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덕승
劉德昇
생몰년도 미상
후한 말의 서예가. 자는 군사(君嗣).
영천 사람으로 환제와 영제 때 행서를 만들어 이름이 드러났으며, 호소와 종요 등이 그를 스승으로 삼아 유덕승의 필법을 배워 광범위하게 전했다고 한다. 특히 종요의 경우는 유덕승이 3년 동안 포독산에서 글을 가르쳤다고 한다.
유덕승이 만든 행서체는 그 당시에는 널리 쓰이지 않았지만 4세기 초부터 널리 쓰여 왕희지, 왕헌지 부자가 완성했다고 한다.
당나라의 장회관은 서단에서 초고를 쓰더라도 부드러웠으며, 풍요롭고 넉넉하면서 아름다웠다. 풍류와 완약함이 당시의 독보적인 존재였다고 하며, 동시에 호소의 글은 통통하면서 종요는 가늘었지만 이 둘의 서체는 유덕승의 아름다움이 있었다고 평가했다.
남송의 강기는 필체의 노숙함을 귀하게 여겨 조금 잘못이 있어도 빛날 수 있다면서 짙고 섬세한 것이 사이에서 나와 혈맥이 서로 이어지면서 근골이 노숙하고 굳세다고 했으며, 또한 풍신이 깨끗해 자태를 갖추는 것을 귀하게 여긴다고 평가했다.
생몰년도 미상
후한 말의 서예가. 자는 군사(君嗣).
영천 사람으로 환제와 영제 때 행서를 만들어 이름이 드러났으며, 호소와 종요 등이 그를 스승으로 삼아 유덕승의 필법을 배워 광범위하게 전했다고 한다. 특히 종요의 경우는 유덕승이 3년 동안 포독산에서 글을 가르쳤다고 한다.
유덕승이 만든 행서체는 그 당시에는 널리 쓰이지 않았지만 4세기 초부터 널리 쓰여 왕희지, 왕헌지 부자가 완성했다고 한다.
당나라의 장회관은 서단에서 초고를 쓰더라도 부드러웠으며, 풍요롭고 넉넉하면서 아름다웠다. 풍류와 완약함이 당시의 독보적인 존재였다고 하며, 동시에 호소의 글은 통통하면서 종요는 가늘었지만 이 둘의 서체는 유덕승의 아름다움이 있었다고 평가했다.
남송의 강기는 필체의 노숙함을 귀하게 여겨 조금 잘못이 있어도 빛날 수 있다면서 짙고 섬세한 것이 사이에서 나와 혈맥이 서로 이어지면서 근골이 노숙하고 굳세다고 했으며, 또한 풍신이 깨끗해 자태를 갖추는 것을 귀하게 여긴다고 평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