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목의 변
1. 개요
土木之變
명나라 초중기인 1449년, 몽골 계통의 오이라트와의 전투 도중 정통제가 포로로 사로잡힌 사건. '토목보의 변(土木堡之變)' 또는 당시의 연호를 따서 '정통의 변(正統之變)'이라고도 부른다. 영가의 난, 정강의 변과 함께 중국 한족사 3대 치욕적 사건으로 꼽히기도 한다. 중국 역사의 비극 토목의 변.
2. 원인
명나라와 몽골 계통 오이라트족 사이의 무역분쟁이 원인이었다. 1406년 영락제가 몽골 부족과의 조공무역을 승인한 이후, 명나라에서는 비단과 의류, 식량을 수출하고, 몽골 부족들은 말과 모피 등을 수출하는 마시(馬市)가 관례화되었다.[1]
그런데 초기에는 기껏해야 수십 명 단위의 소규모 교역에 불과했던 마시의 규모가 점점 커져 수천 명 단위가 되어버리고, 여기에 위구르 상인까지 가세하면서 무역의 규모가 지나치게 커져버렸다. 게다가 오이라트 쪽에서는 실제 말 숫자보다 명목상의 말 숫자를 늘리는 형식으로 말 값을 몇 배로 올려받았고[2] , 한 몫 잡으려는 사람들이 가세하여 밀무역이 벌어지는 등[3] 이래저래 영종 정통제 시절에는 명나라의 골칫거리로 자리매김하였다. 그래서 명나라에서는 무역을 제한하기 시작하였고, 환관 왕진이 나서서 조공무역 이외의 무역은 금지하고, 오이라트에도 실제 숫자에 해당되는 말 값만을 지불함으로써 말 값을 사정없이 후려쳤다.
3. 경과
3.1. 정통제의 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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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은 갑작스런 조치에 빡친 오이라트의 에센 타이시[4] 는 군대 2만을 이끌고 1449년 명나라의 산서성 다퉁을 공격하였다. 명나라의 참장 오호(吳浩), 서렬후 송영(宋瑛), 무진백 주면(朱冕) 등이 이끄는 명의 변경 수비대는 기존에 수축된 방어시설을 거점으로 응전하나, 양화구에서 오이라트군에 참패하여 명군의 대부분은 궤멸되고[5] 장군들이 전사함으로써, 군사 요충지 대동(大同)이 쉽게 함락되자 명나라의 방어망은 힘없이 무너졌다. 이러한 상황은 변경의 위기일 뿐만 아니라 수도 북경(北京)이 위험에 처할 수도 있다는 위험신호이기도 했다.
이에 왕진은 정통제에게 친정(親征)[6] 을 주장하였고, 여러 신하들과 장군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정통제는 50만 대군을 구성하여, 변방에 침입한 오이라트족을 공격하기 위해 친정에 나섰다.
그러나 문제는 이 50만 대군이란 병력이 '''문신이나 귀족들이 포함된 단순히 숫자만 뻥튀기한 병력'''이라는 점이었다. 물론 당시 수도인 북경을 수비하던 명나라 경군의 대부분이 포함되는 등 정예 병력의 수도 많고, 이를 지휘할 능력이 있는 장수들도 다수 포함되었지만, 총지휘자가 정통제이고, '''실제 지휘자가 환관 왕진'''이라는 점에서 이미 개판 5분 전. 당연히 움직임이 느렸고 그 피로도 심하였다. 더구나 나이도 어리고 전쟁에 능하지 못하던[7] 정통제의 피로가 심하여 토목보에 일단 머물러야 했고, 추격해 온 에센의 오이라트군이 근처에 있었지만, 50만 대군을 쉽게 공격해 오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나마 '숫자만 뻥튀기한' 것조차도 '''서류상'''으로만 뻥튀기했다는 해석까지 있다. 한 예로 같은 시기 조선왕조실록(세종 31년 8월 18일자)에는 황제가 이끈 군대가 '''8만'''이라는 기록이 있다. # 명나라의 직접 기록이 아니라 간접적인 정보를 획득한 실록의 특성상 부정확할 확률은 있다. 실록에서도 '이 사실은 전해 들었을 뿐, 문서로 전달되어 상고할 만한 것은 없다.'고 적었지만, 그럼에도 '50만'과 '8만'은 차이가 너무 크다.
