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image]
'''주식회사 조선일보사'''
株式會社 朝鮮日報社
Chosun Iibo Co., L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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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ed333b><colcolor=#fff> '''국가'''

'''설립'''
1947년 3월 17일
'''창간'''
1920년 3월 5일[1]
'''본사 소재지'''
서울특별시 중구 세종대로21길 30 (태평로1가)
'''대표자'''
방상훈, 홍준호
'''임원진'''
'''대표이사 사장''' 방상훈
'''대표이사 부사장, 발행·편집·인쇄인''' 홍준호
'''부사장''' 방준오
'''업종명'''
신문발행업, 정기간행물출판업
'''상장여부'''
비상장기업
'''기업규모'''
'''중견기업'''
'''임직원'''
473명 (2019년 12월)
'''매출액'''
2,991억 3,190만 원 (2019년 연간)
'''영업이익'''
301억 2,125만 원 (2019년 연간)
'''순이익'''
253억 4,624만 원 (2019년 연간)
'''최대주주'''
'''방상훈 (지분 30.03%)'''
'''사이트'''
<colbgcolor=#ed333b><colcolor=#fff> '''홈'''

'''SNS'''

'''유튜브'''
'''링크'''

'''구독자'''
62.1만명[A]
'''조회수'''
314,957,428회[A]
'''가입일'''
2012년 1월 31일
1. 개요
2. 사시
3. 사옥
4. 사가
5. 지배구조
6. 로고
9. 사원 처우 및 업무환경
10. 성향
11. 경제면 및 주간 섹션, 기타 연재물
14. 안티조선 운동
15. 자회사
16. 공익재단
17. 산하 기관
18. 조선일보 페이스북
19. 조선일보 유튜브
20. 여담
21. 관련 인물
22. 관련 문서
23. 역대 임원
23.1. 상임고문
23.2. 명예회장
23.3. 명예사장
23.4. 회장
23.5. 사장
23.6. 대표이사[2]
23.7. 대표이사 부사장
23.8. 대표이사 전무
23.9. 부사장
23.10. 부사장대우
24. 역대 법정등록인
24.1. 발행인
24.2. 편집인
24.3. 인쇄인
25. 역대 주요 간부
25.1. 주필
25.2. 논설고문
25.3. 논설주간
25.4. 논설위원실장
25.5. 수석논설위원
25.6. 편집고문
25.7. 편집국장
25.8. 편집국장 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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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사실에 대한 믿음, 할 말은 하는 용기'''

'''아침의 베스트셀러, 조선일보.[3]

'''

대한민국의 조간 일간 신문. 강경한 보수 우파 반공주의 성향의 신문사이다. 한국의 보수 우파 신문 3대장인, 이른바 조중동 중에서 언제나 첫 번째로 꼽히는 언론이다.[4] 실제 언론사 자체적으로도 보수주의[5] 성향을 표방한다. 1920년 일제강점기 중 소위 문화통치 시기에 언론 탄압이 완화되었을 때 탄생하여, 2020년 3월 5일 창간 100주년을 맞이하였다.
2019년도 한국 ABC협회 유료부수 통계에서도 2위 동아일보와 상당한 격차를 벌린 1위를 유지하고 있으며, 전국 각 지역별로도 부산일보가 1위인 부산광역시매일신문이 1위인 대구광역시를 제외한 모든 시도 지역에서 일간지 유료부수 1위를 차지하고 있다.[6] 물론 후술된 내용이나 신문 항목의 내용을 보면 알 수 있지만, 이렇게 알려진 유료부수나 발행부수의 대부분이 뻥튀기 부수인 것은 이미 업계의 공공연한 비밀이다.[7] 어쨌든 1970년대 말 발행부수 1위를 기록한 이래로 줄곧 발행부수나 유료부수가 제일 많으며[8], 따라서 적어도 신문사 가운데에서는 가장 큰 매체 영향력을 발휘하는 언론이기도 하다. 그래서 늘 스스로 '1등 신문'임을 내세운다. 물론 2000년대 후반부터는 점차 신문 자체가 사양산업으로 접어들기 시작했고, 매체로써의 신문 영향력 또한 급격히 쪼그라드는 세상이 된 터라, 과거처럼 '신문 중의 영향력 1위'가 더이상 '언론 중의 1위'가 아니게 되었다. 일례로 한국언론진흥재단에서 매년 조사하여 발표하는 '언론수용자 조사' 통계를 보면, 2000년대 초중반까지만 해도 조선일보가 모든 매체를 통들어 영향력 및 신뢰도 조사 모두에서 줄곧 3위 안에 꼽혔으나, 2020년 현재 통계 기준으로 보면 여러 지상파 채널 및 종편과 포털 사이트에 밀려 영향력 및 신뢰도 조사 순위 모두에서 10위로 추락했다.[9]
박정희의 집권 시기인 1960~70년대에는 동아일보와 같은 독보적인 1등 신문은 아니었지만, 박정희 정권과 깊게 결탁하는 한편[10], 이를 통해 마련한 자금력을 동원하여 마케팅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었고, 동아일보에 버금가는 위치를 공고히 하게 된다. 이후 조선일보가 본격적으로 급성장하게 된 계기는 전두환의 집권과 제5공화국 시기로 볼 수 있다. 12.12 쿠데타 이후에는 전두환 신군부에 적극 영합하면서 피해를 보지 않았고,[11] 조선일보는 80년대 전두환 정부 시기에 폭발적인 성장을 기록할 수 있었다. 심지어 당시 조선일보 사장이던 방우영은 전두환이 집권을 위해 만든 초법적 통치기구인 국보위에 입법위원으로 참여하며 노골적으로 결탁했을 정도였으며, 특히 전두환이 집권을 눈앞에 두었던 시기인 8월 23일에는 그 유명한 ''''인간 전두환 - 육사의 혼이 키워낸 신념과 의지의 행동''''이라는 용비어천가특집 기사를 쓰며 전두환에 대한 우상화 작업에 전력을 쏟았다.[12] 또한 조선일보가 80년대에 급성장 할 수 있었던 결정적 계기는 언론통폐합 이었는데, 당시 조선일보의 주요 경쟁지인 동아일보와 중앙일보는 방송사를 KBS에게 강제로 헌납했고 한국일보 역시 자매지인 서울경제신문의 사업을 접어야하는 등 모두 언론통폐합으로 엄청난 재산을 뺏긴 반면, 조선일보는 일부 개혁 성향의 기자들만 해직시키는 선에서 처리했고, 전두환 정부에 깊이 참여하는 등 5공과 지속적 동반자 관계를 형성해 압도적으로 유리한 고지를 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일보의 전성기는 1990년대로 꼽을 수 있는데, 1987년 6월 항쟁으로 언론 자유화가 되고 지면 제한이 없어지자 의욕적인 확장에 나서서 발행 부수가 200만 부를 넘겼고[13], 보수 정치권이나 경제계와 결탁하여 촘촘한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한편, 당시 폭발적으로 팽창하던 미디어 광고 시장의 수혜도 톡톡히 누렸다.
또한 1987년 민주화 직후부터 1990년대 초중반기에 걸쳐 김대중을 적극적으로 비토해서 反DJ 정서를 고착시키는 한편, 1990년 3당 합당과 1992년 제14대 대통령 선거 국면에서 김영삼을 적극적으로 편들어 준 뒤, 김영삼이 대통령으로 당선됨으로써 매체 영향력을 입증하며 승승장구했다. 특히 당시 조선일보의 논조는 제14대 대통령 선거 직전에 터진 초원복집 사건 관련 보도 사례에서 단적으로 드러나기도 했다. 심지어 정치 권력을 옹립하는 기능으로써의 거대 언론 권력이 최초로 부각된 사례가 김영삼 정부와 조선일보의 결탁이었다는 분석이 이후 언론학계에서 나올 정도였다.[14] 이 덕분인지 1992년 12월, 제14대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한 김영삼 대통령 당선자는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된 바로 다음날 서울 흑석동에 있는 조선일보 방우영 회장의 집을 방문하여 만찬을 함께 하기도 했다. 당시 조선일보가 가졌던 막강한 권력을 보여준 단적인 장면이었다.[15]
거기에다가 이 시기는 언론 통제도 누그러질 때라 정치 권력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는 것도 덤이었다. 물론 중앙일보, 동아일보, 한국일보도 같이 200만부를 넘겼기 때문에 혼자 독주를 하지는 못했지만[16], 어쨌든 영향력으로나 매출액으로나 이때 만큼의 전성기는 없었다. 사실 이 전성기 시절에도 조선일보가 능력있는 기자들을 많이 보유했던 것과는 별개로 오보를 많이 냈던 것은 사실이었기 때문에 조선일보를 비판하는 목소리가 많았다. 어쨌든 시간이 훌러 1997년 대선에서도 조선일보는 이회창이인제를 놓고 이회창을 선택했고, 한동안 이인제가 승승장구해서 지지율이 이회창을 크게 앞섰을 때에도 중앙일보와 합작해서 이회창을 적극적으로 밀어주기도 했지만,[17] IMF 외환위기가 한창 닥쳐왔던 때라서 표 분산을 완전히 막지 못한 채로 결국 김대중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하지만 발행부수가 200만부를 여전히 넘을 정도로 영향력이 강했기에 국민의 정부를 적극적으로 견제하고 비토하는 역할을 담당했고, 2001년부터는 동아일보도 보수 진영에 본격적으로 합류하며 이른바 조중동 3사가 전부 한나라당과 한나라당 총재이자 대선 후보였던 이회창을 밀어주는 스탠스가 되었다.
조중동이라는 용어가 본격적으로 널리 정착한 것도 이때부터였다. 절정에 이르렀던 2001년에는 발행부수가 248만 부에 달했고, 2002년 대선에서 이회창을 당선시키지는 못했지만, 이후 각종 이슈를 만들어내면서[18] 참여정부의 지지율을 하락시켰으며, 이명박 대통령 당선에 큰 역할을 했다는 평을 들을 정도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 이후로는 박근혜를 밀어주면서 대통령으로 당선시키는 데 공을 세웠고, 종편 출범 이후부터는 TV조선도 50대 이상 보수층에게 꽤나 강력하게 어필하면서, 여전히 종이신문 자체 발행부수에 비해 보수층에서 만큼은 높은 매체 영향력을 행사했다.
조선일보 전성기의 마지막 시점은 대략 2000년대 초반 즈음이었던 것으로 평가된다. 일례로 2001년에 조선일보 편집국장에 취임한 변용식 기자가 어느 인터뷰에서 "전국 국민의 4분의 1이 같은 시간에 조선일보 기사를 본다", "영향력 면에서 정치권력을 능가한다"는 주장을 공개적으로 하여 구설에 오를 정도였으며[19], 90년대 후반에서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각종 언론 비평에서 '천만 독자 조선일보'라는 표현이 간혹 등장할 정도였다. 그러나 90년대 후반부터 초고속 인터넷과 컴퓨터의 보급이 점차 이뤄짐에 따라 언론매체의 환경 또한 온라인으로 점점 이동하기 시작했다. 특히 2000년대 후반부터는 스마트폰의 급격한 보급과 함께 통신 환경 또한 모바일 위주로 급변하기 시작하면서 신문 구독률이나 열독률이 급락하기 시작했고, 자연스럽게 조선일보의 매체로써의 영향력도 함께 급격히 줄어들기 시작했다. 단적인 예로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조선일보가 기사를 쓰면 여론이 된다'는 말이 공공연하게 나올 정도였지만, 세월이 흘러 현재는 조선일보가 1면에 뭘 쓰든, 사설에 뭘 쓰든 여론에 별 영향을 끼치지 못하는 세상이 된 것이다.
특히 2010년대 중반 이후 부터는 매체 영향력의 확연한 축소세와 더불어 취재력의 한계 또한 뚜렷하게 관측되는데, 이는 종이신문 산업 전체의 영향력 축소와도 직접적으로 결부된 것으로 보인다. 발행부수나 유료부수 집계는 신문 업계에서는 이미 가짜 유료부수 만들기로 허수와 다름 없이 인식된 지도 오래이고, 조선일보의 유료부수도 대외적으로 알려진 약 120만 부 정도와는 다르게 100만부 밑으로 떨어졌다는 것이 정설이다.# 실제 ABC 공사에서 발표하는 유료부수는 신문대금의 45%만 지불해도 유료부수 1부로 집계해 주고, 짧은 집계 실사 기간동안 신문 사측에서 보급소로 강제 밀어넣기 영업을 통해 유료부수를 부풀리는 것이 일상이기 때문에, 발표 자체의 공신력이 없어진 지 오래 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일례로 종이신문의 가구 구독률이 약 60% 가량 되던 2000년 경 조선일보의 유료부수가 약 200만 부였는데, '''종이신문 구독률이 6.3%로 떨어져''' 종이신문 구독률 자체가 과거에 비해 약 '''10분의 1 수준'''이 된 2020년에 조선일보의 유료부수가 약 119만 부로 발표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는 것. 이에 대해서는 급격히 줄어든 가구 구독 대신 영업장 구독[20] 쪽에 집중하여 유료부수 숫자를 어느 정도 방어하고 있다는 해석도 있지만, 영업장 구독 확대를 통한 부수 방어에도 한계가 있고, 또한 영업장 구독은 그 특성상 신문 독자가 제대로 특정되지 않기 때문에 매체의 집중도와 독자에 대한 영향력이 매우 미약해지므로, 줄어든 유료부수나 구독률보다도 훨씬 더 매체 영향력이 더욱 쪼그라들었다는 것이 중평.
실제 조선일보의 매체 영향력 상실은 객관적인 통계 자료로도 입증되는데, 단적으로 한국언론진흥재단에서 매년 수행하는 언론 수용자 조사의 결과를 보면, 2010년의 신문 열독률 조사[21]에서 조선일보의 열독율이 17.7%로 조사 되었던 것이, 10년 후인 2020년의 조사에서는 3.2%가 나왔다. 10년 만에 열독률이 '''5분의 1 이하로 급락'''한 것이다. 물론 이는 종이신문 산업 전체가 쪼그라들어서 그런 것인지라 모든 신문사가 전반적으로 비슷한 비율로 열독률이 줄어든 것인데, 특히 종이신문 업계 선두주자이던 조선일보는 열독률에 관한 절대 수치에서 매우 큰 타격을 입었다.# 2016년 제20대 총선, 2017년 박근혜 대통령 탄핵, 문재인 대통령 당선 이후로는 2010년대 전반기에 비해서도 영향력이 크게 줄어든 것이 확연히 드러났다는 평이 많으며,[22] 전통적인 보수층에서도 상당수가 조선일보가 박근혜를 비토한 것에 배신감을 느끼고 다양한 극우파 인터넷 대안 언론이나 극우 유튜브 등으로 갈아타는 현상이 관측되기도 했다.
한편 종편 채널인 TV조선이 탄생하면서 완전히 레거시 미디어로 전락한 종이 신문에서 벗어나 방송으로 진출한 후, 60대 이상의 노년층을 타겟으로 하는 전략이 성공하여 2020년 들어서는 JTBC와 엎치락뒤치락하면서 시청률 경쟁을 하고 있다. 물론 광고주들에게 가장 중요한 숫자인 '2049 타켓 시청률'면에서 보면, JTBC가 지상파 3사나 tvN과 비슷한 레벨에서 치열하게 경쟁하고 있는 것에 반해 TV조선은 해당 청년 세대에게는 존재감이나 소구력이 전혀 없는 형편이다. 참고로 20대 초반에서 40대 후반까지는 소비 성향이 크고, 문화 생활의 동향 및 최신 트렌드에 민감하기 때문에 방송국에 광고를 내는 광고주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세대인데, 당연히 이 세대를 타겟으로 한 광고나 프로그램은 광고 효과가 크므로 단가 또한 상당히 비싸다. 종편 경쟁사인 JTBC의 채널 영향력이 급속도로 커진 판이어서, 중장기적으로는 방씨 가문 우위의 조중동 체제가 홍씨 가문 우위의 중조동으로 바뀔 수도 있다는 시각도 존재한다.
현재 조선일보 계열에 대한 가장 불안한 지점은 방송통신위원회 차원에서의 TV조선의 방송 재허가 취소와, 사주 가문의 일감 몰아주기에 대한 공정거래위원회의 제재이다. 실제 TV조선은 늘 방송 재허가 여부에 대한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으며, 또한 방상훈 회장의 아들인 방준오방정오에 대한 지분 상속 작업이 제대로 아직 이뤄지지 않은 터라, 계열사 분할-합병 작업이나 지분 상속 사항 등에 따라 앞으로 상속 및 승계의 불법성 논란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
인터넷 언론 시장을 내다보고 상당히 이른 시기인 1995년에 조선일보 온라인 서비스를 시작하였고, 전자책 국내 도입 초기에 선제적으로 전자책 단말기를 만들기도 하었다. 오랫동안 여러 한자검정시험들을 후원하고 있다.
2017년 6월 24일, 대한민국 최초로 지령 30000호를 넘었다. 2020년 3월 5일, 창간 100주년을 맞이하였다.
노조는 미가맹.[23]

