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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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 제국과 대한민국의 군인.
2. 생애
2.1. 초기
1923년 1월 23일 평안북도 용천군에서 태어났다. 신의주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토요대학 사학과에서 수학했다. 일본군 학병으로 장준하와 함께 중국에 주둔했던 쓰카다 부대에서 복무하였다.
장준하의 일본군 탈영과 독립운동 여정을 담은 수필 '돌베개'에 등장하기도 하는데, 책에는 '육군참모총장이었던 모 장군'이라고 칭하고 실명을 밝히지는 않는다. 당시 일본군 병사였던 모 장군은 일본인 고참병들이 남긴 음식을 혼자 먹기 위해 더러운 손을 밥그릇에 넣어 뒤돌아 혼자 먹는 추태를 보인다. 조선인 탈주병이 생겨 부대 내에서 조선인들에 대한 눈초리가 사나워지고 생활이 고달퍼지자 조선인들이 모여있는 내무반 안에서 조선인 동료들을 향해 칼을 뽑아들고는 "이제 또 누가 도망치겠느냐? 이제 도망가는 놈은 내가 찔러죽일테다!"라고 호통치는 등 모습이 부끄럽기 그지없었다고 한다. 반면에 장도영의 자서전 '망향'에서는 같은 부대의 장준하가 탈영병 1호였다며 탈영 당시 성공하기를 기원했다고 나온다.
2.2. 군인의 길에 들어서다
1945년 8.15 광복 후 고향으로 돌아와 모교인 신의주동중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가 1945년 11월 23일 신의주 반공학생사건이 발생한 후 월남하여 미군정청 군사 고문으로 있던 이응준의 권유로 군사영어학교에 입교해 1946년 3월 군사영어학교를 졸업하고 육군 참위(소위)로 임관했다. 1950년 6.25 전쟁 당시 육군본부 정보국장이었는데 그 아래 북한반장 김종필과 문관 박정희가 있었으며 38선이 위험한 상태인 것을 알고 계속 경고는 했지만 위에서 받아들이지를 않았다.
6.25 전쟁이 터지고 나서는 박정희의 결연한 인품과 불쌍해 보이는 어깨를 보고 상부에 건의하여 현역으로 복귀시켜 준다. 숙군 작업 중 걸려 총살형에 처해질뻔한 것을 구해준 것은 같은 만주군 라인인 백선엽이였고 박정희를 데리고 있다가 현역으로 복직시켜 준 것은 장도영이였다. 이 때를 포함하여 5.16 군사정변까지 장도영과 박정희는 총 5번 상하 관계로 함께 근무한다.
2.3. 6.25 전쟁: 6사단장 시절
1950년 10월 준장으로 진급하여 부상을 당한 김종오 장군의 뒤를 이어 제6사단장을 맡았다. 제6사단은 전쟁 초기 춘천-홍천 전투부터 선전한 정예 부대였으나 1951년 4월에는 부대의 가장 흑역사인 사창리 전투에서 중공군의 일격을 받아 참패를 당했다.
사창리 전투의 패배로 완전히 체면을 구긴 장도영은 절치부심하여 1951년 5월 중공군의 공세 당시 사창리 전투의 패배에서 특히 책임이 컸던 제2연대의 주 저항선 후퇴를 불허하고 북한강 남안 고지에서 사주 방어에 나서도록 한다. 이는 자칫하면 연대 전체를 포위 섬멸당할 위험에 빠뜨리는 도박과도 같은 용병술이었으나 결과적으로는 제2연대의 방어 진지를 주 저항선으로 오인하고 전 병력을 쏟아부은 중공군 제63군의 실책이 겹치면서 한국군의 최대 대승으로 꼽히는 용문산 전투와 파로호 전투로 반전되었다. 이 시기는 군인으로서 그의 최전성기였으며, 6.25 전쟁 중 사단장으로서 최고의 전공을 세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1953년 휴전 후 육군참모차장, 2군 사령관 등을 지냈다.
