웅치 전투

 


'''웅치 전투'''
熊峙戰鬪

'''시기'''
1592년 8월 13일 (음력 7월 7일)
'''장소'''

조선 전라도 전주부와 진안군 경계 웅치
'''원인'''
일본군의 전라도 진공
'''교전국'''
조선 [image]
일본 [image]
'''지휘관'''
김제군수 '''정담'''†
나주판관 이복남
후군장 황박
해남현감 변응정†
종사관 이봉†
종사관 강운†
<^|1> 안코쿠지 에케이
'''병력'''
불명
불명
'''피해'''
사상사 다수 추정[1]
피해 규모 불명
'''결과'''
조선군의 패배
'''영향'''
조선군의 방어선 붕괴 및 전주성에 대한 심대한 위협
1. 웅치 전투의 배경
2. 웅치 전투의 경과
3. 웅치 전투 이후
4. 웅치 전투의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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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웅치 전투의 배경


일본군은 한성을 함락한 후 임진강 회의를 통해 전쟁이 장기화 될 것에 대비하여 조선을 분할통치하는 방식으로 전략을 수정하였다. 이에 따라 5월부터 일본군은 호남을 향해 공격을 해오기 시작한다. 이에 따라 일본군 제 6군의 장수인 고바야카와 다카카게는 한성으로부터 출발해 충청도를 지나 경상도를 지난 뒤 전라도 금산[2]으로 공격해 들어왔으며 그의 부장인 안코쿠지 에케이창원에서 출발해 정암진을 건너 삼가, 함양을 지나 전라도로 진출하려 했으나 정암진에서 곽재우에게 일격을 당하고 성주 방향으로 우회해 금산에서 고바야카와 다카카케와 합세하는 것을 계획으로 진군을 시작했다.[3]
당시 전라도의 군대는 용인 전투에서의 궤주로 이미 많이 소진된 상태였으며 거기에다가 의병장 김천일과 전라 병사 최원이 2만 2천의 병력을 이끌고 북상해 병력이 부족한 실정이었다. 왜군의 공격을 감지한 전라감사 이광은 전라도 방어사 곽영을 금산에, 이계정은 육십령에, 장의현은 부항에, 마지막으로 김종례는 동을거지에 배치해 방어태세를 갖추었다. 6월 17일 무주 경계에 출현한 고바야카와 군은 6월 22일 금산의 제원에 도달해 조선군과 교전을 벌였다. 금산 군수 권종은 전사했고 곽영과 김종례는 고산현으로 퇴각해, 6월 23일 금산성이 왜군의 손에 들어갔다.
금산을 점령한 고바야카와 군은 진안과 용담을 함락한 뒤 전주로 향하기 위해 남하했다. 용담에서 진안을 거쳐 들어오는 길목에 자리한 웅치고개에는 김제 군수 정담, 동복 현감 황진, 나주 판관 이복남, 전 전주 만호 황박이 방어선을 구축했다. 이들중 황진은 남쪽 장수 방면을 지키던 조방장 이유의가 달아나자 남원 방어를 위해 내려갔다 7월 5일경 다시 웅치로 귀환하라는 지시를 받는다.

2. 웅치 전투의 경과


전투 이전에 조선군은 제 1방어선인 산 아래에는 의병장 황박을 배치하였고, 제 2방어선인 산 중턱에는 나주 판관 이복남을, 최종방어선인 산 정상에 제 3방어선에는 정담이 배치되었다.
일본군은 7월 7일 새벽 야음을 틈타 조총을 앞세워 공격해왔지만 조선군이 사력을 다해 싸워 막아내었다. 하지만 해가 뜨자 일본군의 본격적인 공세가 시작되었고 1선의 황박군이 밀려났다. 이에 따라 2선의 이복남 군이 나서 맞섰지만 제쳐졌고 산 정상의 정담군과의 혈전이 시작되었다. 정담군은 사력을 다해 맞섰으며 지휘관인 정담이 직접 활을 쏴 적장을 쏘아 맞힐 정도의 혈전이었다. 치열한 육박전이 전개되었고 날이 저물고 일본군의 피해가 막심하자 퇴각했다. 하지만 이내 조선군의 화살이 다 떨어진 것을 알게 되자 재공격해왔고 치열한 전투속에 정담, 강운, 이봉 등이 전사하였다.

3. 웅치 전투 이후


날이 밝은 뒤 왜군은 조선군의 시체로 덮인 언덕을 넘어 전주로 향했다. 남은 조선군을 이끈 이복남은 군사를 수습해 전주 동쪽 10리에 위치한 안덕원에 방어선을 쳐 재차 왜군을 맞았다. 때마침 귀환 명령을 받고 북상한 황진의 군사가 합류해 지친 왜군을 공격해 간신히 왜군을 저지할 수 있었다. 간신히 한숨을 돌린 조선군은 이광의 지시를 받은 의병장 이정란 지휘하에 전주성에서 방어태세를 갖추었다. 전주 공략에 실패한 왜군은 진안에 머무르다 7월 17일 금산으로 물러났다.
왜군도 조선군의 분전에 감명을 받았는지 퇴각하는 길에 조선군의 시신을 모아 조 조선국 충간의담(弔朝鮮國忠肝義膽)이라는 비석을 세워주어 그들의 충절을 기렸다고 한다.

4. 웅치 전투의 결과


조선군은 큰 피해를 입었으며 총지휘관이 전사하는 패배를 겪었다. 전투에 참여한 왜군의 규모와 피해상황은 알 수 없으나 고바야카와가 이끄는 본대가 곧이어 벌어진 1차 금산전투에서 6천의 고경명군에게 가볍게 승리하고 웅치 전투에서 한달이상 지나 벌어진 이치 전투에 권율군을 압도하는 병력을 투입한 것을 감안하면 웅치에 투입된 병력이 대군은 아니었을 것이다. 난중잡록에서 앞서 곽재우와 교전한 안코쿠지 군의 진로를 기록하며 현풍의 쌍산역(雙山驛, 현풍 북쪽 15리)을 거쳐 뱃길로 경북 성주로 향한 안고쿠지 군의 배가 18척이었다. 그리고 험한 고갯길을 점거하고도 그런 왜군에게 밀린 조선군은 그보다 더 적었을 것이다.

[1] 전투가 종료된 뒤 언덕이 조선군의 시체로 덮였다고 한다[2] 조선시대 이래 금산은 계속 전라도였으며 금산이 충남에 속하게 된 건 박정희 정권기 때 와서의 일이었다.[3] 곽재우는 성주까지 안고쿠지 군을 추격해 교전을 벌였으나 중과부적으로 수급 몇급만 얻고 퇴각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