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충연 반혁명 사건
1. 개요
1965년 5월, 실행 직전에 발각되어 미수에 그친 군 일각의 쿠데타 계획. 주모자인 원충연 대령의 이름을 따고, 당시에는 5.16 군사'''혁명'''에 반하였다고 하여 원충연 반혁명 사건이라 불린다. 국가재건최고회의 시절에도 몇 차례의 쿠데타 음모가 군정에 의해 발각 혹은 조작된 적은 있지만 제5대 대통령 선거를 통해 민정이양이 되어 제3공화국이 출범한 이후에는 유례가 없는 사건이었다.
군정시절의 쿠데타 음모들이 대부분 조작 의혹이 짙은데 비해서, 이 경우는 주모자인 원충연 본인이 순순히 인정한 실체가 있는 사건이다.(1981년 3월 4일 원충연의 중앙일보 인터뷰 #)
2. 원인
- 당국 - 진급불만 및 경제적 문제설
사실 진급불만 문제가 아주 말이 안되는 건 아니었다. 주모자인 원충연 대령부터가 1961년부터 계속 대령에 머물러있었고, 당시 보도된 핵심 가담자 대다수가 중령 혹은 대령이었으며 이들 대다수는 장성으로의 진급이 어려운 상황이었다. 당시 진급은 아무래도 5.16 가담자들이 우선시될수밖에 없었는데, 주모자 원충연 대령부터가 '''군사혁명위원회 공보실장''' 출신이었음에도 비교적 조기에 혁명 수뇌부에서 이탈하여 계속 진급이 막히고 있었으니 다른 사람들은 오죽하랴.
- 원충연 본인의 주장 - 민정이양을 통한 군사혁명 정신 회복, 굴욕적 한일협정 반대
여기에 굴욕적인 한일협정을 폐기하겠다고 주장한 것도 핵심적 명분이다. 당시는 독립한지 20년 정도밖에 안지났기에 일본에 대한 감정이 남녀노소, 지역, 종교, 정치와 이념을 떠나 매우 드세었으며 심지어 군부 내에서도 한일협정에 반대한다는 의사를 공공연히 밝히는 장성들이 있었다. 쿠데타 동지를 규합하고 쿠데타에 대한 국민 지지를 받기 위해 한일협정 반대는 매우 중요한 명분이었다.
3. 계획
핵심 가담자들은 다음과 같다.
- 원충연 - 대령, 정훈1기. 육군정훈학교 부교장
- 박인도 - 대령, 육사7기. 2군단 포병사령관
- 안중광 - 대령, 육사7기. 육군본부 관리참모부 심사분석과장
- 이인수 - 대령, 육사10기. 육군본부 인사참모부 제도실장
- 우덕주 - 대령, 육사8기. 육군본부 정보참모부 기획관리과장
- 문원석 - 대령, 육사10기. 2군단 작전참모
- 김문한 - 중령, 육사10기. 육군본부 작전참모부 상황실장
문제는 정작 수도 서울에서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이 없었다는 것이다. 5.16은 수색의 30사단, 부평의 33사단, 김포의 해병 제1임시여단 등 쿠데타군이 동원한 병력 다수가 서울 인근에 주둔해 있었지만 원충연과 그 동조자들이 확보한 병력은 사실상 2군단 내 일부부대로 한정되어 있었으며 2군단의 주둔지는 춘천 등 강원도 일대로 서울과 거리가 멀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원충연은 서울에서 비교적 가까운 8사단을 동원하고자 했고, 동조자인 안중광을 통해 8사단장 장경석 및 예하 부대원들의 포섭을 시도한다. 2020년 장경석의 인터뷰에 따르면 원충연의 동조자인 안중광(대령, 육사7기)이 자기를 찾아와 가담을 요청하긴 했지만 거부했다는 것이다.2020년 6월 3일 아주경제 장경석 장군 인터뷰 그러나 방첩부서에서 이야기를 나눈 것을 다 알고 있었고 반란음모를 알면서도 묵인하고 신고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자기까지 억울하게 연루되었다는 것이다.
