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충연
1. 개요
元忠淵
(1912 ~ 2004)
대한민국의 군인. 원충연 반혁명 사건의 주모자이다.
2. 생애
2020년 7월 2일 오마이뉴스
일제강점기 시기에 함경남도에서 태어나서 일본 주오대학에서 정치학을 전공한 엘리트로 일제 패망 이후 귀국하여 서울대에서 교편을 잡았다. 그러던 1948년 여수·순천 10.19 사건을 보고 군에 철저한 사상무장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정훈 1기로 군에 자원입대한다. 여기서 알 수 있듯 원충연의 정치성향은 철저히 우파였다.
이후 한국전쟁에 참전했으나 정훈이라는 병과 특성상 일선에서 교전을 펼치진 않았다. 그래도 전후 주변의 추천을 받아 미국 참모학교로 유학을 떠나기도 했고, 유학 이후에는 서독 주재 대한민국 대사관 국방무관으로 재직하기도 했다. 원충연은 군 내에서 보기드문 정치학을 전공한 엘리트였으며 서구사회에 대한 이해가 깊었기에 이런 업무에 제격이었다.
1961년 5월 16일, 쿠데타 당일 박정희에게 혁명을 함께 하자는 제안을 받고 군사혁명위원회(이후 국가재건최고회의) 공보실장, 즉 쿠데타군의 대변인이 된다. 원충연 본인은 1981년 인터뷰에서 쿠데타에 대해 몰랐고 당일 제안을 받았다고 이야기하는데, 당시 관계자들이 모두 사망한 현 시점에선 처음부터 포섭된 것인지 본인 주장대로 쿠데타 당일에 합류한 것인지는 불분명하다. 단, 항목 상단에 링크한 오마이뉴스 기사에서 추측한 대로 원충연은 서구사회에 대한 이해가 깊은 정치학과 출신인 데다 미국 유학, 서독 대사관 근무경력 등이 있어서 쿠데타 정부의 대외승인을 목적으로 원충연을 공보실장으로 기용한 듯.
그러나 원충연은 해당 직무를 9달간 수행한 후 야전부대 참모로 발령난다. 이유는 불분명한데, 단순히 박정희 등 쿠데타 지도부와 원충연의 의견이 안맞아서일수도 있고, 쿠데타군의 얼굴마담이었던 장도영이 이북지역 출신 군 인사들을 요직에 앉혀 박정희를 견제해보려다 숙청당한 사건의 연장선상일수도 있다.[1] 그밖에, 1961년 11월 박정희의 제1차 방미가 사실상 실패로 돌아간 것에 대한 책임 추궁일 수도 있다. 박정희는 1차 방미에서 쿠데타 승인이라는 성과는커녕, 조속한 민정이양을 하지 않으면 모든 원조를 끊어버리겠다는 케네디의 통보를 받고 와야했기에 속이 부글부글 끓던 중이었으니. 심지어 프레스센터에서 연설할 때 연설문이 양면이었으나 이를 알지 못한 박정희는 앞면만 읽어 일부 내용이 누락되고 문맥 안 맞는 연설을 하는 일까지 일어났다.[2] 61년 5월 쿠데타 및 원충연 공보실장 임명, 7월 장도영 숙청, 11월 방미 실패, 62년 1월 공보실장 핵임으로 이어지는 타임라인을 보면 장도영 숙청의 연장선보다는 방미 실패에 대한 책임으로, 대외승인 목적에서 기용한 원충연에 책임을 추궁이 더 말이 되기는 한다.
이렇게 원충연은 쿠데타군과의 짧은 인연을 마무리짓고 일선으로 갔다.
쿠데타 이후 재판에 넘겨져 사형을 선고받았다가 감형되어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복역 중 1981년 출범한 제5공화국 정부에 의해 형집행정지 처분을 받고 석방되었다. 이는 지난 정부와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격하를 통해 집권의 정당성을 확보하려 한 차원으로 보인다. 원충연은 이후 캐나다로 이민을 가 2004년 생을 마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