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정 공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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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68년에 벌어진 베트남 전쟁의 운명을 결정지은 전환점. 현지 명절의 이름을 빌려 '땟(tết) 공세'라고도 알려져있다.
2. 과정
구정(설날)은 음력을 쓰는 나라라면 명절로 다루는 중요한 날이다. 베트남도 우리나라처럼 중국의 영향으로 설날을 쇠었기 때문에, 이때에는 남·북 베트남 모두 휴전에 들어가는 것이 관례화가 되어있었다.[5]
이 기간에는 미군도 예외없이 연휴를 즐기기 위해 한껏 풀어져 있었고, 게다가 설날에는 인파와 차량이 인산인해를 이루었기 때문에 검문도 어려웠다. 베트콩은 이를 알고 기습을 계획한다.
남베트남의 주요 도시와 시설을 모두 공격하는 이 작전에 '''35개 대대'''에 달하는 병력이 투입되었다. 이 병력들은 변장을 하고 있었으며, 무기는 관 속에 넣어서 들어오는 등 철저하고 치밀하게 계획되어 들어오고 있었기 때문에 미군은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그러나 뗏 휴전 시에도 베트남 공화국군만 공격받지 않았을 뿐 외국군(한국군, 미군, 호주군 등)은 어김없이 공격받았다. 실제 베트남 민주 공화국군은 휴전 기간에는 미군 비행기가 잘 뜨지 않는다는 걸 노려서[6] 이 기간 호치민 루트를 집중 가동했고[7] 주의 분산을 위해 로켓포 공격 따위로 딴지를 걸었다. 이런 사실은 당시의 그린베레 정찰 보고서 등에도 자주 경고되었으나 MACV(남베트남 지원군 사령부)는 이를 무시하여 피해를 키우고 말았다.
물론 미군이라고 아예 손놓고 있지는 않았다. 1968년 테트 공세를 준비하기 위한 사전 공세는 1967년 말부터 캄보디아 국경 인근 서부지대와 북부 비무장지대 인근에서 있었다. 상당한 규모의 북베트남군 공세로 인해 미군 전투 대대들이 다수 이 지역으로 파견된 상태였다. 구정 공세를 앞둔 시기, 주월미군 사령부 내부에서도 너무 많은 부대들이 외곽에 나가있어 테트 연휴를 앞두고 대도시들의 치안부재가 걱정된다는 문제 제기가 있었고, 미군들도 전방에서 대대들을 빼서 재배치시켰다. 그나마 미군보다 휴전에 대해 의구심이 강했던 한국군 지휘부 정도가 훨씬 더 철저한 방어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남베트남군이 관리하고, 소수의 미 군사고문단(미 해병대)이 주둔했던 후에시[8] 는 삽시간에 함락되어 민간인 수천명이 학살당하고, 지옥의 전장이 되어버렸다.[9] 결국 충분치는 못했던 것이 사실이지만, 이때 재배치한 대대들이 테트 공세 초기에 베트콩-북베트남군의 공세를 막아낸 주력부대가 되었다.
당시의 미국 CBS 뉴스. 사이공을 둘러싼 험악한 공기가 여실히 드러난다.[10]
'''1월 30일, 새벽의 폭죽놀이를 신호로 베트콩들은 공세를 시작했다.''' 사이공에 위치한 주요 기관 시설들은 모두 타겟이 되었고, 주월 미 대사관마저 베트콩들이 RPG로 외벽을 부순 뒤 침입하여 깽판을 부렸다. 결국 전원 사살 당하긴 했지만 대사관 직원이 베레타 M12 기관단총을 들고 아직 남아있는 베트콩을 찾아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모습은 미 국민들에게 충격을 주기 충분했다.[11] 이들은 사이공뿐만 아니라 남베트남 대부분의 도시(총 41개 지역)에 잠입해 있었기 때문에 남베트남 전역이 전쟁터가 되었다. 또한 미군과 한국군을 제외한 동맹군은 이때 기습을 할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데다 당시 남베트남군 대부분이 설을 쇠러 가서 공백이 생겼기 때문에 크게 당황했고, 전투는 매우 혼란스럽게 벌어졌다.