2. 사시


'''정의옹호, 문화건설, 산업발전, 불편부당'''


3. 사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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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식 본사. 서울특별시 중구 세종대로에 위치한 코리아나 호텔에 일부 사무실이 있다.[24] 현재의 모습은 2001년에 보수한 것이다.
광화문 정면에서 '조선일보' 네 글자를 볼 수 있다.
[image]
코리아나 호텔 뒷편에 있는 별관.[25]
별관이 사실상 본사 건물이다. 조선일보 사장 집무실과 기자들이 상주하는 편집국이 있는 건물.

4. 사가


작사는 본사 사가제정위원회, 작곡은 김정길이 담당했으며, 1980년 2월에 제정되었다.
(1절)3.1 독립운동의 정기 받들어 / 망국의 설움을 딛고 일어나
온 겨레 깨우침에 앞장을 서서 / 이 땅의 슬기를 한데 모았네
(2절)민족의 외침을 글로 모아서 / 자유의 깃발을 높이 들었다
사나운 비바람이 휘몰아쳐도 / 정의의 필봉은 꺾이지 않네
(후렴)민족지 조선일보 / 길이 빛나리

5. 지배구조


'''주주명'''
'''지분율'''
방상훈
30.03%
방성훈
21.88%
방일영문화재단
15%
방용훈
10.6%
방준호
7.7%
기타 분산 지분[26]
11.4%

6. 로고


'''▲ 과거 조선일보의 로고'''
과거 조선일보는 사명(社名)의 머리글자를 본떠서 만든 로고를 사용했으며, 로고를 자세히 보면 '조선'이라는 글자임을 알 수 있다. 이 로고는 1920년부터 2010년까지 쓰였다. 현재의 로고는 2010년 창간 90주년에 즈음하여 바뀌었다.

7. 사주 일가




8. 역사




9. 사원 처우 및 업무환경


대체로 임금도 많고 노동 강도가 세다고 알려지지만, 2017년 미디어오늘 기사에 따르면 크레딧잡 조사 결과 조선일보 봉급은 6,875만 원으로 내일신문, 연합뉴스, 중앙일보에 이어 4위이다.
2010년대 후반부터 사측과 조선일보 노조 사이의 갈등이 점점 심화되고 있다. 업계에서 독보적으로 영업이익을 많이 내는데도 불구하고 사원들의 연봉을 그닥 인상해 주지도 않고,[27] 처우 개선도 별로 이뤄지지 않고 있으며, 특히 인력 확충이 충분하지 않기 때문에 업무나 근무 시간이 과중되는 등, 사측에서 제대로 된 업무 환경을 제공해주지 않기 때문이라고(...).[28]

10. 성향



대한민국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신문 중 하나이며 성향과 논조는 강경한 보수 우파 반공주의. 일명 조중동이라고 일컫는 대표적인 보수 언론들의 선두주자이다. 그러나 중앙일보, 동아일보와는 세부적으로는 조금 다르며, 조선일보 쪽에서는 조중동으로 함께 엮이는 것을 매우 싫어한다. 사회 분위기나 회사 사정에 따라 간혹 보수 성향에서 벗어난 논조를 보여주기도 했던 중앙일보나, 과거 2000년 이전까지는 개혁적 성향이였던 동아일보와는 달리, 조선일보만큼은 예나 지금이나 일관적인 강경한 이념적 보수 우익 성향이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각 섹션별로 논조가 조금씩 다른 ''''''''과 달리, 조선일보 만큼은 그야말로 모든 이슈에서 초강성 보수 논조의 기사와 칼럼을 쏟아낸다. 심지어 스포츠 뉴스나 스포츠 칼럼에서조차 뜬금없이 좌우파 이념 드립을 치는 문장이 튀어 나온다. 예를 들면 이런 식. 그래서 전통적 이념 보수 성향의 장노년층을 제외한 다른 연령대의 보수 성향 사람들은 조선일보의 논조가 너무 극단적이라는 비판적인 의견을 피력하기도 한다.
과거 보수정권 시기에는 전반적으로 온건한 논조를 보이던 조선일보이지만, 문재인 정부에 들어와서는 같은 조중동 계열인 중앙일보, 동아일보를 훨씬 뛰어넘는 자극적인 칼럼과 기사가 유독 많아졌다. 국내 정치 현안과 정부 공직자들의 크고 작은 혐의나 비리 관련 보도와 관련하여 여타 보수 언론들보다도 훨씬 더 원색적인 칼럼과 강경한 논조로 확대 보도하고 있으며, 특히 별의별 극우 단체나 종교 단체들의 홍보 광고가 조선일보에 유독 집중적으로 실리고 있다. 일례로 2020년 8월 중순 이후 벌어진 전국적인 코로나-19 대량 감염 사태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던 극우 단체들의 광복절 집회 홍보 광고가 7~8월 동안 가장 집중적으로 게재된 신문이 바로 조선일보였다. 심지어 조선일보를 위시한 조중동은 당시 집단 감염 사태가 터진 이후에도 전광훈 측의 일방적인 입장문을 전면광고 형태로 또 실어주기도 했다. 이 때문에 문재인 정부 이후의 조선일보 논조는 국민의 정부참여정부 시기의 보도 논조보다도 훨씬 더 우경화된 상태라는 평이 많다.
2010년대 후반들어서 정치 관련 유튜브가 급성장하면서 강성 보수층들이 극우 유튜브로 건너가고 있는 터라, 조선일보가 점점 극우 유튜브와 정치적 프레임 경쟁을 벌이거나, 심지어는 조선일보에서 극우 유튜브의 정치적 프레임을 그대로 받아 먹는 상황까지 나타나고 있다. 일례로 2020년 제21대 총선 이후, 조선일보의 최고위급 기자인 김대중 고문과 최보식 선임논설위원 등이 극우 유튜브에서 주장하던 부정선거 음모론을 그대로 받아서 본인들의 기명 칼럼을 통해 주장하기도 했다.
각 언론사별 비하 명칭에서도 조선일보가 압도적으로 많다. 이는 안티조선 운동이 본격화 되던 90년대 후반 이전부터도 그러했다. 특히 매년마다 발표되는 언론 매체 신뢰도 관련 여론조사에서 언제나 '불신하는 매체' 1위에 고정적으로 오르는 불명예를 차지한다. 단, 이는 대부분의 경우 일반인들 대상 여론조사기 때문에 실제 언론의 신뢰도를 보여준다기보다는 일반 사람들의 선호도를 보여주는 것에 가깝다. 또한 매체 신뢰도나 선호도 조사에서도 종종 조선일보가 상위권을 차지할 때가 있는데, 이는 보수 지지자들이 중앙일보나 동아일보를 선호한다고 대답하기 보다는, 조선일보에 대해 긍정 응답을 몰빵하기 때문이다.
한편 한국기자협회에서 현직 기자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2020년 여론조사에서는 조선일보가 신뢰도 1위를 하기도 했다.

