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커창

 



'''리커창 총리 관련 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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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대 중화인민공화국 국무원 총리'''
'''리커창'''
李克強

'''이름'''
간체자: 李克強
번체자: 李克強 (병음: Lǐ Kèqiáng)
한국 한자음: 이극강
'''출생'''
1955년 7월 1일 (68세)
중화인민공화국 [image] 안후이성 허페이시
'''국적'''
중화인민공화국 [image]
'''학력'''
베이징대학 법학 학사, 경제학 박사
'''정당'''

'''직업'''
정치가
'''현직'''
중화인민공화국 7대 국무원 총리
'''주요 이력'''
제17, 18대 중국공산당 정치국 상무위원
랴오닝 성 당 위원회 서기
허난 성 당 위원회 서기
허난 성 성장
중국 공산주의 청년단 중앙서기처 제1서기
1. 개요
2. 경력
3. 시진핑과의 갈등설
4.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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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시진핑의 헤스'''[1]
중국정치인. 제7대 국무원 총리.
2012년 제18차 중국 공산당 당 대회에서 원자바오의 뒤를 이어 중국 국무원 총리로 지명된 사람이다. 1955년 7월 1일생으로 안후이 성 출생. 태자당인 시진핑과 달리 후진타오가 있던 공산주의 청년단(공청단) 출신이며, 북경대중국 공산당의 정치적 배경으로 두는 사람이다.
원래 후진타오의 후임으로 중국 국가 주석에 이 사람이 될 수 있었지만, 장쩌민상하이방의 격렬한 반대에 밀려 결국 태자당의 시진핑이 국가 주석이 되고 이 사람은 총리가 되었다는 설이 있다. 하지만 공산당 서열 2위로 나름대로의 권력을 갖고 있다고 한다.
2013년 3월 15일 중국 양회(两会)[2]에서 정식으로 국무원 총리가 되었다.

2. 경력


안후이성 출신이지만, 관리인 아버지를 따라서 허베이성에서 자랐다. 1974년 문화대혁명 기간 중에 고등학교를 졸업했는데, 당시 대부분의 고교 졸업생들은 지식 분자로 간주되어 농촌에 배치되어 삽질을 하게 되었다. 리커창도 마찬가지로 시골에서 몇년간 삽질을 했다. 이후 마오쩌둥이 사망하고 문화 대혁명이 끝나자 중앙으로 올라와 베이징대학 법학과에 입학했다.
이공계 출신이 주름잡던 다른 총리들과는 달리[3] 문돌이다. 베이징 대학 학생회장을 역임한 공청단 파벌. 이어 관리 생활을 시작하고, 관리 생활 중에도 학업을 병행하여 1995년 경제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기도 했다. 이 논문은 중국에서 가장 유명한 경제 관련 상인 쑨예팡 상을 받았다.
1999년 허난 성 성장(대한민국도지사)에 지명되었는데, 당시 중화인민공화국에서 44세로 최연소 성장을 역임하였다고 한다. 중국의 동부 지역[4] 급격한 경제 성장 과정에서 중부 내륙 지방인 허난 성의 경제를 이끈 공을 인정받았다. 단, 허난 성의 에이즈 창궐 관련 문제는 그의 치적에 있어서 옥에 티가 되었다. 이후 2004년 동북 지역의 랴오닝성 당서기를 맡았다. 랴오닝성은 중국판 러스트 벨트로 개혁개방 전까지는 공업지대로 유명했으나, 2000년대 들어 급격히 쇠락한 지역인데, 이 지역에서 국유기업의 구조조정을 밀어부쳤고 그 성과를 인정받아 중앙정계에 발탁되어 차세대로 주목받게 되었다.
그리하여 부총리를 맡다가 2013년 최종적으로 국무원 총리 자리에 올랐다.
국가 주석 시진핑의 권력 확대로, 전임 총리 주룽지원자바오에 비해서는 존재감이 미약하다. 전임 총리였던 주룽지는 마오쩌둥 시절 두번이나 숙청되었을 정도로 자신의 주장이나 소신이 뚜렷한 인물이었고, 원자바오는 국가주석 후진타오가 오히려 리커창과 비슷한 스타일이었기 때문에 존재감이 있었지만 리커창은 전형적으로 윗사람에게 모나지 않게 출세하는 관료 스타일이기 때문에 시진핑의 고집에 눌려 빛을 발하지 못하는 듯하다. 그래도 신문연파를 보면 두세번째 소식으로는 꼭 나오기 때문에 존재감이 아주 없는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존재감이 떨어지는것은 어쩔수 없다.
문재인 대통령이 한국 기업을 신경써달라 하였는데 리커창이 행정부 내의 수장이기는 하지만, 대외정책의 영역인 THAAD 대응책은 본인의 영역이 아니라 국가주석인 시진핑의 담당이라 딱히 확답을 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어서 확답을 주지는 못했다.
대외적으로는 일부 정상회의에서 시진핑 주석을 대신하여 타국 정상인사와 자리를 갖는 인물이다.[5] 행정부 내각(국무원) 수장으로서 인도의 총리처럼 타국 대통령과 어깨를 나란히 했을 적에는 문제가 없었을지 몰라도, 시진핑 주석이 중국의 모든 권력을 장악한 현재[6]는 외교 격이 맞지 않는다는 지적이 나온다.