그러나 약속된 북베트남군의 지원이 없었고, 베트콩들은 자신들이 도시에서 전투를 벌이면 남베트남 도시 내부에서 봉기가 일어날 것이라 예상했으나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게다가 미군은 프랑스군과 달리 화력지원과 보급도 매우 잘 받는 상태였다. 베트콩의 공세는 2~3일만에 대부분 미군에게 진압되었다. 하지만 수도 사이공은 2주, 후에에서는 한달 가까이 베트콩의 게릴라전에 의한 시가전이 벌어졌다.
특히 후에에서는 19세기 응우옌 왕조가 건설한 보방식 요새가 베트콩에게 탈취당하면서 전투가 치열해졌고, 이 기간 동안 정부 기능은 사실상 마비되었다. 특히 후에 시내는 상황이 매우 안 좋아서, 원래 외국군대는 간섭군이란 지적을 피하기 위해 도시 방어는 남베트남군이 맡도록 되어 있던 원칙까지 어겨가면서 미 해병대도 투입되어 섬멸전을 벌여야 했다.
이때 포로들과 민간인을 포함한 수천 명이 처형당하고 강제 북송당했다. 처형당한 이들은 대부분 군경의 가족이나 정부와 연관된 간부, 혹은 그들의 가족들이었다.
그동안 한국군은 베트콩의 공격을 사전 예측했기 때문에 돌파당한 진지는 한 군데도 없었고, 오히려 이들의 공격을 철저하게 방어해냈다.
3. 케산 전투
구정 공세 기간 중 최대 격전.[12] 항목 참조.
4. 결과
4.1. 전술적 실패
본래 작전 내용은 베트콩이 남베트남에서 사건을 벌이면 동시에 북베트남도 군대를 동원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정작 베트콩이 먼저 나선 후에도 북베트남군의 행동은 늦어졌고,[13] 결국 대대적으로 준비한 작전이 실패로 돌아감으로 인해 남베트남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던 베트콩의 조직은 거의 괴멸되는 상황이 펼쳐졌다. 베트콩은 이런 공세에서 대대적인 물자와 인력을 투입하였는데 공세가 실패로 돌아갔으니 괴멸될 수 밖에 없었다.
전과 측면에서는 후에 시와 케산을 제외하고서는 대부분의 공격이 실패했고, 후에도 미군과 남베트남군의 대대적인 탈환작전 끝에 재탈환당하고, 케산 포위전은 미군의 대규모 공습과 공중보급 및 핵 협박으로 실패하는 등 실질적인 성과는 거의 전무하다고 할 수 있었다. 특히 치고 빠지기 식의 비대칭전 전술을 포기하고 야전에서 공세를 감행한 것은 미군의 장기인 대규모 화력투사 앞에 전력을 고스란히 노출시키는 결과를 낳았다.[14] 당시 간부진의 전멸 및 군수물자의 손실 등 남베트남 내 베트콩 조직의 피해는 심각해서, 나중에 공개된 북베트남군 내부 문서에 따르면 '''향후 수년 간 베트콩은 독립적인 작전 수행이 불가능할 것'''이라고 평가했을 정도였다. 실제로 이후 베트콩 조직 내 주도권은 남쪽 출신자가 아니라 북쪽에서 파견된 이들이 가지게 된다.
이 전투는 전술적으로 보았을 때 명백한 베트콩과 북베트남의 패배였다. 미군과 남베트남군은 전사자 5,100여 명[15] 을 포함해 도합 20,000명의 사상자를 낸 반면, 베트콩들은 병력의 절반 가량인 45,000명의 전사자를 냈고, 특히 전투 경험이 많은 간부급의 피해가 커 조직이 사실상 궤멸되었다. 반면 미군과 남베트남 주둔군에는 큰 피해도 주지 못했고 도시를 장악하는 데에도 실패했다.
