과의 전면전은 무리고 극동지역의 소련군을 묶어두는 수준에서 그쳤을 것이지만 그것만으로도 독일에게는 굉장한 이득이다. 게다가 독일이 스탈린그라드를 점령하여 소련 남부 지역을 완전히 장악했다면, 소련에게 매우 중요한 바쿠 유전의 상실로 소련군은 전쟁 말기의 독일군이 겪었던 연료부족으로 인해 각개격파당하는 것을 피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다만 무기대여법으로 연료를 더 뜯어내는걸로 때웠을 가능성도 있다.) 또한 레닌그라드와 모스크바의 존재도 지속적으로 위협받았을 것이며 동부전선의 붕괴는 못해도 2, 3년 뒤로 미루어졌을 것이다.[56]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독일 6군이 성공적으로 철수 했다면?
앞의 가정과 함께 많이 의논되는 이야기이다. 6군이 독일 정예군의 결정체로서 이들의 전멸이 독소전쟁이 분기가 되었을 정도로 매우 중요했다. 하지만 코카서스에는 이들보다 규모가 훨씬 큰 A집단군 역시 소련군에게 포위될 위기를 겪었다. 6군의 저항 덕분에 코카서스의 A집단군이 철수 할 수 있어서 남부전선 전체가 붕괴되는 사태를 피할 수 있었다. 가장 희망적인 가설은 A집단군 철수 이후 다시 구조작전이 시작되어 남은 6군이 성공적으로 철수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시기에 소련의 포위망이 엄청나서 병력은 몰라도 장비회수에는 어려울 것이다. 그렇지만 살아남아 전선에 다시 투입될 병력자체만으로도 독일군 역량에 도움이 되었을 것이고 만약 장비들 역시 운좋게 회수하였다면 독일군 역량 회복에 큰 기여를 했을 것이다.[57]
쿠르스크 전투의 경우
앞의 2개의 가정에 비해선 파급력이 낮은 편이지만 이 또한 매우 중요한 편이다. 이 전투에서 소련군이 승리함으로써 동부전선에서 독일군이 후퇴하기 시작했고 이탈리아 전선에 상륙한 병력들도 북진할 수 있었으며 나아가 노르망디 상륙작전바그라티온 작전이 이루어짐으로 독일이 패망했다. 그런데 여기서 독일군이 승리했다면 이후 독일은 방어전으로 전환하여 동쪽에선 소련군을 막아내면서 남부에선 이탈리아 방어에 더 치중할 수 있었을 것이다. 노르망디 상륙과 바그라티온도 없었던 일이 되었을 것이고 당시 독일군의 후방을 교란했던 게릴라들도 싸그리 청소함으로써 독일의 목숨이 몇년 연장되었을 것이다.[58]
영국을 완전히 항복, 종속시킨 후 침공했다면?
이건 앞의 것들보다는 좀 가능성이 적은 게, 애초에 영국을 항복시킬 힘이 없었기 때문. 그러나 이건 어디까지나 IF 시나리오이고 역사라는 특성상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현상의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최소한 영국이 독일의 패권을 인정, 협조하게 되었다고 가정하고 영국의 막대한 해군력과 식민지 상당부분이 독일의 영향권에 간접적이나마 들어갔다고 치자. 사실 독소전쟁의 개전부터 승패가 갈렸다고 볼 수 있는 스탈린그라드 전투와 레닌그라드 전투 시점까지 독일은 영국과 싸우느라 별로 에너지를 소모하지도 않았으며 비록 해전공중전은 계속 발생했지만 동부전선에 비하면 보잘것없는 규모였다. 독일이 항복한 영국의 도움을 받고 공군력과 해상 보급도 동원했다면 안습한 보급이 상당부분 나아졌을 것이고 속전속결로 모스크바나 스탈린그라드 정도는 점령이 가능했을 수도 있다. 여기까지 점령한 후에 영국도 없이 유럽에 홀로 남겨진 소련이 강화를 결정했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애초에 소련이 초반에 패배한 결정적 이유가 '히틀러 그놈이 설마 영국이 아직 건재한데 전쟁을 또 벌일까?'였던 걸 보면 영국이 항복한 시점에서 소련은 최고 경계 상태가 되었을 가능성이 높고 그렇다면 초반부터 그렇게 밀리지 않았을 수도 있다. 전 유럽 점령은 아니더라도 모스크바아르항겔스크, 스탈린그라드를 잇는 광활한 지역과 중앙아시아 일부도 독일군의 공격에 노출되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영국이 이미 독일의 아래로 들어간 마당에 미국이 유럽 전쟁에 적극적으로 개입했을지도 의문이다. 이런 상황까지 왔다면 미국은 독일 중심의 유럽이라는 새로운 질서를 인정하고 독일과 공존하기를 택했을 가능성이 높다.[59] 그렇게 영국을 굴복시킨 후 소련 침공도 순조롭게 이루어짐으로써 유럽 일대를 제패했더라면 당신들의 조국이 현실화됐을지도.
일본 제국이 미국 대신 소련을 공격했다면?
독일의 요구를 받아들여 소련을 공격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심리적 영향과 소련에 타격은 주었겠지만 일본군의 역량을 생각해본다면 궁극적으로는 적백내전 때처럼 북 사할린연해주, 더 나아가 봐야 바이칼 호 이동 지역만 초토화되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또한 독소전이 시작된 이후에도 극동에는 최소 30개 이상의 사단이라는 대규모 병력[60]이 배치되어 있었고 일본 육군은 소련까지 상대할 여력 자체가 없었다. 따라서 일본이 독일처럼 불가침조약을 무시하고 공격한다고 하더라도 극동에 배치된 병력을 잡아두는게 최선이고 그 이상은 기대하기 어렵다. 그러나 이건 어디까지나 이론적인 면으로 일본군이 여러가지 문제를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나 의외로 군사적으로 제정신 박혀있는 일본 장성들이나 수준높은 병사들이 상당수 있었기에 아무리 주공이 아니여도 막으려면 소련군은 추가 병력을 보내긴 해야 할 것이고 이러면 소모품, 전차, 중화기, 항공기 같은 보급품도 같이 보내줘야 하는데 이러면 동부와 서부 전선에 보낼 보급이 갈수록 부족해질 가능성만 높아진다. 그리고 동부전선 소련군은 일본군에게 주요 지역이 점령 당하면 '''보급 거리가 북아프리카 전역를 뛰어넘는 수준으로 늘어난다.''' 일본군이 파괴 공작이라도 벌이면 동부전선 소련군은 발이 묶여버리는데, 동부전선에서 시베리아 너머에서 온 정예 부대들[61]이 엄청난 전공을 세운 것을 생각하면 생각보다 독일군에게 많은 큰 도움이 되었을 수도 있다. 독일군의 목적인 소련군을 잡아두는걸로도 모스크바 방위가 강화되지 못하여 모스크바가 심대한 타격을 받던가 심지어는 함락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에니그마#s-2를 해독하지 못했다면?
연합군이 만약 독일의 암호였던 에니그마를 해독하지 못했었다면 독일의 무제한 잠수함 작전이 성공을 거둠으로써 결국엔 미, 영, 소 삼국을 협상 테이블에 앉게 하는 결말을 불려왔을 수도 있다. 단순한 상상력만이 아닌 게, 영국으로 향하는 보급선을 죄다 격침함으로써 섬나라인 영국은 엄청난 물자난에 시달렸을 것이고 결국엔 독일과 강화했을 수 있다. 이 시나리오로 간다면 에르빈 롬멜의 아프리카 군단에게 연료를 보급할 수 있게 됨으로써 카이로바그다드를 거쳐 히틀러가 추축국에 동조시키려 안달이였던 친독성향의 중립국인 터키를 가입시키고 원래 목표지점을 점령하고 스탈린그라드까지 가게 됨으로써 소련군의 숨통을 조이는 것이 가능하며 소련은 유보트의 영향을 크게 받지 않는 이란 루트나 태평양 루트로의 렌드리스를 받을 수는 있겠으나 그 보급이 늦어지는 약점이 생기며 영국이 결국 독일과 강화하여 전쟁에서 발을 뺀다면, 원래대로라면 미국, 영국과 상대했을 병력들이 죄다 동부전선에 투입되는 결과를 낳았을 것이고 그만큼 소련의 부담도 가중되었을 것이다. 렌드리스야 어차피 독일 해군이 현실적으로 건드리기 어려운 루트로 운영되기도 하였으니 받을 수도 있었겠지만 불리한 것은 확실하며 소련과 독일의 단독 싸움에서 독일이 소련을 압도하기는 힘들었겠지만 굉장히 유리한 상황에서 협상을 맺을 정도가 되었을 수 있다.
◆ 독일 혹은 독일 국방군인종차별과 그에 기반한 전쟁범죄를 저지르지 않았더라면?
'''독일만이 아니라 모든 참전국들에게 가장 희망적인 가정이지만, 실현 가능성이 거의 없었던 경우.''' 만일 나치 독일이 인종차별과 학살을 완전히는 아니더라도 최대한 자제하고 소련 치하의 민족들의 국가 설립을 막지 않았다면 600만여 명에 달하는 유대인과, 집시들은 독일군에 징병 되는 건 물론, '''핵 개발의 주요 인물들의 미국 망명이 없었거나, 조국에 다시 귀국하면서 미국의 맨해튼 계획이 시작도 안 되거나 매우 늦춰지는 결과가 있었을 수 있다.''' 또한 '''전쟁 초반에 독일군을 해방자로서 반긴 점령지의 수많은 슬라브족 인구가 독일군에게 적극 협조하고, 병력이 되어 소련군과 싸우면서 더 큰 피해를 줄 수 있었다.''' 이랬을 경우 독일군의 병력은 소련군과 동등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나치 독일의 성립 이념을 생각해보면 이런 인종차별과 전쟁범죄가 없을 수가 없었다.''' 만일 나치 지도부가 개전 이후 타민족의 협력을 얻기 위해 인종차별 정책을 철폐했다면 인종주의에 기반한 나치 이념과 충돌을 일으켜 모순을 이뤘을 것이다.
히틀러가 군사 문제에서 완전히 손을 뺐더라면?
'''의외로 가장 현실성 있는 시나리오'''이다. 그럴 일은 없었겠지만 히틀러가 아예 전적으로 군 지휘권을 맡긴다던가 스탈린처럼 모스크바, 스탈린그라드 등 초반에서의 참패를 맛본 후 장군들에게 모든 군사 지휘권을 이양했다면 독일의 목숨이 상당 기간 연장되었을 것이다. 최대한 희망적으로 가정하면 보병들의 화력을 대폭 상승시켜줄 수 있는 StG44의 대량 생산을 1942년~43년쯔음부터 시작하고[62] 보급에서부터 전선 축소에서부터 기동 방어전에 이르기까지 장성들의 꿈이 이루어질 것이며 에리히 폰 만슈타인의 계획대로 하르코프에서 소련군을 격퇴시키고 헛된 공세로 병력들을 다 소모하는 일 없이 드네프르 강변에 구축된 이중, 삼중으로 된 방어선으로 소련군의 진격을 막으면 소련에게 조금이라도 더 큰 피해를 강요하고 진격을 조금이나마 늦출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다만 미국은 '''1945년 8월에 독일을 핵공격할 계획이었다.''' 동부전선에서 소련군을 막아내더라도 독일 본토에 핵이 떨어지는 것은 피할 수 없었다. Me262가 히틀러의 때문에 개발이 늦어진것도 아니고 연합군의 공세로 독일 공군이 붕괴되는건 피할 수 없었으므로 독일이 핵 투하를 막는것은 불가능한 이야기인데 대신 독소전쟁에서 이기거나 소련의 진격을 어떻게든 막아서 연합군이 좀 더 동쪽으로 전진했을 가능성은 있다.
◆ 소련이 먼저 독일을 공격했다면?
만약 소련이 T-34를 좀 더 일찍 배치하고 독일이 소련을 공격하기 전에 먼저 선제공격을 하였다면 소련군의 공격은 아무리 잘해 보아야 단치히바르샤바, 동프로이센쯤에서 중단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당장 소련은 스탈린대숙청으로 군이 반병신이 된 상태였고 독일도 소련을 침공하기 전에 소련의 공격에 대비한 어느 정도의 준비를 해 둔 상태였다. 다만 소련의 선공이 있었더라면 모스크바까지 뚫리는 일과 더불어 소련의 침공으로 여력이 없게 된 독일은 홀로코스트를 실행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홀로코스트 계획이 이루어진 것은 1942년 1월의 일로 독일이 소련을 쳐바르고 있을 때의 일이다. 그런데 당장 전황이 심각해진 상황에서 소련군 막을 생각을 먼저 하지 유대인을 죽일 생각을 할까? 하더라도 실행은 나중의 일로 미루었을 것이다. 일단 당장은 눈앞의 불을 꺼야 할 상황이니까. 그런데 소련의 선공으로 독일이 여념이 없는 동안 북아프리카에선 롬멜의 진군과 후퇴도 없이 방어전의 상황으로 지속되었을 것이고 오히려 북아프리카 군단이 좀 더 오래 견디는 이상한 상황이 연출되었을지도. 그러나 이런 경우 소련이 명백히 침략자인 상황이므로 미국이 렌드리스를 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고 어쩌면 독일이 급한 불을 끄기 위해 비시 프랑스에게 점령지를 뱉어줄지도 모르지만, 당시 서구 여론은 독일을 제 1의 적으로 보았기 때문에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며, 양면전선이 된 독일을 노려 일찍 독일을 패망시켜 끌어내리고 소련과의 비밀 협약을 통해 얄타회담 후와 같이 유럽을 양분하게될 가능성이 높다. 즉 어딜가나 실제 역사와 비슷하게 흘러갈 수밖에 없다는 것.
