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창휘
'''韋昌輝'''
병음: Wei Changhui
(1823 또는 1826 ~1856.11.2)
1. 개요
태평천국의 지도자로 정식 명칭은 '''후호우부군사북왕(後護又副軍師北王)'''이다. 북왕(北王)으로 알려졌으며, '''태평천국 최고의 명장인 석달개를 태평천국에서 쫓아낸 장본인이다.'''
2. 태평천국 운동 이전
위창휘는 광시성 구이핑 금전촌의 부유한 토착민으로 땅과 전당포를 가지고 있었다. 홍수전과 풍운산처럼 과거에 응시했으나 실패했고 돈으로 직위를 사서 금전촌에서는 부자들 중 멸시당하는 처지였다고 한다.
위창휘는 풍운산과 홍수전에 의해 입교하였다.[1]
초기의 태평천국 세력은 자신들을 지지해주는 물주가 필요한 처지였는데 위창휘는 이 역할에 부합했다. 굉장한 부자라서 집에 12개의 제련소를 두고 무기를 만들었으며 이 무기들은 홍수전이 신의 계시로 무기를 얻었다면서 선전활동을 할 때 유용히 사용됐다. 그리고 위창휘는 이 공로를 인정받아서 1848년 여름, 태평천국의 주요 지도자 자리를 인정받았다.위창휘는 풍운산과 홍수전에 의해 입교하였다.[1]
3. 태평천국 운동
위창휘는 전쟁 초기부터 태평천국의 최고 장수였다. 1851년 12월 4일 홍수전은 위창휘를 북왕(北王)으로 칭했고 육천세를 받을 수 있도록 했다. 태평천국이 난징을 점령하자, 위창휘는 주변 지역의 방위를 강화하고 난징의 식량 조달을 담당했다.
4. 천경사변과 죽음
양수청은 그의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위창휘를 모욕하고 위협하기 시작했다.[2] 그는 먼저 자신에게 위협이 될 만한 북왕 위창휘[3] , 익왕 석달개[4] , 연왕 진일강[5] 을 각각 다른 지방으로 보내 버린다. 홍수전은 드디어 양수청이 자신에게 매우 심각한 위협이 된다는 것을 알아내고 위창휘, 석달개, 진일강을 난징으로 급히 호출했다. 1856년 9월 1일 위창휘가 3,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난징에 입성했고 진일강은 이미 입성해 있었다. 홍수전과 동료들과의 합의 끝에 아직 돌아오지 않은 석달개의 난징 입성을 기다리지 않고[6] 양수청을 제거하기로 결정한다. 그날 反양수청군은 동왕궁을 기습해 양수청이 탈출하기 전에 살해한다. 그러나 아직 양수청의 무리 6,000 명이 남아 있었다. 홍수전과 그의 장수들은 이 자들에게 함정을 파기로 결정하고 홍수전은 위창휘와 진일강을 체포하고 양수청의 무리들을 초대해 그들이 두들겨 맞는 것을 보게 한다.[7] 동왕부의 핵심 인사가 안으로 홍수전의 천왕부 안으로 들어가자 동왕부 인사들은 투옥되었다. 다음 날 아침, 그들은 모두 처형되었다. 이후 양수청의 추종자들에 대한 학살이 3개월 동안 이어졌다.
석달개가 그 해 10월에 난징에 도착했고 이러한 학살극에 대해 위창휘를 비판했다. 위창휘는 돌연 석달개가 배신자라고 주장했다. 자신이 다음으로 죽을 것이라고 경고받은 석달개는 난징에 도착한 그 날로 난징에서 도망쳤다. 그날 밤 위창휘와 진일강은 석달개의 저택을 급습해 그의 가족과 시종들을 죽였다. 석달개는 10만의 병력을 이끌고 위창휘와 진일강의 머리를 요구했다. 위창휘는 진일강에게 석달개의 공격을 막으라고 지시하고 본인은 홍수전을 투옥시키려 시도했다. 홍수전은 이 계획을 가로챘고 홍수전의 경호원들은 위창휘를 죽였다. 진일강도 다시 불려들여진 뒤 곧바로 죽임을 당했다.
5. 평가
위창휘는 배상제회 신도들을 경제적으로 지원하고 보호해 줌으로써 그들이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 이후에 난징을 점령하고서도 그는 난징에 없어서는 안 될 귀중한 존재였다. 난징의 식량 조달을 담당했으며, 제일 중요한 것은 그가 양수청에게 제대로 맞서는 유일한 인물이었다는 것이다.[8] 그러나 설득이 안 되면 하느님 불러서 조지는 양수청의 행동은 천경사변을 불러왔고 이 과정에서 위창휘는 양수청에게 당한 원한으로 인해 무자비한 학살을 벌이고, 이를 비판한 석달개의 일족까지 멸살하는 등 학살자로 변해 버렸다. 그가 죽은 후 태평천국은 양수청과 위창휘의 빈자리를 채우긴 커녕 무능한 홍수전 일가와 띨띨한 왕들이 정치를 독식하는 권력구조로 인해 썩어가게 된다.
[1] 정확히는 광시성에 포교 와서 돌아다니던 풍운산이 위창휘의 집에 숙박하면서 포교에 성공한 것. 과거에 실패하고 금전촌에서 미미한 가문이라 멸시당하던 위창휘의 열등감을 풍운산이 잘 파고들어서 성공했다.[2] 홍수전은 사실상 정사를 팽개친 상태였고 다른 왕들은 위창휘만큼 위세를 갖추지 못했다. 그렇다고 이 양반이 다른 왕들에게 모욕을 주거나 위협을 하지 않은 건 아니다.[3] 양수청은 위창휘의 아버지를 자신의 가마가 지나갈 길을 막았다고 감금하고 위창휘를 폭행하는 등 천왕 홍수전이 정사를 손에서 놓은 이후 경쟁자였던 그를 갖은 방법으로 괴롭혔다.[4] 정사에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군사적 능력을 두려워했다.[5] 양수청과 같이 난징을 점령했고 우한 전투를 이끌었으며 청의 총독 지르한가(길이항아)를 죽이는 등 명망이 높았다.[6] 기다렸다가는 홍수전까지 짓누르는 양수청에게 다 끔살당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7] 물론 다 연기였다.[8] 다른 왕들은 애초에 관심이 없거나 양수청의 위세에 눌려 제대로 기도 못 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