4.2. 전략적 성공
그러나 '''정치적·전략적으로는 완승을 거둔 전투였다.''' 연휴 기간의 좋은 분위기에서 터진 갑작스러운 공격으로 베트콩이 베트남에서 손꼽히는 대도시인 고도(古都) 후에를 잠시 점령하고, 베트콩 특공대가 사이공의 미 대사관을 습격, 미 해병대의 경비병력을 사살하는 등 전력의 건재함을 과시해 터널 끝의 빛이 보인다던 미 정부의 믿음을 정면으로 깨부숴 버렸다. 또한 이러한 장면이 텔레비전으로 미국에 방송되어 '''미국 내의 반전 여론에 불을 지피게 된다.'''[16] 당시 미국 정부는 이제 전투가 거의 막바지로 가고 있다고 국민들을 안심시키고 있는 상황이었는데, 이 전투로 사이공의 미국 대사관이 공격당해 불에 타고 베트남 전 지역이 불바다가 되는 과정이 방송을 통해 미국 국민들에게 알려졌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한 일은 남베트남 대통령 관저, 소위 독립궁도 주 공격 대상에 포함되어 있었으나 남베트남군이 성공적으로 방어했다. 독립궁이 늘 '''쿠데타'''에 대비해 철통같이 방어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독립궁은 1975년 4월 30일 남베트남군이 항복하고 나서야 점령되었다.
미 대사관 습격이라는 특종에 밀려 성공적인 방어라는 성과는 미국 매스컴의 관심을 전혀 받지 못했고, 뒤이어 후에 재탈환 과정에서의 민간인 피해 및 문화재 파손, 도주한 북베트남/베트콩 색출과정에서의 불미스러운 사건이 대대적으로 보도되면서 미국 국내정치적으로 심각한 파장을 일으켜 '''미국이 베트남전에서 발을 빼게 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미국인들에게 지구 반대편에서 펼쳐지는 혼란스러운 전쟁은 그 끝을 알 수 없는 공포처럼 다가왔던 것이다. 미국인들은 정치인들이 공약한 베트남전의 승리에 대해 의문을 가지기 시작했고, 더 나아가서 베트남전이 과연 정당한가라는 의문마저 가지기 시작했다. 이는 반전 운동으로 이어졌고, 68운동이 전 세계로 뻗어나가는데 영향을 끼쳤다. 결국 미국인들은 선거에서 전쟁 지속을 주장하는 민주당에 등을 돌리고, 종결을 주장하는 공화당의 손을 들어주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베트콩은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고 사실상 와해되어 버리지만 북베트남은 승리한 경우'''라고 봐야 하는데, 이는 매우 중요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훗날 북베트남의 주도로 통일이 될 경우에 남베트남에서 강한 영향력과 군사력을 보유한 베트콩들은 북베트남 수뇌부의 입장에서 보면 화근의 씨앗이 될 가능성이 충분하였기 때문에 그대로 놔둘 수 없었다. 때문에 장래의 경쟁자가 될지도 모르는 베트콩의 세력 약화와 동시에 미국에게 타격을 입히기 위해 북베트남이 구정 공세를 진행했다는 것이 대부분의 추측이다. 이 추측에 따르면 앞서 북베트남의 지원이 오지 않았다는 이유가 설명이 된다. 이만한 대규모 군사작전을 실행하는데 날짜를 착각해서 지원을 하지 못했다는 건 사실 말이 안 되는 이야기다.
그리고 무모할 정도로 미군에게 정면공격을 시도한 베트콩들은 지휘부를 비롯한 전투병력 대부분이 사라져 버리지만 미국에게는 승리가 아닌 패전의 인식을 심어주었으며 북베트남 수뇌부는 훗날 통일이 되었을 때 방해가 될 수도 있는 강력한 정치집단을 제거하는데 성공했다. 마치 1944년 바르샤바 봉기의 전후 사정과 관련하여 소련군이 들었던 평가와 비슷하다.
이것이 와전되어서 베트남 전쟁이 끝난 후의 베트콩 지휘부를 베트남 정부가 숙청했다는 식의 프로파간다가 퍼진 적이 있는데 사실이 아니다. 구정 공세 이후 남베트남 지역의 게릴라전 지휘는 북베트남에서 파견한 인물들이 맡아서 계속 진행했고, 전쟁이 끝난 뒤에도 숙청되지 않고 각자 임무를 계속 수행했다. 다만 별도로 숙청은 안했지만 베트콩 출신들이 토사구팽당한 것은 대체로 맞다. 1975년 베트남 대통령궁 대문이 넘어가고 탱크가 진주해 들어가던 순간에서 북베트남 수뇌부의 최대 고민이 바로 베트콩의 잔여 세력이 남베트남의 폐허를 재빨리 차지하고, 그동안 도와준 북쪽 동포들 땡큐, 이제 남베트남 해방됐으니 여기서 헤어집시다~라고 독립 선포하는 것이었다.