◆ 소련이 독일의 공격을 조기에 막아냈더라면?
대표적으로 스탈린라인의 완공 문제와 키예프 방어전이 있다. 폴란드 국경에 건설 중이던 스탈린라인을 괜히 옮기는 일 없이 그대로 계속했더라면 1941년이 오기 전에 완공할 수 있었을 테고 그렇게 되었더라면 독일은 소련 침공을 재고해 보았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키예프의 경우도 마찬가지. 우크라이나소련 남부에 독일군이 오는 것을 막을 수도 있었는데. 독일의 공격을 조기에 막고 전쟁의 종결을 앞당기는 동시에 수천만 명의 생명을 구할 수도 있었을 것이 멍청한 독재자무능한 장성의 결정으로 물거품이 되었다.
뮌헨 회담이 결렬되었다면?
회담이 결렬되고 독일의 선공으로 전쟁이 일어났다고 가정하면 독일이 체코를 점령하고 서쪽으로 진격하더라도 마른 강 유역에서 막히고 나아가 루마니아를 통과하여 체코로 진입한 소련군이 전쟁의 진행을 완전히 바꿔 놓았을 것이다. 다만 앞에서도 말했듯이 소련군은 스탈린의 숙청으로 제 상태가 아니었고 폴란드가 있었으므로 히틀러가 소련 때문에 무너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만 그 이후로의 진행 과정을 보면 1차 대전 꼴을 피하기는 어려웠을 것이고 히틀러에게는 이대로 마른 강에서와 폴란드-루마니아-북우크라이나로 이어지는 동부전선에서의 전쟁을 계속하다가 패망하던지 아니면 점령지를 죄다 토해내는 것으로 강화를 하던지 2가지 선택만이 남았을 것이다. 그래도 현실과 비교하면 독일을 비롯한 전 유럽인들과 히틀러 그 자신에게도 '''해피엔딩이 아닐 수 없다.''' 이 정도였다면 독일은 그냥 1차 대전 재탕이 될뿐이고 홀로코스트도 본격화되지 않은채 히틀러도 그냥 권좌에서 쫓겨나 기껏해야 추방, 망명 내지는 감옥에 가는 정도로 끝났을테고, 나치 독일은 평범한 패권국으로, 히틀러는 보통(?) 독재자 정도로 평가받을 것이다.
히틀러 암살 미수사건이 성공했다면?
당시 쿠데타 측의 계획은 히틀러와 괴링, 파울 요제프 괴벨스, 하인리히 힘러, 마르틴 보어만 등을 비롯한 나치당 수뇌부를 제거하고 독일 제국 시절과 같은 군주국을 세운 뒤 연합국과 강화하고 그들과 함께 소련에 맞설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미 독일의 패망이 한 발자국 앞으로 다가온 상황에서 연합군 수뇌부는 그럴 생각이 없었다. 게다가 설령 그들이 히틀러 암살에 성공하고 주요 인사들을 제거한다 치더라도 힘러의 경우 테러가 일어났을 땐 저 혼자서 멀리 떨어진 채 SS 호위 병력의 경호를 받으면서 무장 열차 안에 있었고 힘러가 쿠데타 진압을 명령한 뒤 자신이 독일의 총통이 되었을 가능성도 있다.[63] 파울 하우서요제프 디트리히 등 SS 소속 장성들은 힘러를 싫어하며 오로지 히틀러에게 충성하였으나 이들도 쿠데타 측을 그냥 보고 있었을 리도 만무. 결국 대다수의 역사학자들이 지적한 데로 쿠데타 측과 SS의 충돌로 내전이 벌여졌을 것이고 전선이 붕괴되어 연합국이 1944년 12월 크리스마스 전에 베를린에 입성하는 꼴로 끝났을 것이다. 진짜 많이 잘해서 쿠데타 측이 힘러까지도 제압하고 SS의 진압도 물리친 후 신정부를 세웠다고 치자. 이미 독일 내부의 혼란으로 전선의 붕괴는 더 빠르게 이루어졌을 테고 신정부가 협상을 시도할 즈음엔 연합군은 이미 지크프리트동프로이센까지 밀려오고 있었을 것이고 강화는 결렬, 신정부 측은 좋든 싫든 계속 전쟁을 해야만 하는 처지가 된다. 전선 붕괴 없이 방어전에 어찌어찌 성공하고 점령지 대부분에서 철수한다는 조건으로 처칠, 루스벨트와 강화했다고 치더라도 독일 혼자만의 여력으로 소련군을 막기는 힘들 것이 확실. 게다가 병사들의 사기도 쭉쭉 내려가고 국민들의 신뢰도 내려간 마당에 소련군에 쳐발리는 신정부에 불만을 품은 세력에 의해 제2, 제3의 쿠데타가 일어나지 않는다는 법도 없다. 즉, 쿠데타 측이 암살과 신정부 수립에 성공했어도 독일의 패망은 정부만 바뀌었을 뿐 이루어졌을 일이고 더욱이 이들은 '''총통을 죽이고 나라를 망하게 한 매국노들'''로 후대에 전해졌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이렇게 되면 철저한 나치 청산이 이루어지지 않고 다시 한 번 배후중상설이 돌며 독일이 또다시 군국주의화되었을 수도 있다. 설령 민주화가 됐더라도 현재 일본마냥 과거사 문제로 유럽 주변국과의 관계가 매우 시끄러웠을 것이다.
◆ 독일이 연합국보다 먼저 핵을 개발했다면?
이쪽은 가능성이 낮다. 대전 말기 원자로 가동도 하지 못한 상태를 감안하였을 때, 나치 독일의 핵무기 개발은 힘들었을 듯. 핵이 개발되어도 독일은 핵 공격을 할 만할 초대형 전략 폭격기의 생산이 어려웠다. 핵 투발용 특수 전략 폭격기의 생산이 불가피한 상황이다. 그리고 애초에 그 핵폭탄을 제작한 주요 인물들 중 일부는 추축국 출신이다. 그들은 망명할 계획 없이 잘 살다가 '''나치가 집권하고''' 인종차별을 시작하면서 망명했다. 거기에 입국을 거부하고 입국했으면 사형선고를 때릴 정도로 무차별적인 인종청소가 만연했다. 1945년에는 이미 루프트바페보텐플라테 작전 등의 삽질을 통해 갈가리 찢겨 핵 폭격기 호위기도 부족한 상황이고. 이 한 방에 모든 것을 걸어 보았자 광활한 시베리아를 전부 점령하기란 불가능하다. 그나마 V2 개량이라는 묘수가 있긴 했으나 핵무기가 올라갈 플랫폼 수준으로 개량하기에는 많은 시간이 걸릴 것이고. 핵 공격은 흐지부지될 가능성이 높다. 오히려 독일은 핵무기 대신 생화학 무기를 V2에 탑재해서 미국으로 날리는 게 더 빠를 지경이었다. 그러나 만약 독일이 핵을 1940년이나 1941년에 개발하였더라면 동시에 로켓 개발이 빠르게 이루어져 V2, V3 개발을 완료했다면 런던레닌그라드, 모스크바는 지도에서 증발하고 핵으로 초토화된 유럽은 제3제국으로 통합되었을 것이다. 전쟁 중후반에 미국과 독일이 비슷한 시기에 핵개발을 했다면 끔찍한 상황이 될텐데 당시에는 매우 강력한 폭탄 정도로 알고있기에 어느 누구도 핵무기의 폐해를 모르는 상태에서 이미 진행중인 전쟁에 거리낌없이 사용했을테니 '''핵무기가 만들어지는대로 죄다 적국 주요 도시와 전선에 뿌려버렸을 것이며 수많은 핵공격이 일어나는 진정한 의미의 핵전쟁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 스탈린이 독일과 강화했다면?
모스크바 전투 이전에는 스탈린은 불가리아의 중재로 일단 나치 독일과 폴란드 서부, 발트 3국, 몰다비아, 벨라루스, 우크라이나 일부를 내주는 선에서 강화를 맺으려고 했다.[64] 이는 선례도 있어서 더 유리하다. 블라디미르 레닌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으로 거대한 영토를 떼어 주고 1차 대전에서 빠진 후 한숨 돌렸다가 나중에 독일이 패한 다음에 많은 영토를 수복했다. 스탈린은 이를 따라하려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조기강화의 경우에 '''독소전쟁은 사실상 독일의 승리'''로써 소련은 1차 대전 전후의 러시아 제국처럼 대러시아 부분만 간신히 유지했을 것이고, 더불어 스탈린의 권력 또한 엄청나게 위험해지게 되어 조기 실각의 가능성이 훨씬 커졌을 것이다. 심지어 '''소련 자체가 해체될 수도 있다.''' 동쪽의 위협이 사라지고 자원 수급도 원활해진 독일은 혼자 버티는 영국과의 전쟁에 집중했을 것이며 일본이 이 와중에 혼자 진주만 공습을 벌이더라도 일본의 도움이 불필요해진 독일이 일본 편을 들어서 미국에 선전포고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미국도 영국 빼고 전 유럽을 장악한 독일을 공격하지는 않았을테니 일본과만 전쟁을 했을 것이고 전후 질서는 유럽의 독일 세력 vs 아메리카와 아시아의 미국 세력의 냉전 체제가 되었을 것이다.
한편 일부에서는 독일이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패한 시점에서 소련 공략을 포기하고 강화 조약을 맺었다면 좀 더 생명이 연장되었을지도 모른다고 이야기하는데 가능성은 제로에 수렴한다. 독소전쟁 중 독일과 소련의 강화 가능성은 모스크바 전투가 끝날 때 완전히 소멸했기 때문이다.
1944년에는 오히려 위기에 몰린 독일이 스탈린과 협상하여 단독 강화를 맺으려고 하며, 파울 요제프 괴벨스는 서방 측보다 이쪽이 더 가능성이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나치에게 죽을 번하다가 살아난 소련이 다 잡은 맹수를 살려 줄 리가 없지 않은가.[65]
◆ 독일이 소련에 좀 더 일찍 쳐들어갔다면?
'''의외로 가장 가능성이 높았을 사례.''' '''원래 바르바로사 작전은 1941년 5월 15일이었다.''' 유고슬라비아 침공이랑 그리스 침공이 예상치 못 하게 터짐으로써 독일을 비롯한 추축국이 병력을 빼서 유고슬라비아와 그리스를 침공, 점령하는데에 군사력이 소비됨으로써 바르바로사 작전이 1941년 6월 22일로 미뤄졌다. 한마디로 '''유고슬라비아-그리스 침공으로 독소전쟁의 발발을 늦춘 것이다.''' 이 1달이 늦어진 것으로 인하여 추축국의 점령 직전의 레닌그라드 공격이 포위전으로 바뀌고 모스크바 공방전이 겨울까지 끄는 바람에 월동 준비가 부족한 추축국이 공세를 중단했기 때문에 모스크바 점령 직전에 실패한 주요한 이유이다. 작계대로 혹은 4월쯤 일찍 바르바로사 작전이 발동되었다면 겨울이 오기 전에 주요 도시인 레닌그라드와 모스크바 등이 함락, 소련은 그야말로 멸망 직전까지 몰렸을 것이다. 최소한 모스크바 시내가 독일군의 전면적인 공세로 전장터로 초토화되었을 것이다.[66]
◆ 독일이 바그라티온 작전비수아-오데르 대공세를 막아냈다면?
당시 독일은 스탈린그라드 전투쿠르스크 전투의 피해로 역량이 많이 하락한 상태였지만, 전선 붕괴의 주 원인이 히틀러의 고지사수 명령이었다는 점에서 위에서 나온, 히틀러가 군사문제에 더이상 개입하지 않았다는 가정과 연결된다. 히틀러가 군사 문제에 개입하지 않음으로서 장군들의 재량이 주어졌다면 독일은 소련군의 공격을 잘 소화해내며 어느 정도 방어에 성공하였을 수도 있다. 사실, 소련 역시 인력부족에 시달리고 있어서 여기서 엄청난 손실을 본다면 소련 역시 감당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시기에는 서부에서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기점으로 서방연합군이 승기를 잡고 진격하고 있는 상황이었기에 멸망을 막을 수 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한쪽 전선에서의 여유를 통해 벌지 전투에 역량을 집중할 수 있었을 것이고 벌지 전투 없이 방어작전을 구사했다면 어느 정도 생명 연장을 했을 것이다. 아니면, 서방 연합군이 일찍 베를린을 점령하는 등 조금 더 동쪽으로 진격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7.7. 독소전쟁 연구의 변화