3.2. 토목보의 참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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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왕진이 무리하게 출격시킨 주면의 호위부대가 박살난 정황을 목격하고는 황급히 철수하기로 해서, 이대로 철수했더라면, 비극을 겪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환관인 왕진이 자신의 고향을 군대가 통과할 경우 입을 피해를 우려해서[8] 철수 경로를 우회시키는 뻘짓을 감행하였고, 결국 물이 없는 토목보[9] 라는 작은 요새에 포위당하는 신세가 되었다. 전략적으로 보자면, 토목보는 원래 거용관(居庸關)의 전선에 설치된 소규모 작은 성, 곧 보(堡)에 불과하였으며, 많은 병사와 전마들이 마실만한 수원(水源)과 대군을 보호할 만한 방어 시설이 부족한 곳이다. 당연히 이 환관 왕진의 뻘짓 + 물 없는 작은 요새의 이중효과로 인해, '''50만 대병력'''은 기회를 잡은 몽골군한테 기습 공격으로 간단하게 박살이 나고[10] , 토목보에서 '''황제 정통제가 포로'''로 잡혀버리는 사태가 벌어졌다.
황제가 이민족에게 포로로 잡히고 장보를 비롯한 조정의 상당수 공경대신과 장군들이 전사했으며, 수도를 지키는 정예군인 경군이 그 장비와 함께 전멸하는 바람에, 명나라는 '''수도 북경성이 거의 무방비 상태로 대혼란에 빠졌다.'''
4. 결과
4.1. 경태제 옹립과 북경공성전
명나라 조정은 남경에 남아있던 제2조정의 신하들이 주축이 되어 남경으로 천도할까 진지하게 논의했지만, 병부상서 우겸이 총대를 메고, 남쪽으로 도망간 송나라의 예를 들어가면서 강력히 반발한 까닭에 간신히 진정되었다. 그리고 황제가 포로로 잡힌 상황에서 본국에 황제가 없으면 안 되니까, 정통제의 이복동생 주기옥을 황제로 옹립했다. 이후 북경 방어의 총책을 짊어진 우겸은 거의 총력을 다해 남경의 무기와 병력을 이동시키는 등 방어전력을 모으고 전쟁에 대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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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나라가 그럴 동안에 에센은 우선 정통제를 앞세우고 명나라 변방을 돌아다니면서, 각지의 요새들을 무혈점령하려는 시도를 한다. 그러나 북경처럼 요새화된 도시를 공략하는 건 상당히 다른 차원이라서, 여러 요새에 공격을 시도해봤지만 격퇴당하고, 남쪽에서 근왕병들이 속속 증원되어 올라오자 북경 공략은 불가능해졌다. 그래서 사로잡은 정통제를 이용해 협상하려 했는데, 이때는 이미 명나라는 경태제를 세우고 정통제를 버린 상태라 별 성과가 없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에센은 격노하여 군대 10만으로[11] 북경에 쳐들어갔다. 그러나 명나라는 이미 예상하고 있던터라 22만여 병력을 소집해 베이징에 모아 놨고, 장비들도 남경과 기타 지역, 심지어는 토목보 주변에 버려진 것까지 싹 회수해서 배치한 상태였다. - 게다가 단순한 수성전이 아니라, 북경 주변에 있는 옛 성의 성벽 등을 이용해서 주변에 진지도 다수 깔아 놓은 상태. 한마디로 토목에서 당했던 것과 차원이 다른 상태였다.
토목보 주변에 버려진 화기가 매우 많았는데, 그 이유는 평소 화약을 사용하는 화기에 대한 명나라의 비밀 엄수가 너무 심해서[12] , 병사들이 화기를 '''휴대만 했지 사용법을 몰랐기 때문'''에 미사용 상태로 화기를 버렸고, 역시 에센의 몽골군도 화기를 사용하는 법을 몰라 그대로 화기가 방치되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다만 이는 사실과 다를 수도 있는 것이, 몽골은 원나라가 건국되기 이전인 몽골제국 시절 이미 북송을 통해 화약무기를 접했고, 이를 적극 받아들여서 사용했으며, 이는 남송을 멸망시킬 때나 일본 원정을 갔을 때의 기록으로 찾아볼 수 있다. 즉 이전 문서에 "몽골이 화약 무기를 사용하게 된 것은 명나라 말기였다"고 서술되어 있던 것은 잘못된 정보인 것이며, 토목보 주변에 버려진 화기를 몽골군이 활용하지 못했다는 것은, 단순히 화기를 사용할 줄 몰라서가 아니라 화약이 수중에 없었기 때문이라고 가정한다면 차라리 말이 된다.