물론 막나간다면 독립 따윈 씹어버리고 진압할 수도 있겠지만 그랬다간 같은 공산주의 국가들을 포함한 세계 각국을 크게 자극하여 국제사회의 인정을 얻기 힘들뿐더러, 지금까지 겪었던 전쟁과는 차원이 다른 수준의 문제[17] 를 맞이했을 갓이다.
4.3. 매스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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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전쟁의 가장 유명한 사진 중 하나. 사진이 유명하지만 동영상도 남아있다. 1968년 2월 1일, '사이공식 처형'이라는 이름으로 촬영되어 알려진 이 사진은 후에 사진기자 '''에디 애덤스'''에게 퓰리처상을 안겨다 주었다. 소녀의 절규와 함께 베트남 전쟁 관련으로 가장 유명한 사진 중 하나로 미국의 베트남 전쟁 지지 여론을 한 순간에 돌려 놓은 사진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 사진을 찍은 에디 애덤스는 참전 찬성파였고 베트남 전쟁의 적극적인 지지자였다.
여기서 총을 든 사람은 '''응우옌 응옥 루안'''(阮玉鸞, Nguyễn Ngọc Loan)이라는 이름의 사이공 경찰청장(공군 소장), 사살당한 남자는 베트콩 소대의 지휘자인 '''응우옌 반 렘'''(阮文歛, Nguyễn Văn Lém)으로 추정되는[18] 인물로 시가전 중에 체포됐다. 군복을 입은 것도 아니고 군사작전을 벌인 것도 아니기에, 제네바 협약에 따른 전쟁 포로의 대우를 기대할 수 없는 처지. 게다가 당시는 구정 공세의 긴박한 상황이 이어지고 있었다. #
또한 렘의 아내에 대한 인터뷰 영상에 따르면 렘이 있는 부대는 후퇴를 하고 싶었으나 병사들에게 포위당했으며 오직 강으로 후퇴할수 있었다. 렘은 부대원들의 퇴각을 지원 했으며 그 후 체포당했다. 라고 진술했다.#
그때 당시의 처형 장면 #잔인한 장면 주의
여담이지만 이 사진이 촬영되던 바로 그 현장에 동아일보의 김용택 사진 기자도 있었고 체포되어 연행되던 이 사람 사진을 찍기도 했다.
영국 군사학자 맥스 헤이스팅스는 당시 남베트남 군경의 기록에 따르면 렘은 36시간 전 남베트남군 중령의 가족을 몰살시킨 베트콩 특작부대 소속이라고 나와있다고 밝혔고, 애덤스도 이 사실을 믿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다만, 남베트남 군경의 기록이고 주장이기에 사실인지는 알 수가 없다. 사실여부를 확인하지 않고 즉결처형을 하였기 때문에 진실은 알 수 없을것이다.
일부에서는 위 내용 근거로 극도로 분노한 경찰의 대량학살범에 대한 부적절한 즉결처분 정도로 비판받는 데서 끝나야 할 사진이 '''부패한 남베트남 경찰의 잔인한 사형'''이란 내용으로 왜곡된 거 아니냐는 주장이 있었으며, 30년이 지나고 나서야 에디 애덤스가 직접 미국으로 망명한 응우옌 장군[19] 을 찾아가서 사과하기도 하였다.
응우옌 전 서장은 저 사진의 사건 얼마 후에 테러 당해서 다리를 다쳤고, 75년 북베트남 군에 의해 사이공이 함락되자 결국 미국으로 망명하였다. 미국에서 피자 가게를 하며 살아가다[20] 1998년 암으로 사망했고, 죽을 때까지 비난에 시달렸으며 자신의 가게에 사람들이 찾아와 욕을 하기도 했다.[21] 중간에는 미국 내의 베트남 출신의 전범자들을 찾아내는 과정에서 추방당할 뻔도 하였는데, 이때 에디가 변호를 자처해준 덕에 추방은 당하지 않았다.
