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싱턴 요새 공방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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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 독립 전쟁 시기인 1776년 11월 16일 뉴욕 맨해튼 섬의 워싱턴 요새에서 벌어진 영국군과 대륙군의 전투. 대륙군은 이 전투에서 패한 후 절체절명의 위기에 직면한다.
2. 배경
뉴욕 맨해튼 섬의 가장 높은 언덕에 위치한 워싱턴 요새는 1776년 6월 영국 군함이 허드슨 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걸 저지하는 목적으로 세워졌다. 그해 8월 27일 롱아일랜드 전투에서 패해 뉴욕 시를 영국군에게 내줘야 했지만 여전히 뉴욕 시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조지 워싱턴은 워싱턴 요새와 근방의 리 요새를 거점으로 삼아 영국군에 대항하려 했다. 그러나 그해 11월 할렘 하인츠 전투에서 대륙군이 패하자, 워싱턴의 부관 내더니얼 그린 장군은 워싱턴 요새 수비대에게 필요하다고 판단하면 철수하라고 통보했다.
당시 워싱턴 요새에 남겨진 병력은 로버트 마고 대령 휘하 1,200명이었다. 그들은 10월 27일 영국 프리깃함 2척이 허드슨 강을 거슬러 올라오는 것을 보고 즉시 대포 사격을 가해 큰 손상을 입혔다. 또한 11월 8~9일엔 워싱턴 요새 수비대 수십 명이 헤센군 수십 명과 교전해 적병 10명을 사살하고 대륙군 한 명이 부상당하는 소규모 승리를 거두기도 했다. 이에 자신만만해진 마고는 그린의 통보에도 불구하고 요새에서 철수하지 않고 끝까지 항전하기로 결정했다. 이러한 결정엔 몇 주 동안 증원군이 들어오면서 수비대의 규모가 거의 3천 명으로 늘어난 것도 한몫했다.
한편, 워싱턴은 워싱턴 요새를 포기하는 걸 진지하게 고려했다. 하지만 내더니얼 그린은 요새를 사수해야만 허드슨 강을 지킬 수 있고 영국군이 뉴저지를 공격하는 걸 단념시킬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 마고와 이즈라엘 퍼트넘 소장도 그린의 주장에 동의했고, 워싱턴은 이에 따라 요새를 버리지 않기로 결정했다. 이후 11월 중순 윌리엄 하우 소장이 이끄는 영국군이 워싱턴 요새로 진군하자, 워싱턴은 11월 13일에 리 요새에 도착하여 영국군을 견제하면서 찰스 리 장군에게 수천 명의 병력을 줘서 허드슨 강 동쪽에서 대기하면서 적이 뉴잉글랜드를 침공하지 못하게 했다.
11월 15일, 하우는 제임스 패턴슨 중령을 요새로 보내 항복하지 않으면 수비대 전체를 살해하겠다는 최후통첩을 보냈다. 그러자 마고는 "우리는 최후의 최후까지 요새를 방어할 것"이라고 답했다. 이에 하우는 다음날 워싱턴 요새에 대한 공세를 개시했다.
3. 양측의 전력
3.1. 영국군
- 지휘관: 윌리엄 하우 소장
- 병력: 8,000명
3.2. 대륙군
- 지휘관: 로버트 마고 대령
- 병력: 약 3,000명
4. 전투 경과
11월 6일 오전 10시, 영국군은 워싱턴 요새을 향한 공세를 개시했다. 하우는 공세를 세 갈래로 진행하기로 했다. 퍼시 준장이 이끄는 척탄병 부대는 맨해튼 섬 남쪽에서 요새로 진군했고, 매튜스 준장은 경보병과 근위병을 이끌고 할렘 강을 건너 콘월리스 장군이 이끄는 척탄병 및 보병 제 33연대와 함께 요새의 측면을 공격했으며, 크니파우센 장군이 이끄는 헤센 부대는 허드슨 강을 도하하여 요새의 전면을 공격했다.
정오경, 매튜스 준장이 이끄는 경보병 및 근위병 부대는 맨해튼 섬에 상륙하여 펜실베니아 민병대와 교전했다. 백스터 대령이 교전 중 전사하자, 민병대는 요새로 달아났다. 한편 크니파우센 장군은 킹스브리지에서 맨해튼 섬으로 건너가 요새 전면을 공격했다. 롤링스 장군의 민병대는 헤센군의 공세에 맞서 격렬히 저항했지만 결국 적의 기세에 밀려 요새로 퇴각했다.
한편 퍼시는 요새 남쪽의 캐드월레이더를 공격했고, 보병 제 42연대는 맨해튼 섬 동쪽에 상륙하여 캐드월레이더의 후방으로 진입했다. 그러자 그곳에 자리잡고 있던 대륙군은 전의를 상실하고 요새로 퇴각했다. 이후 영국군은 요새를 향해 무자비한 포격을 퍼부었고, 결국 마고는 오후 3시에 영국군에게 항복의사를 밝혔고, 오후 4시에 영국의 깃발이 요새 깃대에 나부꼈다. 이리하여 워싱턴 요새 공방전은 영국군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5. 결과
영국군은 워싱턴 요새 공방전에서 450명의 사상자를 기록했는데 그중 320명은 헤센 병사들이었다. 반면 대륙군은 59명이 전사하고 96명이 부상당했으며, 나머지는 모두 생포되었다. 18개월 후 전쟁포로에 대한 통상적인 절차에 따라 포로 교환이 이뤄졌지만, 대륙군에 복귀한 병사들은 고작 800명이었고 나머지는 억류 생활 도중 사망했다.
워싱턴은 워싱턴 요새가 함락된 지 사흘 만에 리 요새를 포기하고 델라웨어 강을 건너 트렌턴 북서쪽 펜실베이니아로 진입했다. 당시 대륙군은 워싱턴 요새마저 맥없이 내주자 사기가 바닥까지 떨어졌고 많은 민병대들이 행군 도중에 도주했다. 게다가 1776년 12월 31일이 지나면 복무 계약이 끝나서 집으로 돌아갈 민병대들이 많았는데, 그 중 계약 기간을 연장할 의향이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이 때문에 워싱턴은 이대로 전황을 바꾸지 못한다면 독립 전쟁은 내년 즈음에 종말을 고하고 자신들은 반역자로 몰려 처형당할 위기에 내몰렸다. 이에 워싱턴은 사생결단을 내기로 결심하고 12월 26일 트렌턴 전투를 감행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