11. 경제면 및 주간 섹션, 기타 연재물


조선일보가 정치•논설분야에서는 보수 우파 성향이라서 진보 좌파 성향 사람들은 거부감을 보이지만, 이들 사이에서도 비정치분야만큼은 호평받는 편이다. 조선일보는 섹션 컨텐츠 면에서 동아일보, 중앙일보 등 여타 국내 경쟁지들보다 발행 면수나 기사량 면에서 강점을 보인다. 국내 신문 중 섹션 보강 기조를 주도한 신문은 90년대 후반 중앙일보였지만 현재는 조선일보가 중앙일보보다 컨텐츠 면에서 풍부한 편이다.
한편 경향신문이나 한겨레 등 진보 언론은 이런 쪽에서는 확실히 빈약한 편이며 차라리 탐사보도 측면(경제면 포함)[29]에서 승부하는 언론으로, 방향성이 완전히 다르다고 봐야 한다. 즉 누가 좋다 나쁘다를 판별할 수 없다는 말. 심지어는, 조선일보는 정치면과 오피니언, 사설만 빼면 나무랄 데가 없다는 의견[30]이 조선일보에 비우호적인 사람들 사이에서도 나왔을 정도였다. 신문 앞머리를 차지하는 정치면과 마지막을 차지하는 논설의 서술 방향이 마음에 들지 않지만 경제면과 다른 섹션이 마음에 들어서 구독한다는 사람도 있었다.
우선 경제면은 조선일보가 2000년대 초중반부터 강력하게 승부하던 컨텐츠다. 한국경제신문, 매일경제신문 등 거물급 경제신문과 경쟁하기 위한 방안으로 냈다고 한다. 기업들 입장에선 조선일보를 놓칠 수 없으니, 컨텐츠 자체는 확실히 빵빵한 편이다. 특히 경제섹션의 마지막 바로 앞(B7 또는 B11)면에 나오는 최신 과학기술 동향 소개, 취업전략 소개 등은 꽤 알찬 편. 특히 토요일의 Why 섹션은 저 많은 섹션 중에서도 가장 인기가 좋다고 알려져 있다. 이런 비결 덕분에 성공적으로 전 회사적 위기를 잘 이겨냈다는 평가를 받는다.[31]
김성윤 음식전문기자도 평이 좋다. 이태리 유학파이고 조선일보 기자 경력만 15년이 넘는다.
아래는 요일별로 C섹션 이후에 나오는 컨텐츠 섹션이다.
다만, 저 섹션 말고도 특정 기업 하나에 대해 4면 또는 8면으로 쓰는 경우가 있는데 이건 보통 쓰레기장으로 가는 경우가 많다(...) 업계 용어로 advertorial section이라고 하는데 기사의 형식을 빌려서 사실상 광고를 실어주는 경우임을 저 단어로 명시하고 있다. 회사도 먹고살려면 어쩔 수 없는 경우라 만들긴 만드는데 품질 면에서 그렇게 공들이지는 않으니 독자로서도 슬쩍 보고 잘 읽지는 않게 되는 것. 대체로 갓 졸업한 기자가 연습용으로 만들며 객원기자란 명칭이 많이 보인다. 그나마 해당 업계 취업을 앞둔 취업준비생이 지원 희망 회사나 경쟁사의 동향을 간략히 알기에는 좋다.(방산특집, 공기업 특집 등.)
다만 위에서 말한 각종 섹션들은 읽으라고 힘줘서 만든 티가 나기에'''(안티조선을 실력으로 물리쳤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공들인 기사가 많다)''' 확연히 차이가 나는 편. 아예 섹션만을 위한 팀이 별도로 구성되어 있어서 이 사람들은 일반 정치, 사회면을 거의 건드리지 않는다. 하지만 최근에는 이것도 옛말이고 편집국 인원이 경영 효율화 명분으로 퇴직/유고 등 자연소멸분 만큼 100% 다 충원이 안 되기 시작하면서 거의 대부분 기자가 본지 기사를 쓰고 섹션면 기사도 쓴다. 본 부서는 경제부면서 경제면 조간 마감을 막고, 섹션 기사 쓸 일이 있으면 소속팀에서 또 기사를 쓰는 것. 여기서 노동 강도가 더 늘어나면 요즘은 예전보단 덜하지만 가끔 TV조선 패널로도 가는 경우가 있으니 결코 노동 부담이 작다곤 할 수 없다.

11.1. 월요일~금요일


'''조선경제''' :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는 12면이 발행되고, 금요일은 8면을 발행한다. 경제 뉴스 외에 Stock & Money면을 고정 운용하며, TV프로그램 면도 여기에 편성한다. 영어, 중국어, 일본어, 한자 학습 연재물과 치매 예방 콘텐츠도 이 섹션에 실린다. 요일별로 특화된 콘텐츠 또한 정기적으로 수록되는데, 그 목록은 다음과 같다.

11.1.1. 월요일


'''N''' : 세계를 보는 창 Now
'''이슈 & 트렌드'''
'''부동산'''

11.1.2. 화요일



11.1.3. 수요일



11.1.4. 목요일



11.1.5. 금요일



11.2. 월요일


건강 섹션 '''Health+''' : 물론 특정 병원 광고성 기사도 있지만 정보성 기사도 많은 편이며 주 독자가 아무래도 노년층이 많아서 맞춤형으로 보도되는 경우가 많다. 보관해서 어르신들께 선물해 드리면 좋아하실 수도.
'''에듀 섹션''' : 특목고, 상위권 대학으로 가거나 갔던 학생들의 공부방법 등을 알려주는 정보. 다만 사교육 업체의 광고가 좀 많은 편이라 걸러 들어야 한다. 기존에 삽지되던 교육 섹션 맛있는 공부는 단종되었다.

11.3. 수요일


자동차섹션 '''Auto''' : 말 그대로 자동차에 대한 섹션이다. 최신 기술동향, 최신 발매 차량의 정보, 최신 기술 등을 소개하는 코너. 1개월에 1번 온다. 모터쇼라든가 큰 기사거리가 없을 때는 신차 홍보 기사를 쓰고, 박스 기사로 취재 기자의 탑승기를 울며 겨자먹기로 주로 붙이는데 기사 양을 늘리기 위해 아는 형용사를 총동원해 운전감과 탑승감을 서술하는 기자의 분투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 하지만 (2018.04 기준) 월요일 경제면(B9~B10)에 격주로 실린다.

11.4. 금요일


2018년 9월 21일자를 끝으로 더 이상 발행하지 않는다는 공지를 하였다. 10월 27일자를 마지막으로 발행된 Why? 섹션과 합쳐 11월부터 새로운 형태로 발행한다고 한다.
'''Books''' : friday와 붙어 있으며 주로 서평, 책 추천, 인기 작가 인터뷰가 수록된다. - 토요일 A면으로 원상복귀 하였다.

11.5. 토요일


'''아무튼, 주말''' : 금요섹션 friday와 토일섹션 Why?의 특장점을 하나로 모아, 매주 토요일 독자를 찾아가는 12면 짜리 주말 섹션이다. 아무튼, 주말 섹션의 도입에 따라, 11년 반동안 독자의 사랑을 받아왔던 Why? 섹션은 종간됐다. 이로써 2007년 3월 중앙선데이 창간으로 개시된 조선일보와 중앙일보의 일요일판 신문 전쟁은 11년 반만에 막을 내리고, 토일섹션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2018년 3월 중앙일보가 토요일자 신문을 폐지하고 중앙선데이를 토요일에 대체 발행한 것을 기점으로 조선일보의 토일섹션은 사실상 그 수명을 다했던 것이다.
'''Weekly Biz''' : 별매품으로 발행되는 경제경영전문 격주간지. 별도 신청자에 국한하여, 무료 삽지하여 배달된다. 최근 10년 내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미국의 대기업 CEO 인터뷰 등 거물급 인사의 인터뷰가 많이 실려 있다. 무려 2007년도에 부동산 재벌 도널드 트럼프 단독 인터뷰도 있었다. 그런데 왜인지 2017년 3월부터 별도 신문으로 독립해서 2주에 1번 오는데 월 3천 원이라는 구독료를 따로 받는다. '''이 섹션은 인터넷으로 제공되지 않으며''' 기존 구독자는 무료로 신청 가능하다.[32] 물론 한국 언론이 이런 인물들과 단독으로 인터뷰하기 쉽지 않다는 점은 고려해야 한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2007년 도널드 트럼프 이런 스케일의 인물들은 이건희 회장보다도 더욱 사회적 영향력이 크고 돈도 많이 벌 정도로 자국 언론 인터뷰도 응하기 쉽지 않은 사람들이며, 그런 인물들은 대한민국을 아직까지도 변방 취급하는 경우가 많으므로 조선일보 정도나 되어야 단독 인터뷰를 따올 수 있다. 기본소득을 주장하는 학자의 인터뷰도 싣고 기업의 사회적 윤리를 매우 강조하는 등, 경제경영학 원론적 이야기 수준을 넘는 다양한 이야기가 많이 실려 있다.기사처럼 전문가들의 분석과 전망을 볼 수 있는 양질의 기사가 많다.
'''Why?''' : 역경을 딛고 일어난 사람들을 인터뷰하고, 또한 감동적인 이야기도 많이 실리는 편이다. 또한 사회면의 사건 중 특별히 추리소설(?)적으로 풀어낼 만한 이야기가 있으면 심층 분석해 준다. 간장 두 종지라는 흑역사급 사건도 있었지만, 이희진이 한창 뜰 때 인터뷰를 했다가 '''사기꾼 같다는 점을 기자의 동물적 본능으로 알아채고'''[33] 내보내지 않은 쾌거도 있다. 앞장이 아닌 뒷장 섹션이라고 해서 얕잡아볼 섹션이 절대 아니다. 조선일보에는 기자가 작정하고 말아먹은 사례(송희영 주필 등)도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3류 사기꾼이 조선일보를 상대로 거짓말을 치려는 것까지 용인할 수준의 신문사는 절대 아니다. 현재는 발행되지 않는다.
아래 2개는 하나의 섹션으로 온다. 각각 1~5면, 6~8면이다. 4면은 전면광고(...), 5면은 보통 IPTV 컨텐츠 소개면이다.
'''Tech & Biz''' : 4차 산업혁명 시대 최신 IT 기술동향을 소개하는 코너. 전자신문의 마이너 버전이라 보면 된다. 현재는 폐지됨.
'''과학섹션 iF''' (into the Future) : 이영완 기자가 기획한 과학섹션으로 최신 과학에 대한 소개를 주로 한다. 과학동아의 마이너 버전이라 생각하면 된다. 중력파같이 상당히 어려운 개념을 여기 나올 정도로만 써도 매우 쉽게 쓴 편이라는 게 중론. 현재는 폐지된 섹션이며, 조선경제 섹션에 병합되었다.

