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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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제5·6·7·8·9대 대통령.
5.16 군사정변으로 장면 내각을 전복한 후 제5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이후 3선 개헌과 10월 유신으로 장기집권을 획책해 독재자의 길을 걸었으며, 임기와 생을 측근의 암살로 마감하였다.
경상북도 구미시 출신, 본관은 고령 박씨이며, 호는 중수(中樹)이다. 제18대 대통령인 박근혜의 부친이다.
2. 일생
3. 평가
4. 여담
5. 다른 정치인들과의 관계
6. 묘소
서울현충원 정문에서 직선방향으로 맨 안쪽 높은 곳에 위치해 있다. 당시 유명한 지관(地官) 지창룡(1922~1999)이 터를 골랐으며, 수맥을 막기 위해 토목공사를 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앞을 내어다보면 앞에 장군 제1묘역과 한강을 중심으로 강북과 강남이 한눈에 보인다.[4]
현재 대한민국에서 가장 규모가 큰 무덤이다.(순수 매장한 무덤 규모 기준) 국가원수 묘소 중 가장 규모가 크며, 국가원수 묘소 중 가장 규모가 작은 김대중대통령묘소(국립서울현충원 소재)와 비교해도 가히 넘사벽급 차이가 난다. 사실 박정희 전 대통령 묘소와 김대중 전 대통령 묘소는 순수 묘소 기준으로 비교하자면 박정희 묘소가 김대중 묘소보다 약간 큰 수준으로 별 차이가 없지만, 주변 묘소 전체가 1000평이 넘어갈 정도로 굉장히 넓다.
7. 관련 시설
7.1. 박정희대통령기념관/도서관
서울특별시 마포구 월드컵로 386(상암동)에 있으며, 운영주체는 (재)박정희대통령기념재단이다.
건립 과정에서 우여곡절이 있는데, 1997년 15대 대선 때 김대중 후보가 공약으로 내세워 집권 뒤인 1999년에는 기념관 건립에 200억원이 넘는 보조금을 보태기로 약속한 뒤, 부지를 서울 상암동 난지도 쓰레기매립장 권역에 잡고 2002년 완공을 목표로 했다. 그러나 '박정희기념관 반대 국민연대' 등 재야 시민사회단체들이 극렬히 반대하면서 착공이 2002년으로 미뤄졌고, 이듬해 노무현 대통령이 집권한 후 2004년 들어 모금액이 1백억 원에 그치고 2005년에는 행정자치부가 국고보조금 회수를 명령하면서 공사가 중단되었다. 이에 박정희대통령기념사업회 측이 행정소송을 제기해 2006년 1심에서 2009년 대법원에 이르기까지 승소 판결을 받아냈고, 이듬해부터 공사를 재개해 2011년 준공 후 2012년에 개관했다. 도서관은 개관 후 1년이 넘도록 개방이 되지 않았다가 # 현재는 개방되었다.
2017년에는 박정희 전 대통령 100주년을 맞아 지지자들이 기념관에 4.2m 짜리 동상 설치를 추진하고 있었지만 지역 주민과 시민 단체들이 반대하는데다 또한 기념관 부지가 서울특별시청 땅인지라 동상 건립 움직임에 서울시청도 난감해 하는 분위기다. # 공공용지에 동상을 세우기 위해서는 반드시 공공미술위원회의 심의를 거쳐야 하는데 이미 만들어진 조형물을 심의한 적이 없다보니 서울시도 이를 보고 당혹스러워한 것이다. 기념관은 원래 동상 제막식까지 하려던 것을 어쩔 수 없이 기증식으로 축소했다며, 최대한 빨리 설치하겠다고 한다. 서울시가 어떤 결정을 내려도 한쪽에서 거세게 반발할게 뻔해서 동상을 둘러싼 갈등은 쉽게 끝나지 않는 전망이다.