어쨌든 북경 공방전에서는 그때의 교훈을 살려 병사들에게 화기 사용법을 숙지시켰기 때문에, 명군이 화력 면에서 우위에 설 수 있었다. 그 결과 몽골군은 창의문과 덕승문을 중심으로 벌어진 교전에서 명나라 포병의 공격과 수비군의 저항으로 1만의 사상자를 내면서[13] 북경성을 함락시키지 못했다. 그리고 북경을 구원하기 위한 명나라의 지원군 22만이 오고 있었기에 난감해진 에센은 북경 공략을 포기하고 강화해 돌아간다. 그렇게 5일 동안 싸우고 돌아온 후, 오이라트 측은 정통제를 내세워 송환 문제를 포함한 협상을 진행시켰지만, 위에서 말했다시피 명나라는 정통제를 이미 -버린 말 취급했기에 협상 자체가 잘 되지 않았고, 에센 칸은 명나라의 분열을 노리고 1450년 정통제를 조건 없이 석방했다.
4.2. 탈문의 변
경태제는 정통제가 귀환할 경우 황제 자리를 내놔야 되나 싶어서 매우 걱정했지만, 신하들이 그럴 필요는 없다고 설득해서 정통제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정통제는 사실상 연금 상태에 놓였다. 경태제가 매우 불안할 수밖에 없는 게, 애초에 명나라의 종친왕들은 의전상 신분만 높고, 연금을 주는 등 예우만 해줄 뿐이지, 실권은 박탈된 채 살았는데, 경태제 자신은 예전에 그렇게 살다가 정통제가 사로잡힌 후, 정통제의 생모 성모태황태후[14] 가 나서서 그를 옹립해준 것이기에, 후계자로서 필요한 제왕 교육도 제대로 못 받았고, 민심 안정을 위해 황태자로서는 정통제의 맏아들 주견심을 그대로 놔뒀기에, 권력 기반은 매우 약한 상태였다. 그러니 정통제, 즉 자기 형이 복위하면, 형의 허락도 없이 즉위한 자신의 목숨을 걱정함은 당연했다.
권력 기반이 어느 정도 다져진 후, 경태제는 형인 정통제의 아들을 황태자에서 폐위시키고 자신의 아들 주견제를 황태자로 책봉했지만, 몇 년 후 경태제의 태자 주견제가 병으로 죽었다. 그런데 경태제는 무슨 생각에서였는지 후계자 지명을 거부해서,[15] 후계자가 없는 상황이 지속되다가, 몇 년 뒤 경태제 본인도 병에 걸려서 위독해졌다. 이에 정통제는 자기를 따르는 군사를 모아 쿠데타를 일으켜 경태제를 퇴위, 감금하고 황제에 '''복위'''하였다. 이걸 '''탈문의 변(奪門之變)'''이라고 한다. 그리고 연호를 천순으로 바꿔 '''천순제'''라고 불리었다.[16]
이 쿠데타를 주도한 사람은 서유정과 조길상인데, 서유정은 토목의 변 당시 남경으로 천도하자고 하다가, 우겸의 꾸중에 입을 다문자고, 조길상은 환관이었다. 이 쿠데타 과정에서, 우겸은 어쩌면 서유정 때문에 죽었는지도 모른다.
천순제로 복위한 이후 베이징을 방어했던 우겸을 사형시키는 등 삽질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어쨌든 예전에 고생한 때문인지, 개판이었던 정통제 시절보다는 조금 괜찮게 정치를 했다고 하며, 포로로 잡혔던 기억 때문인지 그동안 명나라에 전해지던 몽골 악습을 제거하는데 심혈을 기울여서, 후궁과 궁녀의 순장(殉葬)을 당대에서 끊어버렸다고 한다.