11.6. 기타 연재물


'''신문은 선생님''' : 어린이 및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신문 활용 교육(NIE, Newspaper in Education)을 실시하는 지면. 초중고 전/현직 교사가 주 집필진으로 구성되어 있다. '''한 가지 주의할 점은 이 지면은 절대 모바일 어플리케이션으로는 제공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미래의 독자인 아이들에게 종이 신문을 읽는 좋은(?) 습관을 들여 주기 위한 방편으로 여겨진다. 매요일마다 각각 한국사(월), 자연과학(화), 세계사(수), 경제학(목), 예술(금) 분야의 소재 한 가지를 정해서 소개하며 한자, 영단어 어원 소개도 있다. 하단에는 최근 이슈가 된 내용의 소재 또는 희귀종 생물에 대해 다루기도 한다. 어른들이 보기에도 알찬 내용이 많으며 토론란의 경우 중립적으로 양측의 입장을 모두 소개하고 있다.
''''두근두근 뇌운동''' : 치매 예방을 위해 '''머리를 쓰게 하자'''는 취지에서 나온 코너인데, 고령의 어르신들에게 상당한 인기를 끌고 있다. 신문 사진 잘라 붙이기, 숫자 계산하기, 문장 활용하기 등이 꾸준히 나오고, 이것을 활용하는 프로그램도 치매 예방센터 등에서 많이 활용되고 있다. 이 코너의 한가지 특징은 조선일보 특유의 강선 친박 논조의 기사를 치매 예방 놀이의 예시 문장으로 활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11.6.1. 월요일


최보식이 만난 사람 : 인터뷰어 최보식의 인물 인터뷰 지면. 종래에 토일섹션 Why?에 연재되던 고정물이었으나, 수년 전 부터는 매주 월요일 오피니언 앞면에 게재되고 있다. 최보식의 인터뷰 스타일은 인터뷰이에 반론을 적극적으로 제기하여, 인터뷰이의 심연 속으로 한 발자국 더 들어가 본다거나 심층적인 정보와 논리를 독자 제위에 선사하려 노력한다고는 하는데, 여러가지 한계가 드러나고 있다. 일단 인터뷰이 선정부터 다소 안일한데, 주로 원로[34]로 불릴 법한 노년층 전문가를 섭외하기 때문에 인터뷰 내용이 상당히 고루하다. 고색창연한 느낌을 줄 때가 적지 않으며, 최보식도 이렇게 노쇠해져 가는 것인가 하는 의아함을 자아낼 때가 많다. 정년퇴임을 몇년 남겨두지 않은 최보식의 안일한 특성이 드러난다는 평가가 많고, 조선일보 지면 전반에서 두드러지는 조로화와 결부되어 있다고 판단된다.

12. 비판허위보도





13. 사건사고




14. 안티조선 운동


1998년 최장집 교수 사건을 계기로 잉태되어 2000 남북정상회담이 열린 후 국내 진보 시민사회 단체로부터 '''안티조선''' 운동의 요주의 대상으로 오르기도 했다. 이는 조선일보가 1969년 3선 개헌 시기부터 쭉 일관되게 보여주었던 반민주주의적인 논조와 친독재정권, 기득권 세력 옹호 논조, 사실관계 왜곡보도와 허위보도, 짜깁기, 특정인 모욕주기 등을 보다 못한 많은 시민단체들이 안티조선 운동을 펼쳤으며, 이들은 '''조선일보 구독 거부 및 사절''', '''조선일보 신문 및 잡지 불매운동''' 등을 벌였다. 2001년 조선일보가 언론사 세무조사 대상에 올랐을 때 조선일보 사측이 세무조사를 거부하고 다른 보수 언론들이 조선일보의 입장에 동조하면서, 이러한 안티조선 운동은 조선일보를 넘어서 동아일보, 중앙일보 등 이른바 족벌언론 3인방인 조중동 전체에게 불똥이 튀기도 하였다.
2008년 광화문 촛불시위 때는 광화문에 집결했던 과격 폭력 시위자들에 의해서 본사 입구가 공격을 당하기도 했으며 그 때문에 조선일보 간판이 부서지고 출입문 유리가 파손되는 등 피해를 입었다. 또한 옆동네 동아일보도 과격 폭력시위자들에 의해 동아일보 깃발이 강제로 끌어내려져 밟힐 뻔도 했고, 동아일보 간판과 출입문이 박살나고 파손되는 등 피해를 입었다. 그리고 후에 한 청년이 조선일보 본사 건물과 함께 쓰고 있는 코리아나호텔의 손님으로 가장하더니 조선일보 사옥 유리창을 깨부수고 '''조선일보는 폐간하라'''라는 현수막을 보이며 시위를 벌이기도 하였다.
하지만 안티조선 운동이 기성 종이신문 점유율을 크게 바꾸지는 못했지만 대한민국 사회에서 절대적인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던 조선일보의 권위와 권력에[35] 어마어마한 타격을 입히는데는 성공했으며 종이신문의 쇠락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종이신문의 전성기였던 1990년대에는 조선일보를 보며 불쾌해하면서도 언론의 역할이라고 인식하며 수용을 했고, 또한 1990년대 당시 대항 매체였다고 할수있던 PC통신은 이용자수가 적을 뿐만 아니라 비싼 전화요금과 느린 속도때문에 파급력이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던데 반해, ADSL이 보급됨에 따라 인터넷을 값싸게 즐길 수있게 되면서 다음, 야후, 네이버, 엠파스, 네이트 등 포털 사이트를 통해서 뉴스를 접하는 경우가 늘어남에 따라 종이신문의 발행부수가 떨어지기 시작했는데, 이 시기가 안티 조선운동이 절정에 달했을 때였던데다가, 시의적절하게(?) 상대적으로 親 민주당계 리버럴 포지션이던 동아일보가 세무조사에 반발하며 보수진영으로 전환해버리기까지 하면서 종이신문의 신뢰도가 당대의 30대 이하 계층에게서 폭락해버렸고, 또한 폭락한 종이신문의 신뢰도가 그대로 고착화 되면서 그 기간 동안 조선일보를 포함한 종이신문들의 신규독자층의 유입이 확 줄어드는 상황을 초래하게 되었다.
또한 비슷한 시기에는 네이버와 다음 등의 대형 포털 사이트와 다양한 언론 비평 매체 등을 통해 조선일보의 기사에 대해 실시간 교차 검증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36] 또한 점차 조선일보의 과거의 보도 기사들과 논조들이 알려지고 공유되면서 과거 조선일보에서 올렸던 오보들과 편향적인 기사들이 계속해서 재발굴되기도 했는데, 이 덕분에 현대는 물론 과거 대한민국에서 거대한 위상을 차지했던 조선일보의 과거 행보에 대해 비판적/회의적인 시각들이 크게 증가하기 시작했다. 일례로 이때 언론 비평계에서 재발굴했던 기사 중의 하나가 바로 ''''인간 전두환 - 육사의 혼이 키워낸 신념과 의지의 행동''''이라는 용비어천가찬양 기사였다.
다시 말해, 미디어의 변화와 인터넷의 보급, 그리고 시민사회의 격변을 거치면서 '조선일보'라는 무소불위의 언론 권력에 대한 권위가 점점 무너지기 시작한 것이다. 1990년대만 해도 조선일보를 비판하는 사람들조차 조선일보를 두고 "그래도 1위 신문사인데..." 하면서 어느 정도는 인정해 주는 분위기였다면, 2000년대 이후로는 "좆선이 그럼 그렇지 뭘 바라냐"는 반응이 확 많아져 버린 것이었다(...) 결국 조선일보 차원에서도 이를 방어하기 위해 과거에 간혹 시도했던 구독층 확장을 위한 '중립적인 논조' 기획마저 사실상 철회하고, 조선일보를 구독하는 보수층을 일방적으로 옹호하는 논조로 매몰되기 시작했다. 구독층 확장을 위한 논조 다변화 대신, 자신들의 전통적 지지자들의 입맛에 맞는 논조를 공고히 하게 되면서 조선일보의 신뢰성에도 상처를 계속해서 내게 된 것이다. 물론 이 덕분에 전통적 구독자들을 결집, 유지하는데는 큰 효과를 보여주었지만, 반대로 또 과거부터 끊임없이 문제가 제기되어 왔던 조선일보의 정치적 편향성들이 더 크게, 계속해서 부각되는 부작용을 안겨주게 되었다.
그 외에도 과거와 달리 조선일보를 경영하는 방씨 일가의 지배 구조에 대한 의혹 제기들도 이제는 시대가 바뀌었다는 것을 여과없이 보여준다. 과거엔 그냥 쉬쉬하면 되는 문제였고, 과거엔 조선일보를 소유하고 경영하는 방씨 일가에 대한 직접적인 비판과 언론 보도는 감히 상상치도 못할 일이였다. 하지만 점차 조선일보를 소유/지배하는 방씨일가 내에서 발생한 사건들이 속속히 공개되기 시작하면서 방씨 일가 뿐 아니라 방씨 일가가 소유하는 조선일보도 같이 이미지가 실추되게 된다. 결국 장자연 자살 사건 의혹, 방용훈 부인 자살 사건, 조선일보 사주 손녀의 운전기사 폭언 사건 등을 거치면서 사회로부터 상당한 반감을 얻게 된 것이다. 물론 그리 놀랍지도 않다는 반응도 상당하다. 무소 불위의 힘을 자랑하며 견제 받지 않던 권력인 조선일보와 방씨 일가라면 그런 막장 행각들도 충분히 발생할 수도 있지 않냐는 것.
참고로 김어준이 90년대 말에 조선일보의 안티테제로 만든 것이 바로 딴지일보이다. 그래서 딴지일보는 초창기부터 쭉 조선일보를 집중적으로 까는 기사가 굉장히 많았다. 특히 조선일보 김대중 주필의 그 유명한 '월스트리트 저널 왜곡 번역 보도 사건'을 최초로 밝혀내어 세상에 폭로한 것도 딴지일보였다.[37] 다만 1990년대 말부터 2000년대 즈음까지는 조갑제와 김대중 등이 영향력 있는 언론인 조사 TOP 10에 꼭 들었을 정도로 조선일보의 영향력은 여전했었고, 아무리 김어준이 1990년대 말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주목받는 언론인이 되었다 한들, 어디까지나 인터넷 대안 매체 분야에 한정된 인물이었고, 심지어 중소기업 수준 회사의 재정 충당을 위해 관광 가이드업이나, 쇼핑몰, 성인용품 판매(...)같은 잡사업까지 도맡아 할 정도였으니, 당시에는 둘의 규모나 영향력을 비교하는 것 자체가 민망한 수준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며 인터넷과 스마트폰의 보급으로 아예 신문 산업 자체의 영향력이 줄어들었고, 팟캐스트유튜브 등의 여러 온라인 미디어들이 그야말로 폭발적으로 성장했으며, 특히 2016년 제20대 총선, 2017년 제19대 대선, 2020년 제21대 총선 등의 주요 정치적 이벤트를 겪으며 조선일보의 미디어 영향력이 쪼그라든 것이 확인된 것과 동시에, 비슷한 시기에 나는 꼼수다김어준의 뉴스공장 등이 대히트를 치면서 김어준의 미디어 영향력이 조선일보의 김대중 주필이나 아예 조선일보 자체를 훨씬 넘어서게 된 현재의 상황은 2000년대 초반 기준으로 보면 그야말로 상전벽해 수준이다.
참고로 안티조선 운동 자체는 현재는 거의 수그러든 상태이고,[38] 각 사이트들은 원래 있던 사람들이 계속 있는 경우가 다수이며, 운동가들 중 일부는 극우 반공주의 운동가(!?)로 전향한 상태.[39]

15. 자회사


이들을 통틀어 조선미디어그룹이라고 한다.
  • 조선경제i[40] : 조선비즈, IT조선, 이코노미조선, 조선닷컴[41]
  • 디지틀조선일보[42] : 옥외전광판 뉴스, 게임조선 운영 담당.
  • 스포츠조선[43]
  • 헬스조선 : 헬스조선
  • 조선교육문화미디어 : 조선에듀[44],어린이조선일보[45],더나은미래[46]
  • TCN미디어
  • 조선뉴스프레스 : 월간조선, 주간조선, 여성조선, 산, 웰빙라이프, TOP Class, 조선pub, 행복플러스
  • 조선아이에스
  • 조선방송 : TV CHOSUN, TV CHOSUN2
  • 조선영상비전
  • 코리아나 호텔[47]

16. 공익재단


  • 방일영문화재단
  • 통일과나눔
  • 조선일보 미디어연구소

17. 산하 기관


  • 조선일보 동북아연구소: 북한정보 사이트 'NK조선' 운영.

