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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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명나라 제5대 황제. 묘호는 선종, 시호는 헌천숭도영명신성흠문소무관인순효장황제(憲天崇道英明神聖欽文昭武寬仁純孝章皇帝). 휘는 첨기(瞻基). 홍희제의 장남. 연호는 선덕(宣德).
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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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나라 황제들 중에 명군 축에 들어가는 인물로 어린 시절부터 총명하고 과감했으며 무예에도 소질이 있어서 할아버지 영락제의 총애를 받았다. 특히 잦은 원정을 벌였던 영락제가 어린 선덕제를 원정에 자주 대동할 정도였다고. 그에 비해 아버지 홍희제는 문(文)에 치우쳤던 스타일이라 영락제는 홍희제보다 손자 선덕제를 더 후계자로써 염두에 두고 있었다 한다. 선덕제가 황태손으로 책봉되었기에 황태자였던 홍희제의 제위가 보장된 것으로 보일 정도.
2.1. 재위
1424년, 영락제가 죽고 홍희제가 즉위했으나 이듬해 바로 죽는 바람에 27세의 나이로 명나라 5대 황제에 올랐다. 그런데 선덕제가 즉위한 이듬해 숙부였던 한왕(漢王) 주고후(朱高煦)[4] 가 반란을 일으켰다.[5] 자칫하면 건문제 시즌2를 맞을 뻔했으나 선덕제는 친히 군대를 이끌고 가서 이 숙부의 반란을 진압하고 그를 사로잡은후 자금성 안에 소요성이라는 건물을 짓고 유폐시켰다. 그래도 반역을 일으킨 자를 살려두었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관용이다. 이후 선덕제는 숙부님이 어찌 계신가 궁금하여 소요성에 행차하였는데,[6] 이 숙부가 신하들과 근위병들 앞에서 갑자기 '''황제를 발로 차 넘어뜨리는 일'''이 일어났다. 이에 크게 노한 선덕제는 근위병들에게 일러 개념 상실한 숙부를 붙잡아서 구리 항아리에 가두었고, 인간흉기 급으로 힘이 장사였던 숙부가 이 항아리의 뚜껑을 밀어젖히자 더욱 화가 치밀어 다시 집어넣고 항아리를 장작 더미에 달궈 통구이로 만들어버렸다. 그와 동시에 주고후의 아들 열 명도 모두 죽였다.[7]
이때 죽은 한왕 주고후의 아들은 다음과 같다.
폐세자(廢世子) 첨기(瞻圻)[8]
세자 첨탄(瞻坦)
제양왕(濟陽王) 첨자(瞻垐)
임치왕(臨淄王) 첨역(瞻域)
치천왕(淄川王) 첨역(瞻墿)
창악왕(昌樂王) 첨성(瞻垶)
제동왕(齊東王) 첨평(瞻坪)
임성왕(任城王) 첨도(瞻壔)
해풍왕(海豐王) 첨장(瞻㙊)[9]
신태왕(新泰王) 첨방(瞻垹)
이들 중에 결혼하여 자손을 남긴 자들도 있지만, 아들은 두지 않았기에 그들의 자손은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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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덕제의 그림)
재위 초반에 저런 막장 드라마틱한 사건이 있었으나, 역시 선덕제는 사람 보는 눈이 있었다. 선덕제는 당시에 '3양'이라 불렸던 양사기, 양영, 양부를 필두로 한 명신들을 중용하여 어진 정치를 펼쳐나갔다. 중국 황제치고는 대단히 검소하여 궁을 사치스럽게 꾸미지 않았고 지나친 진상 역시 금지했다. 외정 면에서는 올량합 부족[10][11] 의 침공을 물리쳤고, 대외 원정으로 명나라의 국력을 과시한 영락제와는 달리 굳이 전쟁을 일으키지 않고 내치에 올인하였기에[12] 전쟁터에 끌려나가 희생되는 백성들도 적었다. 이런 선정으로 전임 홍희제의 묘호인 '인종'과 선덕제의 묘호인 '선종'을 따서 이 시대를 '인선의 치(仁宣之治)'라 부르며 명나라 최고의 전성기로 평가하고 있다.
또한 개인적으로는 예술 감각이 뛰어나 글씨와 그림에 두루 능했는데, 특히 그림은 전문 화가의 작품 못지 않게 생동감이 넘치는 수작(秀作)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북송 휘종과 쌍벽을 이룬다.[13][14] 그런 만큼 명나라의 문화 발전에도 기여했다.
그러나 환관을 교육시키는 내서당을 설립해 권한을 강화했고 이는 훗날 명나라에서 환관들이 나라를 좀먹게 되는 한 원인으로 작용하게 된다. 또 사냥과 더불어 귀뚜라미 싸움을 좋아하는 희한한 취미가 있어서 싸움 잘하는 귀뚜라미를 찾으라고 내시들을 전국 각지로 보내고 이들에게 특혜를 부여한 탓에 각지에서 횡포가 심했다.
어쨌든 나라를 잘 이끌어 나갔으나, 1435년 재위 약 10년 만에 향년 35세로 아직 창창한 나이일 때 죽었다. 그가 죽은 후 명나라는 어린 정통제가 즉위하고 토목의 변을 겪게 되면서 파란만장한 명나라 황실의 역사가 시작된다.