7.2. 박정희 대통령 생가
박정희가 태어난 1917년부터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한 1937년까지 20여 년을 살았던 집으로, 1993년 2월 25일에 경상북도 기념물 제86호로 지정되었다. 주소는 경상북도 구미시 박정희로 107(상모동)이다.
현재 구미의 가볼만한 관광지로 자주 소개되어 일반인들도 많이 찾으며, 특히 보수 정치인들이 자주 와서 참배를 하곤 한다. 박정희 전 대통령 탄신제도 여기서 행해진다.
여기에 쓰인 영정 사진은 실제 장례 때 쓰인 사진이 아닌 테일코트 차림에 무궁화대훈장을 패용한 사진을 쓰고 있다.
2016년 11월 30일, 누군가가 생가에 불을 질러 박정희 영정이 있는 추모관이 전소되었다. 경찰이 현장에서 백모 씨(48)를 방화 용의자로 체포하였는데, 이 사람은 4년 전에 노태우 대통령 생가에도 불을 지른 적이 있었고 그로 인해 대구지법에서 징역 1년 6개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은 전과가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또 백모 씨는 2007년에도 송파구에 위치한 사적 제101호 삼전도비를 훼손했던 적이 있다고 한다. # 백모 씨는 박근혜 대통령이 국정농단 사건이 터지고도 하야를 하지 않아 방화를 저질렀다고 경찰에 진술하였다. 그는 방화 외에도 폭행, 상해, 재물손괴 등의 전과가 있다고 알려졌다.
이에 구미시는 약 9천만 원을 복구비로 들여 생가와 추모관을 곧 복원하겠다고 한다.
2017년 4월 25일, 법원은 문화재보호법 위반 등의 혐의로 기소된 백모 씨에게 징역 4년 6개월을 선고했다. 이 재판은 국민참여재판으로 진행되었다. #
8. 가족 관계
- 아버지 박성빈(1871 ~ 1938)
- 어머니 백남의(1872 ~ 1949)
9. 대중매체에서
9.1. 박정희를 연기한 배우들
이창환이 특히 박정희 전 대통령 전문 배우로 유명하다.
- 신종섭: KBS2 드라마 무풍지대의 박정희
- 백준기: KBS 드라마 여명의 그날의 박정희
- 이진수: KBS 드라마 욕망의 문, 훠어이 훠어이의 박정희, MBC 드라마 제2공화국, 제3공화국, 전쟁과 사랑의 장년 박정희
- 김상민: MBC 드라마 제3공화국의 아역 박정희
- 홍경인: MBC 드라마 제3공화국의 청소년 박정희
- 이창환: MBC 드라마 제3공화국의 청년 박정희, 제4공화국, 제5공화국의 박정희, 특집극 오른손과 왼손의 박정희, 단막극 베스트극장 - 대통령과 TV의 박정희, 예능 타임머신의 박정희, 다큐멘터리 MBC 스페셜 - 부마항쟁 40주년 기념 '1979'의 박정희, KBS 다큐멘터리 극장의 박정희, SBS 드라마 삼김시대, 야인시대의 박정희, 특집극 70분 드라마 - 가방을 든 남자의 박정희, 연극 인간 박정희의 박정희, 영화 잘 살아보세의 박정희, PBC 드라마 김수환 추기경에 관한 마지막 보고서의 박정희, MBN 다큐드라마 대한민국 정치비사의 박정희, tvN - TV조선 합작 단막극 <위대한 이야기 - 원폭 박치기 김일의 박정희, SeMA 벙커 특별전시영상- '나, 박정희, 벙커'의 박정희
- 독고영재: SBS 드라마 코리아 게이트의 박정희, MBC 드라마 영웅시대의 박정희
- 이균식: 영화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의 박정희
- 조영진: 영화 효자동 이발사의 박정희
- 송재호: 영화 그때 그 사람들의 박정희
- 김승훈: 영화 덕혜옹주의 박정희[8]
- 이성민: 영화 남산의 부장들의 박정희[9]
- 김윤홍: 북한 영화 민족과 운명에서 박정희 역할을 맡았다. 북송선을 타고 온 재일교포 출신으로, 이 영화의 박정희 연기 덕분에 김정일로부터 "대통령 각하"라는 칭찬도 받고, 무명배우에서 공훈배우로 출세했다. 박정희와 닮게 나오려고 주사도 맞고, 튀어나온 입을 묘사하기 위해 촬영 때마다 입 안에 틀도 넣었다고 한다.