이 부분은 소련군 전문 이글루스인 РККА Ставка 이글루스 지부에서 상당 부분 발췌한 것으로 보인다.

냉전 체제의 특수성으로 인해 독소전쟁에 대해 진실에 근접한 연구는 이루어지기 힘들었다. 전쟁 당사자인 소련은 대외적인 독소전쟁 자료와 연구를 선전에 알맞거나 검열을 통과한 것만 공개했고 주요한 1차 사료들은 문서 보관소에 꼭꼭 숨겨 놓았다. 심지어 후일 신빙성 있는 사료로 밝혀진 자료들마저도 공산주의적 강박증이 큰 서술 방식 때문에 믿기 힘든 자료로 받아들여지기도 했다.

7.7.1. 냉전 이전까지의 소련 측 연구


1945~58년 사이 소수의 소련 자료들만이 작은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 자료들마저 너무 정치색을 강하게 띄었고 독자나 학자의 관심을 끌만한 작전 적으로 자세한 자료가 아니었다.
1958년까지의 소련 군사 저작들은 너무 정치적이었고 모든 부분에서 스탈린의 업적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에 부합하여 작전술 적, 전술적 자세함은 없었다. 1958년 이후 개인 숭배에 대한 비판이 일어나며 군사 저작들에는 작전술적, 전술적 정보가 자세히 실렸다.
'''1958년이 시작되며 소련에서도 정확하고 유용한 자료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이 자료들을 받아들이며 소련군 군사사 저널에서는 모든 수준의 전투 경험을 다룬 '''뛰어난''' 연구 자료들을 '''방출했다.''' 군사사 저널은 1958년 직후부터 전쟁의, 최초 시기에 대한 괄목할 만할 연구들을 내놓았고 이전의 정치성이 강한 연구들은 의도적으로 무시했다. 군사사 저널은 이론적 상황에서의 실제적이고 사실적인 문제점에 초점을 맞췄다. 이는 소련의 군사 문제를 보는 경향이 구체성을 띄게 했고 각자의 화제를 역사적 문맥에서 보게 했다.
1958년, 소련 최초의 2차 세계 대전사 통사인 플라토노프의 <제2차 세계대전사>가 발간되었다. 이 책에서는 최초로 소련의 전쟁 초기 실패를 언급했으며 전쟁 초기를 전체적으로 설명했다. 예를 들어 이 책에서는 소련군이 실패한 1942년의 제2차 하르코프 공방전을 다루고 있는데 이 전투는 지금도 소련 내에서 논하기에는 너무 쓰라린 주제로 남아 있다. 플라토노프는 2차 하르코프 공방전에 대해 자세히 다루지는 않았지만 패배한 전투를 솔직하게 말하는 최초의 소련 측 자료가 되었다. 같은 시기 소련 역사학자들은 전후 사례를 가르치는 전쟁 기 경향으로 복귀했다. 콜가노프의 <대 조국 전쟁기의 전술 발전>은 1958년에 나왔고 전투 사례를 통한 전쟁 기 전술을 다뤘다. 이 교훈적인 저작은 장교들의 교육을 위해 만들어졌고 성공한 사례와 실패한 사례를 동등한 비중으로 담았다. 콜가노프의 자료들은 다소 단편적이지만 실패 사례와 성공 사례를 동등하게 다루고 있으며 어떠한 경우에도 정확, 마르크스주의적 표현으로는 '과학적으로' 대처하는 교육 사례로서 최대한 자세해야 했다.
1958년 이후 회고록, 부대 사, 그리고 작전 자료들이 전보다 지속적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소련 학계는 당시 군사 지휘관들과 참모들의 기록들을 대거 끌어 모았다. 이 기록들은 스타브카 수준의 인물들(주코프, 바실렙스키, 시테멘코), 전선군 사령관 수준의 인물들(로코솝스키, 코네프, 메레츠코프, 예레멘코, 바그라먄), 야전군 사령관 수준의 인물들(모스칼렌코, 추이코프, 크릴로프, 바토프, 갈리츠키, 그레치코, 카투코프, 렐류셴코, 로트미스트로프), 군단장 수준의 인물들과 그 이하 지휘관들의 회고록들이 출간되었다. 소련 군사사가들은 제병 협동 군, 전차군, 군단, 사단, 그리고 여단이나 연대 수준까지의 부대 사를 저술했다. 회고록은 지원 부대 지휘관들의 책까지 포함했다.
이후 뛰어난 작전 연구들이 주요 작전(모스크바, 스탈린그라드, 쿠르스크, 벨라루스)이나 조금 덜 중요한 작전(노보고로드-루가, 동포메리아, 돈바스), 그리고 기타 수행했던 작전들을 다룬 연구서들이 나왔다. 대학의 역사학자(삼소노프)나 군사학자(질린, 갈리츠키, 시도렌코) 등이 대규모 사료를 동원하고 자세한 서술을 사용해 1등급 연구 자료들을 내놓았다. 회고록, 부대 사, 작전 연구는 총체적인 전훈을 담고 있는 귀중한 자료들이다. 이 연구들은 전쟁사 전체를 연구하는 학자들과 작전술 발달사를 연구하는 인물들(세메노프, 스트로코프, 바그라먄, 크럽첸코)과 전투 사례를 전술적, 작전술적으로 연구하는 학자들(라지옙스키, 쿠로치킨), 기갑 부대와 기계화 부대를 다루는 인물들(로트미스트로프, 바다자냔, 라지옙스키, 로시크), 작전술과 전술을 연구하는 인물들(시도렌코, 사브킨, 레즈니첸코), 그리고 막대한 전투 지원을 주제로 하는 연구들을 포함한다.
대조국 전쟁사와 제2차 세계 대전사를 총체적으로 다룬 저작들이 1960년대 이후에 나타났다. 6권의 <동부 전선사>는 이전의 학자들이 다루기 꺼린 정치적으로 민감한 소재들을 솔직하게 다뤘으며 작전적 자세함도 증가했다. 하지만 분량의 한계 때문의 작은 규모의 작전이나 전투에 대해서는 다루지 않았다. 11권짜리 <제2차 세계대전사>는 정치적으로는 덜 솔직하지만 작전술적, 전략적 수준의 분석에서 더 자세했다.
그리하여 동부 전선의 작전들에 대해 소련이 막대한 양의 자료를 가지고 있음은 분명하다. 게다가 에릭슨이 설명했듯이 이러한 자료들의 종합은 동부 전선 작전의 인상적인 그림이다. 하지만 이 자료들에는 몇 가지 문제가 있는데 독일 측 사료와 똑같은 문제로 독일 측의 편견과 같은 소련 측의 편견이다. 첫째로 소련 저작들은 너무 정치적이거나 이념적이다. 요점은 소련 저작들은 전투 사레를 가르치고 주입하기 위한 것이다.
이론적으로 전쟁은 정치적, 이념적 맥락 내에서도 자세하게 설명할 수 있다. 그리하여 정치적 편향성도 이해받을 수 있으며 비판적인 독자들은 무엇이 정치적인 것이고 무엇이 비정치적인 것인지를 판단할 능력을 가져야 한다. 독자들은 읽기 편하고 대중적인 책일수록 정치적 의도가 깔려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그리하여 소련 내에서 만든 작전술적, 전술적 사실은 개인이나 부대의 희생과 영웅주의를 장려하는 용도가 되었다.
군사 저작이 정치적 맥락에 휘둘리던 이래로 군사 저작 발행 환경은 독자(=공산당)의 입맛에 맞출 수밖에 없었다. 문맥이 간략하고 세련됨이 부족한 저작은 정치성이 강한 것이었다. 제일 중요한 작전과 전술은 계획 수립과 수행에서 당의 역할을 강조하느라 비교적 제한된 연구 소재가 될 수밖에 없었다.
소련 군사 저술가들은 성공적인 작전에 강세를 두고 자세히 쓰며 실패한 작전은 자세하게 쓰지 않는 경향이 있었다. 그리하여 최근까지 전쟁 극 초반인 1941년 6~7월의 전투나 제2차 하르코프 공방전, 세바스토폴 공방전#s-3.3케르치 반도 상륙작전, 제3차 하르코프 공방전, 기타 성공적인 작전들에서도 위험했던 국면들은 잘 나오지 않았다. 비슷하게, 1943~45년 사이에도 중요하지 않은 작전에 참가한 부대의 역사도 얼마 나오지 않았다.
60년대 초의 소련군은 실패한 작전들을 논하기 시작했는데 제2차 하르코프 공방전을 예로 들 수 있다. 2차 하르코프 공방전에 대한 당의 기술은 정확했지만 실패에서 배우려는 사람들을 만족시키기에는 부족했다. 시간이 흐르고 더 많은 자료가 나타나자 이 패배를 바로 볼 수 있게 되어 하르코프의 재앙에 대해 더 자세한 연구가 나올 수 있었다.(예를 들면 모스칼렌코의 <남서부 축선>의 한 장이 있다.)
비슷한 경향이 소련 공수부대를 다룬 문건에서도 나타난다. 당시의 소련 공수 작전들은 별로 성공적이지 못했다. 1964년 전에는 소련 공수 부대를 다룬 자료가 거의 없었다. 1976년까지도 공수 부대 활동에 대한 자료들은 자세하지 않았고 낭만적인 문장들로 포장되었다.
매우 자연스럽게 소련군의 작전 해석은 독일의 해석과 매우 달랐다. 사실 소련 학자들의 작전 해석 시기에 따라 해석이 달라졌다. 장군들의 회고록이 작전 경과에 대해 합리적이지 못하게 적었다면, 학자들은 이에 대한 토론을 통해 공식 역사를 시정했다.
소련 자료와 독일 자료가 가장 상충되는 부분은 서로 대적한 병력의 숫자였다. 양측 자료를 평가하면 이러한 경향을 볼 수 있다. 첫째로 소련 자료는 소련군의 병력에 대해서는 정확하고 독일 정보부 자료와도 일치한다. 대조적으로 소련 자료는 독일군의 전력을 과장한다. 게다가 소련 자료는 독일군의 포병과 기갑 전력을 인력보다 더 과장한다. 부분적으로 이는 소련군이 독일 동맹국 병력과 경찰 병력, 그리고 민병대(국민돌격대) 병력도 합쳐 추산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기준을 사용한다 해도 소련군은 독일 육군 최고사령부 기록과 대조해 봤을 때 너무 높은 적 전투력 측정을 했다. 독일군 또한 상대하는 소련군의 전력을 과장했다. 독일 측은 전력 차를 8:1에서 17:1까지 과장했고 소련군은 전력 차를 3:1에서 2:1로 낮췄다.[67]
소련 사료들은 전쟁의 사상자 문제 때문에 신뢰성을 스스로 떨어트렸다. 초기의 소련군 저작들은 아군 사상자에 대한 기술을 완전히 무시했고 그 이후에도 사상자 도표도 나타나지 않아 현대 소련군 저술가들의 민감한 문제로 남아 있다. 거대 작전에서의 손실 도표나 사단 사에 수록된 중대들의 전투 전후 전력 비교 도표 정도가 간간히 남아 있는 정도였다. 아마 소련 저자들이 숨기고 있는 것도 있었을 것이다.

