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진(명나라)

 


'''王振'''
? ~ 1449년
1. 개요
2. 행적


1. 개요


명나라환관.

2. 행적


울주 사람으로 글을 읽어 여러 번 과거 시험을 봤지만 매번 낙방해 현청의 교관으로 있다가 죄를 지어 귀양살이를 했는데, 황궁에서 환관을 모집하자 스스로 거세해 궁궐을 들어가 환관이 되었고 환관 중에는 글을 읽을 줄 아는 자가 없어서 글을 좀 아는 왕진은 선생이라 불렸다.
선덕제의 마음을 잘 헤아려 총애를 받았고 선덕제의 명으로 황태자 주기진에게 글을 가르치게 했지만 왕진은 그를 모시면서 국랑이 되어 글을 가르치지 않고 그의 비위를 맞춰주기만 했으며, 1435년에 정통제가 즉위하자 그의 스승이었던 왕진의 지위가 높아져 사례감태감이 되었다.
정통제는 놀기만을 좋아해 왕진이 말하는 대로 조정 내의 정치를 했으며, 자신의 말을 듣지 않는 대신에 대해 구실을 만들어 몰아세웠다. 유구가 상주문을 통해 자신을 화나게 하자 감옥에 가뒀다가 죽게 만들거나 이택이 자신에게 무릎을 꿇지 않자 철령위로 귀양보내게 했으며, 석경이 자신의 집의 환관을 욕했다고 해서 그를 감옥에 가두게 했다.
왕우에게 왜 수염이 없냐고 하자 왕우가 어른께서 수염이 없는데 소인은 어찌 수염이 나겠냐고 아첨했으며, 그에게 아첨하는 대신들은 그를 옹부(翁父)라 불렀다. 1449년에 오이라트의 에센이 명나라와 무역을 하면서 2천 명에게 말을 바치게 하면서 더 많은 보상을 받기 위해 3천 명이라고 거짓 보고를 했는데, 왕진은 조정을 기만했으니 말 가격의 5분의 2만 주고 남아도는 자에게는 밥을 주지 말라고 했다.
7월에 에센이 산시성을 공격하자 정통제에게 친정할 것을 권유해 50만 대군을 이끌고 출정했는데, 회래로부터 선부에 이르기까지 비로 인해 길이 좋지 않아 사람, 말이 지치고 양초가 떨어진데다가 병사들이 굶어서 죽는 자들이 많았다. 이에 대신들이 함부로 전진하지 말 것을 이야기했지만 왕진은 화를 내 그를 붙잡아 조리를 돌렸는데, 에센이 매복했다가 정원이 이끄는 부대, 증원부대인 주영, 주면 등을 격파하면서 대신들의 건의로 철수하게 되었다.
자형관을 돌아 북경으로 철수하자고 했지만 환관인 왕진은 자신의 고향을 군대가 통과할 경우 입을 피해를 우려해서 철수길을 우회시키는 짓을 했는데, 결국 토목보에서 에센에게 포위되어 에센이 이끄는 군사들에게 크게 패하면서 토목의 변이 일어났고 왕진은 그에게 분노한 근위대 장군 번충에게 철퇴로 맞아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