10. 어록
'''내
一 生 祖 國 과民 族 을為 하여'''
'''우리 나라는 다른 나라에 비하여 적어도 1세기라는 시간을 잃었다. 이제 더 잃을 시간의 여유가 없다. 남이 한 가지 일을 할 때 우리는 열 가지 일을 해야 하겠고 남이 쉴 때 우리는 행동하고 실천해야 하겠다.'''
'''우리는 자유 민주 체제보다 더 훌륭한 제도를 아직 갖지 못했다. 그러나 아무리 훌륭한 제도라 하더라도 이를 지킬 수 있는 능력이 없을 때에는 이 민주 제도처럼 취약한 제도도 또한 없는 것이다.'''
'''우리의 전진을 가로막는 장해가 있다면 그것은 아직도 우리 주위에 잔재하는 수구(守舊)와 파쟁(派爭)이며, 시기와 모함이며, 독선과 아집이며, 단견(短見)과 무정견(無定見) 등 전근대적이며 비생산적인 요소이다.'''
'''체육은 인간을 강건하게 만들고 규율과 질서와 협동을 존중하는 슬기롭고 애국적인 시민을 만들어 준다. 실로 체육은 심신을 연마하고 조화시키는 사회교육이라 하겠다.'''
'''다시는 이 나라에 본인과 같은 불운한 군인이 없도록 합시다.'''
군 전역식 中
'''우리는 이 각박한 국제사회의 경쟁 속에서 지난날의 감정에만 집착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아무리 어제의 원수라 하더라도 오늘과 내일을 위해 필요하다면 그들과도 손을 잡아야 하는 것이 국리민복(國利民福)을 도모하는 현명한 대처가 아니겠는가?'''
한일회담 타결에 즈음한 특별담화문 中(1965. 6. 23.)
'''농사는 하늘이 지어 주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지혜와 노력으로서 짓는 것이다.'''
연두교서 中(1966. 1. 18.)
'''제자가 스승을 우습게 여기는 교권 없는 학원에서 진정한 교육은 이루어질 수 없다.'''
연두교서 中(1966. 1. 18.)
'''한 치의 앞도 내다보지 못하는 단견과, 아무런 계획이나 한 가지 실천도 없이 덮어놓고, 헐뜯고, 불평하는 비생산적인 정신적 자세를 바로잡지 않고서 “번영이다, 발전이다, 조국의 근대화다”라고 하는 말은 한낱 공염불에 그치고 만다는 것을 나는 단언하지 않을 수 없다.'''
충무공 탄신일 기념사 中(1966. 4. 28.)
'''자유는 그것을 위해 투쟁하는 자만이 누릴 수 있는 것이며, 평화는 그것을 지킬 수 있는 자의 것이다.'''
아태지역각료회의 치사 中(1966. 6. 14.)
'''하나의 발전은 보다 큰 발전을 위한 밑거름이 되어야 하고, 오늘의 기쁨은 내일의 영광을 위한 분발의 계기가 되어야 한다.'''
광복절 경축사 中(1966. 8. 15.)
'''우리는 모두 정의를 지지하며, 정의가 지배하는 사회를 희구한다. 그러나 정의가 힘을 동반하지 못할 때, 그것은 정의일 수 없고, 남는 것은 한낱 굴욕과 노예상태밖에 없을 것이다.'''