7.7.2. 냉전 이전까지의 서방 측 연구


소련 사료에의 접근성 부족과 냉전의 영향으로 영미권 학자들은 쉽게 구할 수 있는 독일 측 사료들 위주로 독소전쟁을 연구할 수밖에 없었고 이는 독소전 연구의 편향성을 가져왔다.[68]
주요한 사료로 쓰인 에리히 폰 만슈타인의 회고록 <잃어버린 승리>나 하인츠 구데리안의 <기계화부대장>, 프리드리히 폰 멜렌틴의 <기갑 전투>는 회고록의 특성상 자신의 실수나 병크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 안 하고 공적만 늘어 놓은지라 신중한 교차검증이 필요했으나, 소련 측 자료가 거의 입수 불가능했기 때문에 이를 검증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거기에다가 미 육군에서 독소전쟁에 관해 편찬 책임자를 맡은 전 독일군 총참모장 프란츠 할더[69]는 오로지 독일 측의 시각으로 독소전쟁을 기술하였다. 그리하여 전술적, 작전적으로 항상 우위에 있던 독일 국방군히틀러의 전략적 오판과 무한한 인력과 자원으로 몰아붙이기만 할 줄 아는 소련군에게 패배한 것인 양 서술함으로서 소련군의 승리의 원인을 거의 "운빨"로 돌리고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1950년대 독일군에 의해 만들어진 저작들은 소련군의 작전 자료 부재라는 결점을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다. 독일 집단군, 야전군, 군단, 사단 소속의 독일군들은 수요를 짐작할 수 없을 정도의 수적 우위와 끝없는 포격 하에 행해지는 인해전술, 그리고 전쟁 말기에는 무수한 소련군 기갑 부대와 대적했다고 주장했다. 소련군 규모에 대한 부정확한 서술에는 적 부대 각각의 작전술 적 역할에 대한 고려가 전무하여 독일 저작들이 소련군에 대해 공통적으로 말하는, 상상력 없이 단순한 정면 공격밖에 모르지만 막대한 물량을 가진 소련군이 뛰어난 능력과 기교 넘치는 기동을 구사하는 독일군을 이겼다는 주장을 깔아 놓았다. 소련군의 '스팀롤러'는 동유럽에 그들의 시체와 부상자를 끝없이 쌓았다고 그들은 주장한다. 독일 자료들이 전해 준 소련군에 대한 심리적 인상은 지금까지 남아 있다. 더 나아가 작전들에 대한 이러한 개관은 소련군의 규모를 제대로 알지 못하게 해 독자들에게 그게 사실이든 아니든 독일군이 항상 압도적인 수의 소련군과 대치했다고 믿게 했다. 이런 회고록들과 팸플릿들은 독일의 원 사료들이 세상에 나오기 전에도 그랬고 지금까지 소련군에 대한 작전 자료의 부재를 보여 준다.
1960년대 나온 앨런 클락의 동부 전선에 대한 자료인 <바르바로사(Barbarossa)>는 작전술적으로 소련 자료를 부족하게 담고 있었다. 게다가 클락은 다른 학자들이 쉽게 받아들인 수법인 전쟁 첫 2년을 자세히 쓰고 마지막 2년은 간단히 쓰는 서술 방법을 사용했다. 사실 총 506쪽의 책 중 400쪽 이상이 전쟁 초기에 할애되어 있다. 이러한 서술은 독일 저작들에도 잘 나타나는데 그들의 패배를 히틀러의 오판으로만 몰아세움으로서 그 때의 작전들에 대해 자세히 쓸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미 육군 군사사 연구소는 이 불균형을 어느 정도 해결할 얼 짐케의 두 저작인 <모스크바에서 스탈린그라드까지(Moscow to Stalingrad)>와 <스탈린그라드에서 베를린까지(Stalingrad to Berlin)>을 내놓았다. 이 저작은 유효한 자료로 학술적인 것이다. 짐케는 1942년 11월부터의 전쟁을 조명하고 전략과 고차원적인 작전적 관점에서 분석했다. 독일 사료에 많이 의존하고 있지만 짐케는 독일 기록 자료를 연구했고 그곳에서 소련군의 작전 자료들을 찾아냈다. 그리하여 짐케는 동부 전선에 대한 미국인들의 시각을 넓혀 주었으며 기존 자료들의 문제점들을 교정했다. 짐케와 그를 따르는 저자들은 동부전선을 서술하며 1950년대 말부터 시작되어 1960년대에 가속화된 소련 역사학자들의 대전사 연구에 많은 도움을 받았다. 이 새로운 소련의 연구들은 나중에 더 말하겠지만 질이 천차만별이었음에도 전쟁사 연구에 새롭고 핵심적인 차원을 열었다. 대부분의 뛰어난 학자들은 소련군 연구를 흡수했다. 1970년대까지 소련 측 저작들은 동부 전선사를 보는 시각에 균형을 제공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짐케 또한 독일 자료에 상당히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1970년대 초, 독일 저자인 폴 카렐은 동부전선에 대한 2개의 책인 <히틀러, 동쪽으로 움직이다(Hitler Moves to East)>와 <조각난 대지(Scored Earth)>를 썼다. 이 책들은 기사 형식의 매력으로 독일군의 작전술적 작전을 자세히 조명했고 참전 장교들에 대한 막대한 인터뷰를 실었다. 카렐의 저작은 독일 관점에 무게를 두고 있지만 소련군 사료에 대한 참고 비중은 짐케의 저작보다 많다. 카렐의 책은 그 생생함으로 독자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하지만 지금 보면 제3차 하르코프 공방전을 통해 독일이 승리할 수 있었다는 걸 진지하게 주장하는 등 문제가 많다. 무엇보다도 폴 카렐의 본명은 파울 칼 슈미트로 신분세탁한 나치독일 외무부 언론과장이자 알게마이네SS 상급돌격대지도자(중령)이다. 그는 헝가리 유대인아우슈비츠로 이송할때 이를 정당화하기 위한 명분을 날조하자는 제안을 한게 밝혀지는 등, 기본적으로 신뢰할수 없는 나치 선동꾼이기 때문에 지금은 학술적 가치를 완전히 상실했을뿐만 아니라 그를 인용하는거 자체가 '나는 네오나치요' 선언하는 행위로 취급받고 있다.
카렐 식의 서술에서 더 학문적인 저작으로는 알버트 시튼의 2권의 책인 <러시아-독일 전쟁(Russo-German Conflict)>와 <모스크바 전투(Battle of Moscow)>로 짐케의 연구를 전술적 수준으로 분석한 것이다. 독일 사단들의 공식 기록을 통해 시튼은 전술적 수준에서의 전쟁사 서술이라는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카렐처럼 시튼은 소련 자료의 부족 때문에 독일 측 관점에서 전쟁을 보는 경향을 보였다.
이런 서방권의 저술에는 나치인종주의적인 기술도 많이 눈에 띤다. 가령 러시아인들은 "중세부터 억압과 순종에 길들여져 왔기 때문에 희대의 독재자 스탈린의 명령에 따라 독일과의 전쟁에서도 맹목적인 희생을 바쳐 승리할 수 있었다."[70]는 식의 기술이다. 이런 기술은 러시아인을 자기 목숨도 전제자에 바치는 노예 정도로 묘사하는 것이고, 나치 침략자들이 바라본 러시아 관과 똑같다. 그러나 '''만약에 전쟁에 패하면 자신이나 자기의 가족이 학살될 텐데 싸우지 않을 병사가 어디 있겠는가?''' 게다가 당장 소련이란 나라 자체가 러시아 혁명이라는 20세기의 새로운 시대를 시작한 가장 거대한 대중 봉기와 항쟁을 통해 생긴 정권이고, 꼭 숙청이나 굴라그 같은 강압적 방법이 아니라 진심으로 공산주의소비에트 연방의 이상에 믿음을 가지고 투신한 사람들도 많았고 공산주의자가 아니라도 러시아 민족주의와 애국심으로 종교에 의지하기도 하며 싸운 병사도 많았다.
실제로 독일군이 대승을 할 때(바르바로사 작전~청색 작전)는 개별 전장에 투입된 인원은 독일군이 더 많았다. 바르바로사 작전의 참패는 소련군의 졸렬한 지휘도 한몫했지만, 애당초 투입된 독일군 병력이 더 많았기 때문이다.[71][72] 그러나 소련군이 우세한 시기가 되면 소련군은 대체로 1.4~2배 정도의 전체 병력을 투입했으며 독일군과 마찬가지로 독일군의 방어의 취약점을 찾아 집중 공격했다.(그러나 르제프전투에서도 독일군은 적은 병력으로 소련을 완파했다.) 이 때문에 공세의 중심에 서 있는 독일군 지휘관이 느끼는 적의 병력 수는 수십 배가 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공세를 펼 때 적보다 많은 병력을 동원한다는 점은 독일군이든 소련군이든 마찬가지다.'''
이러한 독일 편향적인 냉전기 서방의 연구 저작에서 존 에릭슨의 저작은 단연 독보적이었다. 에릭슨의 연구는 1960년대 이후부터 그가 작고한 2001년까지 독소전쟁 연구에서 가장 큰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에릭슨의 책들은 기존의 독일 관점 동부 전선 서술을 극복하고 소련 측 관점을 대거 차용해 동부전선 사를 서술했다. 그의 첫 번째 책인 <소련군 최고 사령부(Soviet High Command)>는 1941년 여름의 상황을 최초로 조명했다. 그의 뒤따른 두 책인 <스탈린그라드로 가는 길(The Road to Stalingrad)>와 <베를린으로 가는 길(The Road to Berlin)>은 전쟁 전체를 자세하게 기술했다. 이 책들의 원칙적인 가치는 수백 개의 소련 자료에서 가치 있는 자료를 뽑아 동부 전선에 대한 상세한 기술을 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에릭슨 같은 저자도 있고 베트남 전쟁 이후 대두된 미군의 개혁 바람에서 소련군의 기동전과 작전술을 연구하는 경향이 생겨나긴 했지만 사실 대부분 학술적인 것이라 대중이 접하기 힘들었고, 특히 에릭슨의 저작들은 영미권에서도 어렵기로 소문나 있던 지라 대중의 인식을 바꿔놓기는 힘들었다. 무엇보다 서구권의 창작물 및 가볍게 볼 수 있는 서적들이 독소전쟁을 제대로 다루지 않는다는 것도 큰 문제였다.

7.8. 냉전 이후


냉전이 해빙기를 맞이하고 소련 쪽 자료 공개가 이루어지기 시작하면서 독소전 연구가 활기를 띄기 시작했다. 존 에릭슨을 비롯한 서방 학자들은 동서독 역사학자들의 교류 중에서 유출된 소련의 내부 연구 자료들과 1, 2차 사료들을 구할 수 있었고 그 결과 존 에릭슨은 기념비적인 독소전쟁 3부작인 <소련군 최고사령부(Soviet High Command)>, <스탈린그라드로 가는 길(The Road to Stalingrad)>, <베를린으로 가는 길(The Road to Berlin)>을 출판할 수 있었다.
이후 소련이 붕괴되고 문서 보관고의 문이 열리기 시작하자 독소전쟁 연구는 전성기를 맞이하기 시작했다. 존 에릭슨은 물론이고 데이비드 글랜츠를 비롯한 새로운 연구자들이 개방된 소련측 자료들을 대거 연구에 수용함에 따라 독소전쟁 연구는 크게 활기를 띄었다. 글랜츠는 이 시기 조너선 하우스와의 공저를 통해 체계적인 독소전쟁 개괄서인 <거인들이 충돌했을 때(When Titans Clashed-국내 번역명 '독소전쟁사')>를 출판했다.
<When Titans Clashed> 이후 글랜츠와 니입 부자(父子), 스웨덴의 군사사학자 니콜라스 채터링을 비롯한 많은 학자들이 독소전 연구에 뛰어들어 명저들을 출판했고 공산주의 체제의 강박증에서 풀려난 러시아 학자들 또한 갈수록 가치 있는 연구 성과들과 출판물들을 내고 있다.
그리하여 여러 사실이 새롭게 밝혀졌는데, 데이비드 글란츠가 발굴한 "르제프 전투"가 대표적이다. 이 공세는 글란츠의 저서 Zhukov's greatest defeat page(1999)가 나오면서 알려졌다. 요약하면 1942년 11월의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천왕성 작전은 사실 주공세가 아니었고, 실제 주 공세는 게오르기 주코프가 그 북쪽인 르제프에서 맡았던 "화성 작전"이었는데, 여기서 주코프가 대패를 당했다는 것이다. 현재 영미권에서 화성 작전으로 대표되는 르제프 전역과, 그 동안 남부집단군에 비해 주목도가 낮았던 중부집단군의 전투에 대하여 지속적으로 연구가 진행되는 계기가 되었다. 반면 러시아 군사학자들은 화성 작전으로 독일 중부집단군의 발이 묶여서 스탈린그라드의 위기를 지원할 수 없게 했다는 주코프의 일기 등을 기반으로 하여 이 작전이 글란츠의 말대로 꼭 실패라고 볼 수 없다는 반론을 제기하고 있지만, 글란츠는 7년여 만에 발매된 러시아어 저서에서 부록으로 당시 소련군 군사 문서를 다량 수록하여 재반론하고 있다.
또 한 가지 사례는 니콜라스 채터링이 발굴한 프로호프로카 전투의 손실 분석이다. 이 사람의 책 《Kursk 1943: A Statistical Analysis, London: Frank Cass》(2000)에서는 소련 제5전차군이 SS 기갑사단과 격돌해서 대등하게 싸웠다고 선전되었던 프로호프로카 전투에서 사실 소련군이 전술적으로는 대패했다는 것을 독일군 작전 일지를 분석하여 밝혔다.(독소의 손실 비는 약 1:6) 그러나 이런 전술적 승리에도 불구하고 이 전투에 참가한 독일 기갑 부대는 그 전투에서 입은 손실 또는 지연 때문에 더 이상의 진격을 중단, 소련군의 돌출부를 잘라 버리는 데 실패했고, 결과적으로 이 전투가 전략적으로 소련의 승리라는 점은 부인되지 않는다. 최근에는 성채 작전의 북부 방면을 담당한 독일 중부집단군과 오룔 탈환 전투인 소련군의 쿠투조프 작전에서의 손실 또한 1:7에 가까웠다는 연구가 제기되고 있다.
어찌되었든 소련군의 문서들이 많이 공개되면서 기존 독일군에 편중되었던 시각이 사라지는 중이다. 특히 미군은 독소전쟁 시기를 거치면서 완성된 '''소련군의 작전술을 본격적으로 본받고 배웠고''' 걸프 전쟁의 승리에 크게 기여했다는 사실이 밝혀지기도 했다.[73] 미군은 1982년 이전 까지만 해도 작전술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아 야전군, 집단군을 통솔할 작전술이 부제한 상황이었고 거기다가 독일 국방군 출신 장교들이 서독군과 나토군에 대거 편입되면서 미군 장교 상당수들도 인종주의적 시각에도 편승해서 소련군을 무시하는 시각이 자리잡았다. 그러나 베트남 전쟁제4차 중동전쟁을 거치면서 장차 바르샤바 조약기구의 대규모 재래식 기갑 공세에 맞서서 대규모 야전 부대들을 통솔할 새로운 작전 개념이 필요했다. 데이비드 글랜츠를 비롯한 연구자들이 소련군의 작전술을 적극적으로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그 결과 1985년, 소련군사연구소가 창설되는 것을 시작으로 미육군지휘참모대학의 고등군사연구원에서 소련군 군사 서적이 사용되었다. 그리고 1986년 판 야전근무 요무령에도 작전술이 본격적으로 명시되면서 미군은 소련군의 작전술 체계를 도입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러한 결정은 걸프 전쟁의 승리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서방 전사가들이 편견 없이 소련군의 작전 체계들을 연구하는 행보에 대해 소련 측에서도 만족감을 표명했다고 한다.