2.4. 5.16 당시의 행적
제2공화국 출범 이후 장면 국무총리에 의해 육군참모총장으로 임명되었다.[3] 1961년 5.16 군사정변을 앞두고 장면은 장도영에게 박정희가 쿠데타를 일으킬 것이라는 정보를 들었다고 하였으나 장도영은 장면에게 결코 그런 일은 없을 것이라고 하며 그를 안심시켰다.[4] 하지만 정작 5.16 군사정변이 터지자 진압하는 것도 아니고 적극 가담하는 것도 아닌 모호한 태도를 보여[5] 사실상 군사정변을 방조했다는 의혹이 일기도 했다.당시 군사정변에 가담했던 장교의 평가 본인은 훗날 자신에 관한 다큐멘터리에서 이에 대해 극구 부인했는데 특무대장 이철희가 계속 해서 박정희 쪽은 아니며 오히려 족청 세력에서 쿠데타 위협이 있다는 역정보를 보고해서 상황 판단을 잘못하고 있었다고 한다. 장도영의 주장은 윤보선 대통령이 "계엄령은 법적 절차를 따라야 하며 아군끼리 피를 흘리지 말라!"라고 하여 쿠데타 세력이 주장한 계엄령을 합법적이 되도록 지원하고 무력 진압을 금지하는 것으로 해석하여 이에 따랐다는 것이다. 아군끼리 피를 흘리지 않기 위해 계속해서 "돌아가지 않으면 체포하겠다!"만 외치다가 결국 사태 수습을 위해 쿠데타 세력의 얼굴마담으로 추대된다. 사실 주한미군과 이한림 제1야전군사령관은 쿠데타 진압을 강력하게 주장했지만 윤보선 대통령과 장면 국무총리가 거부한 상황이었다. 대통령과 국무총리가 진압을 거부한 마당에 그들의 지시를 따라야 하는 장도영 육군참모총장은 할 게 없었으며 오히려 이한림 사령관 등을 다독이는 역할을 맡았다. 서울로 밀고 들어온 대한민국 해병대는 대한민국 해군 소속이고 제5군단 포병대는 주한미군 소속이었으며 그들의 진퇴를 주장할 명령권도 없었다. 반대로 주변은 전부 쿠데타군이었지만 장도영의 지시에 따르는 병력은 헌병대 일부와 30사단 내 1개 중대 정도였다.
5.16 군사정변 직후 장도영은 박정희 세력에 의해 포섭되어 군사혁명위원회 의장, 계엄사령관,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내각 수반, 국방장관으로 추대되었다. 명목상으로는 박정희보다 높은 5.16 군사정변 주요 인물이었지만 민심이 어느 정도 수습되자 1961년 7월 2일 김종필 등 육군사관학교 8기생 주도로 정변 주체 세력들에 의해 전격 체포되면서 숙청되었다.# 1962년 3월 10일 특수범죄처벌에관한특별법상 반혁명 행위죄로 무기징역이 확정되었으나 1962년 5월 2일 형집행 면제로 풀려났고 바로 미국으로 떠난다. 1968년에 잠시 귀국하여 박정희와 만났다고 전해진다. #
2.5. 만년
도미 후 미시간 대학교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고 1969년 위스콘신 대학교 교수가 되었다가 1971년부터 1993년 정년을 맞을 때까지 웨스턴미시간 대학교 교수로 재직하였다. 2001년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제작진과 직접 인터뷰를 했으며 2011년 서울신문과 인터뷰도 했었다.#
은퇴한 후 치매와 파킨슨병으로 투병 생활을 하다가 # 2012년 8월 3일 미국 플로리다 올랜도에서 향년 89세로 사망했다.#
3. 대중매체에서
- 1993년 MBC 드라마 제3공화국에서 배우 노주현이 연기했다. 비열한 인물로 역을 맡았으며 장도영이 전작보다 더 깎아내려진 제3공화국의 경우 장도영 본인이 직접 인터뷰한 장면이 방영되기도 했는데 장도영이 인터뷰에서 한 해명을 나레이션이 직접 비판하는 장면까지 있다.
[1] 알츠하이머, 파킨슨병 합병증으로 인해 사망.[2] 내각수반 겸직[3] 후임인 김종오 중장이 육군참모총장 임기 중 대장으로 진급하면서 육군참모총장은 대장이 부임하게 된다. 마지막 중장 육군참모총장인 셈이다.[4] 김종필의 증언에 의하면 박정희가 장도영을 포섭하고자 직접 혁명 계획서를 전달했다고 한다.[5] 중앙일보 2015. 4. 6 김종필 소이부답 기사 '거사를 준비하고 있던 4월 10일에도 그는 박정희 소장을 통해 내가 작성한 혁명 계획서를 전달받았지만 끝내 반환하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 정변 세력의 편을 들어준 줄 알았더니 갑작스럽게 5·16 새벽이 되자 한강 다리를 건너던 혁명군에 발포를 명령하더니 갑작스럽게 오후에는 혁명 지지 쪽으로 돌아서는 오락가락하는 모습을 보였다'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