월남지원국 정상회의 기조연설 中(1966. 10. 24.)
'''대통령으로서 처음에 취임하던 그 당시나, 오늘 이 시점에 있어서나, 내 가슴 속에 풀리지 않고 맺혀 있는 하나의 소원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도 어떻게 하든지 남과 같이 잘 살아 보아야 하겠다는 염원입니다.'''
대통령 취임 제3주년 기자회견 中(1966. 12. 17.)
'''우리의 후손들이 오늘에 사는 우리 세대가 그들을 위해 무엇을 했고 조국을 위해 어떠한 일을 했느냐고 물을 때 우리는 서슴지 않고 조국 근대화의 신앙을 가지고 일하고 또 일했다고 떳떳하게 대답할 수 있게 합시다.'''
연두기자회견 中(1967. 2. 2.)
'''바르게 알도록 하고, 바르게 판단하도록 하고, 바르게 행동하도록 하는 무거운 책임이 바로 우리 언론에 있다.'''
신문의 날 치사 中(1967. 4. 6.)
'''역사는 언제나 난관을 극복하려는 의지와 용기가 있는 국민에게 발전과 번영의 영광을 안겨다 주었다.'''
충무공 탄신일 기념사 中(1967. 4. 28.)
'''자신의 자유와 권리만을 주장하기에 앞서, 타인의 권리와 인격을 존중할 줄 알아야 하고, 사랑과 신의, 이해와 존경으로 공동생활을 영위하겠다는 자세를 가다듬을 때 진정한 의미의 인권은 보장된다.'''
세계인권선언 기념일 치사 中(1967. 12. 8.)
'''우리는 죽을 수 없다. 나도 살아야 하고, 너도 살아야 하고, 민족도 살아야 하고, 조국도 살아야 한다. 살기 위해서는 죽음을 각오하고 싸우는 길밖에 없다.'''
서울대학교 졸업식 유시 中(1968. 2. 26.)
'''무방비 상태의 자유는 압제를 자초하는 법이며, 힘이 없는 정의는 불의의 노예가 되고 만다.'''
'''아무리 방대한 국력을 자랑하는 나라라도 안일과 태평 속에 연약해지고 방종에 흐를 때에는 세계사의 무대에서 후퇴하지 않을 수 없다.'''
향토예비군 창설식 유시 中(1968. 4. 1.)
'''우리가 서있는 이 땅은 자손만대 이어 받아서 번영과 행복의 땅으로 가꾸어 가야 할 우리들의 고향이요, 선조들의 뼈가 묻혀 있고, 또 우리의 뼈도 언젠가는 이 곳에 묻힐 우리의 향토다. 이 땅을 수호할 사람은 바로 우리들이다. 우리의 생명, 우리의 단란한 가정을 우리 힘으로 지키고, 내 고장, 내 직장을 내 힘으로 수호하는 자기 방위의 사명과 책임감이야말로 진정한 향토애이며, 이것이 곧 조국애의 구현이다.'''
향토예비군 창설식 유시 中(1968. 4. 1.)
'''참다운 평화수호의 길은 평화를 지킬 수 있는 힘을 비축하고, 어느 때나 그 힘을 행사할 수 있다는 의연한 결의를 침략자에게 보여 주는데 있다.'''
국방대학원 졸업식 유시 中(1968. 7. 23.)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국민교육헌장 中(1968. 12. 5.)
'''평시(平時)에 땀을 많이 흘리면 전시(戰時)에 피를 적게 흘린다.'''
공군사관학교 졸업식 유시 中(1969. 3. 29.)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만약에 북괴가 또 다시 6.25와 같은 전쟁을 도발해왔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여기에 대한 우리의 결심은 명백하다. 우리는 모든 것을 송두리째 희생하는 한이 있더라도 일보의 양보도 있을 수 없다. 이때는 군과 민, 전방과 후방의 구별이 있을 수 없다. 전국민이 한덩어리가 되어 이번만은 최후의 결단을 짓겠다는 각오로써 최후까지 싸워 통일의 계기를 마련해야 한다.'''