애덤스는 이 사건을 두고 ''''사진은 절반의 진실만을 말한다.''''고 말했다.[22][23] 이 때 응우옌 청장은 '나는 내가 할 일을 한 거고, 당신은 당신이 할 일을 한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100% 무고한 게 아니고 전장에서의 범죄자 즉결처분은 비난받아도 할 말 없다는 점은 본인도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5. 대중매체에서
심슨 가족에서 미 육군 에피소드에 패러디가 나온다. 또한 영화 풀 메탈 재킷 후반부가 구정 공세 후를 무대로 하고 있고, 올리버 스톤 감독이 만든 영화 플래툰에서도 구정 공세 시기 베트남군의 대공세를 영화 후반에 다룬다.
콜 오브 듀티: 블랙 옵스에서 이를 배경으로 한 미션이 있다. 미션 5와 미션 6이 각각 케산 공방전과 후에 시가전을 배경으로 한다. 여기서 메이슨이 망명자 레즈노프를 만나게 되고, 드라고비치가 노바6로 서방세계에 대한 공격을 준비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된다.
라이징 스톰 2: 베트남에서는 구정공세를 배경으로 한 케산, 후에 시 같은 맵이 존재한다.
[1] 뗏(Tết)은 한자로 節(절)로서 원래 '설날'이란 뜻이 없지만, 현대 베트남에서 뗏(Tết)은 설날과 동일시 되었다. 현대 베트남어의 Tết은 설날이라는 뜻으로 고유명사화되어, 현재 신정(tết dương lịch, 節陽歷)과 설날(Ngày Tết, 날 + 설/Tết âm lịch,節陰歷)을 제외한 베트남의 다섯 국경일(4월 30일 해방기념일/통일기념일, 5월 1일 노동절, 국경절, 9월 2일 건국기념일)이나 기념일의 표기에는 절(節)이란 단어 대신 베트남어로 날을 뜻하는 ngày가 쓰인다. 예: 국경절-Ngày quốc khánh(날日+국경國慶), 노동절-Ngày Quốc tế Lao động(날日+국제노동國際勞動) 추석도 Tết Trung thu(뗃쭝투/節中秋)라 하여 뗏을 쓰기도 하나 오히려 Tết(뗃)을 떼고 흔히 Trung thu(쭝투)라고만 칭한다. 더불어 베트남의 추석은 국경일로 지정되지 않았다. 다시 말해, 현대 베트남어에서 Tết은, 설날(Tết Nguyên Đán,절원단/Tết âm lịch, 음력설)과 동일시 되었다.[2] 북베트남군이 케산을 공격했을때 주공이 케산이고 테트 공세는 연막이라 생각했다. 실제로는 케산이 연막이고 테트 공세가 주공이었다. 테트 공세 이후 교체되었다[3] 명목상으로는 최고지도자인데 실제 통치는 레주언이나 쯔엉찐이 했다. 그래서인지 영어 위키백과 테트 공세 문서에는 아예 지휘관 목록에 없다. 거기다 테트 공세 시기 호치민은 중국에 있었다. 한가지 확실한건 구정 공세를 감행하기 전 레주언을 비롯한 북베트남 공산당 고위층들이 최종적으로 호치민의 허가와 승인을 받았다.[4] 당시 북베트남을 실질적으로 통치한 인물. 지속적인 공격을 통해 남베트남을 붕괴시켜야한다고 주장했다.[5] 영화 풀 메탈 자켓에서 주인공의 상관이 "구정에 베트콩측의 공세가 있을 거라는 소문이 있다."는 주인공의 얘기를 듣자, "구정은 7월 4일과 같은 날이야 북남 할거없이 그날에는 폭죽이나 터뜨린다고"라고 하며 이를 귀담아 듣지 않는 장면이 나온다. 즉 미국이 참전한 1964년부터 1967년까지는 정말 그랬기에,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이 기습공격을 감행할 것이라 예상치 못했고, 그런 소문도 일종의 소문으로만 받아들였다.[6] 알다시피 미 공군은 북베트남군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다.[7] 휴전기간 중 수송하는 무기와 탄약이 6개월 분을 넘었다.[8] 베트남 응우옌 왕조의 수도였던 도시이다. 