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송

 



'''대송'''
'''大宋'''
''Da Song''

[image]
1142년의 동아시아. 황갈색 부분이 남송
'''1127년 ~ 1279년'''
'''성립 이전'''
'''멸망 이후'''
'''북송'''
'''원나라'''
'''별칭'''
송조(宋朝)
'''위치'''
중국 남부
'''수도'''
임안(臨安, 1129~1276)
'''정치 체제'''
전제군주제
'''국가원수'''
황제(皇帝)(천자)
'''국성'''
(趙)
'''주요 황제'''
고종 조구,(1127~1162),
효종 조신,(1162~1189),
영종 조확,(1194~1224),
이종 조윤,(1224~1264),
'''언어'''
중세 중국어
'''문자'''
한자
'''종교'''
유교, 대승 불교, 도교
'''종족'''
한족
'''통화'''
지폐: 교자, 관자(關子), 회자(會子)
동전: 송전[1]
1. 개요
2. 건국
3. 계속되는 금과의 전쟁
4. 몽골과의 44년 전쟁
4.1. 양양 공성전
4.2. 양양 함락과 남송의 멸망
5. 고려와의 관계
6. 평가
7. 남송의 역대 황제
8. 계보
9. 미디어 믹스

[clearfix]

1. 개요


북송의 후신, 수도는 임안(臨安, 오늘날의 항저우). 1127년 ~ 1279년까지 152년간 존속하였다. 나라에 일어난 변화가 너무 커서 역사학에서는 북송과 남송으로 시대를 구분하여 고찰하는 것이 일반적이나 당시 사람들의 의식으로는 황실의 교체없이 이어져 왔기 때문에 별개의 나라가 아니라 조송(趙宋) 단일 왕조가 화북지역을 상실한 형태로 명맥을 유지한 것으로 인식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2. 건국


1126년 11월 ~ 1127년, (916년 ~ 1125년)를 멸망시킨 은 송나라로 진격해 수도 개봉을 점령하고 황제인 흠종과 상황 휘종을 포함한 황족과 신하들을 포로로 잡아간다.
이로써 북송은 멸망하였으며 금은 송나라의 신하 장방창(張邦昌)을 초제(楚帝)로 내세운 괴뢰 국가 대초(大楚)를 세우고 군사를 철수시켰다. 금군이 물러나자 곧 송의 군신들은 장방창에게 맹반발하며 제위를 포기하도록 권했고 장방창은 이를 받아들여 휘종의 아들 중 유일하게 포로로 잡혀가지 않은 흠종의 동생 강왕(康王) 조구(趙構)에게 황제의 자리에 오르기를 바란다는 편지를 보내고 황제에 등극한지 32일만에 스스로 퇴위한다.[2]
새로운 황제로 옹립된 조구는 1127년 응천부 (應天府, 지금의 허난성 상추시)에서 송고종으로 즉위하며 연호를 건염(建炎)으로 고치고 송나라를 재건하였다.

