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하이오 켄트 주립 대학교 발포 사건

 


Kent State shootings
(May 4 massacre, Kent State massacre)

1. 개요
2. 배경
3. 전개과정
4. 사건이 미친 영향
5.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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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하이오 켄트 주립 대학교 발포 사건은 1970년 5월 4일, 미국 오하이오주 켄트에 위치한 켄트 주립대학교에서 주방위군이 학생들에게 발포한 사건이다.

2. 배경


1968년 구정 공세 이후 이를 생중계로 지켜본 많은 미국인들은 베트남 전쟁을 반대하게 됐다. 구정 공세 이후 미국 내에선 베트남 전쟁을 반대하는 반전운동이 거세게 일어났고, 이를 이끄는 중심축은 대학에서 공부하고 있던 학생들이었다. 린든 존슨을 재치고 미국 대통령이 된 리처드 닉슨 대통령은 '베트남화 정책'이라 하여 1969년 부터 베트남에서 단계적으로 철수하게 됐다. 이와 동시에 미국의 리처드 닉슨 대통령은 1970년 베트콩 소탕이라는 명분하에 캄보디아를 침공했고, 이러한 닉슨의 정책에 반전운동을 전개하던 학생들은 반발했다.

3. 전개과정


"어떤 젊은이가 '야, 실탄이야!'라고 외쳤다. 그리고 나서 그 젊은이는 '하느님 맙소사! 이 소녀가 맞았어요!'라고 소리지르면서 총에 맞은 소녀를 일으켜 세우려고 했다. 소녀의 재킷 겉에는 붉은 점이 찍혀 있었고, 입에서는 피가 쏟아졌다."

출처: 베트남 10000일의 전쟁 p.526

닉슨 정부의 캄보디아 침공사실을 알게 된 미국의 반전운동측 대학생들은 캄보디아 침공에 반대하는 반전운동을 전개했고, 하버드 대학과 MIT, UC 버클리 대을 비롯한 미국의 유명한 대학교에서 반전운동 집회가 일어났다. 마찬가지로 미국 오하이오 주에 있는 켄트 주립 대학에서도 대략 2천 명 이상이나 되는 대학생들이 닉슨 정부의 캄보디아 침공을 규탄하는 반전 집회를 열었다. 전국적으로 반전 시위가 폭력적인 항의로 발전할 것이라고 예상한 닉슨은 데모를 효과적으로 진압할 방법과 대비책을 토의했다. 하지만 오하이오 켄트 주립대학교 사건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것. 오하이오 주에 있는 켄트 주립대학교에서 발생한 반전 항의 집회는 날이 갈수록 점점 더 거세졌고, 학생들이 교수들 집무실을 점거하는 집회 양상이 전국적으로 퍼져 나갔다. 또한 켄트 주립 대학교에 있던 ROTC 건물이 군중에 의해 방화되는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었다.
그러던 1970년 5월 4일 오하이오 주의 미국 주방위군 병력은 실탄을 장전한 개인 화기로 무장하고, 켄트 주립 대학교의 교정을 포위했다.[1] 방위군은 후퇴하는 것 같았지만, 학생들을 포위하고 있던 G 분대가 돌아서서 주차장 주변에 있던 학생들을 향해 발포했고, 집회에 참여했던 학생들 중 일부는 총에 맞아 쓰러졌다. 그 결과 주방위군의 발포로 인하여 4명의 학생(2명은 남성이고 2명은 여성이다.)이 죽고[2] 9명이 학생이 부상당했다. 총에 맞아 죽은 한 여학생의 아버지는 "내 딸은 불량배가 아니다!"라고 절규했다.

4. 사건이 미친 영향


이 사건 이후 많은 항의 방문이 백악관으로 이어졌고, 시민 및 학생운동 단체 대표들 또한 이를 규탄했다. 일주일 후 워싱턴에선 15만 명이 모여 시위를 벌였다. 결국 닉슨 대통령은 학생들과의 질의응답 시간을 가지게 되었지만, 계속되는 학생들의 질문을 회피하기가 급급했고, 학생들의 흥분과 분노를 가라앉히기는 커녕 오히려 분노를 유발시켰다. 전국적으로 400만 명의 대학생 및 고등학생이 동맹 휴학에 들어가면서 나라가 한 차례 뒤집어졌다.
하지만 이것은 젊은 학생들 사이에서만의 일이었고, 반공주의에 젖어 있던 기성세대는 별다른 문제를 느끼지 못한 듯 하다. 당장 사건 다음 날의 갤럽 여론조사에서 '''58%가 학생들의 잘못(= 총맞아 싸다)이라고 대답했고,''' 주방위군의 잘못이라고 응답한 사람은 11%에 지나지 않았다. 켄트 주립대생들에게 데모질 못하게 더 총맞아 죽었어야 한다는 폭언이 가해지는가 하면, 일부 학생들은 자기 가족에게 절연당했다.[3] 이런 추세가 계속되면서 상당수 학생들이 견디지 못하고 이탈하고, 끝까지 운동을 지킨 사람들은 그렇게 고립당한 끝에 과격화되거나 지하화되어[4] FBI 지명수배자가 되는 등 인생이 망했다. 일본의 전공투가 무너진 과정과 거의 같다. 사실 68혁명 시기에 명멸한 운동이 대부분 이렇게 전학/전국적 운동 → 강경한 탄압에 온건파 이탈 → 고립된 운동권의 과격화 → 몰락의 수순을 밟는다.
조선일보는 명백한 국가폭력인 이 사건 때문에 미국의 반전운동이 철퇴를 맞은 것을 두고 "폭력시위가 줄어든 계기"라고 높이 평가했다.(...)

5. 참고 문헌


  • 베트남 10000일의 전쟁, 마이클 매클리어, 을유문화사(2002)
  • 미국의 베트남 전쟁, 조너선 닐, 책갈피(2004)

[1] 물론 시위에 참가한 학생들은 이들이 실탄을 장착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2] 그 중 한명은 구경하던 ROTC 장학생이었다.[3] Means, Howard. (2016). ''67 Shots: Kent State and the End of American Innocence''. Boston: Da Capo Press. ISBN 978-0-306-82379-4. pp 171-186[4] 8월 24일 위스콘신 매디슨 대학에서 육군수학연구소가 입주한 스털링 홀에 1톤트럭 폭발불 테러를 시도한 사건 등. 육군연구소는 멀쩡했고 지나가던 물리학 교수가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