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렌턴 전투
[image]
에마누엘 로이체 작, 델라웨어 강을 건너는 워싱턴.
1. 개요
미국 독립 전쟁 시기인 1776년 12월 26일 뉴저지 주 트렌턴에서 대륙군이 영국군에서 복무하던 헤센 병사들을 기습한 전투. 전쟁 발발 후 영국군에게 연전연패하던 조지 워싱턴이 불리한 전황을 반전시키는 데 기여한 전투이다. 조지 워싱턴의 급박한 열흘이라는 글을 참고해도 좋다.
2. 배경
1776년 늦가을, 조지 워싱턴의 대륙군은 뉴욕 인근에서 영국군에게 연전연패하며 델라웨어 강으로 퇴각했다. 그는 찰스 콘월리스 소령 휘하의 영국군에게 추격당했지만 전력을 최대한 보존하며 12월 초 델라웨어 강 너머 펜실베니아로 후퇴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대륙군 병사들은 거듭된 패배로 사기가 극도로 저하되었고 많은 이들이 행군 도중에 탈영했다. 게다가 1776년 12월 31일이 지나면 복무 기한이 만료되어 집으로 돌아갈 병사들이 많았는데, 그 중 복무 기한을 연장할 의향이 있는 이는 거의 없었다. 만약 전황을 극적으로 바꾸지 못한다면, 대륙군은 1776년이 지날 시점에서 완전히 붕괴될 가능성이 높았다.
12월 14일, 영국군 총사령관 윌리엄 하우 소장은 추격을 중지하고 그의 군대를 겨울 숙영지에 배치했다. 또한 그는 뉴저지 북부 전역에 일련의 전초기지를 세웠다. 그 사이 워싱턴은 각지에 흩어진 병력을 규합했고 12월 20일 존 설리번 소장과 호레시오 게이츠 소장이 이끄는 두 개의 부대와 합류해 약 2,700명을 추가로 확보했다.
이후 워싱턴은 12월 25일 장교들에게 트렌턴에 있는 헤센 수비대를 기습 공격하자고 제안했다. 당시 워싱턴은 트렌턴에서 영국 충성파 행세를 하던 첩보원 존 허니만이 제공한 정보를 통해 델라웨어 강 건너편의 적군의 방비 상태를 확인했고, 이 중 트렌턴에 주둔한 헤센군의 기강이 해이해 기습 공격시 큰 성과를 거둘 수 있음을 파악했다.
워싱턴은 세 지점에서 델라웨어 강을 건너기로 했다. 첫째는 로드 아일랜드 연대, 일부 해병대, 델라웨어 민병대 및 두 개의 대포로 구성된 캐드월레이더 대령이 지휘하는 병력이었고, 두번째는 유잉 준장 휘하의 민병대였으며, 셋째는 워싱턴 본인이 이끄는 2,400명의 민병대였다. 워싱턴 본인은 곧장 트렌턴으로 진격하고, 다른 두 부대는 다른 지점으로 도하한 뒤 우회 공격하기로 했다. 이후 대륙군은 12월 25일 밤 델라웨어 강 기슭으로 은밀하게 이동했고 12월 26일 새벽에 작전을 개시했다.
3. 양측의 전력
3.1. 대륙군
- 지휘관: 조지 워싱턴
- 병력: 2,400명. 대포 18문
3.2. 헤센군
- 지휘관: 요한 라흘 대령
- 병력: 1,600명, 대포 6문
4. 전투 경과
12월 26일 새벽 3시, 워싱턴과 민병대 2,400명은 델라웨어 강을 은밀하게 건너기 시작했다. 이때 워싱턴은 전투 시 통상적으로 끌고 가는 야전 대포 6문의 3배에 달하는 18문을 한꺼번에 끌고 갔는데, 이는 영국 지원군이 당도하기 전에 트렌턴의 헤센군을 가능한 빨리 제압하려는 의도였다. 그러나 유잉 준장 휘하 민병대는 눈보라가 심한 데다 얼음이 두꺼워서 강을 건너지 못했고, 캐드월레이더 대령의 부대는 강을 건너는데 성공했지만 대포를 끌고 갈 수 없게 되자 펜실베니아로 돌아갔다. 결국 워싱턴은 별동대의 지원 없이 단독으로 트렌턴을 공격해야 할 상황에 몰렸다.