3. 계속되는 금과의 전쟁


[image]
황제로 즉위한 송 고종은 곧 주전파 관료들을 기용하여 군사를 소집하는 등 전쟁 준비에 박차를 가하였으나 이런 행위는 금을 크게 자극시켰고 마침내 '초나라를 무너뜨리고 초 황제 장방창을 죽였다.'라는 명분하에 다시 대규모 남하를 시작했다.
한창 기세가 오른 금이 이런 고종을 가만히 둘리가 없었다. 금의 공격이 맹렬하여지자 고종은 응천부를 버리고 양저우(楊州), 항저우(杭州), 원저우(溫州) 등으로 고종은 계속해서 달아나고 급기야 1129년에는 '''배를 타고''' 바다로 도망가기까지 한다.
그 경위는 다음과 같다. 1129년 남송 정부는 수세에 몰리자 수도를 남경에서 해안과 가까운 임안으로 옮겨 끝까지 저항할 뜻을 밝힌다. 그런데 남경을 함락시킨 딱 3달 후 금나라 군대는 임안까지 함락시킨다(...). 바로 이 때 고종이 바다로 달아난 것. 여기까지는 송나라의 사망 플래그였다.[3]
양자강 이북을 점령한 금나라는 1130년 대제(大齊)라는 제2의 괴뢰 국가를 세워 항장인 유예(劉豫)를 황제로 옹립했다.
남북조시대 이후로 이토록 강남이 이민족에게 유린당한 적도 없었다. 이렇게 절망적인 상황은 1130년 부터 갑자기 바뀌게 되는데, 남송의 명장 한세충이 1130년 4월 강중에서 최초로 금군을 대파하게 된다. (이 해 진회가 포로에서 탈출해 남송에 복귀한다.) 5월에는 악비가 금군을 대파하고, 다시 1131년에는 오린과 오개 등이 화상원에서 금군을 대파한다. 1133년 악비는 강광의 군도를 평정했다. 다시 1134년에는 한세충이 다시 한번 금군을 대파하게 되었다. 계속되는 패배에 1135년 금의 태종이 죽자 금군은 북쪽으로 물러나게 된다.. 이후 진회의 협상(1142년)이 있었고, 그가 죽은 후(1155년) 해릉양왕이 재침을 1162년 계획했으나 살해되고 금세종이 즉위하면서 다시 화평했다. 이로서 의외로 남송은 회하까지 영토를 확보하게 된다. 이후 한탁주가 북벌을 시도하였지만(1206년) 준비도 제대로 안 된 상태에서 무리하게 강행하였기 때문에 실패로 돌아간다.
이렇게 남송과 금나라 모두가 서로를 먹어버릴 역량은 없는 상태에서 어느새 강성해진 몽골이 금을 압박하기 시작했고, 남송에서는 금을 경제적으로 도와서 몽골을 막게 해야 한다 vs. 금을 먹어서 힘을 키워 몽골을 막아야 한다는 주장이 대립하게 되었다.[4] 당시 여론은 후자가 우세했지만 어쨌든 남송은 양측 의견을 절충해서 금나라에 바치던 세폐를 끊지만 금나라를 공격하지는 않기로 한다.
그런데 남송이 조용하고 싶어도 이번에는 금나라가 가만있질 않았다. 몽골에게 패배해서 영토를 크게 잃은 금나라가 그나마 만만해보이는 남송을 공격해서 자신이 잃은만큼 뜯어낸다는 발상을 한 것. 아무리 순망치한이라지만 남송이 고분고분 침공을 용납할 수도 없었다. 결국 금나라는 애종 때에 와서야 정신 차리고 남침 행위를 중단하는 한편 송나라와 평화 협상을 제안하지만 남송은 이미 금나라의 멸망은 돌이킬 수 없으니 괜히 금나라를 도와서 몽골을 자극할 바엔 차라리 몽골과 우호관계 맺어서 전쟁준비할 시간을 버는 게 낫다고 판단하여 몽골과 동맹을 맺는다. 게다가 상황이 나빠지자 애종도 결국 다시 남송의 사천 일대를 먹어서 근거지를 확보하려는 시도를 하기도 했다.
결국 금나라와의 전쟁은 1234년 남송이 몽골 제국과 연합하여 금나라를 멸망시킬 때까지 계속되었다.