18. 조선일보 페이스북


[image]
과거 조선일보 페이스북은 여타 다른 언론사 페이스북과 같이 뉴스 기사 링크만 제공하는 페이지였으나 카드뉴스 등 젊은 층을 타겟팅한 뉴스 컨텐츠를 앞세워 신문사 페이스북 중 이용자 수 1위를 달성하며 2015년 하반기 좋아요 수가 30만을 돌파했었다. 2017년 2월 현재 좋아요 수는 약 55만으로 기세가 폭발적으로 불고 있는데 '''그 이유는 바로 조페지기(조선일보 페이스북 지기)의 드립 때문이다.''' 게다가 단순한 드립이 아니라 속을 시원하게 뚫어주는 일침, 팩트폭력 수준이라 형식적인 언론의 틀을 깬다는 점에서 호감을 얻었다.
원래 조선일보 페이스북 좋아요는 기존 보수 성향의 페북 이용자들에 불과했으나 조선일보 페이스북 지기가 기사 내용과 관련된 드립을 댓글로 올리는 등 일반인들과 눈높이를 맞추는 가까운 행보를 이어가고 재미가 더 해지자 '''조선일보에 반감을 갖고 있던 유저들도 좋아요'''를 누르며 흥하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드립으론 '김정은(수소돼지/하이드로겐 포크)', '안철수', '문재인', '김무성', '최경환' 등의 정치적인 관련된 대상을 이용하는 드립이며 보수적인 성향의 이용자 뿐만 아니라 일반 유저들까지 대부분 흡수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팔로워 연령도 꽤 젊은 편. 참조
클로저스 티나 성우 교체 논란으로 메갈리아의 문제가 대두되고 있는 가운데, JTBC 뉴스룸에서 '''메갈 싫어하면 일베충'''이란 논조로 방송을 했다. 메갈 성향을 제외한 대부분 인터넷 커뮤니티가 격렬한 비판을 가했는데 조페지기는 이를 두고 "JTBC덕분에 인터넷이 통일되었다"며 글을 썼다.
2016년에 조선일보 페이스북에서 메갈리아, 워마드 등을 비판하지 말라고 다량의 메시지를 받았는데, '''의견 감사합니다🙂 '''라고 무시하며 무지개 반사시전하는 것이 밈으로 자리잡았다.
2016년에 들어 더욱 심한데 청와대, 박근혜 정부와 사이가 매우 나쁘다. 청와대에서는 조선일보를 부패 기득권 세력이라고 비난할 정도. 보수 언론임에도 불구하고 독특한 케이스.
페북을 관리하는 고정된 기자가 있는 것은 아니고, 기자들이 돌아가며 당번식으로 맡는다고 한다. 페북 관리자가 직접 '''"한 명이 관리하는 것은 아닙니다."'''라고 말을 했다.[48] 이외에 조선일보 인스타그램에도 진출해 있으며, 같은 관리자가 관리하는 것으로 보인다. 조선일보 트위터도 존재하나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처럼 드립을 치지는 않는다. 페북 관리하는 기자중 한 명은 야갤러 내지는 야갤계 디씨 갤러로 보인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관련해서 기자가 약을 무지하게 빤듯하다. #
2017년에 또 마약 한 건 터뜨리셨다. 마약의 현장 2017년 이후로는 주로 조선2보 페이지에서 드립친다. 바로가기
이후 한동안 뜸하다 2019년 지드래곤의 휴가 관련 논란에서 'GD, 이번에도 Goon Dae 논란'이라며 유머성 게시글 업로드를 다시 시작했다.
[image]
김정은 컨셉의 유저가 댓글을 달자 자매 페이지인 조선2보와 콜라보로 드립을 쳤다.
또한 2019년 5월부터 관리자가 웃긴 댓글을 뽑아 시상하기도 하는 모습이다.

19. 조선일보 유튜브


조선일보에서 운영하는 공식 유튜브이다.
다음은 정기 업로드 중인 주요 콘텐츠
  • 김광일의 입 - 월~금 오후 6시
  • 김태훈의 우파만파 - 수 오후 3시
  • 이슈 포청천 - 목 오후 3시
  • 꽁수처 김검사 - 금 오후 3시
그 밖의 콘텐츠로는 '의대녀' 등이 있다.

20. 여담


  • 여느 신문들처럼 세로쓰기 체제를 유지하였으나, 1999년부터 가로쓰기로 편집되고 있다. 창간 당시부터 가로쓰기였던 한겨레신문을 제외하면 2000년을 앞두고 거의 모든 신문이 가로쓰기로 전환했다.
  • 조선일보(朝鮮日報)는 특히 한자(漢字) 표기를 고집하는 것으로 유명한데, 지금도 표제어, 중요한 단어, 중국일본고유명사(인명, 지명)는 한자로 표기하거나 한자를 병기하고 있다. 다른 신문도 표제어는 이렇게 처리하는 걸 왕왕 볼 수 있지만, 다른 신문에 비해 조선일보가 유난히 많은 편이다. 또 連敗(연속패배)/連霸(연속우승)처럼 동음이의어 중에서도 뜻이 극단적으로 상반되는 경우에는 반드시 한자를 같이 쓴다.마치 한겨레가 알파벳마저 가독성을 해칠 정도로 한글표기를 고집하는 것[49]대척점에 있는 내용이다. 그런데 신문은 그나마 한자 표기가 적은 편이다. 월간조선 등 조선일보에서 발행하는 상당수의 잡지들은 신문보다 독자층이 더욱 한정되어 있어서 그런지 어지간한 사람들의 인명부터 기사 제목까지 전부 풀 한자로 쓰여있는 것을 쉽게 볼 수 있다. 또한 바둑 관련 보도에서는 프로의 단수를 한자로 철두철미하게 표기(예 : 이세돌 九단)하는데 조선일보가 바둑대회도 주관하는 신문사다 보니 가능한 이야기다. 오히려 이것이 한국기원이 제시하는 표준 표기법이다.
  • 서울대학교와 연합하여 TEPS를, 한국어문회를 후원하여 한자검정시험을 주관하고 있고 매년 춘천 마라톤을 개최하고 있다. 춘천마라톤 자체도 조선일보에서 어마어마하게 밀어주는 대회이며, 10월 대회 시즌이 오면 아예 마라톤 대회 전용으로 신문 섹션이 하나 늘어나기도 한다. 이 대회가 열리면 경춘선에 열차 증편까지[50] 시켜버리는 위업도 보여준다. 단순히 전문 선수만 뛰는 게 아니라 동호인이나 일반인들도 많이 참가하기 때문.
  • 창간 100주년을 맞은 2020년 3월부터 조선 뉴스 라이브러리에서 창간 후 1999년까지의 모든 기사와 지면을 볼 수 있다.링크
  • 이규태 칼럼도 유명했다. 1983년부터 2006년까지 만 22년을 연재한 칼럼인데[51]칼럼이지만 실은 연재식 수필에 가까웠고 담백한 문체로 이야기를 풀어내는 것이 인기를 얻어서 독립적인 단행본이나 심지어 CD롬 형식의 원시적인 e북으로 나오기도 했다.(당시 1990년대였는데 이때만 해도 CD롬 형식 e북은 뭔가 신선해보이는 형식이었다) 얼마나 인기가 있냐면 해적판도 끼어있었을 정도. 나름대로 조선일보 독자층 사이에서 팬을 보유하고 있었던 이규태 논설고문은 2006년에 작고했다.
  • 깨알 같은 점으로 신문 내 일러스트가 간결하면서도 특유의 그림체로 인지도가 높다. 조선일보의 신문 삽화를 담당하는 사람은 김도원이라는 화백으로, 보통 본명보다는 일러스트에 서명으로 남기는 'do'라는 필명으로 더 유명하다. 이 분은 1969년에 조선일보에 입사하여 도안사로 일했고, 이후 1981년부터 데스크로 들어가 미술담당 부장, 부국장, 국장대우를 지내고 2004년에 은퇴한, 조선일보 짬밥만 50년 가까이 되는 분이다보니 김대중 고문[52]과 함께 간부급 대우를 받고 있다. 1980년대부터 금성사나 럭키금성의 광고 삽화 작가로도 활동하였다.
  • 리빙 포인트라는 코너에서 간단한 생활의 지식을 소개하고 있다. 코너 특성상 내용이 상당히 짧은데, 리빙 포인트도 어쨌든 인터넷에 기사로 올라가기 때문에 한때 네티즌들의 "이런 것도 기사라고 올리니 기자 하기 참 쉽다"는 오해를 받았다(...). 실제로 좋은 팁도 많이 올라오지만, 누구나 다 알 법한 팁[53]도 많이 올라오는 건 좀 문제. 어쨌든 리빙 포인트는 까인 만큼 인지도가 높아져서 패러디까지 되고 있다. 패러디 중 <음식이 싱거울 때 소금을 넣으면 좋다>는 이미 전설은 아니고 레전드. 그리고 이 리빙 포인트의 고정삽화 역시 김도원.
  • 1953년부터 청룡기 전국고교야구 선수권대회를 주최하고 있으며 1974~1996년까지 기왕전, 1996년부터 LG배 조선일보 세계기왕전이라는 프로바둑기전을 주최하고 있다. 이외에도 1967년부터 경찰청과 함께 '청룡봉사상[54]'을, 1963년부터 청룡영화상을 시상중이다.
  • 양경숙 전 라디오21대표가 페이스북에 업로드한 이미지를 통해 <조선일보 Why>지면에 플랑드르 스칼렛이 등장#했다.
  • 조선일보 온라인 사이트에 회원 가입을 하지 않으면 그 시점에서 1주일 이전의 과거 기사나 프리미엄 조선의 기사를 온라인으로 조회하지 못한다.
  • 조선일보는 특히 일반 사건사고 면에서 가장 신뢰성 높은 매체에 속한다. 이슈가 되는 일반인을 인터뷰할 시에는 2차 검증도 매우 깐깐하게 진행하고, 정치적으로 대립하는 진보 진영에서조차 비정치적 기사로 조선일보가 단독 보도한 것은 믿고 인용하는 편이다. 조선일보의 공신력이 아직까지도 유지되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며 의외로 안티조선 세력에게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다. 조선일보의 기자 능력만 놓고 보면 문과 출신 중에서 고시 합격자 빼고는 최고 스펙으로 대우받을 정도로 출중하다.
  • 만평 외에 시사 내용을 가볍게 다루는 웹툰인 뉴스툰을 홈페이지에서 연재한다. 2016년까지는 악명 높은 윤서인조이라이드(웹툰)를 연재하는 등 매우 편향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윤서인을 사실상 내쫒은 이후엔 치삼만화, 권권규, 고콜과 같은 병맛 개그로 유명한 만화가들이 연재하고, 내용 또한 조선일보치고는 비교적 중도적이면서 병맛을 잘 살린 작품들이 올라오고 있다. 젊은 층을 중심으로 한 네티즌들에게도 비교적 호평을 받고 있다. 다만 뉴스툰 자체의 댓글들은 오히려 부정적인 평가가 더 많다. 권권규의 글을 볼 때 작가들의 자율성을 존중하는 모양.
  • 2018년 9월에 시사IN이 일반인을 상대로 한 여론조사에서 가장 불신하는 언론 매체에서 25%로 1위를 했다.# 또한 이 조사에서 가장 신뢰하는 ‘신문’을 묻는 질문에는 한겨레가 14.2%로 1위, 조선일보가 14%로 2위를 기록했다.
  • 2020년 8월, 기자협회가 기자들을 상대로 실시한 여론조사[55]에서 가장 신뢰하는 언론 매체 1위를 기록했다.#
  • 2020년 9월 1일에 홈페이지와 모바일 앱이 완전히 리뉴얼 되었는데 이전보다 굉장히 깔끔하게 바뀌었다. 아마존에서 개발한 Arc 엔진을 이용한다고 한다. 그때문인지 미국 신문사 사이트들(특히 워싱턴 포스트)과 비슷한 느낌이 난다.

