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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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양'''
汪洋

'''이름'''
한문: 汪洋 (병음: Wāng Yáng)
한국 한자음: 왕양
'''국적'''
[image] 중국
'''출생'''
1955년 3월 12일 (69세)
중화인민공화국 안후이성 추저우시
'''학력'''
중국과학기술대학
'''종교'''
무종교 (무신론)
'''정당'''

'''현직'''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주석
'''주요 이력'''
제19기 중앙정치국 상무위원
제17기~제18기 중앙정치국 위원
제16기 정치국 후보위원
광둥 성 당위원회 서기
충칭 시 당위원회 서기
1. 개요
2. 생애
3. 행보
4. 평가
5. 영상
6. 관련 문서


1. 개요


왕양은 중국의 정치인이며 중국공산당 최고 핵심 기구인 정치국 상무위원 7인 중 한명이다.

2. 생애


중화인민공화국 안후이성 숙주에서 태어났으며, 노동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1972년부터 노동자로서의 경력을 시작하게 되며, 1975년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하게 되었다. 그리고 1979년 중앙당학교 입학 후 중국공산당 안휘성 위원회에서 경력을 쌓아가게 되며 2007년부터 중앙정치국 위원 및 광둥성위원회 서기직을 맡으며 중국공산당 내 주요 권력 서열에 오르게 되었다. 그리고 광둥성 당서기 시절 시장 자본주의적 정책을 펼쳤는데(광둥 모델) 이때 마오주의적 정책(충칭 모델)을 펼친 보시라이와 경쟁했다. 하지만 보시라이는 무기징역을 선고 받고 형을 살다 지금 가석방 돼서 나왔고 왕양은 중국 최고의 자리인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이 된걸 보니 아이러니. 여담의로 보시라이의 전임 충칭시 당서기가 왕양이다. 그리고 현재 중국공산당 중앙정치국 상무위원회 상무위원에 있음으로서 중국공산당 내 높은 권력서열을 보여주고 있다.

3. 행보


주로 민생경제와 대외무역 등 경제라는 분야에 전문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인물이다. 실제로 박근혜 정부 시절 당시 경제부총리였던 최경환과 만나기도 하였고, 트럼프 정부의 미국 경제인대표단과의 만남에서 대표로 참가하기도 하였다. 중국공산당에서 그의 독보적인 행동과 사회주의적 경제관에 얽매이지 않는 모습이 시진핑의 신뢰를 이끌어낸다고 언론에서 보도된 적이 있다.

4. 평가


18기 중국공산당 중앙정치국 위원에 오르게 되며 리커창이 총리로 있는 국무원의 부총리직을 수행하였다. 이후 차기 상무위원회의 유력한 후보 중의 한명이였으며 예상과 비슷하게 19차 당 대회에서 상무위원회 입성을 하게 되며,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정협) 주석직을 맡게 되었다. 광둥성 서기직 시절에는 중국 내에선 그나마 정부의 개입이 적고 친시장적인 광둥식 모델을 내세웠다. 또한 우칸촌 사태 당시 주민들의 의사로 뽑은 촌장을 인정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행보를 통해 중국공산당 내부에서 비교적으로 자유주의적이며 개혁적임을 추측해 볼 수 있다. 정치적 계파로는 공청단에 속한다.

5. 영상




6. 관련 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