국군의 날 유시 中(1969. 10. 1.)
'''한 세대의 생존은 유한하나, 조국과 민족의 생명은 영원한 것. 오늘 우리 세대가 땀 흘려 이룩하는 모든 것이 결코 오늘을 잘 살고자 함이 아니요, 이를 내일의 세대 앞에 물려주어 길이 겨레의 영원한 생명을 생동케 하고자 함이다.'''
서울대학교 총장에게 보내는 친서 中(1970. 3. 16.)
'''우리는 전통문화의 가치 있고 품위 있는 밝은 면을 찾아 내어 그 속에 숨어 있는 민족의 예지와 긍지를 최대한으로 개발하고 문화적 자주성을 견고히 지키고 꿋꿋한 정신문화의 전통을 계승 및 발전시켜야 하겠다. 온고지신(溫故知新)의 정신으로 우리의 빛나는 민족문화와 역사적 전통을 자손 만대에까지 길이 빛내자는 것이다.'''
도산서원 보수 정화 준공식 치사 中(1970. 12. 8.)
'''토지가 국민이라면, 지도자란 비료에 지나지 않는다. 여기서 종자(種子)는 민족의 이상이 될 것이다.'''
자서전 <민족의 저력> 中
'''이제 우리는 절망 속에서 희망을 되찾았고, 체념 속에서 의욕을 일깨웠으며, 불안 속에서 자신을 얻었다. 우리의 이 희망, 이 의욕, 그리고 이 자신이야말로 민족의 생동하는 정신자원인 것이며, 바로 여기에 조국의 앞날을 밝히는 빛이 있고, 길이 있는 것이다.'''
제7대 대통령후보 지명수락연설 中(1971. 3. 17.)
'''누구나 불가능하다고 체념해 버렸던 그 어려운 일들을 우리는 스스로의 힘으로 거뜬히 성취시켰고, “하면 된다.”는 인간의지의 승리를 역사 앞에 실증하였다. 10년 성장의 힘겨운 과정에서 우리는 드디어 잠자던 민족의 얼을 일깨우고, 묻혔던 민족의 저력을 개발한 것이다. 유구한 반만년 역사를 통틀어 이처럼 희망과 의욕과 자신과 긍지와 생명력이 생동한 때가 과연 몇 번이나 있었던가?'''
제7대 대통령후보 지명수락연설 中(1971. 3. 17.)
'''공산당과 대결하는 데 있어서는 무엇보다도 힘이 있어야 한다. 공산당과 입으로 싸워서는 문제 해결이 되지 않는다. 공산당은 상대방의 힘이 강하다고 생각하면 절대 침범하지 않으며, 약하다고 생각했을 때는 언제든지 침범하는 것이 공산당이다. 이것이 지난 20년 동안에 얻은 교훈이다.'''
광주 유세 연설 中(1971. 4. 22.)
'''우리는 우리를 해치지 않는 자에 대해서는 언제나 이들을 우리의 친구로 맞아들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를 해치려는 자에 대해서는 그 누구와도 감연히 대결하여 끝까지 싸울 의연한 자세를 지킬 것이다.'''
제26주년 광복절 경축사 中(1971. 8. 15.)
'''우리에게는 많은 문화유산이 있지만, 우리의 글인 한글이야말로 민족문화의 큰 분수령(分水嶺)을 이루는 찬연한 위업이요, 자랑이라 아니 할 수 없다.'''
한글날 담화문 中(1971. 10. 9.)
'''우리는 비록 남북으로 갈라져 있다 해도 같은 말, 같은 역사, 그리고 하나의 피로 이어져 온 운명공동체다. 이데올로기는 변해도 민족은 영원하다.'''
제27주년 광복절 경축사 中(1972. 8. 15.)