8. 매체



8.1. 영화


  • 고양 - 컴 앤 씨 감독인 엘렘 클리모프의 아내기도 한, 라리사 셰피트코가 찍은 유작. 독소전쟁 벨라루스를 배경으로 소련 저항군 병사 두 명이 독일군의 포로로 잡히면서 벌어지는 순교극을 다루고 있다.
  • 베를린 함락 - 1949년, 소련. 물론 시대에 걸맞는 스탈린 숭배 영화다. 베를린 전투만을 다루진 않고, 독소전의 시작과 끝까지 다루었다. 그래도 소련군의 복식이나 무기들은 전쟁이 끝난 지 얼마 안 되어서 제대로 고증되어 있다. 잘 관찰하면 대전 기간 중의 소련군 제복의 변천사[74]를 볼 수 있다. 거기다가 수백 대의 T-34 전차, SU-76, SU-152 자주포, 카츄샤 로켓포를 실은 트럭들이 소련군 병사와 함께 행진하는 CG 없이 찍은 실사판 장관을 볼 수 있다.
  • 인간의 운명 - 1959년 소련. 전쟁의 참혹함과 전쟁 고아 등 피해자들의 고통, 그리고 가족애와 인간애를 다룬 영화. 미하일 숄로호프의 소설을 영화화한 것이다. 숄로호프는 인간의 운명으로 레닌 상을 받았고, 여러 소설들을 저술해 1965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 철십자 훈장 - 1977년 미국. 할리우드 영화에서는 잘 다루지 않는 독소전을 다루었다. 이미 전황이 기울어진 1944년 산전수전을 다 겪고 철십자 훈장을 탄 독일군 고참 부사관 슈타이너 중사가 훈장을 위한 공명심에 들뜬 귀족 장교 슈트란스키 대위를 바라보는 시선을 통해 전쟁의 허무함을 나타낸다. 당시 유고슬라비아 현지에서 로케를 해서 T-34 수백 대와 함께 몰려나오는 우라 돌격이 이 영화의 백미. 슈타이너가 실전에서 탄창도 제대로 교환하지 못하며 허둥대는 상관을 보고 미친 듯이 웃어대는 모습 또한 명장면이다.
  • 벙커 - 1981년, 프랑스. 2부작 TV영화로, 훗날의 다운폴과 마찬가지로 벙커에 갇힌 히틀러와 주변 인물들을 다뤘다. 히틀러 역할을 맡은 안소니 홉킨스의 명연기를 감상할 수 있다.
  • 컴 앤 씨 - 1985년, 소련. 어린 소년을 화자로 독일 국방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을 다룬 영화다.[75]
  • 즈베즈다 - 2002년, 러시아. 1944년 독일군 후방으로 침투한 소련군 정찰대 이야기. 즈베즈다는 영화에 등장하는 소련군 정예 정찰 부대명이자 암호명이다.
  • 피아니스트 - 2003년, 프랑스, 영국, 독일, 폴란드. 독소전쟁 자체보다는 독일군 점령 하의 바르샤바가 배경이다. 마지막 부분에서 소련군과 패배한 독일군이 나오기는 한다.
  • 탈리-이한탈라 1944 - 2007년 핀란드. 1944년 6월 25일~7월 9일까지 벌어진 핀란드와 소련의 탈리-이한탈라 전투를 배경으로 한다. 이 전투 자체는 핀란드군이 소련군의 공세를 막고 격퇴하는 데 성공했고 최종 사상자수 차이도 2.5배 가까이 차이 났지만, 전체 전력 차이 때문에 핀란드는 GG 치고 정전 협정을 체결한다. 그리고 핀란드는 소련과 함께 독일을 공격한다.
  • 베를린의 여인 - 2008년, 독일, 폴란드 합작. 베를린 전투가 배경. 점령군으로서의 소련군과 독일인의 복잡한 감정을 다루었다. 이 영화에서 초반부에 소련군의 범죄(약탈, 강간) 및 독일 여성들의 치부(성상납) 같은 이야기가 나오긴 하지만,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소련군 병사들의 인간적 모습이 잘 나타난다. 다큐멘터리나 전쟁물 같지만 실제로는 점령군 장교와 피점령국 여인 사이의 복잡 미묘한 감정을 그린 멜로 물이다.
  • 디파이언스 - 독일군 점령 하의 벨라루스에서 지역 농부들이었던 비엘스키 형제들이 이끈 유대인 게릴라가 주 소재. 이들은 천 명이 넘는 유대인들을 보호했고, 소련군 유격대와 협력해 독일군을 공격하기도 했다. 소련군 유격대 사령관도 이들의 전략적 중요성을 알아서 많이 도와줬다.
  • 레닌그라드 - 2009년, 러시아, 영국 합작. 레닌그라드 포위전이 배경이다. NKVD에 의해 스파이로 오인받아 붙잡힌 영국인 기자(미라 소르비노)가 여자 민병대원의 도움으로 탈출하여 독일군에 포위된 레닌그라드에서 추위, 굶주림 속에서 생존의 투쟁을 하는 내용.
  • 브레스트 요새 - 2010년, 러시아. 1941년 6월 22일~29일 브레스트 요새 전투가 배경이다. 처절한 우라돌격 신으로 유명하다. 불시에 기습당해 무기조차 들지 못한 상태에서 창틀, 의자, 도끼 등 손에 잡히는 대로 들고 독일군에게 돌격한다. 실제 브레스트 요새 전투에서 독일 45사단은 후퇴를 명령받았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요새는 하인츠 구데리안이 폴란드에게 뺏어서 소련에 넘겨준 것이었다. 따라서 영화 초기에 민간인들과 희희낙락하게 평화로운 삶을 사는 소련군의 모습 따윈 다 뻥이다. 실제로 소련 점령 치하 폴란드는 나치 치하 지역처럼 살벌한 군정이 이루어졌으니, 폴란드인들 말마따나 이건 역사 왜곡이 굉장히 심한 편이다. 한국에선 개봉도 제대로 안 되고 다운로드 서비스만 하는 영화지만, 의외로 한국 영화 채널에서 자주 틀어 주었다.
  • 화이트 타이거 - 2012년, 러시아. 제85회 아카데미 외국어 영화상 노미네이트. 1943년부터 종전까지의 기간 동안, 정체를 알 수 없는 독일 전차와 이에 대적하는 소련군 전차 승무원들의 모습을 담았다. 전쟁으로 나타난 인간 심리를 이야기하는 전차병 나이데노프, 그런 그와 적 전차를 전쟁에 맞추어 새롭게 태어난 존재로 여기는 상관 페토도프, 베를린의 항복 식전에 등장한 독일군 고관들, 그리고 마지막 히틀러와 누군가의 대화 등을 보면 단순히 전차전만을 그린 영화가 아님을 확인할 수 있다.
  • 우리 어머니, 우리 아버지(Unsere Mütter, Unsere Väter - 2013년, 독일. 1941년 6월부터 1945년 5월까지를 5명의 시점에서 다룬다. BoB와는 다르게 '승리의 영광'이 아닌 '처절한 패배'를 다루는 것이 특징. 초반에는 "모스크바까지 OOkm"였지만 독일이 밀리기 시작하는 중반부부터는 "베를린까지 OOkm"로 바뀐다. 전쟁을 지속하며 결국 인간성이 마비되어 가는 인물들, 전쟁에 광기에 휩쓸린 사람들과 처절하게 죽어 가는 병사들을 주로 보여 준다.
  • 스탈린그라드(2013) - 2013년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등. 1993년 독일에서 만든 원조 스탈린그라드를 패러디해서 만든 영화이다. 1993년작 스탈린그라드와는 달리 소련군 시점이며, 스탈린그라드 전투 당시 군인들과 함께 생활했던 한 러시아 여인의 회상을 바탕으로 만든 영화이다. 1993년 작품과는 내용도 전혀 다르고 등장인물도 전혀 다르다.
  • 1944 - 2015년, 에스토니아. 독일과 소련 사이에 있어서 2차 세계 대전에 휘말려 버린 에스토니아를 배경으로 같은 민족의 인물들이 한쪽은 독일 무장친위대에, 다른 쪽은 소련군에 소속되어 동족상잔의 비극을 벌이는 이야기. 나바 전투(Battle of Narva)에서 일어난 실화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제20무장척탄병 사단[76]이 소련군과 치열하게 전투를 벌이는 도중, 상대방으로부터 에스토니아어가 들리기에 싸움을 멈추고 확인해 보니 비록 군복과 장비는 달랐지만 같은 에스토니아인으로 구성된 소련군 제8 '에스토니아' 소총병 군단[77]이었다.영화로 유명한 국가에서 만든 것은 아니지만, 의외로 전투 장면의 퀄리티가 굉장히 높다. 다양한 독일군 총기와 보존 상태가 좋은 다수의 T-34/85를 볼 수 있다.
  • 여기의 여명은 고요하리라 - 1969년 소설 원작의 영화로 1972년과 2015년 2차례에 걸처 영화화 되었다. 1942년 키예프 철도를 파괴하려는 독일군 16명을 상대로 싸우는 소련 여군 병사들과 지휘관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 T-34(영화) - 2018년 러시아 영화. 독일군에 포로로 잡힌 T-34 승무원들이 탈출을 감행하는 스토리의 영화이다. 전차 포탄을 슬로 모션으로 보여준다.
  • 디어 엘자(한국어 개봉명: 위대한 전진) - 독소전쟁이 한창이던 1940년대 동부전선에 투입된 헝가리군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 보통 동부전선의 이야기는 독일군 아니면 소련군이 주인공이 되어서 이야기를 그려나가는 것이 특징이지만, 이 영화는 거의 유일하게 헝가리군을 다루고 있다. 교사 출신이었던 한 남자가 헝가리군에 징집되어 소련군에 대항해 싸우지만 공세에서 패배, 소련군의 포로가 되어 잡히면서 발생하는 이야기들을 다루고 있다. 중간중간 이탈리아군의 이야기도 나와, 독일 소련 위주의 독소전이 아닌 그 외 추축국들의 이야기를 볼 수 있다는 점에서 꽤 흥미로운 영화.

8.2. 게임



8.3. 만화


  • 수리부엉이 - 독소전의 공중전을 다루고 있다. 프랑스 만화 특유의 정밀한 묘사가 일품.
  • 요한의 타이거 - DC 코믹스 산하의 버티고 코믹스의 워스토리의 단편 중 하나. 정확히는 독소전 말기인 1945년 4월의 시점으로 전차장 요한이 부하들을 살리기 위하여 고생하는 이야기이다. 고증이 다소 좋지 못하지만 작품이 나온 시점을 감안하면[78] 동부전선에서 독일군의 전쟁범죄를 적나라하게 묘사했다. 애초에 주인공 요한부터 전쟁범죄를 저질렀다.

8.4. 기타


  • 록그룹 sabaton - Panzerkampf, Attero dominatus 등 독소전쟁을 포함해 2차 대전을 소재로 한 노래들을 불렀다.
  • 러-일 합작 애니메이션 제 1부대: 진실의 순간'[79]
  • 버프소녀 오오라 - 88화에서 '인류역사상 ㅄ같은 결정을 하면 항상 나타나 우는 새' 븟새가 등장하는데, 그때 나온 컷이 히틀러가 소련을 공격한다.라고 말하자 창가에서 븟새가 울었다.
  • 일본의 만화가 고바야시 모토후미의 작품들
  • 잊혀진 병사 (Le soldat oublié) : 프랑스-독일 혼혈로서 동부전선에 참전했던 독일군 병사 ‘기 사예르’(처음에는 수송부대로 참전하지만 나중에는 독일의 정예사단이자 전략예비대로 동부전선의 소방수 역할을 한 그로스 도이칠란트 사단으로 들어감)의 수필이다. 당시 동부전선의 처절함이 최악 중의 최악의 상황을 묘사하며 나타낸다.[80] 화자는 영국군에게 포로로 잡히는데 다행히도 아버지가 프랑스인이어서 프랑스 재건이라는 암묵적인 명목으로 별다른 재판 없이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게 되었다.(아버지가 프랑스인이라는 혼혈, 작품 시작 부분에는 머리가 검고 곱슬이라는 외모까지 더해져, 독일인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동료들에게 무시당하는 모습도 나온다. 하지만 바로 이 점 때문에 기 사예르는 평범한 독일 병사들과 달리 포로로 잡히어 나름의 파격적인 대우를 받게 된다. 여담으로 2차 대전 후 프랑스 군에서 나름의 지옥 훈련을 받는다고 했지만 자신의 입장에서는 동부전선에서 겪은 것들에 비하면 아이들 장난 수준이었다라는 정도로 시니컬하게 쓴다.)
  •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 전쟁에 참여한 여군들을 중심으로 그들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풀어낸 '이야기 소설'. 1985년 작품이나 소련 당국이 "이 책을 읽고 조국을 위해 싸울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저열한 사실주의에 물든 더러운 속옷 같은 책."이라고 비판하며 압박을 주는 바람에 내용 일부를 잘라내고서 출판할 수 있었다. 그 후 소련이 무너지고 2002년에 검열당한 내용들을 복구해서 재출간했다. 독소전쟁의 지옥도를 있는 그대로 풀어낸 수작. 링크는 그 지옥도의 일부. 2015년에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 폭풍속의 씨앗 - 실제 무장친위대 참전 병사인 헤르베르트 브루네거의 회고록. 그가 소속된 3 SS 토텐코프 사단 옹호, 자원 입대 여부 등 문제가 있으나 동부전선의 처절함과 당시 독일군의 상황 등을 훌륭하게 묘사하였다.