4. 몽골과의 44년 전쟁


세계를 정복한 최강의 제국, 여기에 맞서던 지상 최대의 장벽[5]
1234년 남송은 북송 때의 영토를 수복하고자 20만 대군을 통해 화북을 공격했고 이는 몽골의 분노를 부른다. 남송의 침입을 격퇴한 1235년 2월의 쿠릴타이에서 남송 공격에 대한 방침이 정해지고, 몽골군은 남송을 공격하기로 한다. 1235년 10월 성도가 떨어지고, 다음 해 3월 양양이 함락되었으며 1237년이 되자 몽골군은 동쪽으로 황주에 도달하였다. 사태가 급반전된 것은 명장 맹공 덕이었는데 맹공은 강릉에 대한 공격을 막아내고, 오히려 몽골군을 연전연파하면서 양양 일대를 다시 수복하고, 기주를 되찾았으며, 사천으로 가서 몽골군을 격파하고 영토를 수복하는 등 저력을 보여준다. 한편, 몽골군의 침입으로 엄청난 수의 주민과 군인들이 중원에서 남쪽으로 피난해 왔는데, 맹공은 그들을 수용하여 군대에 편재하고 둔전을 하며 단단하게 방어망을 정비했다.
[image]
결국 1241년 대칸 오고타이 칸이 죽자 몽골군은 후퇴했고 몽골 제국이 내부의 다툼으로 시간을 준 그동안, 남송은 그 막강한 경제력을 기반으로 어마어마한 방위 전선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특히 지난 번의 전투에서 성도가 함락되며 엄청난 피해를 받은 사천 지역을 중심으로 방위 전선이 강화되었는데, 핵심은 산성 방어 체제였다. 안 그래도 진입하는데 지형적으로 험준한 사천의 주요 강, 하천의 연안과 각종 교통 요지의 험준한 곳에 새로 성을 쌓고, 그런 성들을 무수하게 많은 별처럼 이어지어 서로 도울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그런 전선을 계속 유지할 수 있는 경제적 기반을 갖추는 작업도 물론 포함되었다. 남송은 맹공의 주도로 사천 지방에만 10여개의 성을 새로 쌓아 올리고 몽골군이 다시 쳐들어올 때를 대비했다. 특히 양양 지역의 방어력은 실로 강대했으며, 후술하듯이 이곳은 남송의 가장 중요한 방어선이 되었다. 삼국시대에도 나오는 형주의 중요성이 역시 컸던 셈이다.
형주 문서에 나오듯이 양양 지역은 북중국과 남중국을 연결하는 중요한 교통의 요충지였다. 사천은 양양보다 더욱 지형이 험하여서 진격이 어려웠고, 회수 하류에서 강남으로 곧바로 공격하기엔 곳곳에 있는 하천과 호수, 습지 등으로 인해 몽골군의 장점인 기병의 활용이 대단히 어려웠다. 즉 몽골군의 입장에선 이 양양을 반드시 확보해야 남송으로의 진격이 가능했다.
1247년에 몽골군에서 장유의 사주 공격이 있었지만 소규모에 불과했고 1258년 몽골의 대칸이었던 몽케 칸은 다시 군대를 나누어 대대적인 침공에 들어갔다. 몽케는 이미 1253년에 동생 쿠빌라이를 시켜 운남대리국을 점령하여 남송을 포위 공격할 기반을 다졌는데 이 공격으로 남송을 멸망시킬 작정을 했다. 몽케 본인이 이끄는 주력은 사천, 동생 쿠빌라이는 악주(오늘날의 호북성 무한시), 다른 별동대는 운남에서 담주(오늘날의 호남성 장사시)로 치고 들어갔다. 몽케는 사천의 성도를 공략하고 곧이어 사천 합주 조어성(오늘날의 사천성 중경시)를 공격했는데 사천의 다른 지역이 겁을 먹어 싸우지도 않고 항복했던 것과 달리 남송의 명장이자 맹공의 부장이었던 왕견은 주민 10만과 결사 항전을 주장하여 저항했고 몽케는 5개월 동안 공성전을 펼치다가 철통 같은 방어를 뚫지 못하고 진영에 돈 전염병[6]에 걸려 죽었다.[7]
이 합주 조어성 전투는 본의 아니게 몽골제국사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몽케가 죽자 몽골은 새로운 대칸을 선출하기 위한 쿠릴타이를 열 필요가 있었고, 당시 바그다드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서진을 계속하던 서방 사령관 훌라구는 쿠릴타이 참석을 위해 회군했다. 훌라구는 일부 병력을 지금의 팔레스타인 근처에 두었는데, 아인 잘루트 전투에서 맘루크 왕조의 술탄 바이바르스의 부대가 이 몽골군을 격파하고 훌라구가 남긴 부장 키트부카를 처형하면서, 끝도 없을 것처럼 계속되던 몽골군의 서진은 이 시점에서 마침내 종료되었다.
어쨌거나 대칸마저 죽은 이상 몽골군은 두번째 대규모 원정도 실패하여 모두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전쟁 영웅이었던 '''가사도'''[8]가 1260년 이후 덜컥 재상이 된다. 도량형, 통화개혁, 부정부패 엄단, 긴축 재정 정책 등 평시 수상으로는 나쁜 인물은 아니었지만 군벌들을 중앙에서 밀어내어 군사력을 악화시켰다. 특히 남송의 마지막 재상이 된 충신 문천상을 박해한 것 때문에 더욱 욕먹는다.