21. 관련 인물


가나다순
  • 강천석 - 전직 조선일보 주필이자 조선일보 고위직 기자로 호남 출신이다.[56]
  • 강효상
  • 김기림 - 조선일보 1기 공채기자. 시인이자 비평가. 모더니즘 이론을 한국에 본격적으로 소개한 사람이기도 하다.
  • 김대식 - "김대식의 브레인 스토리"를 집필한 외부 필진이다.
  • 김대중
  • 김재봉 - 사회주의계열 독립운동가. 1920년대 중반 조선일보 기자 활동. 조선공산당 창립 주역 중 한명.
  • 김종환 - 前 기자. 퇴사후 '참깨방송'이라는 우파 유튜브를 운영중.
  • 류근일 - 2000년대 초반 논설위원. 소위 운동권에서 전향한 386세대 언론인 중 인지도가 제법 높다. 조선일보 퇴사 후에는 뉴데일리 고문으로 활동 중.
  • 리영희 - 1960년대 조선일보 외신부에서 기자로 활동.
  • 문일평 - 독립운동가. 1933년~1939년 조선일보 편집고문. 그의 외손녀는 방우영의 부인이기도 하다.
  • 경영진 방씨 일가 (조선일보 가문)
  • 백석 - 시인. 조선일보 출판부 기자로 근무했다. 1930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단편소설 ‘그 모(母)와 아들’로 데뷔.
  • 선우휘 - 1971~1980년까지 주필, 1980~1986년까지 논설고문 역임.
    • 선우정 - 선우휘의 아들. 現 사회부장. 일본 특파원, 논설위원역임
  • 송병준 - 친일파. 1921년~1924년 조선일보 사주.
  • 송희영 - 조선일보 전 주필. 대우조선 로비 의혹으로 모든 직에서 사퇴했다.
  • 신석우 - 독립운동가. 1924년~1931년 조선일보 사주. 1927년~1931년 조선일보 사장.
  • 심훈 - 독립운동가. 1928년~1931년 조선일보 기자. 상록수를 쓴 작가.
  • 안재홍 - 독립운동가. 1931년~1932년 조선일보 사장.
  • 양상훈 - 조선일보 편집국장, 논설실장, 논설주간 등을 역임했다. 송희영 前 주필의 사임 이후 실질적으로 주필을 담당. 2017년 3월 주필겸 이사로 승진.
  • 양희원 - "양해원의 말글 탐험" 작가. 여자 같지만 나이 지긋한 남성이다.
  • 우종창 - 前 월간조선 기자. 과거 노무현이 호화요트를 가지고 있다고 했다 사과를 조건으로 고소를 취하받은 적이 있는 기레기로, 이한우와 더불어 최장집을 비난하는는데 앞장섰었다. 박근혜 탄핵 이후로 최순실 태블릿PC 조작설을 밀고 있으며, <우종창의 거짓과 진실>이라는 이름으로 개인 유튜브 채널을 운영했다. 조국 사태에선 조국이 박근혜 탄핵을 담당한 재판장과 식사를 했다고 부적절한 행위라 주장했다 명예훼손으로 실형을 구형받았다.
  • 유광렬 - 조선일보 사회부장 출신.
  • 이광수 - 친일파. 소설 연재 및 부사장 역임(1933년~1934년). 당시 민족개조론을 비판하던 사람 중 하나인 신일용은 아이러니하게도 동시기 조선일보 논설주필로 활동한 조선일보맨이었다.
  • 이규태
  • 이도형 - 6.25 전쟁 때 통역장교로 참전했으며, 1965년 입사 이래 주일특파원과 논설위원 등을 역임함. 1989년 퇴사 후 한국논단 창립. 2020년 4월 5일 작고.
  • 이상재 - 독립운동가. 1924년~1927년 조선일보 사장.
  • 이승복 - 독립운동가. 1927년~1933년 조선일보 이사 및 영업국장. 신간회 소속이기도 했다.
  • 이육사 - 독립운동가, 시인. 조선일보 기자
  • 이한우(기자) - 베른하르트 크반트와는 무관. 월간조선의 우종창과 더불어 최장집을 비방하는 기사의 주도자이기도 하였다. 2016년 퇴사로 기자 일선에서는 은퇴. 이후에는 조선사와 동양유교철학(논어 등)에 전념하고 있다. [57]
  • 유봉영 - 독립운동가. 임시정부 재무부에서 일하면서 재정지원을 하다가 경찰서와 형무서에 여러차례 수감되었다. 1936년~1940년 조선일보 폐간시까지 기자로 활동. 조선일보가 1945년 복간된 뒤 재입사하여 1971년까지 재직하며 주필과 부사장을 역임했다.
  • 윤희영 - 매주 목요일 날씨면 위의 코너인 "윤희영의 news english"를 집필한다. 여자인 것 같지만. 나이 지긋한 중장년 남자다.
  • 정영일 - 영화 평론가로, 1960~1987년까지 영화전문 기자로 재직하며 문화부장, 체육부장, 특집부장, 소년조선일보 주간, 편집위원 등을 역임함.
  • 조갑제 - 20세기 말의 조선일보맨 중에서도 가장 영향력이 높으며 기자정신도 인정받는 편이지만 그만큼 어그로도 많이 끌던 인물. 월간조선으로 옮겨 활동하다 경질 후 조갑제닷컴으로 독립.
  • 조만식 - 독립운동가. 1932년~1933년 조선일보 사장.
  • 주돈식
  • 최병우 - 1952년~1954년 조선일부 외신부장. 종군기자
  • 최병렬
  • 최석채 - 1959년~1971년 조선일보에 재직하며 편집국장, 주필 등을 지냈다. 2000년에는 1964년 언론윤리법 파동 때 언론자유를 수호하기 위해 앞장선 공로로 국제언론인협회(IPI)가 선정하는 20세기 언론자유영웅(Press Freedom Hero) 50인에 뽑혔다.
  • 최우석 - 조선일보 정치부 기자. 독립운동가 최능진의 손자.
  • 최은희 - 독립운동가. 조선일보 기자. 일제시대 가장 활발히 활동했던 여성 기자 중 한명이었다.
  • 최보식 - 매주 월요일 a27면에 "최보식이 만난 사람들" 집필. 주로 최근 이슈에 연관된 사람, 의견을 내는 사람을 만남. 그 역시 태블릿PC 조작설에 대하여 호의적인 논설을 낸 바가 있다.
  • 하쿠 신쿤 - 조선일보 일본 지사장. 현 입헌민주당 참의원 의원
  • 한기악 - 독립운동가. 조선일보 편집국장
  • 한용운 - 독립운동가, 작가. 장편소설 '흑풍'을 조선일보에 연재하며 데뷔했다. 이후 장편소설 '박명'도 조선일보에 연재했다. 소설외에도 각종 논설, 수필 등도 기고 했으며 1940년 조선총독부에 의해 조선일보가 폐간될때까지 '삼국지'를 번역 연재했다.
  • 허문도
  • 홍명희 - 독립운동가, 소설가. 대표작 임꺽정을 조선일보에 1928년~1939년에 걸쳐 연재하다가 조선일보가 폐간되는 바람에 '조광'에 잠시 연재했으나 미완으로 끝났다.
  • 홍사중 - 1990년대 '홍사중 칼럼'으로 애독자들에게 이름을 날림. 논설고문 역임.

22. 관련 문서



23. 역대 임원



23.1. 상임고문



23.2. 명예회장



23.3. 명예사장



23.4. 회장


  • 방응모 (1948 ~ 1950)
  • 홍순필 (1950 ~ 1952)
  • 홍종인 (1959 ~ 1963)
  • 방일영 (1964 ~ 1993)
  • 방우영 (1993 ~ 2003)

23.5. 사장



  • 조진태[58] (1920)
  • 유문환 (1920 ~ 1921)
  • 남궁훈 (1921 ~ 1924)
  • 이상재 (1924 ~ 1927)
  • 신석우 (1927 ~ 1931)
  • 안재홍 (1931 ~ 1932)
  • 유진태 (1932 ~ 1933)
  • 조만식 (1933)
  • 방응모 (1933 ~ 1953/1954 ~ 1967[59])
  • 장기영 (1952 ~ 1954)
  • 방일영(1954 ~ 1964)
  • 방우영 (1964 ~ 1993)
  • 방상훈 (1993 ~ 현재)

23.6. 대표이사[60]



23.7. 대표이사 부사장


  • 신동호 (1988.10 ~ ?)
  • 안병훈 (2002.3 ~ 2003)
  • 홍준호 (2017 ~ 현재)

23.8. 대표이사 전무


  • 신동호 (? ~ 1988.10)
  • 방상훈 (1984 ~ 1988)
  • 변용식[61] (2010 ~ 2014)
  • 홍준호 (2015 ~ 2017)

23.9. 부사장


  • 예종석 (1920)
  • 신석우 (1924 ~ 1929)
  • 안재홍 (1929 ~ 1931)
  • 임경래 (1932 ~ 1933)
  • 방응모 (1933)
  • 이광수 (1933 ~ 1934)
  • 이훈구 (1940)
  • 홍종인 (1952 ~ 1958)
  • 방일영 (1954)
  • 최용진[62] (1954 ~ 1965)
  • 성인기 (1958 ~ 1960)
  • 유봉영 (1960 ~ 1971)
  • 류건호 (1980 ~ 1987)
  • 방상훈 (1988 ~ 1993)
  • 신동호 (1988 ~ 1989)
  • 안병훈 (1998 ~ 2002)
  • 방계성 (2004 ~ 2006)
  • 김문순 (2008 ~ 2010)
  • 방준오 (2017 ~ 현재)