어쨌든 원충연은 8사단 및 기타 확보한 병력으로 서울을 들이치고 대통령과 행정부서를 장악하고자 하였다. 문제는 5.16 쿠데타를 성공시킨 수뇌부가 역쿠데타에 대항하기 위해 수도경비사령부를 창설했다는 것이고 당연히 이들은 서울 한복판에 주둔하고 있었다. 여기서 나서는 것은 작전참모부 상황실장이라는, 실동원병력은 없지만 유사시 상급자들을 대신하여 주요부대에 대한 동원 및 투입을 결정하고 정보를 전파하는 매우 중요한 위치에 동조자인 김문한 중령이 있었다는 것. 김문한은 쿠데타 발동과 함께 여러 역정보를 퍼트리고 정보를 통제하여 진압군의 활동을 차단할 예정이었다.
이들이 최종적으로 거사일로 삼은 것은 1965년 5월 16일, 박정희의 방미일이었다. 국가원수의 부재를 틈탄다는 전형적인 쿠데타 계획이라는 말도 있고, 역으로 방미를 위해 대통령이 수도 서울을 떠나 김포공항으로 향하여 수경사 등 정부군의 손에서 벗어나는 순간 대통령을 납치하려 했다는 말도 있다. 이때 미국 대통령 린든 B. 존슨은 전임자인 존 F. 케네디와 달리, 베트남 전쟁에서 한국군의 파병을 중요하게 여기고 있었기에 방미를 위한 기체가 없던 한국에 자신의 전용기까지 보내줄 정도로 열성적이었고,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자격으로 두 차례 방미했을 적 케네디로부터 푸대접을 받았던 박정희는 민선으로 정식 선출된 대통령 자격으로서의 첫 방미에다가 존슨도 자신에게 우호적이었기에 매우 들떠 있었으니 쿠데타군 입장에선 충분히 기회였을 것이다.
4. 결과
이 쿠데타 계획은 비교적 일찍부터 방첩부서에 노출된 상태였다. 베트남에 비전투임무로 파병을 갔다 돌아와 수도사단 기갑대대장을 맡고 있던 이상열(갑종1기) 중령과 원충연 대령이 접촉한 것이다. 누가 먼저 접촉했는지는 모르지만 원충연 입장에선 수도사단의 전차대대라는 핵심 전력의 지휘관이니 포섭을 시도해볼만한 사람이었다. 더군다나, 원충연의 동조자 중 한국군 기갑병과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던 육군본부 전사과장 이성재 대령(육사10기)이 있었으니 기갑학교 경력이 있는 이상열과 연을 트긴 쉬웠을 것이다.
결국 원충연과 이상열은 서울 한 여관방에서 몰래 만나 의기투합을 하는데, 이상열이 불안감을 느낀 건지 처음부터 그럴 작정인지 몰라도 이상열은 대화내용을 모두 녹음한 다음 이를 육군 방첩대장이던 윤필용에게 제출한다. 당연히 방첩부서는 뒤집혀져서 극비리에 주요 가담자들에 대한 조사를 시작했고, 5월 초 방첩대는 기습적으로 원충연과 그 동조자들을 일거에 검거한다.
이후 방첩대와 사법당국은 불고지죄와 자금제공 등의 혐의를 들어 추가로 군 장교 일부와 행정부 관료 등 민간인, 심지어 야당 국회의원이던 김형일까지 체포하였으나 최종적으로는 절반 이상이 무죄로 풀려났고 원충연, 박인도가 사형, 나머지 핵심가담자 다수는 징역을 선고받았고 문원석은 선고유예, 이성재나 장경석, 김형석 등은 최종적으로 불기소처분되었으나 불기소처분된 군 인사들은 대부분 강제예편당했다.
5. 후일담
원충연·박인도엔 사형. 1965년 12월 23일 중앙일보
주모자 원충연은 감형되어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복역중 1981년 출범한 제5공화국 정부에 의해 형집행정지 처분을 받고 석방되었다. 이는 지난 정부와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격하를 통해 집권의 정당성을 확보하려 한 차원으로 보인다. 원충연은 이후 캐나다로 이민을 가 2004년 생을 마감했다.