9. 어록


Wollt ihr den totalen Krieg? Wollt ihr ihn, wenn nötig, totaler und radikaler, als wir ihn uns heute überhaupt erst vorstellen können?#

여러분! 총력전을 원하십니까? 만약 필요하다면, '''오늘날 우리가 대체로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도 더 급진적이고 총력적인 전쟁이 되기를 원합니까?''' -

- 요제프 괴벨스[81]

국민 여러분! 우리 정부와 그 수반이신 스탈린 동지께선 저에게 다음과 같은 성명을 발표하도록 위임하셨습니다. 오늘 오전 4시를 기하여 단 한마디의 요구 사항이나 선전포고도 없이 독일 군대가 우리 소련을 공격하여 국경선의 여러 곳을 넘어왔으며, 항공기를 이용해 지토미르와 키예프, 세바스토폴, 카우나스와 기타 도시들을 폭격함으로써 2백명 이상의 사상자를 냈습니다. 루마니아와 핀란드 영토로부터 공습과 포격까지 자행했습니다. 우리나라에 대한 이같은 공격은 문명국 역사상 유례가 없는 배신행위입니다. 소비에트 사회주의 연방과 독일 사이엔 불가침조약이 체결되어 있었고, 우리 정부에선 이 조약의 모든 규정들을 성실하게 이행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이같은 공격행위를 저지른 것입니다. 불가침조약이 유효한 전체 기간에 걸쳐 우리 소련의 조약 준수 여부와 관련해 단 한번도 불평하지 않았던 독일정부가 우리에 대하여 이처럼 그릇된 공격행위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소련에 대한 이런 약탈성 침공과 관련해 전적인 책임은 독일의 파시스트 지도자들이 감당해야 합니다. 오전 5시반, 다시 말해서 '범죄적 침략행위'가 저질러진 연후에 모스크바 주재 독일대사 슐렌부르크는 자신의 정부를 대신하여 우리 붉은 군대가 독일의 동부 국경지대에 집결했다는 이유로 우리에 대해 전쟁을 개시한다는 독일정부의 결심을 외무인민위원인 저에게 통보해 왔습니다. 이러한 통보문에 대해 저는 소비에트 정부를 대신하여 즉각 다음과 같이 대응했습니다. 마지막까지 독일정부는 우리측에 어떠한 요구도 하지 않았다는 점, 독일은 소련의 평화적인 입장과 태도에도 불구하고 소련을 공격했다는 점, 그래서 파시스트 독일은 침략자라는 점을 밝혔습니다. 정부의 훈령으로 저는 성명을 발표해 우리 육군과 공군이 국경선 어느곳도 침범하지 않았다는 것을 밝히고, 소련 항공기가 루마니아 비행장들을 폭격했다는 라디오 방송 내용은 새빨간 거짓이며, 우리에 대한 도전임을 명시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측이 소비에트와 독일간의 조약을 준수해오지 않았다며 히틀러가 오늘 뒤늦게 꾸며대서 우리를 비난한 것 역시 거짓이고, 우리에 대한 도발입니다. 우리 연방에 대한 공격은 이미 시작되었기 때문에, 우리 정부는 아군에 이 약탈자들의 공격을 격멸하고, 우리 영토로부터 독일군을 몰아내도록 명령을 내렸습니다. 우리가 알기로 고통을 겪고있는 독일의 국민들이나, 독일의 노동자, 농민, 지식인들이 이번 싸움을 우리한테 걸어온 것이 아니라, 이미 프랑스체코, 폴란드, 세르비아, 노르웨이, 벨기에, 덴마크, 네덜란드, 그리스 및 기타 민족들을 노예로 만든 피에 굶주린 소수의 독일 파시스트 지배자 도당이 걸어온 것입니다. 소비에트 정부는 용감한 우리 육해군과 독수리 같은 우리 공군이 조국과 인민을 위해 명예롭게 의무를 다해 침략자에게 막대한 타격을 가해주리라 굳게 믿습니다. 우리 인민들이 오만방자한 적들의 공격을 받아본 것은 이번이 처음만은 아닙니다.

나폴레옹공격해 왔을 적에도 우리는 조국을 위해 싸웠으며, 나폴레옹은 패배를 맛보았고 그의 최후를 맞이했던 것입니다. 오만스럽게 우리 조국을 침범한 히틀러도 똑같은 운명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붉은 군대와 전체 인민은 다시금 조국을 위해, 우리나라와 명예, 자유를 위해 성공적인 전쟁을 이끌어나갈 것입니다. 소비에트 정부는 우리 인민 모두가 노동자와 농민, 지식인, 남녀 모두가 자신들의 의무와 직무를 충실히 수행해 주시리라 확신하는 바입니다. 우리 인민들은 그 어느때보다 굳건히 단결하여 일어서야 합니다. 우리 인민 각자는 자신과 모든 사람들의 규율과 조직적인 행동으로 극기심의 참다운 애국자가 됨으로써 반드시 적들을 무찌르도록, 붉은 군대 육해공군이 필요할 모든걸 지원해야 합니다. 정부는 소비에트 인민 모두에게 영광스런 볼셰비키당(黨)과 정부, 그리고 위대한 지도자 스탈린 주위에 더욱 굳건하게 뭉쳐주시기를 당부드립니다. 우리의 목적은 정당한 것입니다.

'''적들은 반드시 패배하고 말 것입니다. 승리는 우리의 것입니다!'''

1941년 6월 22일, 대조국전쟁 개전(開戰) 사실과 항전을 촉구하는 담화문을 발표하면서 뱌체슬라프 몰로토프

"22 июня 1941 года"

"1941년 6월 22일"

Внимание, внимание.

주목, 주목.

Говорит Москва. Передаём важное правитель ственное сообщение.

모스크바에서 알려드립니다. 중요한 정부의 메시지를 전해 드립니다.

Граждане и гражданки советского союза.

소비에트 연방의 인민들이여.

Сегодня в 4 часа утра без всякого объявления войны Германские вооруженные силы атаковали границы советского союза.

오늘, 6월 22일 새벽 4시 선전포고도 없이 독일의 군대가 소련의 국경을 넘어 공격해왔습니다.

Началась '''великая отечественная война''' советского народа против немецко-фашистских захватчиков.

파시스트 침략자들에 대항하는 소련 인민의 '''대조국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Наше дело правое, враг будет разбит, Победа будет за нами!

우리의 대의는 옳으며, 적은 패배할 것이고, 승리는 우리의 것입니다!

-1941년 6월 22일, 유리 레비탄 아나운서, 소련 라디오 방송. 원음 영상

Неужели немецко-фашистские войска в самом деле являются непобедимыми войсками, '''как об этом трубят неустанно фашистские хвастливые пропагандисты?'''

허풍쟁이 파시스트 선동꾼들이 끊임없이 요란하게 알린 것처럼, '''파시스트 독일의 군대는 정말 무적인가?'''

Конечно, нет! '''История показывает, что непобедимых армий нет и не бывало.'''

절대 그렇지 않다! '''역사는 무적의 군대란 없으며 존재한 적도 없다고 말하고 있다.'''

-1941년 7월 3일, 소련 국가 방위 위원회(GKO) 위원장, 이오시프 스탈린의 라디오 연설 中. 연설 대본, 녹음 영상

'''우리 정보국은 나에게 소련에는 160개 사단과 3,000대의 전차가 있다고 말했다. 우리는 지금까지 400개 사단과 2만 대의 전차를 파괴했으며, 이제 우리 앞에는 500개의 사단과 3만 대의 전차가 있다.'''

- '''아돌프 히틀러'''

"내가 유일하게 배우지 못한 말, 그것은 바로 항복이라는 말이다."

"우리 도이칠란트 역사에 항복이라는 단어가 적히지 않을 것을 온 세계에 선언하노라."

- 아돌프 히틀러

'''신병들은 이곳에 잘 적응하지 못한다. 그들은 어머니를 찾다가 결국 미쳐서 죽게 된다. 8월 8일, 6중대의 총 사망자 50명 중 우리는 그렇게 35명을 잃었다.'''

- 독일 제18보병연대 '호케' 소령[82]

"히틀러의 독일이 우리를 공격하고 있다. 그들의 공격은 냉혹하고 무자비하다. 이 나라에 암운이 드리워졌다."

- 이오시프 스탈린

'''나는 여기서 죽지만 항복하지 않는다. 조국이여, 잘 있거라.'''

(I'm dying, but I won't surrender! Farewell, Motherland.)

- 브레스트 요새 방어전 당시 이름 없는 소련군 병사가 남긴 문구[83]

[84]

나를 기다려줘요. 나는 돌아올 거예요.

온 힘을 다해 기다려줘요.

황색 비와 함께,

슬픔이 밀려오더라도 기다려줘요.

휘몰아치는 눈보라 속에서 기다려줘요.

타는 듯 뜨거운 열기 속에서 기다려줘요.

다른 사람들이 기다리길 포기하고

그와 함께 지난날을 잊더라도 기다려줘요.

먼 곳에서 쓴 편지가

오지 않을 때도 기다려줘요.

함께 기다린 사람들이 모두

기다림에 지치더라도 기다려줘요.

나를 기다려줘요. 나는 돌아올 거예요.

자신들이 옳다고 주장하면서

당신에게 잊어야 한다고 하는 사람들의

말을 듣지 말아요.

비록 내 아들과 어머니가

내가 벌써 죽었다고 믿고 있더라도,

내 친구들이 기다림에 지쳐서

모닥불 옆에 앉아 내 영혼이 편히 잠들기를 빌며

쓴 술을 한 잔 마시더라도...

기다려줘요. 나를 위해 건배하는

그들과 성급하게 함께하지 말아줘요.

나를 기다려줘요. 나는 돌아올 거예요.

모든 죽음을 능멸하기 위해.

기다리지 않은 사람들에게

"그는 운이 좋았군."이라고 말하게 해요.

그들은, 기다리지 않은 사람들은

이해하기 힘들지요.

바로 그 불의 열기 속에서

여기서 나를 기다림으로써,

나를 구원한 이는 바로 당신이라는 것을.

내가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오직 당신과 나만이 알 거예요.

당신이 다른 사람과는 달리

기다리는 법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지요.[85]

졔냐가 1941년 12월 28일 아침 12시에 죽었다.

할머니가 1942년 1월 25일 낮 3시에 죽었다.

레카가 1942년 3월 17일 새벽 3시에 죽었다.

엄마가 1942년 5월 13일 아침 7시 30분에 죽었다.

사비체프 집안 식구가 죽었다.

'모두 다 죽었다.'

- 레닌그라드 공방전 당시, 11살 소녀 타냐 사비체바의 일기장. 일기장의 주인도 1942년 말 병으로 사망했다.[86]

'죽이고 또 죽여라, 적들의 시체는 예술이며 혁명이다.'

- 프라우다

'''"네가 유능한 장교들을 다 죽여 버렸잖아!"'''(you had our best generals killed!)[87]

- 클리멘트 보로실로프, 자신을 질책하는 스탈린에게

"그 때 1학년 학생이 세 반 있었는데, 이웃 마을에 두 반, 가예보에 한 반이 더 있었습니다. 우리는 서로 잘 알고 지냈죠. 그래서 나는 전쟁에서 몇 명이 죽었는지 압니다. 우리는 100명쯤 됐는데, 전선에서 죽은 사람이 분명히 92명이에요. 나머지는 모두 불구자가 되어 고향으로 돌아왔고요. 사지 멀쩡히 돌아온 사람은 저 1명뿐이었습니다."

- 소련군 참전 용사의 증언

'러시아의 광대함은 해아릴 수가 없다... 사단 12개를 처부술 때마다 또 다른 사단 12개가 나타난다.'

- 프란츠 할더

전반적인 관점에서 보았을 때 소련군이 궤멸시킨 독일의 전력은 25 개국 연합군 모두가 한 것보다 명백히 크다.

프랭클린 D. 루스벨트가 1942년 5월에.[88]

'''우리 소련의 승리는 제가 이뤄낸 것이 아닙니다. 이 모든 것은 우리 소련 인민들의 피와 땀이 이룩해낸 것입니다.'''