가장 최근의 베트남 왕조이지만 규모나 경제력도 그렇고, 수도였던 기간도 1804년부터 1955년까지 150년 정도였어서 하노이보다 비중이 떨어지는 곳이다. 후에를 수도로 삼은 응우옌 왕조가 본래 다이비엣의 반독립적 지방 정권이었기도 했고. 한국으로 치면 남한은 수원시, 북한은 개성특별시 정도에 비유할 수 있다.[9] 강 남쪽의 MACV본부와 강 북쪽의 남베트남 1사단 본부만 적군에 넘어가지 않고 버텼다.[10] 잔인한 장면이 있으므로 재생시 주의. 총맞고 쓰러진 사람을 발로 차서 밀어내는 장면도 나온다. 도중 한국군 헌병도 잠시 볼 수 있다.[11] 사실 이 사람은 대사관 직원이 아니라 CIA 요원이다. 전시, 분쟁지역에서 활동하는 CIA는 보통 현지 미 대사관에 본부를 차리는 경우가 많은데, 왜냐하면 미국측 치외법권이기도 하고 현지에서 제일 보안이 확실한 곳이기 때문이다.[12] 다만 전투 시작시점은 구정 공세보다 이른 1월 21일이다.[13] 결국 북베트남군이 남베트남-북베트남 국경선인 DMZ 인근에 있는 케산 지역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했지만 미국의 압도적인 화력에 밀려 베트콩들에 대한 지원이 막혀버리고 만다.[14] 미군은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군의 야습을 수없이 받아치면서 정립된 정교한 방어 교리를 가지고 있었다. 화력이나 훈련 면에서 정규군이며 명색이 강대국의 일원인 일본군의 수준과는 비교할 수 없이 뒤떨어진 베트콩의 정면공세는 당연히 자살행위에 불과했다.[15] 미군 1,100명. 남베트남군 4,000명. 이는 구정 공세 초반인 2주동안 발생한 전사자다. 1달 동안 미군은 약 2,500명이 전사하고 공산측(대다수는 베트콩)은 37,000명 이상 전사했다.[16] 이 때문에 미국은 걸프 전쟁중 자국내 언론인들을 철저히 출입을 금지하였다.[17] '민족해방'이라는 북베트남의 전쟁수행 명분을 통째로 날리는 짓이다.[18] 확실한 신원은 밝혀지지 않았다.[19] 남베트남군 예비역 소장이기도 해서 애덤스는 응우옌 장군이라고 했다.[20] 은퇴를 이유로 가게를 닫았다.[21] 에디 에덤스는 가게 화장실에 "우린 네가 누군지 안다. 개새끼야(We know who you are, fucker)."라는 낙서를 발견했다고 얘기하였다.[22] http://www.time.com/time/magazine/article/0,9171,988783,00.html "나는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쏘는 사진으로 1969년 퓰리처상을 받았다. 그 사진에는 죽은 사람이 두 명 찍혔다. 하나는 총알을 맞은 사람이고, 또 다른 하나는 응우옌 장군이다. 장군은 베트콩을 죽였고, 나는 장군을 죽였다. 진실로 사진은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무기이다. 사람들은 사진에 찍힌 걸 그대로 믿지만, 특별히 조작을 하지 않더라도 사진은 거짓말을 한다. 사진은 절반의 진실만을 말한다. 사진이 말하지 않은 진실은, "만약 당신이 그 더운 날 그 시간 그 장소에 있는 장군이었고, 미군 병사를 하나나 둘, 셋 정도 쏴넘긴 '나쁜 놈'을 잡았다면 어떻게 했을 것인가?" 하는 것이다."[23] 여기서 절반의 진실이라고 말한 건 응우옌이 100% 잘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즉결처분은 어떤 상황이건 정당화될 수는 없고, 그 부분에서 비난받는 건 그가 감수해야 할 책임이다. 하지만 사진이 거기까지 이르게 된 사정을 전혀 반영하지 못하고 그냥 민간인을 즉결처분한 학살자로 내보낸 점에서 진실을 왜곡했다고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