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충(후한)
王充
(27~100)
1. 개요
후한의 사상가이다. 자는 중임(仲任)으로, 고문학파에 속한다. 논형(論衡)이라는 저작을 남겼다. 한국에는 성선악혼설을 주장한 사람으로 널리 알려져있다.
2. 상세
어려서부터 놀림받는 것을 싫어해 동네 애들과 노는 일이 일절 없었다고 한다. 대신 공부를 하러 다니다가 성인이 되고 나서는 낙양으로 상경해 한서를 지은 반고의 아비 반표에게 사사했다. 가난했기 때문에 서점에서 책을 보고 암기하는 식으로 공부해 제자백가를 통달했다고 한다. 벼슬이 공조에 이르는 등 꽤 괜찮았으나 윗사람과 뜻이 맞지 않아 교육의 길로 들어섰다. 60세 때 자사 동근에게 초빙되어 주종사가 되고, 치중에 이르렀으나 62세 때 퇴직한다.
기속, 정무, 양성 등의 책을 지었으나 여전히 현실에 짜증나는 바가 많았던 모양으로 최대 걸작인 논형을 짓는다. 논형은 일부가 소실되었으나 현대까지 전한다. 논형은 엄청난 분량을 자랑한다.[1] 한 개인이 지은 백과전서 류의 저작으로 당나라 대까지 대단한 저작으로 평가받았다. 허나 송나라 대에 성리학이 흥기하며 공자, 맹자에 대한 비판이 문제시되며 잊혀졌다. 논형은 이후 20세기가 돼서야 재평가를 받게 된다. 문화대혁명 비림비공운동 시기에 공자를 비판하고 유물주의를 주창하는 부분이 주목받으며 고평가받고 있다.
논형은 위대한 저술이지만 동양적 기준으로는 지나치게 시비를 변별하려고 하고 글의 풍류나 시적인 함축성이 적고 남들이 읽어줄 거라는 생각도 안했는지 매우 시시콜콜한 부분도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탁월한 저작이었기에 논형은 후한말에 이르러 주목을 받게 되었다. 채옹이 오나라 땅에서 논형을 얻고 왕성하고 풍부한 비판 정신을 고평가했으며, 채옹이 북으로 돌아갔는데 그의 식견이 갑자기 높아지자 친구들이 몰래 서재를 뒤져서 논형을 발견했다는 이야기가 세설신어에 전한다. 왕랑이 회계태수 시절 득템해 기뻐하였고 위무제 조비도 논형의 애독자였으며, 포박자를 지은 갈홍도 즐겨 읽었다고 한다.
왕충은 옛 성인들의 글쓰기 방식에 의탁하지 않고 자신만의 글쓰기 방식을 추구했다. 술은 무슨 술이던지 먹으면 취하고, 오곡은 뭐던 간에 먹으면 배부르고, 노래는 곡조가 다르지만 들어서 좋고, 미인은 생긴 게 다 다르지만 예쁜데 왜 글쓰기는 한 가지 방식이냐며 반발하고 문학 작품도 구어에 가까워야 한다고 주장한다. 건안문학에 영향을 끼치지 않았을까 미루어 추정할 수 있다.
왕충이 자못 뻐기며 논형을 자찬한 바에 따르면, 시 300편은 생각에 사악함이 없듯이, 논형 10여편도 허망함을 미워하는 것이라고 시경(詩經)에 논형을 비겼다.[2] 왕충이 고문학파의 거두로서 천인감응설이나 참위설을 같잖게 바라봤음은 명확하다. 한대의 유학은 관학으로서 자리매김하며 국가와 황제와 지도층의 권위를 강화하기 위해 음양가나 도가의 영향을 많이 받아 고전유가와는 상당히 변화된 양상을 보인다. 이들 학파의 일단을 거칠게 논해 보자면 황제가 착하니 세상이 평온하고 황제가 나쁘니 가뭄이 들고 머리 두 개 달린 소가 나타났으니 이건 하늘의 경고이므로 긴장하라는 것이다.
논형은 무위자연의 이치로 이를 반박한다. 고대 중국의 사상에 따르면 하늘과 땅 등 자연은 제일가는 무위의 도로 세상을 주재한다. 이것은 고대 중국의 우주론이다. 일이 이러한 것은 자연이 특별한 감각기관이 없는 것을 볼 때 명확하다. 왜냐면 기가 이루어져 나타난 생명체는 감각기관으로 활동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연은 생명체가 아니고 그러므로 어떤 일도 스스로 하지 않는다. 그런데 머리 둘 달린 소가 나타났으므로 하늘이 경고한다는 것은 곧 하늘이 무언가를 한다는 것이다. 논리적으로 옳지 않다. 그리고 우주 속의 인간은 옷 안의 벼룩이나 이에 불과할 텐데, 벼룩이나 이가 아무리 날뛴다고 해서 옷의 기질을 변화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런데 인간은 인간의 작위로 인해 우주의 기가 변화한다고 말하는데 불가한 얘기라고 한다.
왕충은 이와 같은 자연의 무위함과 더불어 시비를 날카롭게 변별해 자연과 인간의 무관함을 드러내고 있는 그대로의 자연에 대한 탐구심을 존중해 도가의 앞길을 밝힌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그뿐 아니라 인간문물과 행위의 중요성도 역설했다. 이는 왕충 본인이 행한 공, 맹에 대한 비판과 더불어 순자와 비슷한 성향임으로 평가받는다.
왕충의 주장이 공, 맹 등이 모두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다. 왕충도 공자를 제일가는 성인으로 인정하나, 그렇다고 해서 비판은 또 다른 문제라는 것이다. 학술에 있어서 바르게 판단하고 옳고 그름을 구별하는 것은 몹시 중요한 일이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도가적 사상을 드러내되 공자를 제일가는 성인으로 인정하는 왕충의 기풍은 위진시대 현학으로 이어진다. 이 부분에서는 왕필의 학풍도 꼭 들어맞는다.
후한서는 왕충, 왕부, 중장통 셋의 열전을 묶었는데, 세 사람 모두 기존의 유학을 비판적으로 해석한[3] 체제비판적 지식인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1] 대단히 오랜 시기에 걸쳐 썼던 것으로 추정되며 일관적이지는 않다는 약점이 있다.[2] 시삼백(詩三百)은 이른바 시경을 가리키는 말인데, 자신이 지은 논형을 공자의 편저이자 유학의 3대 경전 중 하나인 시경에 빗대어 자랑한 것. 앞의 '시 300편은 생각에 사악함이 없듯이'라는 표현도 논어의 구절(자왈, 시삼백, 일언이폐지, 왈사무사)에서 따왔다.[3] 특히 전한 이후 정치권력과 결합하여 사상계에서 상당한 권위를 누렸던 동중서의 천인감응설에 반대되는 견해를 드러냈다는 공통점이 있다. 왕충과 중장통의 주장은 동중서와 커다란 차이점이 있으며, 왕부는 이들에 비해 덜하지만 동중서보다 인간의 의지를 더욱 중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