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해룡

 


[image]
성명
우해룡(禹海龍)
이명
우해운(禹海雲)
생몰
1906년 7월 16일 ~ 1969년 3월 9일
출생지
경상북도 대구군 서상면 북내동
(현재 대구광역시 중구 북내동)
사망지
경상북도 대구광역시
매장지
국립신암선열공원
추서
건국훈장 애족장
1. 개요
2. 생애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우해룡은 1906년 7월 16일 경상북도 대구군 서상면(현 대구광역시 중구) 북내동에서 태어났다. 그는 대구청년혁진단(大邱靑年革進團)의 간부를 맡았다. 그러던 1925년 7월 18일, 그는 대구노동친목회(大邱勞動親睦會)의 창립대회 석상에서 "약소민족의 생존권을 말살하는 일제의 위정자는 가면을 쓴 이리족(族)과 동일하다"라고 발언했다가 현장에서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이후 대구복심법원에서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6개월,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그 후 서동성, 서학이, 신재모, 방한상(方漢相) 등이 중심이 되어 1925년 9월 29일에 조직한 아나키즘 비밀결사 진우연맹(眞友聯盟)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진우연맹은 항일운동의 구체적 방법으로서 2년 내에 대구부 내의 도청·경찰서·우편국·법원을 비롯하여 관서·일본점포를 파괴하는 한편 지사(知事)·경찰부장·관아(官衙) 수뇌부를 암살할 것을 계획하였다. 이를 위하여 파괴단(破壞團)을 조직, 중국 상해에 있던 무정부주의자 유림을 통하여 폭탄을 입수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계획을 추진하던 중 동 연맹원 안달득이 일제 경찰에 붙잡혀 진우연맹의 전모가 드러나게 되었다. 이로 인해 체포된 그는 대구복심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3년형을 언도받아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대구에서 조용히 지내다 1969년 3월 9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0년 우해룡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그의 유해는 국립신암선열공원에 안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