- 이오시프 스탈린, 승전 후에



10. 관련 자료


  • 스탈린과 히틀러의 전쟁(리처드 오버리)
  • 피의 기록, 스탈린그라드 전투(안토니 비버)
  • 독소전쟁사(데이비드 글랜츠)
  • pobediteli[89]

[1] 빌리까야((위)대(한)) 아쩨취스뜨빈나야(조국) 바이나(전쟁), 영어로는 The Great Patriotic War라고 한다. 참고로 조국전쟁은 프랑스의 나폴레옹과 치른 전쟁이다. 거기에 대를 붙여서 대조국전쟁이라는 명칭이 만들어졌다. 한국에서는 보통 독소전쟁이라는 표기가 많이 쓰이지만, 문재인 대통령이 러시아 방문 중 상대국에 대한 존중 차원에서 두마 연설에서 러시아측 용어를 사용한 바가 있다.15분 20초부터[2] 노르망디-니에멘 참고.[3] 무기대여법 참고.[4] 미국의 지원은 '''소련이 전쟁에서 승리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자세한 내용은 무기대여법 참고.[5] 기병 부대를 비롯한 군대를 파병해 지원했다.[6] 제2차 세계 대전/관련 인물 참조.[7] 아직 나무위키에 개별문서가 생성된 장군은 아니지만, 무려 37살이라는 나이에 전선군 사령관에 오를 정도로 대단한 인물이었다. 동프로이센 공세 도중 전사.[8] 독일 민주 공화국, 폴란드 인민 공화국, 체코슬로바키아 사회주의 공화국, 헝가리 인민 공화국,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 알바니아 사회주의 인민 공화국, 루마니아 사회주의 공화국, 불가리아 인민 공화국 건국.[9] 출처 : 뤼디거 오버마스,2000. ISBN 3-486-56531-1; 바딤 에리크만, 2004. ISBN 5-93165-107-1; Mark Axworthy, 1995, ISBN 1-85409-267-7 및 기타 서독 정부 보고서[10] 추축국에 부역한 소련인들의 그들 측 명칭. 러시아 해방군, 카민스키 여단 등.[11] 다만 베를린이 소련에게 접수된 이후에도 엘베강 도하 작전이나 덴마크의 일부 섬에서 잔존 독일군이 소련군에 항복을 거부하면서 저항하는 등 소규모 전투는 계속해서 벌어졌다. 이런 저항이 완전히 끝났던 건 대략 1945년 5월 말- 6월 경이었다.[12] 본명은 레지널드 에일머 랜펄리 플렁켓언리얼드락스(Reginald Aylmer Ranfurly Plunkett-Ernle-Erle-Drax, 1880-1967). 최종 계급은 해군 대장(계급)이다.[13] 사실 이는 1차대전 전부터 이어져온 전통(?)이다. 독일은 독일 제국 시절에도 서쪽의 프랑스와 동쪽의 러시아로부터 양쪽에서 동시에 공격받는걸 우려했고 그래서 슐리펜 계획을 세웠다. 비록 이 계획은 원래부터 있던 문제에 그나마 장점도 없애버린 채 고쳐버린데다가 판단 미스 등등의 이유로 실패했고 결국 독일은 양면전선에 빠져 독일 패망에 기여하다시피 했으니(정작 러시아는 러시아 혁명으로 먼저 망했다.) 나치 독일으로서는 양면전선을 만들지 않는게 제1의 목표일 수 밖에 없다. 실제로 나치 독일도 정말로 양면전선이 형성되는 바람에 망했으니 그 판단은 틀린건 아니었다.[14] 안토니 비버/피의 기록 스탈린그라드 31~32[15] 실제로도 1942년 시점부터 이미 소련의 현역 병력은 천만명을 돌파했다.[16] 이언 커쇼, 히틀러 2권 383~384 페이지[17] 이언 커쇼, 히틀러 2권 484페이지[18] 실제로 독일에 의한 역공작이 없지는 않았다.[19] 당시에 프랑스는 점령당했고 미국은 아직 참전하지 않았다.[20] 굳이 분석해보자면 이렇다. 당시 유럽은 이미 영국과 소련만이 남아있는 상황이었고, 나머지 국가들은 중립을 선언하거나 독일에 의해 모두 점령당한 상태였다. 만일 여기서 소련이 독일에 의해 점령된다면, 사실상 유럽에서 고립되어버린 영국이 스스로 항복하고 나오거나, 설령 영국이 끝까지 저항하더라도 소련의 막대한 자원과 인구를 바탕으로 군대를 재정비해 영국을 치면 전유럽의 통일이 완성된다는 것. 그리고 이러한 생각의 바탕에는 '게르만족은 세계에서 제일 우월한 민족이니 노예 슬라브족들을 상대로 결코 지지 않는다.' 라는 히틀러 특유의 게르만 우월주의가 깔려있을 가능성이 높다. 문제는 전선이 양면으로 형성되면서 안 그래도 부족한 군이 양쪽으로 나뉘게 되었고, 소련의 뒤를 쳐주길 바랬던 일본은 이미 소련의 진가를 알고 있었고, 아리아인은 세계에서 제일 우월한 민족이 아니었다. 설령 아리아인이 세계에서 제일 우월한 민족이었다고 해도 우월한 민족이란 것이 승리를 가져다주진 않는다.[21] 농담 아니고 이미 독일은 한 차례 양면전선을 만들었다가 말아먹은 적이 있었다. 이러니 스탈린은 지극히 현실주의적 입장에서 정국을 분석한 것이었지만 그냥 히틀러가 희대의 광인인 것이다. 이미 20여년 전에 실패했는데 또 꼴아박았으니...[22] 사실 이것이 스탈린의 큰 단점이기도 했는데 강철인간이란 이름답게 기계같은 사고를 가진 스탈린은 자신의 상대도 기계적이고 냉혹한 판단을 내릴것이라 생각하고 행동했기에 히틀러의 광기을 예상하지 못했고 이후 냉전기에 서방국가들이 자국의 이권을 일부 희생하면서 타국의 민주주의를 지키려는 행동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23] (일본군만주사변 처럼)일부 과격한 독일 장교들이 히틀러의 승인 없이 자의적 도발을 감행한 것일 뿐일거라고 말하기도 했다.[24] 이 경우 독일이 다시 연합군을 바다로 몰아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견해도 있는 모양이지만 결과는 원래의 역사와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연합군이 머저리가 아닌 이상에야 소련이 독일과 언제든 한 판 붙으려고 한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을 것이고, 소련이 독일로 진공하는 것과 발맞춰서 상륙을 개시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연합군 측에서 손실이 좀 더 나왔을 가능성은 크지만 본격적으로 미국의 군수공장 라인이 돌아가면서 확충되는 물량은 영국이 유럽에 방기하고 철수한 물자의 양 정도는 우습게 쌈싸먹을 정도였기 때문에 고작 그 정도 노획했다고 해서 독일군이 연합군의 상륙을 막았을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25] 독일 또한 원래 계획대로라면 1945년에 모든 군수산업 시설이 완공되어서 총력전을 충분히 수행할 환경이 되는데 문제는 독소전쟁은 1941년에 시작되었다는 점(...). 실질적으로 나치 독일이 가장 많은 군수물자를 생산한 해는 1944년이다.[26] 이미 나폴레옹의 러시아 전쟁과 제1차 세계대전에서 러시아의 겨울 위력이 입증되었기 때문에, 과거의 선례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는 여름을 노리는 게 일반적인 전략이다.[27] 스탈린이 떨어뜨리는 문서는 독소 불가침조약 조약문이다.[28] 루스벨트가 들고 있는 몽둥이에 쓰여 있는 단어는 "합동 공세"이다.[29] 예외적으로 발터 모델은 명령형 지휘체계를 선호했다.[30] 이 수치는 정확하지 않다. 1945년 종전 당시에는 2,000만이라고 주장하였고 현재 역사가들은 종전 이후 인구 성장률과 남녀 비율을 살펴 볼 때 최대 4,000만의 인명 손실을 주장하기도 한다. 주요 전장이었던 벨라루스우크라이나에서는 아직도 시체로만 이루어진 지층이 존재한다. 벨라루스 초토화작전 문서 참고.[31] 그러나 이 자료에 의하면 소련인 사망자는 2,000만명이다.[32] 러시아에서는 다년생 검사 기준으로는 3,700만 명까지 추산하고 있다.[33] 이걸 개산하면 '''분당 약 10명'''이 죽었다는 계산이 나온다. [34] 다만 1946-47년도 기근의 영향으로 베이비붐 수준은 미국에 비해서 그리 강하지는 않았다. 미국에서 출산율 3명대 후반을 기록할 동안, 소련은 출산율 3명대 초반 정도 기록하던 수준이었다.[35]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에스토니아는 그나마 나은 편이었다. 인종 구성이 슬라브가 아닌 발트였기 때문에 나치 점령군도 학살에 신중해질 수 밖에 없었다. 실제로 소련에서 나치 부역자들이 제일 많았던 곳도 이 나라들이었다. 하지만 이 나라들도 레벤스라움의 일원이었으므로 절멸까지는 아니더라도 강제 동화의 칼날은 피할 수가 없었다.[36] 이 수치는 이 문서 맨 위에 있는 수치와 맞지 않는다. 정확한 검토 요망.[37] 이전 문서에서는 독일 국방군 총 사상자 1,348만 명이라 나와있는데, 이 수치는 이 문서 맨 위에 있는 수치와 맞지 않는다. 정확한 검토 요망.[38] 이 점에 있어선 미국더글러스 맥아더와 비슷하다. 주코프와 마찬가지로 맥아더도 성격이 매우 오만했으며, 정치적 야심을 의심받았기 때문에 정치계에서 견제가 심했다.[39] 전쟁 당시 소련군 포로의 사망률은 무려 '''30%~58%'''로 추산된다. 중국쪽에서는 70%라고 주장한다고 하는데 이쪽은 신빙성이 높지 않으므로 논외. 일단 58%로 잡은건 영국 학자 니얼 퍼거슨인데 이쪽은 아무래도 높게 잡힌편으로 보는 경우가 많다. 소련에게 잡힌 포로는 15~30% 정도로 추산되며 30%는 마찬가지로 니얼 퍼거슨의 추산이다. 참고로 일본군에 잡힌 미군 포로의 사망률은 27%이고 중국군까지 집계하면 최대 40% 수준이니 저게 결코 낮은 수치가 아니라는걸 알 수 있다.[40]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를 보면 포로로 잡힌 독일군의 내장과 갈비뼈를 볼때까지 고문하고 죽였다는 증언들이 있으며, 나치의 병사들의 도청 기록엔 전쟁 초반에 포로로 잡힌 독일군들이 푸줏간에서 도살되거나 혓바닥이 못에 박힌 채 잔혹하게 처형된 사례들이 다수 보고된다.[41] 당시 나치의 목적은 동유럽 지역의 슬라브인에 대한 말살이었으며, 소련 측 감청자료에서는 이들이 입으로도 말하기 어려운 끔찍한 전쟁범죄를 '''즐거웠던 일처럼 추억하는''' 내용도 있다.[42] 2003년 독일 영화 베른의 기적에서 주인공 꼬마 아버지도 이때 징집되어 소련 전선에 갔다가 포로가 되어 시베리아에서 10년 동안 강제노동을 하고 겨우 살아돌아왔지만, 광부였던 아버지는 10년동안의 트라우마로 독일에서 광부 일을 하려고 하자 발작을 일으켜 일도 그만둬야 했다.[43] 최대 추정치는 150만 명[44] 희생자가 대충 500-600만 선으로 윤곽이라도 잡힌 홀로코스트와 달리 포라이모스의 사망자가 30만에서 150만까지 널뛰기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45] 단, 후일 재조사에 따르면 네멜스도르프라고 선전된 학살 사진 상당수는 다른 동프로이센 마을에서 촬영됐다고 한다.[46] 출처 : Bellamy, Chris Absolute War: Soviet Russia in the Second World War. Macmillan, 2007. ISBN 978-0-375-41086-4 p.1~7[47] 독소전쟁의 인식이 한국에서 안 좋은 게, 헝가리, 루마니아, 핀란드 등 제 2선급으로 소련에 타격을 준 나라가 있을 정도로 단순히 독일 VS 소련으로만 나눌 수는 없는 노릇이다. 헝가리, 루마니아는 추축국에 가입하여 소련에서 나치 독일 못지않은 학살을 했다.[48] 소련이 자주 승리를 얻어낸 대전 후반부에도 소련의 손실은 연패를 거듭한 독일보다도 오히려 많았다. 전쟁 초반에 독일군과 소련군의 교환비는 무려 20 : 1이었다. 소련군은 바그라티온 작전 이후에 가서야 겨우 1 : 1 남짓으로 교환비를 좁히게 된다. 소련의 희생이 더 적었던 대전투는 바그라티온 작전과 베를린 전투밖에 없다.[49] 그런데 대한민국의 기성 세대에선 냉전기의 잘못된 교육 탓에 "독소전은 러시아가 독일을 두려위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잘못된 인식이 널리 퍼져 있다. 러시아인이 들으면 실소를 금치 못할 듯.[50] 다만 모스크바에서는 10월 혁명 기념일이 아니라 1941년의 모스크바 전투 기념일로 기념행진을 하는 경우는 있다.[51] 다만 이는 현실적으로 따져볼때 영프쪽도 어쩔수 없는 사정이 있긴 했다. 현대에 각국의 사료를 비교해봤을때 군수물자로나 병력으로나 병장기의 질로나 폴란드 침공 시점에선 영프가 합친게 독일측보다 우세하긴 했지만 작정하고 전쟁준비를 해놨던 독일에 비해 영국과 프랑스 양국은 '''전쟁을 한다는 생각 자체를 안하고 있었다.''' 애초에 어딘가로 공세를 간다는 생각 자체를 빼놓고 있던지라 보급수단 정비는 물론이요 편제나 작계 같은 기본적인 구성도 안되어 있었다. 