23.10. 부사장대우



24. 역대 법정등록인



24.1. 발행인


  • 예종석 (1920)
  • 최강 (1920)
  • 권병하 (1920 ~ 1921)
  • 김용희 (1921 ~ 1924)
  • 김동성 (1924 ~ 1926)
  • 안재홍 (1926 ~ 1928/1931 ~ 1932)
  • 신석우 (1928 ~ 1931)
  • 임경래 (1932 ~ 1933)
  • 방응모 (1933 ~ 1953)
  • 장기영 (1953 ~ 1954)
  • 방일영 (1954 ~ 1963)
  • 방우영 (1963 ~ 1984)
  • 류건호 (1984 ~ 1986)
  • 신동호 (1986 ~ 1989)
  • 방상훈 (1997 ~ 2006)
  • 김문순 (2006 ~ 2010)
  • 변용식 (2010 ~ 2014)
  • 홍준호 (2014 ~ 현재)

24.2. 편집인


'''역대 조선일보 편집인'''
[ 펼치기 · 접기 ]
1920
최강
1920 ~ 1921
권병하
1921 ~ 1924
김용희
1924 ~ 1926
김동성
1926
민태원
1926 ~ 1928
백관수
1928 ~ 1929
장지영
1929 ~ 1931
류광렬
1931 ~ 1932
안재홍
1932 ~ 1933
임경래
1933 ~ 1953
방응모
1953 ~ 1954
장기영
1954 ~ 1963
방일영
1963 ~ 1968
유봉영
1968 ~ 1985
류건호
1985 ~ 1986
신동호
1986 ~ 1988.10
안병훈
1988.10 ~ 1989.6
신동호
1989.7 ~ 1990.12
방상훈
1991.1 ~ 2002.3
안병훈
2002.3 ~ 2003.1
김대중
2003.1 ~ 2010.3
변용식
2010.3 ~ 2013.12
강천석
2014.1 ~ 2016.8
송희영
2016.8 ~ '''현재'''
홍준호

  • 홍준호 (전무, 2016.8 ~ 2017.2/부사장, 2017.3 ~ 현재)

24.3. 인쇄인


  • 서만순 (1920 ~ 1921)
  • 유방주 (1921 ~ 1924)
  • 김형광 (1924 ~ 1925)
  • 최익진 (1925 ~ 1926/1933 ~ 1938)
  • 이용구 (1926 ~ 1930)
  • 박창근 (1930 ~ 1933)
  • 최이복 (1938 ~ 1940)
  • 김한호 (1945 ~ 1953/1954 ~ 1966)
  • 방일영 (1953 ~ 1954)
  • 방우영 (1966 ~ 1984)
  • 류건호 (1984 ~ 1986)
  • 신동호 (1986 ~ 1989)
  • 방상훈 (1989 ~ 2006)
  • 김문순 (2006 ~ 2010)
  • 변용식 (2010 ~ 2015)
  • 홍준호 (2015 ~ 현재)

25. 역대 주요 간부



25.1. 주필


  • 남궁훈 (1924)
  • 안재홍 (1924 ~ ?)
  • 김양수 (1925)
  • 신일용 (1932 ~ 1933[63])
  • 서춘 (1933 ~ 1937)
  • 이훈구 (1938 ~ 1946)
  • 이갑섭 (1946 ~ 1947)
  • 홍종인 (1948 ~ 1949/1950 ~ 1959)
  • 김석길 (1949 ~ 1950)
  • 유봉영 (1959 ~ 1961/1961 ~ 1965)
  • 부완혁 (1961)
  • 최석채 (1965 ~ 1971)
  • 선우휘 (1971 ~ 1980)
  • 신동호 (1985 ~ 1988)
  • 이규태 (1989 ~ 1990)
  • 김대중 (1990 ~ 2002.3)
  • 류근일 (2002.3 ~ 2003)
  • 강천석 (2006 ~ 2014)
  • 송희영 (2014 ~ 2016)
  • 양상훈 (2017 ~ 현재)

25.2. 논설고문



25.3. 논설주간



25.4. 논설위원실장


  • 이규태 (1986 ~ 1988)
  • 류근일 (1989 ~ 1996)
  • 최청림 (1996 ~ 2001)
  • 강천석 (2002 ~ 2003)
  • 송희영 (2006 ~ 2010)
  • 양상훈 (2013 ~ 2014)
  • 박정훈 (2018 ~ 현재)

25.5. 수석논설위원


  • 오태진 (2005 ~ 2016)[64]
  • 한삼희 (2016 ~ 현재)[65]

25.6. 편집고문


  • 민태원 (1926)
  • 이관용 (1932 ~ 1933)
  • 문일평 (1933 ~ 1938)
  • 이광수 (1935 ~ 1937)
  • 황의돈 (1940)
  • 김형원 (1946)
  • 홍종인 (1947 ~ 1948)
  • 김규택 (1949)
  • 유봉영 (1950 ~ 1959)
  • 윤석중 (1959 ~ 1969)

25.7. 편집국장


  • 최강 (1920 ~ ?)
  • 선우일 (1921 ~ ?)
  • 염상섭 (1921)
  • 이상재 (1924 ~ ?)
  • 민태원 (1924 ~ ?)
  • 김동성 (1924 ~ ?)
  • 한기악 (1928 ~ 1932)
  • 주요한 (1932 ~ 1933)
  • 이광수 (1933 ~ 1934)
  • 김형원 (1934 ~ 1937/1945 ~ 1946)
  • 함상훈 (1938 ~ 1940)
  • 이건혁 (1946)
  • 홍종인 (1946 ~ 1947)
  • 문동표 (1947 ~ 1949)
  • 유봉영 (1949 ~ 1950)
  • 성인기 (1950 ~ 1958)
  • 천관우 (1958 ~ 1959)
  • 송지영 (1959 ~ 1961)
  • 최석채 (1961)
  • 윤주영 (1961 ~ 1962)
  • 류건호 (1962 ~ 1963/1974 ~ 1975)
  • 선우휘 (1964 ~ 1965/1968 ~ 1970/1971(대행))
  • 김병환 (1965 ~ 1968)
  • 장건호 (1970 ~ 1971)
  • 신동호 (1971 ~ 1973/1975 ~ 1980)
  • 김용원 (1973 ~ 1974)
  • 김용태 (1980)
  • 최병렬 (1980 ~ 1985)
  • 안병훈 (1985 ~ 1988.10)
  • 인보길 (1988 ~ 1989/1992 ~ 1995)[66]
  • 김대중 (1989 ~ 1990)
  • 주돈식 (1990 ~ 1992)[67]
  • 최청림 (1995 ~ 1996)
  • 최준명 (1996 ~ 1998)
  • 강천석 (1998 ~ 2001)
  • 변용식 (2001 ~ 2004)
  • 이상철 (2004 ~ 2005)
  • 송희영 (2005 ~ 2006)
  • 김창기 (2006 ~ 2009)
  • 홍준호 (2009 ~ 2010)
  • 양상훈 (2011 ~ 2013)
  • 강효상 (2013 ~ 2015)
  • 김창균 (2015 ~ 2017)
  • 박두식 (2017 ~ 2020)
  • 주용중 (2020~ 현재)

25.8. 편집국장 대리


  • 신석우 (1926)
  • 이선근 (1930 ~ 1932)
  • 권덕규 (1932)
  • 신동호 (1975)
  • 김윤환 (1975 ~ 1978)
  • 김용태 (1979 ~ 1980)
  • 최청림 (1992 ~ 1995)