한편 헤센군 사령관 요한 라흘 대령은 트렌턴 마을 주변에 방어 진지를 건설하라는 명령을 받았지만 눈보라가 거센 날에 굳이 병사들을 고생시키고 싶지 않아서 명령 수행을 미뤘다. 그리고 트렌턴 전투 전날 밤 저녁 식사를 하던 라흘 대령은 첩보원으로부터 대륙군이 기습하려 한다는 정보를 전달받았지만 순찰대를 정기적으로 파견하는 것 외엔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그나마 그 순찰대는 12월 26일 새벽에 잠깐 순찰한 뒤 금방 귀환해버려서 워싱턴이 트렌턴으로 접근하고 있는 걸 발견하지 못했다.
트렌턴 인근에 접근한 워싱턴은 내더니얼 그린 소장의 사단을 트렌턴 북쪽으로 이동시켰고 설리번 소장의 사단을 강길을 따라 이동시켜 트렌턴 서쪽과 남쪽을 공격하게 했다. 두 부대는 12월 26일 오전 8시 직전에 트렌턴 외곽에 도착했다. 그린의 부대는 먼저 공격을 개시해 적군의 시선을 자신들에게 끌여들였고 프린스턴으로 가는 퇴로를 차단했다. 그 동안 헨리 녹스 대령의 포병대는 킹 스트리트 언덕 꼭대기에 대포를 설치하고 트렌턴 마을을 향해 포격을 가했다. [1] 한편 설리번의 부대는 탁 트인 강길을 통해 서남쪽으로 트렌턴으로 진입하여 어순핑크 개울 다리를 봉쇄했다.
라흘 대령은 대륙군의 기습에 맞서기 위해 그의 연대를 규합하려고 시도했다. 그 후 그는 킹 스트리트 언덕의 대륙군 포병대를 공격하려 했지만 대륙군이 18문에 달하는 대포로 포격을 퍼붓는 바람에 실패했다. 또한 어순핑크 개울 다리를 탈환하고자 일부 부대를 파견했지만 역시 격퇴당했다. 라흘은 마을 외곽 들판에서 병력을 다시 모은 뒤 반격을 시도했지만 끝내 실패했고 도중에 가슴에 총상을 입고 즉사했다.
워싱턴은 적군을 인근 과수원으로 몰아넣고 항복을 강요했고, 결국 살아남은 헤센군 전원이 대륙군에게 항복했다. 이후 워싱턴은 프린스턴을 공격해 전과를 확대하려 했지만 캐드왈레이더 부대와 유잉 부대가 강을 건너지 못했다는 걸 뒤늦게 깨닫고 델라웨어 강 건너편으로 철수하기로 결정했다. 이리하여 트렌턴 전투는 대륙군의 승리로 종결되었다.
5. 결과
대륙군은 트렌턴 전투에서 4명이 전사하고 8명이 부상당했다. 반면 트렌턴의 헤센군은 22명이 전사하고 918명이 생포되었으며 500명 만이 전투 중에 탈출했다. 트렌턴 전투는 규모가 크지 않긴 했지만 대륙군에게 자신감을 불어넣기에 충분했고, 1776년 12월 31일에 복무 기한이 만료되는 장병들은 승리에 고무되어 기한을 연장하는 데 동의했다.
이후 워싱턴은 12월 30일 델라웨어 강을 다시 건너 프린스턴으로 진군하다가 찰스 콘월리스 소장의 영국군 8천 명이 자신을 추격하는 걸 알게 되자 이들을 요격하기로 결심했다. 이리하여 1777년 1월 3일, 양군은 프린스턴 전투에서 맞붙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