그렇지만 우겸의 사형건은 천순제의 입장에서 본다면 아주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아니다. 생각해보면 전란이 끝난 후 전시에 큰 공을 세운 공신은 반란을 일으킬 용의자 1순위이다. 토사구팽(兎死狗烹)이 괜히 생겨난 말이 아닌 것이다. 그러니 그렇지 않아도 쿠데타로 즉위한 천순제에게 우겸은 참으로 부담스러운 존재였을 것이다. 더군다나 우겸은 경태제를 옹립시킨 1등 공신이다. 다른 걸 떠나서 자기를 공기로 만든 존재를 용서하긴 쉽지 않다.
하지만 우겸은 제위나 권력에 야심이 없었고, 북경성이 위기에 처했을 때 보여준 그의 능력을 감안하여, 대국적 견지에서 용서했다면, 이후 정통제에게 충성을 다했을 가능성이 높았다는 점에서 실책이었다는 견해가 다수다. 실제로 천순제도 우겸을 사형시키고 가산을 몰수하는 과정에서, 우겸이 청렴결백한 신료였다는 것을 알고 크게 후회했다고 하며, 경태제의 즉위 과정을 다시 조사한 후 우겸을 모함한 측근들을 처형했다.
한편 천순제는 자신을 폐위시킨 동생 경태제를 '불효하고 오만불손하고 어질지 않고 정의롭지 않고 도덕을 더럽히고 추문을 드러냈다'며 폄훼했다. 따라서 신과 사람들은 모두 그에게 분개했다며 7년 동안 유폐를 당한 원한을 거의 저주에 가까운 악평 수준으로 격하시켰다. 그리고 경태제가 사후에 황릉의 장지로 생전에 천수산에 만들어 놓은 수릉을 없애버리고 그를 서산에 안장하게 했다. 그리고 천순제는 그를 폐위시킨 뒤 성려왕이라는 다른 시호를 내렸다. 그 뜻은 패륜을 저지르고 사나우며 욕심이 많은 성왕이라는 것으로 얼마나 악감정이 심했는지 여실히 드러난다.
4.3. 오이라트족의 향방
토목의 변 이후로 몽골 내부에서 오이라트족을 이끌던 에센의 위상은 크게 올라갔으며 대부분의 몽골 부족들이 그에게 귀부하였다. 그러다 결국 1453년 몽골의 타이슨 카간이 에센과의 전투에서 패하고 부하의 배신으로 사망하자, 에센은 스스로 카간의 자리에 올랐다. 그러나 당시에는 황금 씨족(칭키스 칸의 성인 보르지긴 가문, 칭기즈 칸의 후손)만이 카간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기에 황금 씨족 출신이 아닌 에센이 카간이 되자 많은 부족들이 반발하였다. 게다가 에센은 카간의 자리에 오르자마자 부족들을 탄압하여 전 몽골을 분노하게 만들었다. 결국 1455년 에센이 카간의 자리에 오른 지 단 2년 만에 초원 부족들간의 내분으로 에센은 부하들에게 살해당하고 만다. 그리고 에센 사후 오이라트의 세력은 약화되어 몽골 서부로 쫓겨났다.
4.4. 당시 조선의 반응
당시 조선은 세종 재위 31년이었는데, 정통제는 친정(親征)을 하기 전 조선에도 원정을 지원할 병사를 보내달라는 요구를 한다. 그런데 실록의 기록으론, 명나라에서 '우리가 오랑캐들 정벌하러 갈건데, 조선도 평안도에 10만 대군을 배치하고 부를 때 와서 호응해달라.'고 요구했고, 여기에 한술 더 떠 '조선에 말이 많이 난다고 들었다. 3만 마리쯤 준비해달라. 더 보내도 된다. 돈은 내주겠다.'며 민폐성 요구도 해왔다고 한다.[17] 특히 토목의 변을 당한 후에는 하게 도움을 요청한다.
이런 무리한 요구에 세종은 고민하다가 신하들이 성의 표시로 5천 필만 보내자고 건의하자, 그래도 1만 필은 채워 보내자고 하는 정도로 타협을 봤다고 한다. 그외에도 세종은 만일의 사태를 경계하여 여진 토벌과 몽골 침입의 대비로 6진 개척 후 조정에 있던 김종서를 다시 북방에 파견하기도 한다. 그리고 말년에 이런 골칫거리에 시달리다보니 세종은 원래도 안 좋던 건강이 더 나빠져 이듬해(1450) 세상을 떴다.