[1] 1940년 조선총독부에 의해 폐간, 1945년 해방 이후 복간[A] A B 2020년 11월 29일 기준[2] 사장 등 겸직자 제외.[3] 2020년 창간 100주년을 앞두고 2019년부터 밀기 시작한 홍보 멘트이다.[4] '조중동' 용어에 대해서는 나 먼저 원리에 따라 중앙일보에서는 굳이 그렇게 불러야 할 일이 있다면 '중조동', 동아일보에서는 '동조중'이라고 애써 자기들끼리 부르긴 한다만, 사람들은 그냥 늘 조중동이라고만 부른다.[5] 2019년 12월 21일 사보에서 방상훈 사장이 신년사에서 조선일보를 "보수 언론"으로 언급한 내용이 있다.#[6] 그나마도 부산과 대구에서도 조선일보가 2위를 차지하고 있다.[7] 물론 업계 모든 회사들이 뻥튀기 부수이기 대문에 상대적인 순위에서는 별 차이가 없다. 다만 절대적인 부수 규모 자체는 알려진 것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8] 한국 ABC 협회 기준 2019년(2018년 조사) 유료부수 119만 부, 23개 신문사 중 1위[9] 과거에는 '신문사 기자가 진짜 기자이지, 방송사 기자는 기자도 아니다'는 말이 언론계에서 공공연하게 나돌 정도였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방송의 영향력이 신문을 압도한 지가 한참 오래되었고, 기자 지망생들 조차 기왕이면 방송사 기자를 하려고 하지, 굳이 신문사 기자를 하려고 하지 않는다. 과거 한 때는 '중앙 일간지 소속 기자'라는 명함만으로도 큰 힘을 발휘하는 세상이었지만, 지금은 조중동에 합격한 신입 수습기자들이 방송사에서 동시에 합격 연락이 오면, 죄다 신문사를 버리고 냉큼 방송사로 달려가는 분위기가 정착된 지 이미 오래이다.[10] 1960년대 후반, 조선일보가 코리아나 호텔을 지을 때 일본으로부터 약 400만 달러에 달하는 상업차관을 들여온 사건이 있었다. 당시 400만 달러라면 굉장히 큰 돈이었는데, 시중 은행의 금리가 연 26%일 때, 조선일보가 부담한 금리는 겨우 7%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박정희 정권이 조선일보에 엄청난 특혜를 준 것이다.[11] 언론통폐합의 설계자인 허문도가 조선일보 출신이었던 덕을 보았다. 또한 중앙일보나 동아일보와는 다르게, 조선일보는 당시 방송사업에 진출하지 않은 상태였던 터라 방송사를 빼앗길 꺼리도 없었다.[12] 원래 이 기사는 조선일보의 기사 라이브러리에서 아주 오랫동안 삭제되어 있었는데, 창간 100주년 기념으로 조선일보가 자체 아카이브를 '조선 뉴스 라이브러리 100'으로 개편하면서 비로소 공개되었다. 그 이전까지는 몇몇 언론 비평지나 언론 비평에 관심이 있던 사람들이 직접 국회도서관에 가서 해당 기사에 관한 마이크로 필름을 열람한 후 썼던 분석 기사를 통해 공개되어 있었다.[13] 여기서 감안할 점은 온갖 사은품에 전단지 수준으로 뿌려대서 유료부수 규모의 거품을 유지한다는 것이다. 실상 대한민국 신문들은 진보-보수나 좌우파를 떠나, 사실상 구독료 수입이 아닌 기업 광고료 수입으로 먹고 살다보니, 각종 사은품은 물론이고 1년치 구독료 공짜 서비스도 충분히 가능할 정도로 마구 무가지를 뿌려대는 수준이다. 이는 조중동으로 대표되는 대형 족벌 언론이나, 매일경제신문이나 한국경제신문 같은 경제신문들이 특히 심각하다.[14] 조선일보는 민주화 이후로도 노동운동이나 민주화운동가에 대해서 부정적인 논조를 보여왔고, 김대중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보도를 많이 내놓았지만 김영삼과는 사이가 좋았다고 한다. 김영삼은 언론을 대하는 데 능숙했고, 또 그가 이끄는 상도동계는 민주화 진영임에도 조선일보와 유사한 보수 우파 성향을 가졌기 때문에 원만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15] 사실 언론들이 자신의 성향에 따라 특정 세력과 결탁하거나 특정 정치인을 밀어주는 건 다른 언론들도 비슷한 처지이다. 말하자면 조중동은 전통적인 보수정당 세력을 노골적으로 밀어주고, 한겨레경향신문의 경우에는 민주당계 정당을 의식하면서도 실질적으로는 비민주당계 진보정당 세력을 지지하는 경향이 있다.[16] 전통적으로 볼 때, 조선일보는 반공주의와 안보 체제를 내세우는 '이념 보수', 중앙일보는 삼성그룹 계열 언론라는 태생적 특성에 기인한 탓에 경제적으로 보수적인 노선을 걷는 '시장 보수', 동아일보는 상대적으로 민주당계 정당을 밀어주는 개혁 성향의 신문으로 분류되곤 했다. 다만 중앙일보는 언론 통폐합의 영향으로 87년 민주화 이후 전두환 신군부의 언론 정책에 부정적인 스텐스를 보이긴 했으며, 한편 동아일보는 2000년 즈음을 기점으로 완연한 보수 언론으로 변모하여, 이 시기를 기점으로 이른바 조중동 체제가 완성된다. 한편 한국일보는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여러 논조와 색채가 뒤섞인 신문이었다.[17] 일례로 1997년 당시 제15대 대통령 선거를 며칠 앞둔 상태에서, 조선일보 사옥 근처에서 조선일보의 편파 보도에 관해 항의 시위를 하는 새정치국민회의와 국민신당 선거 운동원들을 향해 조선일보의 김대중 주필이 술에 잔뜩 취한 채로 손가락질을 하며 "국민회의, 국민신당. 까불지 마. 내일 모레면 너희들은 다 죽은 목숨이야."라며 주정을 부렸던 사건은 유명하다.[18] 정말 별볼일 없는 일로도 참여정부를 까댔다. 물론 보수층들에게는 잘 먹혔으며 진보언론도 참여정부를 깠던 것은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효과는 배가 되었다.[19] 언론수용자 조사 기준으로 보면, 2000년 당시에는 1주일에 최소 하루 이상 종이신문을 보는 국민의 비율, 즉 신문 열독률이 81.4%였고, 가구별 신문 구독률도 52.3%였다. 다시말해 시민들 대부분이 매일 신문을 읽는 시대였던 것이다. 특히 종이신문 중에서도 조선일보는 단연 독보적인 선두주자였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2020년 조사 기준으로 보면, 신문 구독률은 6.3%이고, 열독률도 10.2% 정도밖에 안 되며, 특히 매일 신문을 읽는다고 답변하는 사람은 심지어 불과 1.1%밖에 안 된다.[20] 회사, 사무실, 가게, 관공서 등[21] "지난 1주일 동안 (하루 이상) 읽은 종이 신문은 무엇입니까?"에 대한 응답[22] 즉, 영향력이 아주 사라진 것은 아니더라도 힘이 크게 약해졌다는 것이다. 19대 대선을 앞두고 주요 언론사들이 안철수를 밀어주었지만 정작 안철수가 토론회에서 초보스러운 모습을 보여주고 결과적으로 3위에 그치면서 언론사들의 영향력이 크게 떨어졌다는 것을 반증해버린 셈이 되었고 그 덕택에 자연스레 영향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조선일보가 이회창을 당선시키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1.6%P, 2.3P 차이로 석패한 것이라 영향력은 유지할 수 있었던 데 반해서, 보수언론-진보언론 상당수가 안철수를 밀어주었음에도 3위에 그친 것은 영향력 과시라는 측면에서 볼 때 뼈아픈 타격일 수밖에 없다.[23] 원래는 언노련 소속이었지만 민주노총 산하에서 산별노조화되면서 탈퇴[24] 코리아나 호텔은 방상훈 회장의 동생인 방용훈 사장이 소유하고 있다. 따라서 한 회사인 셈.[25] 호텔 옆길에서 성공회 성당을 지나 좀 올라가면 있다. 실제 사옥이라고는 하지만 이 건물의 공식 명칭은 조선일보 미술관이고, 실제로 2층 전시실을 중심으로 전시 및 대관 사업을 하고 있다. 이 건물 외에도 별관 형식으로 주변 일방통행로에 여러 건물이 있고 각종 부서들이 여기저기 세들어 있는 형식. 편집국은 미술관 3~4층 TV 조선이 5층을 사용하고 있다.[26] 조선일보 국장, 임원 모임인 '조중회'가 지분 7.74%를 보유 중이다.[27] 이는 영업이익의 대부분이 대주주인 방씨 일가의 배당금으로 들어가기 때문이라고 한다. 언론 업계에서는 방씨 일가의 상속세 대비를 위한 현금 마련책이라고 보는 시각이 많다.[28] 신문 업계에서 가장 규모가 큰 매체이니만큼 조선일보 노조위원장 관련 소식도 종종 미디어 비평 관련 언론계의 관심을 받는데, 조선일보 노조위원장이 조선일보 사측과 충돌한다는 뉴스가 뜰 때마다 '노조를 혐오하는 조선일보에 무슨 놈의 노조가 있어?'라는 비꼼이 항상 붙는다(...)[29] 한겨레는 2008년 대침체를 유일하게, 그리고 가장 빨리 예측한 성과가 있다. 이런 측면에서는 오히려 진보 언론의 특화 분야다.[30] 지금은 퇴사한 이동진 기자가 영화 평론을 하던 시절부터 있던 이야기다. 안티조선운동의 리즈 시절인데, 이동진 기자의 영화 평론은 그 당시 조선일보의 마지막 희망(?)이었다는 이야기도 있었을 정도로 인기였다.[31] 안티조선 운동 자체가 내부에서 몰락한 탓도 있지만, 조선일보의 경제면 보강, 섹션 보강은 우회적으로 다사다난한 회사 분위기를 잘 이겨냈다. '''특히 사원들을 어처구니없게 내보내는 치사하고 더러운 악행은 안 저지른다.''' 안티조선의 리즈 시절, 조선일보의 마지막 희망이었던 이동진 기자도 외압이 아닌 본인 자의로 나간 것이다. 영화 기사 쓰려니 신문이 너무 좁다는 이유로(...) [32] #[33] 부장급 등 데스크의 결재를 받아서 이희진을 인터뷰했는데 막상 실제 인터뷰를 진행했던 기자가 '''냄새가 난다'''고 하고 기사로 보내지 않았다.[34] 일반적인 원로라기 보다는 조선일보 기준의 원로인데,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원로 계층보다도 더 연배가 높은 노년층이 주로 등장한다.[35] 전 조선일보 회장인 방우영 회장이 '밤의 대통령'으로 불릴 정도였다. 당시 조선일보가 정재계와 언론계, 문화계 등에 행사하는 권력과 영향력의 크기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였다.[36] 물론 검색광고료 획득을 위한 기사 낚시질이나 광고성 기사 범람같은 폐헤도 극심하기는 했지만 실시간으로 교차검증이 가능해졌다는 면에서는 90년대에 비해 진보된것이기는 하다. [37] 간단히 이야기하자면, 월스트리트 저널의 기사를 완전히 반대의 뜻으로 번역하여, 당시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를 비난하는 기사로 왜곡 보도했던 사건이다. 자세한 내용은 김대중 항목 참조.[38] 하지만 신문 업계 제1 언론사라는 브랜드는 어디 간 것이 아니라서, 심각한 사건을 터뜨리고자 언론에 제보하려는 보수 진영 사람들이 선호하는 곳은 조선일보이다. 하지만 가면 갈수록 그마저도 다른 언론사나 TV 방송사들에게 상당히 뺏기고 있다. 다만 이는 조선일보만의 탓이 아니라 다른 중량감 있는 기존의 거대 언론사들도 겪는 문제이다. 사실 이러한 것은 다양한 정보 획득 통로들이 새로 생겨난 것과 자국의 이슈에 대해 외국의 언론을 참조하기 시작한 것 등 다양한 원인들이 존재한다.[39]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실제로 뉴라이트 중 상당수가 과거 NL 출신이다.[40] 경제전문지로 조선일보사에서 야심차게 성장시키고 있는 회사. 출범이 10년도 되지 않았지만 뚜렷한 성장을 보이고 있다. 특히 조선일보의 후계자로 점쳐지는 방준오(방상훈 조선일보 사장의 아들)씨가 대표이사로 오면서 주목받고 있다.[41] 디지틀조선일보에서 운영했으나 방준오 사장이 조선경제로 취임하고 이관되었다. 조선경제 디지털편집국으로 개편되었다.[42] 코스닥 상장기업. 의외로 디지탈이나 디지털이 아니다.[43] 여기서 쓰는 기사들은 항상 K리그 클래식을 K-리그라고 쓰는 특징이 있었다. 많은 국내 축구 팬들에게 욕먹는 이유. 그러나 이것도 2015년부터 정상적으로 K리그라고 표기하기 시작하면서 과거형이 되었다. 온게임넷에서 진행했던 스타리그의 공동 주관사이기도 했다.[44] 구. 맛있는공부[45] 구. 소년조선일보(2018년 6월 4일, 창간 81년만에 제호 변경), 만화가 김우영이 『뚱딴지』를 1990년부터 2019년까지 29년 간 연재했다.[46] 조선일보 공익 섹션. 2010년 창간.[47] 방상훈 회장의 동생인 방용훈이 사장이며, 조선일보와 붙어있고 사무실을 공유한다.[48] 사실 대부분의 기업, 기관 SNS는 고정된 관리자가 있는게 아니라 하나의 계정을 여러 인원이 공유해서 관리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49] 가독성에 대한 비판이 간혹 들어온다.[50] 경춘선 전철 개통 전에 무궁화호가 다니던 시절에는 마라톤 당일날 무궁화호 증편이 있었을 정도였다. 전철화되고 나서도 ITX-청춘이 증편된 적도 있었다고.[51] 칼럼이 쓰이는 동안 이규태 기자는 논설위원, 논설위원실장, 편집국장, 주필, 논설고문 순으로 자리를 옮겼다. 2004년을 끝으로 정년퇴임했다.[52] 2003년까지 주필로 있다가, 은퇴하고서 고문으로 물러난다. 조선일보 주식을 3퍼센트나 가지고 있다고 한다.[53] 전설로 남을 '맥주를 차게 마시려면 얼음을 넣으면 좋다'(...) [54] 여담이지만 청룡봉사상은 포상금과 1계급 특진이 따라오는 상이라 경찰이 조선일보에 묶이는 이유가 아니냔 의혹을 받고 있다.#[55] 자기 언론사는 선택할 수 없음[56] 이전 서술에서 흔치 않은 호남 출신 고위직이라고 했는데, 조선일보 내에 호남 출신 고위직은 의외로 적지 않은 편이다. 이규태 칼럼으로 유명한 이규태 기자는 물론, 사내 실세로까지 소문났던 송희영도 호남 출신이다.[57] 사실 조선일보 재직시절에도 간혹 이쪽 책을 펴냈다.[58] 당시 천일은행장.[59] 등기상 재직일.[60] 사장 등 겸직자 제외.[61] 이후 조선방송(TV조선) 사장 역임.[62] 이후 학교법인 동방문화학원 이사장 역임. 1976년 작고.[63] 임경래 발간 시절.[64] 이후 TV조선 보도고문으로 자리를 옮겼다[65] 2018년 12월 8일자 칼럼부터 '선임논설위원' 직함으로 변경[66] 이후 디지틀조선일보 초대 사장을 8년 지내고 2005년 극우언론인 뉴데일리를 창간했다. 딸인 인지연은 극우정당인 대한애국당 정책위 의장을 맡고 있다.[67] 청와대 공보수석으로 입각하며 사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