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장문

 


1. 개요
2. 화양국지의 기록
3. 진서의 기록


1. 개요


王長文
생몰년도 미상[1]
삼국시대 촉나라, 서진의 인물. 자는 덕준(德俊) 또는 덕예(德睿).
화양국지와 진서에 열전이 기록되었지만 두 열전 간에 기록이 상이한 점이 보인다.
광한 처 사람으로 타고난 자질이 있으면서 똑똑하고 재치가 있으며, 고매하면서 아는 것이 많았고 오경을 익혀 많은 책을 모아 통달했다.

2. 화양국지의 기록


약관에 주에서 세 번 불러 서좌에 임명되었지만 병을 핑계로 집으로 돌아갔으며, 통일 후에는 군의 공조에 임명되고 효렴에 뽑혔지만 취임하지 않고 거짓으로 어리석은 척 했다. 평복을 입어 시중에서 멧돼지를 팔아 생계를 이어나가면서 사람들이 왕장문에게 말해도 듣지 못하는 척 했다.
항상 소를 타고 돌아다녔고 군수가 오자 문에서 경의를 표하고 마을에 가자 도망가서 끝내 돌아오지 않았으며, 익주자사 호비의 벽소로 종사제주를 지내 힘들이지 않고 백성을 다스렸다. 호비가 수재로 천거해 나가게 되자 미친 척 하면서 짐을 메고 달려나갔으며, 호비가 여러 차례 사람을 보내 돌아와서 가르침을 줄 것을 청했지만 끝내 가지 않았고, 집의 의붓어머니에게 돌아가서 홀로 공부했다.
무명자 12편을 저술하고 논어를 모범으로 삼았으며, 통경 5편을 저술하고 주역을 모방해 통현경 4편을 저술했다. 춘추삼전이 전해내려온 것과 같지 않아 매번 의논해 근거를 가지고 경전에서 가려뽑아 춘추삼전 12편을 저술했으며, 번거로운 부분을 제외하고 중요한 부분만 뽑아 약예기 10편을 저술해 모두 이 시기에 유행했다.
함녕 연간에 령촉군태수가 되었으며, 효자인 나우의 비석을 세워 그를 따르도록 표창해야 한다고 상표를 올렸다. 재부, 삼사, 무군대장군 왕준 등이 여러 차례 불렀지만 가지 않았으며, 왕준이 죽자 제사를 지냈다. 원강 초에는 강원령을 지냈고 현에 도적들이 곡식을 빼앗자 그들을 위로했으며, 당시 섣달 그믐을 맞이해 모두 집으로 돌아가고 먼저 감옥에 갇힌 자는 떠나게 했다.
사면을 내리자 은혜를 느끼는 것을 모르는 자가 없었으며, 사람을 너그럽게 해 악한 것을 그치게 하자 왕군을 차마 져버릴 수 없다고 했다. 장례로 인해 관직을 떠났고 정치에 있어서 백성을 생각했다.
대장군인 양왕 사마융이 부르자 종사중서랑이 되었으며, 왕, 공경들이 모두 그의 이름을 원해 모두 함께 사귀었다. 가씨가 주살되자 사마융을 따른 공으로 관내후에 봉해졌으며, 중서랑이 되었고 민회태자가 허창에서 죽자 박사, 중서가 제사인 우부(虞祔)를 하는 것에 대해 논의하자 해야 한다고 주장해 이를 시행했다.
낙양령에 임명되었지만 사양했고 익주에 난이 일어난 것을 듣자 통경으로 점을 치니 늙은 누에가 마른 뽕나무에 있는 괘를 얻었으며, 뽕나무에 잎이 없어 누에가 죽을 것이니 촉 사람들은 다 없어질 것이라고 탄식했다. 촉군태수에 임명되었다가 갑작스럽게 병을 앓아 64세에 사망했다.

3. 진서의 기록


성격이 방탕하고 제멋대로였고 자사가 별가로 불렀지만 평복을 입은 채로 몰래 나가서 시장에서 웅크린 채로 호병을 물었으며, 자사가 굴복하지 않으려는 것을 알고 후한 예물을 보냈다.
왕장문은 두문불출해 저술에 몰두해 주역을 모방한 통현경 4권을 저술했는데, 한나라 때 양웅이 지은 태현경과 견주었다. 태강 연간에 사천 지방에 자연재해로 기근이 들자 집안이 가난했으므로 빚이 많았는데, 이런 이유로 갚지 못해 군에서는 체포해 주로 보내 처벌받게 하려고 했다.
자사 서간이 왕장문의 사람됨을 알고 빚을 갚으라는 요구를 하지 않았는데, 왕장문은 서간에게 감사하는 말 한마디 하지 않고 갔다. 성도왕 사마영이 광원령으로 추천했고 양왕 사마융이 승상이 되자 종사중랑이 되었다.
낙양에서 나가고 휘장과 하얀 깃발, 작은 병풍을 수레에 실고 갔는데, 당시에는 이상하다고 했는데 후에 낙양이 무너졌다.

[1] 다만 촉에 난이 일어나고 촉인들이 다 죽을 거라고 한탄한 후 촉군태수가 되어 죽었다는데 이걸 조흠, 이특의 난으로 보면 이 말을 한 때는 300~303년이 될 것이고 이로부터 얼마 안되어 64세로 죽었다고 한다면 대략 230년대 후반~240년대 생으로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