정통제가 오이라트족에 잡힌 후, 명나라에서 이 소식을 알리고 새로운 황제의 등극을 알리는 칙사가 왔을 때 섭정인 세자 문종은 평소 앓던 종기가 악화되어 세종보다 더 심각한 몸 상태였다. 접대를 할 만한 사람이 없어 혼란이 발생했다. 세종은 노환으로 아프고, 세자 문종도 종기 때문에 위급하고, 세손 단종은 이제 겨우 9살이라 이런 엄청난 문제를 맡기기는 곤란했던 것이다. 그렇다고 차남 수양대군더러 접대하라고 하는 것도 외교적 결례이기 때문에, 접대 방식을 놓고 조선 조정은 매우 곤란해했다. 이에 세상물정에 어두운 젊은 유학자 출신 신하들이 "왕이 아프면 세자가 대신, 세자가 아프면 세손이 하면 되지 않나요?"라고 하자, 가뜩이나 건강이 안 좋아서 신경이 날카로웠던 세종이 격분해서 "아오, 이 더벅머리 선비들!"이라고 일갈해했다 전해진다. 어린 세손이 실수라도 해서 쓸데없는 지원 구실을 줄까봐 염려했었고 가뜩이나 약간 역모성이 있는 황제 즉위라 외교적으로 분쟁 여지가 높은 사신인데 이런 소리를 하니 신경질이 날 수 밖에.[18] 결국 사신 접대는 수양대군이 하고, 황제의 칙서는 병상에 누워 있던 문종이 주변의 부축을 받으며 나서서 겨우 받았다고 한다. 이 때문에 명나라 사신들은 "왕이 아픈 건 예전에 들어서 알았는데, 세자는 젊은데 아프다고 코빼기도 안 비치니 우리 너무 무시하는 처사가 아니냐", "수양대군은 세자랑 동모(同母) 형제인 건 맞긴 한가?"라 했고, 조선에선 세자가 매우 아프다는 게 정말이며 사신 홀대가 아니라고 해명했다.
5. 매체
홍콩 신파무협의 대가 양우생의 대표작 중 하나인 평종협영록이 토목의 변을 배경으로 삼고 있다. 양우생의 스타일대로 역사적 사실이 세세한 부분까지 비교적 충실하게 반영되어 있어 읽어볼 만하다. 주인공 장단풍이 등장하는 첫 시리즈.
대체역사물 내가 바로 세종대왕의 아들이다에서는 내용 전개가 뒤바뀌게 되는데 우선 주인공의 등장으로 조선이 발전하면서 화약 사용법이나 카우치드 랜스 전술이 오이라트군에게 전수되게 되고 이를 기반으로 더욱더 오이라트군이 강력해진 것. 이를 기반으로 토목의 변이 일어났을때도 역사 변동이 있어 원 역사에서 죽었어야 할 왕진이 정통제가 친히 몸으로 막아 주어 살아남는데 성공했고 결정적으로 화약 무기를 적극적으로 사용한 오이라트 군에 의해 '''북경이 함락당하고 경태제와 우겸은 남경으로 피신하는 사태가 벌어진다.''' 비록 곧바로 밀려온 조선군과 성 내부에 있던 한명회의 호응으로 오랜 점거를 하진 못하지만... 그래도 오이라트는 더 큰 혜택을 받았는데 일단 청해호 일대의 영지를 얻어 거기서 생산한 소금과 전리품을 기반으로 유목민들의 추앙을 받는데도 성공한데다 결정적으로 에센이 칸을 자처하지 않고 타이순 칸을 내세워 그 뒤에서 실권을 장악하는 방식으로 나가면서 상당히 영향력을 확보했고 그 결과 오이라트는 대규모 서방원정까지 진행할 힘을 얻어 오스만과도 대등한 싸움을 할 정도로 성장한다. 여러모로 소설에 큰 영향을 끼친 사건.