밀고자 이상열은 그 대가로 1년 뒤인 1966년 대령, 다시 1년 뒤인 1967년 준장으로, 2년 뒤인 1969년 소장으로 고속 진급하는 출세코스를 탔으며, 1970년 주 말레이시아 대사관 무관으로 부임했다가 1971년 예편 후 아예 외교관으로 전업한다. 그는 이후로도 한국 현대사의 격동에 또 다시 이름을 올리게 되는데, 프랑스 공사로 재직 중이던 1979년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 실종 사건에 관여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2006년 사망했고, 죽을 때까지 원충연 사건이나 김형욱 사건에 대해 증언을 따로 남기지 않았다. 안치용 기자는 자신의 저서에서 이상열의 외교관 전업에 대해, 국내에 남아있을 경우 원충연 사건 가담자들 혹은 그 후손들에 의해 보복당할 것을 우려하여 국내를 떠나 외교관 생활을 한 것이라 추정한다.[1] 다만, 이 내용이 나오는 부분이 원충연 사건을 전담하는 파트가 아니고, 차지철의 동생 차상철이 미국에서 살인당한 사건에 결부되어 과거 군사정권 시절 인물들 다수가 정권이 바뀐 후 미국 등으로 망명성 이민을 떠난 것을 이야기하며 곁다리로 언급한 정도다. 실제 이상열은 외교관 생활 중에도 중간에 중앙정보부에 기용되어 국내 복귀도 했었고, 은퇴 후에는 한국에서 살았다.
윤필용은 전격적으로 이 사건을 수사, 해결하여 박정희의 신임을 얻었고 이후 1.21 사태로 경질되어 잠시 부침을 겪었으나 이내 재기하였으나 윤필용 사건으로 몰락했다.
원충연 사후, 원충연의 아들은 아버지는 쿠데타를 일으키려 한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를 회복하기 위한 것이었다며 재심을 청구했다. 그러나 법원은 명백히 쿠데타가 맞다고 보아서 1심에서 사형이 징역 17년으로, 2심에서 다시 징역 15년으로 감형되었을 뿐이고 대법원은 2020년 6월 30일 징역 15년의 원심을 최종 확정지었다.# 원충연의 복역기간이 1965년 5월 7일 체포 이후 특사로 석방된 1981년 3월 3일까지로 15년 살짝 넘으니 실제 복역기간에 맞추어 형량이 선고된 셈.
그밖의 주요 가담자들도 길게는 15년에서 짧게는 5년 남짓한 징역생활을 하고 석방되었다. 석방 이후에는 아무래도 반란군 출신이니 경찰과 중앙정보부의 요시찰대상이 되긴 했지만, 유신 시절 쥐도새도 모르게 실종되고 의문사당하던 걸 생각하면, 정권 초기에 대놓고 반란을 모의하다 붙잡힌 결과로는 생각보단 평온(?)했다고 해야 할 듯. 주요 가담자 중 무죄를 선고받은 문원석 대령은 이후 금융기업에 취직하여 활동했다.#
6. 미디어
명백한 군사 쿠데타 음모임에도 '''다뤄진 적이 없다.''' 3공화국 시절을 배경으로 하는 정치영상물이 많지도 않고, 이 쿠데타 아니어도 3공화국을 다루는 영상물들은 '''5.16 쿠데타''', '''황태성 사건''', '''제5대 대통령 선거''', '''6.3 항쟁과 한일수교''', '''베트남 전쟁''', '''사카린 밀수 사건''', '''1.21 사태''', '''제7대 대통령 선거'''로 이어지는 격동의 시기 굵직굵직한 사건들에 집중하느냐 채 봉기도 못하고 밀고로 일망타진된 쿠데타 사건에 할애할 시간따윈 없다. 이런 정치적 사건들 말고도 '''경부고속도로'''와 '''포항제철''' 같은 한국 경제에 있어 중요한 일이 일어난 것도 이 시기인지라.
드라마 제3공화국에서 배우 윤순홍이 원충연 역을 맡기는 했지만, 원충연의 쿠데타를 다루는 것이 아닌, 5.16 직후 군사혁명위원회 공보실장으로서 등장하는 장면 뿐이다.
7. 유사사건
이념이나 지향성은 거리가 멀긴 하지만, 그 계획이나 구도가 여러모로 태평양 전쟁 말기 일본제국 최후의 쿠데타인 궁성사건과 비슷하다.
- 주동자의 인적구성 유사성 : 궁성사건의 주동자들은 대본영의 좌관(영관)급 참모장교들이고 이 사건의 주동자들 상당수는 육군본부의 참모장교들이었다.
- 병력동원 문제 : 주동자 인적구성의 연장선으로, 양측 모두 군 최고지휘부의 참모장교들이라 병력을 동원할 수 있는 실전부대 지휘관이 없었고 때문에 수도(각각 도쿄와 서울)와 가까운 부대(일본의 경우 제국육군 근위 제1사단, 한국의 경우 제8보병사단)의 지휘관을 포섭하려 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양측 모두 포섭에 실패해 병력 동원에 실패했다.
[1] 안치용, 시크릿 오브 코리아(타커스.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