즉 이 때 영프가 말없이 버로우를 탔던건 독일을 과대평가한 면도 없잖아 있지만 그 이상으로 자기네들 체계가 잡혀있지도 않았던게 컸다. 전쟁에서 위험한 것중 하나가 체계 잡히지 않은 상태에서 벌이는 전쟁이라는걸 고려하면 영프는 '''이 시점(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고 자기들은 전쟁준비가 1도 안된 상태)'''에서는 그나마 현실적인 선택을 한 것.[52] 현실에선 롬멜이 상부의 지시를 무시하고 멋대로 공세에 나서긴 했는데 롬멜이 지휘하던 군대는 '''3개 군단'''이 전부였다. 그러고도 물량차이가 압도적으로 나는 영국군을 상대로도 전선을 이집트 국경까지 밀었던걸 고려하면 보급과 군대 증원까지 겹쳐지면 아예 아프리카 대륙에서 유럽열강의 영향력을 완전히 몰아내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을 것이다.[53] 흐루쇼프는 자기 회고록에 이용한 녹음 인터뷰에서 서구가 소련의 전쟁 수행 노력에 원조한 보급 물자들의 중요성을 인정했지만, 다음과 같은 부분은 1990년대에 들어서야 비로소 간행되었다. "나는 스탈린이 주위 측근에게만 (무기대여법을) 인정하는 것을 여러 번 들었다. 그는 우리 공업의 대부분을 잃었기 때문에 만약 우리가 독일과 1대 1로 대결했었다면 감당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54] "스탈린과 히틀러의 전쟁" 268p[55] 실제로 모스크바 전투 전에 스탈린은 히틀러와의 강화를 매우 진지하게 검토했다.[56] 다만 일본이 참전했을 경우에는 무기대여법이 아무런 쓸모가 없어질 가능성이 농후하다. 수송루트가 극단적으로 제한되기 때문[57] 만약 이렇게 6군과 A집단군이 병력을 보존한 채로 성공적으로 후퇴했더라면, 남부집단군의 전력은 거의 2배로 증강되었을 것이고, 이 상태에서 성채 작전을 실행했을 경우, 쿠르스크 돌출부를 자르는게 가능했을 것이다.[58] 그린힐의 대체역사 전집에서 참고. 해당 서적은 국내 미출간.[59] 다만 일부는 영국과 노르웨이가 모조리 독일의 손에 넘어갔다면 제해권이 완전히 장악되어 미국이 렌드리스를 하려고 하더라도 제대로 소련에 도착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이건 틀린 의견으로 그 이유는 렌드리스 수송선의 북극 항로의 비중이 역사적으로 상당히 적었기 때문이다. 미국이 소련에 건네준 렌드리스 물품의 대부분은 북극 항로의 계절적인 위험과 영국을 포위한 유보트 때문에 북극 항로가 아닌 인도양태평양을 통해 옮겨졌다. 북극 항로를 통한 렌드리스는 초기에 시도해 보다가 손실률이 너무 커서 유보트를 거의 다 잡아낸 대전 후기까지는 상대적으로 적은 숫자의 배만 운영되던 비주류 항로이며 렌드리스 물품의 과반수 이상은 일본과 중립 관계였던 소련이 직접 태평양을 통해 옮겼고 나머지도 대부분은 인도양으로 옮겨졌다. 이 북극 항로의 위험성 문제는 렌드리스가 42년 중반이 넘어야 제대로 돌아가기 시작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나치가 영국을 점령하고 그로 인해 일본이 독소전에 참전하여 태평양 항로가 막힌다고 가정하면 렌드리스 자체에 큰 위험이 되겠지만 단순히 미소 간 렌드리스로 한정한다면 북극 항로는 역사적으로 차지하면 엄청 좋은 항로지만 없다고 렌드리스 운송을 못할 항로는 아니었다. 북극 항로가 그나마 대전 총합 20% 수준의 렌드리스 물품이라도 옮긴 건 대전 후기에 유보트를 다 잡아내고 제해권을 장악한 이후에 이 항로를 애용했기 때문으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전 초기에 북극 항로를 통한 운송 실패가 워낙 빈번하여 대전 총합 이 항로의 손실률은 7%에 달했다.[60] 독소전의 정신나간 스케일에 비하면 30개 사단이 별거 없어보이지만 상식적인 구성에서 30개 사단이라는 숫자는 엄청난 대군이다. 그 유명한 북아프리카 전역에서 롬멜의 아프리카 군단은 고작 4개 사단이었고 아프리카 전역의 대전투들이라는건 고작 몇개 사단들끼리 서로 치고박는 정도였다. 30개 사단은 북아프리카에 가져다두면 그 즉시 전역 자체가 종결되는 수준의 대군이다.[61] 극동의 부대들은 정예였고 그 수도 상당했으나 앞서 적혀있듯 심지어 소련의 운명이 풍전등화였던 모스크바 전투에서도 소련은 극동에 대규모 군대를 유지했다.[62] 하지만 이걸 추진하기엔 어려운 것이, 히틀러는 StG44의 초기형인 Mkb42의 시연을 보고 신무기의 채택을 원했지만 이미 널리 보급된 주력 소총인 Kar98k의 탄약과 호환이 되지 않았다. 그게 왜 문제가 되냐면 '''안 그래도 총기 보급을 겨우겨우 해주는데 갑자기 새로운 총을 생산하면서 투 트랙 생산 라인으로 가야한다는 것...''' 생산성이 심히 떨어져 오히려 더 빨리 망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이 있었다. 결국 히틀러는 고심 끝에 자동화기의 생산금지를 명령할 수 밖에 없었고 그나마 군수장관인 알베르트 슈페어의 산업개혁으로 생산성이 향상되고 나서 MP43을 허가, 공식 명칭을 "Sturmgewehr, 돌격소총"으로 자신이 짓고 생산에 박차를 가했다. 한마디로 히틀러의 자동화기 생산중지는 어느정도 일리가 있던 정책이였던 것.[63] 진압에 실패한다 하더라도 외국으로 망명할 수 있는 조건까지 충분히 갖추어진 상태였다.[64] 당장 불가리아는 추축국이지만, 같은 슬라브족-정교회를 매개로 러시아와 매우 가까웠으며, 특히 제정 러시아오스만 제국을 격파하고 불가리아를 독립시켜줬기 때문에 소련을 상대로 전쟁에 참여하지 않았다. 그래서 추축국인데도 독소전쟁에서는 병력을 보내지 않고 사실상 중립을 지키고 있었다.[65] '''애당초 소련을 공격하지 않았다면 이렇게 개같이 털리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점을 잊지 말자. 원래 양면전쟁은 어떤 국가나 피하려고 하는 데다가 독일에는 "전선을 2개로 만들지 말라"는 격언까지 있는데 이를 무시하고 무리하게 전쟁을 확대한 점은을 일으킨 점은 두고두고 까일 일이다. 애시 당초 승리를 확신하지도 않으면서 2차대전 애시당초 독일 스스로도 이 전쟁에서 패할 가능성이 거의 확실하다는 것을 처음부터 예상하고 있었다. 단지 초기 전선잘 돌아가면서 잠시 착각을 했을 뿐 결국 예상대로 되었다고 볼 수 있을 듯. 뭐...전체적으로 본다면 동맹간에 손발이 영 안맞았던게 문제기는 하다. 일본 제국은 소련과 불가침 조약을 체결한 상태였기에 소련을 협공하자는 독일의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이탈리아 왕국은 전쟁 준비도 안된 상태에서 제 앞가림도 못하는 바람에 독일이 상당한 도움을 줘야했으니(...).[66] 전황이 급격히 악화된 후 어느날, 히틀러가 프리드리히 대왕 초상화 앞에서 "그 1달을 돌려달라"고 절규했다는 풍문이 전해질 정도이다.[67] 예를 들어 소련군은 일본 관동군이 1,500대의 전차를 보유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 1,500대의 전차 대부분은 소련군의 전차들이랑 맞싸우기 힘든 중전차라고 부르기 힘든 경전차들이었다.[68] 이 때문에 소련군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냉전 당시 서방 세계의 독소전 연구를 '''패자의 손으로 쓴 역사'''라고 비판하기도 한다.[69] 이 공적으로 할더는 미국 훈장까지 받았다![70] 육군사관학교가 펴낸 세계전쟁사가 이런 기술을 하고 있다. 아마도 본이 되었을만한 영문 자료에서 따온 듯.[71] 바르바로사 작전 독일군이 300만인 데 만해 소련군은 400만이 있었지만, 그것이 모두 분산되어 있었고, 특히 최전선에 배치된 290만은 독일군에 수적으로 적었을 뿐만 아니라, 방어 진지에 대대 단위로 분산되어 있어서 각개 격파당했다.[72] 아주 예외적으로 독일군이 소수의 병력으로 다수의 소련군을 격파한 제3차 하르코프 공방전이 있지만 일반화될 수는 없는 사례이다.[73] 류한수, “8월의 폭풍”에서 “사막의 폭풍”으로:냉전 시기 미육군의 소련군 작전술 이론의 연구와 수용 과정, 국방부군사편찬연구소, 2017년[74] 1943년 초에 급격하게 커진 군대의 규모에 맞게 새로운 군복과 계급장을 도입. 기존에는 계급장이 칼라 끝에 있었으나, 어깨에 견장을 다는 것으로 변경. [75] 무장친위대 소속 디를레방어 여단을 모티프로 삼은 듯[76] 에스토니아 1사단이라는 명칭으로도 불리기도 했으며 제3 SS 의용 에스토니아 여단을 기반으로 확대 개편한 것이다.[77] 에스토니아 동부에서 지원 혹은 강제 징집된 에스토니아인을 근간으로 편성되었다. 산하에 제7 '에스토니아' 소총병 사단과 제249 '에스토니아' 소총병 사단을 두었으며, 이들은 전후 각각 제118근위소총병 사단과 제122근위소총병 사단으로 발전했다. 군단 자체도 마찬가지로 '근위'와 에스토니아의 수도인 '탈린'의 칭호를 수여받아 제41 '에스토니아 탈린' 근위소총병 군단으로 개편되었다.[78] 2001년에 출판되었다. 당시에는 깨끗한 국방군 이론이 주류였을 때였다.[79] '러시아를 침공하다가 격퇴로 전사했던 유령 기사단'을 부활시켜 써먹으려는 SS 친위대의 음모와, 이를 막기 위해 만들어진 소련군 비밀기관의 소녀인 나댜의 이야기를 다룬다. 트레일러 영상을 보면 독일군의 이족 보행병기도 나오는 등 여러 편을 기획한 모양인데, 1편의 흥행 성적이 나빠서인지 유령 기사단을 다룬 1편이 나온 지 3년이 지난 2015년 현재까지 후속작 소식은 없다. 사실 스토리나 작화 등은 괜찮은데, 다큐멘터리처럼 실사 인터뷰 내용 등을 집어넣는 등 연출이 나쁘다.[80] 수송 트럭을 타고 가다가 소련 공군의 기총 소사로 바로 옆에 탄 친구를 잃는다든가 분대원이 너무 굶주려서 소련군이 먹다가 남기고 간 삶은 감자를 먹느라 소련군을 놓치기도 한다. 전선에서 겪는 질병은 덤이다.[81]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독일이 패배한 직후, 마지막 카드인 1,000만 징병 직전 군중들을 다시 선동하기 위해서 베를린 스포츠 궁전에서 행한 연설. 괴벨스는 이 연설로 인해 권력이 더 강화되었다고 한다.(출처:안토니 비버, <피의 기록 스탈린그라드>)[82] 내셔널 지오그래픽 다큐멘터리 제2차 세계 대전 4부[83] 브레스트는 당시 폴란드 제2공화국의 도시였으나 독일의 폴란드 침공 당시 독일의 침공에 호응해 동쪽에서 쳐들어온 소련군에게 점령당해 이곳을 기준으로 양국은 폴란드를 동서로 분할했다. 분할선의 기준점이 된 이상 이곳은 당연히 소련의 가장 최전방에 위치한 도시가 되었고 바르바로사 작전 당시 독일군의 첫 번째 희생양이 되었다. 요새는 1주일 간 저항하다 결국 함락당했고 요새 내 병력 9천여 명 중 2천여 명이 전사했다. 이 문구를 쓴 병사가 생존했는지는 확실치 않으나(정황상 사망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 문구대로 4년 후 이 병사의 조국조국을 유린한 침략자들에게 복수하는 데 성공한다.[84] 지나토프 티메랸 하불로비치라는 병사가 썼다는 설도 있는데, 해당 병사는 연대사관학교(44 소총사단 42소총연대) 생도였던 타타르인 출신 병사였다. 방어전 첫날 부상으로 포로로 잡혔으나, 두어번의 탈출시도를 감행하여 2차에 성공하고 종전까지 소속부대에서 전쟁 초기와 같은 직급인 일반사병으로 복무했다. 이후 브레스트 요새 방어전에 참여한 공훈을 인정받아 조국전쟁 2등급 훈장을 수여받는다. 소련 붕괴 이후 참전용사의 대우가 차가워진 것에 모욕감을 느끼고, 1992년 9월에 77세의 나이로 브레스트에서 열차에 투신자살한다. 출처는 '러시아 연방 공산당 <체계적인 시선> No.5호, <프라브다> 지 사이트, 1997년[85] 소련의 시인 콘스탄틴 시모노프의 "날 기다려줘요". 번역은 올랜도 파이지스의 "속삭이는 사회" 참고.[86] 출처: 스탈린과 히틀러의 전쟁(Russia's War, 리처드 오버리 저, 류한수 역)[87] 다만 이 이야기가 나온 배경은 핀란드와의 겨울전쟁이다. 자세한 내용은 문서 참조.[88] 단 해당 기사에서 소련이 나치 독일 전투기의 70%를 파괴했다는 등의 의심스러운 서술이 있으니 주의. 실제로 소련이 파괴한 비율은 높게 잡아도 20%다.[89] 러시아에서 독소전쟁 승전 60주년을 기획해 만든 프로젝트로, 생존자들의 육성을 포함한 방대한 자료와 한눈에 보이는 자세한 지도로 설명하고 있으며, 2005년 UN 'e-Culture and Heritage'를 수상하였다.flash 허용 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