[1] 사실 몽골 뿐만 아니라 다른 유목민들도 중국과 교역할 때 이렇게 했다.[2] 당연히 좋은 말 안주고 나쁜 말을 많이 주어서 말 값을 비싸게 받았다.[3] 사실 한족과 북방 유목민 간의 밀무역은 이전부터 성행하고 있었다.[4] 이때 에센은 스스로 대칸(大元天盛 大可汗, 대원천성 대가한, 이흐 온 울루스 텡게를크 보크드 칸)이 되기 전이었다.[5] 에센의 계략에 속은것도 있지만 황제가 장군들을 감시하기 위해 파견한 태감인 곽경이 장군들의 정당한 전략을 무시하고 그들에게 공격할것을 강요하여 무모한 공격을 하게 한 것이 컷다.[6] 임금이 몸소 군사(軍士)를 거느리고 정벌(征伐)함[7] 당시 정통제는 참전했을때 나이가 22세로 어리지는 않으나 실전 경험이 없었고 군대에 대한 지식조차 없었다. 현대 기준으로 비유하자면 이등병이 군단장이나 야전군사령관을 맡은 셈.[8] 대군이 통과하면 그에 대한 보급을 해줘야 해서 이로 인한 지역민들의 부담이 심해진다. 특히 황제가 이끄는 군대라서 부담이 더 큰데다 정통제의 군대는 급히 모집해서 질이 떨어지는 군대이기에 지역민들을 대상으로 약탈은 물론 행패까지 부릴수 있었으며 적군이 공격해와서 전쟁터가 되면 그 지역이 더 큰 피해를 입게 된다.[9] 지금의 허베이 성 장자커우 시 화이라이 현 투무 진[10] 이때문에 왕진은 난전 중에 장군 번충이 패배의 책임을 물어서 그의 철퇴에 맞아죽었다. 참고로 이때 번충이 황제가 보는 앞에서 왕진을 때려죽였는데도 정통제는 어찌하지 못했다. 번충은 정통제를 피신시키고 오이라크군과 싸우다가 전사한다.[11] 몽골인 외에도 투르크인과 준가르인, 카자흐인 등 여러 유목 민족이 포함된 군대라서 당시 몽골로선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을 모조리 총동원한 셈이었다.[12] 왜냐하면 문맹인 병사들이 화기로 사고치는게 많다보니 비밀 엄수를 할 수 밖에 없었다. 실제로 굳은 화약을 폐기해야 하는데 무식한 병사들이 이것을 모르고 도끼로 깨서 재활용하려다가 대형 폭발사고가 일어나 사상자가 나온 사태가 있었다.[13] 에센의 최측근 지휘관인 소로, 마오나하이가 전사하기도 했다.[14] 경태제의 생모는 즉위 하면서 태황태후에 봉해졌다.[15] 경태제에게는 주견제 이외의 다른 아들은 없었다. 정확히는 1남 2녀를 두었지만 그 가운데 딸 1명만 성인으로 성장했다. 물론 황제였을 때 나이가 젊었던 만큼, 더 오래 생존하여 계속 재위했다면 다른 아들을 얻었을 가능성은 있다.[16] 이 쿠데타라는 것도 실상은 매우 어설펐다. 경태제가 병으로 드러눕게 되자, 정통제가 밤중을 틈타 유폐되어 있던 궁문을 부수고 자금성에 당당히 들어가려 했으나, 궁문 수비병들이 이를 막았고, 이에 정통제는 "짐이 태상황이니라!" 라고 외쳤는데, 그 한 마디에 수비병들은 모두 만세를 부르고 문을 열어 주었다고 한다.[17] 조선 전성기 때 보유할 수 있었던 말의 최대 물량이 2만~4만 마리였음을 감안하면 명은 조선에게 꽤나 무리한 요구를 한 것이다.[18] 세종실록, 세종 32년 1월 18일 기사. 기사를 보면 칙사 문제에 더해 불사 문제로 간관들의 간쟁을 받은 세종이 상당히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인 것이 드러나 있다. 실록에서는 왕이 쌍욕을 해도 '격하게 화를 내었다'던지 '차마 적지 못할 말을 하였다'는 식으로 돌려 적었다. 고로 전술한 세종의 일갈은 엄청나게 필터링을 거쳐 기록하였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다른말로 온갖 쌍욕과 분노를 표출했다는 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