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성
1. 전주시에 위치했던 조선시대 성
全州城
고려시대 공양왕 원년인 1388년에 축조된 성으로 임진왜란과 동학농민운동 때 전투가 일어난 곳으로 유명하다. 조선시대 그려진 전주부 지형도. 전주가 조선 왕조(전주 이씨)의 발상지인만큼,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모신 '경기전(慶基殿)'이 있어 조선 왕조에서 그 중요성이 매우 높은 성이었다. 동학농민운동 당시 전주성이 농민군에게 함락되자, 고종을 비롯한 조정이 뒤집어진 이유도 그 때문. 경기전에 모셔져 있던 태조의 어진을 인근의 위봉사라는 절로 피신시키기도 했다. 다만 농민군은 전주성을 점령한 뒤에도 전주성내의 관아나 향교 등 중요한 건물들에는 손도 대지 않았다.
현재 전주성은 풍남문을 제외하면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성벽 자리는 대부분 도로로 바뀌었고 지적도상으로도 성벽 자리가 그대로 남아있기 때문에 지도상으로나마 그 범위와 규모를 추정해 볼 수는 있다. 경원동우체국(구 전주우체국)을 중심으로 네 성문까지의 거리가 약 400~450m 정도이며, 전주천 쪽을 빗변으로 하는 뒤집어진 사다리꼴 모양의 성인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현재 가로망을 기준으로 했을 때 네 성문 자리와 성벽의 흔적이 남은 길들은 다음과 같다.
- 북문 (공북문): 현재 문화광장 동쪽 북문오거리 자리.
- 서문 (패서문): 옛 다가동파출소 (현재 완산경찰서 경목회) 건물 앞 삼거리
- 남문 (풍남문): 철거되지 않고 남아 있다.
- 동문 (완동문): 동문길 등용문직업전문학교 앞 사거리. 예술회관에서 홍지서림을 지나 좀 더 걸으면 나온다.
- 북측 성벽: 서측 방향은 영화의 거리이며 옛 KT&G 전주지점 건물 뒷편에서 꺾인다. 동측 방향은 문화광장에서 가톨릭 센터 방향으로 향하는 소로이며, 가톨릭 센터 앞에서 전통문화전당 방향으로 꺾인다.
- 서측 성벽: 구 KT&G 전주지점 건물 서측으로 지나는 전주객사2길-충경로에 부속된 소로로 이어지다 서문 근처에서 잠시 끊어진다. 서남쪽 부분은 전라감영2길-풍남문2길을 통해 풍남문으로 이어진다.
- 남측 성벽: 풍남문2길-풍남문-태조로이며, 중앙초등학교와 경기전 사이의 사거리(즉, 다우랑 앞 사거리) 에서 동측 성벽과 연결된다.
- 동측 성벽: 충경로 남쪽에서는 경기전길이며, 충경로를 건너서는 현무2길로 이름이 바뀌어 전통문화전당 앞까지 이어진다.
1.1. 풍남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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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남문. 대한민국의 보물 제308호.
전주성 사대문 중 유일하게 남아있는 남문의 이름은 풍남문(豊南門)인데, 이는 한고제의 고향인 풍읍 패현에서 따온 것으로, 유방이 세운 대업의 시작점이 풍패이듯이 이성계의 본관인 전주 역시 조선 왕조의 출발지란 의미에서 마찬가지로 '풍패'라고 불러 왔다. 따라서 풍패의 남쪽 문이라 하여 풍남문이란 이름이 붙었고, 서문은 패서문(沛西門)[1] 으로 불렸으나 1911년에 풍남문을 제외한 세 곳과 성벽은 일제가 시가지 확장을 핑계로 허물어 버렸다. 풍남문은 정유재란당시 불타 없어졌다가 영조 44년인 1768년에 전주감사 홍락인이 다시 세운 것인데 현재 안쪽 현판에는 '호남제일성'이라는 글씨가 쓰여 있다.
참고로 제야의 종소리를 여기서도 들을수 있다. 매년 1월 1일 0시에 풍남문 종각에서 종을 친다.
2. 동고산성(東固山城)의 옛 이름
전라북도 기념물 제44호. 1980년 첫 발굴조사 당시 발견된 기와편에 전주성(全州城)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어서 최초 건설 되었던 시기에는 전주성으로 불렸다는게 밝혀졌다.
신라 말기와 고려 초기에 축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산성인데, 전주 성황사 중창기(重創記)에는 "견훤이 세운 궁터로 전해져온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시기도 견훤이 완산주(전주)에 입성해 후백제를 세운 시기와 비슷해서 견훤이 세운 성이라는 주장이 현재까지 유력하다.
3. 전주월드컵경기장의 별칭
전북 현대 모터스의 홈구장인 전주 월드컵 경기장의 별칭이다.
4. 가수
1990년 4월 21일생. 2장의 앨범을 낸것으로 보이며 네이버에서 전주성을 치면 인물정보에 이름과 사진이 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