3. 시진핑과의 갈등설


2020년 6월, 시진핑과 리커창간의 갈등설이 불거지고있다. 제13기 전국인민대표대회 제3차 전체회의 폐막 후 가진 내외신 기자회견에서 중국인 6억명의 월수입이 17만원에 불과하며 집세를 내기조차 힘들다고 토로한 것이다. 이게 특별한 상황인게 중국은 지금까지 중국 경제 성장성만 전면에 내세웠는데 중국인의 거의 절반가량이 빈곤층임을 인정하는 대목이다. 또한 코로나19로 이 상황이 더 심각해진것으로 보인다. 이후 리커창 총리는 노점상 경제를 언급했는데 중국 청두시[7]에서 노점상으로 10만명의 일자리를 해결했다고 언급했다. 임시로 노점상을 합법화해 영업 시간과 지점, 영업 방식을 지정해 단기간으로 빈민층에게 일자리를 줄 수 있는방법으로 노점상 경제를 제시한것이다.[8] 이후 중국 여러 도시에서 노점상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하지만 갑자기 분위기가 바뀌었는데 바로 베이징시 도시관리국에서 노점상의 불법 행위에 대해 철저하게 단속하겠다고 밝힌 것이다. 여기에서 시진핑과 리커창의 갈등설이 불거지기 시작했다.
리커창 총리는 내외신 기자회견에서 빈곤층이 6억명임을 토로했는데 시진핑은 샤오캉 사회[9] 건설을 전면에 내세우고 지금까지 선전하고 있었다. 시진핑은 오래전부터 반부패와 빈곤탈피로 2020년에 샤오캉 사회를 건설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리커창 총리가 공개적으로 국민 중에서 6억명이 빈곤층임을 밝혔기때문에 사실상 샤오캉 사회 건설은 실패라고 볼수있다. 이 6억명 빈곤층 발언은 중국 내 언론들도 보도했는데 이후에는 갑자기 이와 관련된 기사가 지워지거나 더이상 올라오지 않는 것을 보면 언론을 통제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또한 리커창 총리가 언급한 노점상 경제에 대해 비판적인 기사들이 나오기 시작했으며 이는 리커창 총리의 6억명 빈곤층 발언이 시진핑의 심기를 건드렸다고보여지며 중국 공산당 내 1인자와 2인자 사이의 갈등설이 불거지고있다.
또한 홍콩 빈과일보에 따르면 시진핑은 당이 통제하는 경제를, 리커창은 자유경제를 강조해왔다고한다. 즉 경제 측면에서 전혀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는 상황에서 갈등이 축적됐다는 것이다.
수해 피해 방문도 보도하지 않는 것도 이러한 설이 나오고 있다는 점이다.#

4. 기타


2016년 청두에 민생 탐방을 나가서 한 시장의 정육집에서 고기를 사려고 했는데 총리가 방문한다는 이야기에 공안들이 오버하여 가게의 식칼을 사전에 모조리 압수하는 바람에 정육점 주인이 고기를 자를 수 없어서 못샀다고 한다. 다음날 다른 시장을 방문했을 때는 높으신 분이 온다는 소식에 과일에 허위 가격표를 붙인 것이 문제가 되었다고 한다. 당연히 중국 언론에서는 보도되지 않았고 현장에서 광경을 지켜본 목격자들이 웨이보발로 푼 것이다.# 높으신 분의 민생 탐방이 오히려 민폐가 될 수 있다는 사례로 유명해졌다.
리커창의 아내 청훙(程虹, 1957~)은 베이징 수도 경무대학 외국어과 교수를 역임했다.
2020년 1월에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이 최초로 발생한 곳인 우한시를 방문하였다.
중국 밖에서 살아본 적은 없지만, 영어를 꽤 잘하는 듯, 비공식 자리에서는 외국인들과 영어로 대화한다고 한다.# 베이징대학 법학부 출신의 수재라서 머리가 비상하니 놀라울 일은 아니다.

[1] 나치당 내의 서열 2위인 지도자 대리였다. 그러나 나치당의 지도자 대리는 허울뿐인 자리였고 그것도 히틀러가 과거에 헤스의 공로로 지도자 대리라는 그럴듯한 명칭을 준 것이다. 리커창 역시 시진핑 종신집권 선언 전까지는 그나마 지분이 있었지만 헤스가 그랬듯 리커창도 권력의 핵심에서 전에 비해 밀려나버렸다. 그리고 처음에는 시진핑를 도왔지만 시진핑의 경제정책에는 회의적인 반응을 내놓는 것도 헤스가 후일 히틀러의 나치즘에 회의감을 느낀 양상과 비슷하다.[2] 전국 인민 대표 대회 + 중국 인민 정치 협상 회의. 명목상 중국의 국가 최고 의결 기관이다.[3] 초대 총리 저우언라이와 상업 학교을 다닌 화궈펑, 고졸인 자오쯔양을 제외하면 중국 총리는 모두 이공계 기술관료 출신이다. 문화대혁명 때문에 인문사회과학 분야 인재풀 전부가 리셋되었기 때문이다.[4] 베이징 시, 상하이, 선전 등.[5] 중국은 G20이나 APEC을 비롯한 전세계적 차원 행사에는 국가주석이 참석하지만, 그보다 급이 낮은 지역 차원의 회담(예: 한중일 정상회담, 아세안+3, 동아시아 정상회의(EAS))에는 국무원 총리가 참석한다.[6] 사실상 국가원수도 시진핑, 정부수반도 시진핑이라고 봐도 무방.[7] 중국 서부 지역의 도시라고 언급했지만 청두시가 유력하다[8] 이전에는 단속 대상이었다.[9] 小康 - 모든 국민이 편안하고 풍족한 생활을 누리는 사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