3. 조선과의 관계
명군이지만 제후국인 조선에 본의 아니게 민폐를 끼치기도 하였는데, 사냥 마니아였던 그는 조선의 토종 매인 해동청을 줄기차게 요구하여 선덕제 치세에 조선은 명나라에 조공 셔틀하기 바빴다. 또 선덕제는 조선의 두부를 유달리 좋아했다고 한다. 조선 사신이 데려온 두부장인이 만든 두부를 맛본 뒤 이에 감탄하여 사신에게 벼슬을 내렸고, 몇 년 뒤 조선에 사신을 보내어 두부를 만들 사람을 보내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여담으로 이때 조선 국왕은 세종대왕. 세종도 불평을 하긴 했지만, 현실적으로 어쩔 도리가 없었다. 자세한 건 항목 참조. 선덕제 사후인 세종 중반에는 이런 불공평한 조공 행태가 많이 개선되었다.[15]
또한 선덕제는 조선 여자를 후비로 들였는데, 이 때 후비로 들어간 공신부인 한씨는[16]한확의 누이 동생으로, 인수대비의 고모가 되며, 할아버지 영락제의 후궁 강혜장숙여비 한씨의 여동생이기도 하다. 즉, 할아버지에게 후궁으로는 손아래 동서인 셈이다. 언니가 영락제의 죽음과 함께 24살에 순장당했던 걸 아는 한씨는 누이들을 팔아 출세하려느냐면서 오빠인 한확을 원망하며 명나라로 갔다는 야사가 전해지고 있다. 그래도 언니와 달리 오래 살아, 토목의 변으로 폐태자가 됐던 성화제를 잘 보살펴준 공으로# 그녀를 잘 모셨다 전해진다. 명나라에서 수출을 금했던 궁각(弓角) 무역을 허락받는데에 한씨의 도움이 있다는 실록의 기사가 있다. #
4. 매체
이 황제도 할아버지 영락제처럼 무협지에 자주 등장하고, 즉위 초에 반란을 일으켰던 한왕 주고후 역시 무협지에 등장하는 일이 잦다.
5. 둘러보기
[1] 황태손비 출신인데, 딸만 낳고 아들을 못 낳았다는 이유로 궁에서 쫓겨났다.[2] 정통제의 어머니이다. 손태후라고 불린다. 이 여자도 후궁출신인데 가장 선덕제에게 총애를 많이 받았다. 나중에는 황후가 되었다.[3] 주기옥의 어머니이다. 오태후라고 불린다. 이여인도 후궁 출신이었는데, 나중에는 황태후가 되었지만 아들 주기옥이 폐위 당하고 나서 선묘현비로 격하되었다. 나중에 남명 홍광제 때 다시 황태후로 추존하였다.[4] 영락제의 차남[5] 주고후는 한 때 병약한 홍희제 대신 새로운 황태자가 될 뻔한 인물이나, 성격이 너무 난폭해서 무산되었다고 한다.[6] 특히 신하들이 소요성으로 가는것을 반대했는데도 무시하고 갔다.[7] 원래는 아들이 11명인데 장남 의장세자(懿莊世子) 첨학(瞻壑)이 요절해서 3남 주첨탄(朱瞻坦)이 한왕 세자로 책립되었다.[8] 홍희 원년에 폐세자가 되어서 종실의 본관인 봉양(鳳陽)의 능묘를 지키게 되었다.[9] 土+長이며 뜻은 마당, 묏자리로 가는 길에 제사를 하다, 신을 모시는 곳이다. 아래아 한글에서는 쓰여지지만 여기서는 안 쓰인다.[10] 정확한 발음은 우량카이라고 하는데, 이 사람들이 바로 오랑캐라는 말의 어원이다.[11] 올량합의 동태가 심상치않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석문에 나가있던 선덕제는 몸소 총으로 무장한 기병 3천을 통솔하여 올량합의 기병 1만을 격파하였다.[12] 일례로 독립운동을 일으킨 베트남의 독립과 외왕내제를 묵인하며 조공관계를 형성하였다. 특히 영락제의 잦은 대외원정으로 명나라는 국가재정이 나빠진 상황이었다.[13] 선덕제의 글씨와 그림은 지금도 남아 있는데, 거기 보면 선덕제가 '모월 모일 '''심심해서''' 한번 끄적여봄.' 아니면 '모월 모일 '''심심해서''' 휘갈겨봄' 이런 식으로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적어 놓곤 했다. 즉, 선덕제 본인은 자신의 작품을 '''단순한 낙서'''라 생각했는지도 모르는 대목.(...)[14] 역시 예술적 재능이 뛰어났던 휘종이 예술에 심취해서 송나라를 말아먹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더더욱 고평가 받는다.[15] 조선이 조공무역으로 손해를 본 게 가장 두드러지는 시기는 조선 후기에 청나라에 조공할 때였지만 명나라에 대한 조공도 최소한 선덕제 때까지는 조선 측의 손해가 의외로 적지 않은 편이었다. 조명관계가 한창 험악했던 홍무제 치세는 말할 것도 없고...[16] 그녀가 죽은 후 성화제가 시호를 내리면서 쓴 묘표에는 이름이 계란(桂蘭)이라고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