'''민족의 생존권은 절대불가침의 천부적 권리다. 그러나 이 권리는 결코 남이 지켜주는 것이 아니며, 또한 지켜 줄 수도 없는 것이다. 자주-자조-협동의 정신이 바로 집단안전보장의 기본이 된다는 것은 명백하다.'''
제25주년 국군의 날 유시 中(1973. 10. 1.)
'''유신 체제는 공산 침략자들로부터 우리의 자유를 지키자는 체제이다. 큰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는 적은 자유는 일시적으로 이를 희생할 줄도 알고, 또는 절제할 줄도 아는 슬기를 가져야만 우리는 보다 큰 자유를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제27주년 국군의 날 기념식 축사 中(1974. 10. 1.)
'''나는 물론 인간인 이상 나라를 다스리는 데 시행착오가 없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당대의 인기를 얻기 위해서 일하지 않았고, 후세 사가(史家)들이 어떻게 기록할 것인가를 항상 염두에 두고 일해 왔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우리도 다른 나라 부럽지 않게 떳떳이 잘 살 수 있을까?"하는 생각이 머리에서 떠난 일이 없다.'''
기자들과의 환담 中
11. 각종 타이틀
- 최장기 재임 대통령(15년 10개월)
- 최연소 대통령(1963년 12월 기준 만 46세)
- 최다선 대통령(5~9대 대통령, 5선)
- 최장기 재직 대통령(1963년 12월 17일 ~ 1979년 10월 26일, 15년 10개월 9일)
- 가장 단명한 대통령(향년 61세)
- 유일하게 재임 중에 사망한 대통령
- 유일하게 재임 중에 영부인과 사별한 대통령
- 최초의 군인 출신 대통령
- 최초로 주치의를 둔 대통령
- 최초로 기념주화에 들어간 대통령
- 역대 대통령 가운데에 최초로 70대까지 도달하지 못하고 사망한 대통령[A]
12. 저서
- 우리 민족의 나갈 길 (1962)
- 국가와 혁명과 나 (1963)
- 민족의 저력 (1971)
- 민족중흥의 길 (1978)
13. 관련 서적
- 남산의 부장들
- 실록 민주화운동: 우리 강물이 되어 1권
- 실록 청와대: 궁정동 총소리
- 청와대 비서실 1~2권 - 김진/노재현 저.
- 김형욱 회고록 1~3권 - 김형욱/박사월 공저.
- 한국 현대사 산책 1960년대편: 4.19 혁명에서 3선 개헌까지 1~2권
- 한국 현대사 산책 1970년대편: 평화시장에서 궁정동까지 1~3권
- 박정희시대(전 3권), 박정권 18년: 그 권력의 내막 - 이상우 지음
-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 - 조갑제 지음
- 박정희 다시 태어나다
- 실록 군인 박정희 - 정운현 지음
- 개발 독재자 박정희 평전 - 김삼웅 지음
- 만화 박정희(상, 중, 하) - 조갑제,이상무 지음
- 만화 박정희 (상,하) - 백무현 지음
14. 각종 친필들과 그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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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70년대에 제작된 각종 비석들 중에 박정희 친필 비석이 심심찮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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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대통령이 1965년에 쓴 '상승해병' 휘호. 이 휘호는 대한민국 해병대사령부가 서울 대방동에 자리잡고 있었던 시절에 해병대사령관실에 걸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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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이하게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은 박정희가 1979년에 쓴 신년 휘호를 박근혜 대통령에게 선물로 주기도 하였다. 미국으로 이민간 사람이 판매하는 걸 푸틴이 개인적으로 구입하였다고 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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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예만큼 전문적으로 그림을 배우진 않은 것으로 보인다. 스케치나 수채화 그림들이 대부분. 그림을 보면 알다시피 미술을 전공한 사람이 아닌 일반인 기준에선 상당한 수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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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부고속도로 관련 구상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