4.1. 양양 공성전


이후 쿠빌라이가 대칸에 오른 몽골은 이전처럼 사천, 회수 남쪽의 튼튼한 요새들을 나누어서 공략하려는 전략을 버리고 양양-번성 지역을 집중적으로 공격하기로 한다. 양양 공성전은 무려 1267년부터 1273년까지 6년 동안 이어졌다. 보통이라면 그만하고 물러갈 법도 한데, 몽골 제국 측에서도 가지고 있는 전력을 때려박는 느낌으로 끝까지 전투를 지속했던 것이다. 1268년, 무려 10만 명의 몽골 병력이 양양성을 포위했다. 그와 동시에, 쿠빌라이는 500척이 넘는 함선을 새로 건조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양양 주변의 하천, 수로를 장악했다.
포위망을 구축하는 몽골군은 결코 성급하게 공격하지 않았고 오히려, 비교적 양양성과의 직접적인 교전은 자제한 채 계속해서 포위망을 유지하고 늘리고 견고하게 만들었고, 군사를 이끌고 양양성 주변을 순례하며 근처의 송나라군을 몰살, 성 내와 직접적인 연결을 막으려는 작전에만 집중했다. 해자를 파고 성채를 쌓고, 곳곳에는 파수용을 겸한 돈대(燉臺)가 세워졌으며, 양양과 그 근처의 번성까지 한꺼번에 두르는 환성(環城)이라는 이름의 토성이 만들어졌다. 심지어 그런 포위망이 한겹도 아니고 이중으로 이어졌으며, 그 둘러싼 포위선을 쭉 펴서 이으면 100km에 이를 정도였다.
여기에 몽골군은 송나라의 수군이 수로를 통해 공격해오는 것을 막기 위해, 환성의 포위선 상류와 하류에서 몽골 수군의 훈련을 반복해서 시켰으며, 훈련이 끝나면 육상의 각 부대와 연동한 합동 군사 훈련을 반복하였다. 몽골에게 양양 포위전은 단순한 포위전이 아닌, 몽골 수륙군의 합동 연습이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남송은 사실상 최후의 방어선인 양양에서 한수를 통해 물자를 지원하면서 끈질기게 6년을 항전했으나 결국 물자 지원도 중단되어 송나라 군대의 구원 시도도 계속 실패하고 결사대 작전도 실패했다.
[image]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양성은 함락되지 않았는데 한수와 백하와 당하가 만나는 지형으로 한수가 가끔 범람해서 이 지역은 습지라 기병 운용도 쉽지 않다. 양양이 공격받으면 번성에서 괴롭히고, 번성이 공격받으면 양양에서 괴롭히고 여기에 강 때문에 포위망도 완벽하게 구축하기 어렵다. 결국 5년 간의 공성 끝에 양양 외곽의 번성을 먼저 함락시켜야 한다는 결론에 이른 몽골군은 번성을 공격하기 시작했고. 이슬람의 기술로 만들어진 신형 투석기인 회회포(回回砲)로 인해 함락된다. 번성을 지키던 수비 대장 범천순은 미친듯이 쏟아져오는 몽골군을 보더니, 하늘을 우러러 보며

"나는 살아서 송나라의 신하가 되었으니, 마땅히 죽어서도 송나라의 귀신이 되리라!"

라며 목을 메어 죽었다.
번성을 지키던 또 다른 장수인 우부는 백여명의 결사대로 무수하게 많은 적병을 베어내며 저항했지만, 결국 중과부적으로 이길 수 없는 상황이 되자 기둥에 스스로 머리를 찍은 뒤, 불길 속에 몸을 던져 자결했다. 번성을 무너뜨린 회회포는 매일같이 양양을 포격했으며 양식은 떨어져가고, 지원은 기대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고, 몽골군 역시 송나라 사정에 능통한 여문환의 항복을 권했다. 결국 성 내부에서도 이 정도면 할만큼 했다는 의견에 따라서 1274년 3월 6년을 버틴 수비 대장 여문환이 항복해 양양이 함락되고야 만다. 이 양양의 함락으로 남송의 대몽골 방어선은 사실상 무너졌다.
여담으로 무협 소설인 신조협려에서 주연인 곽정이 참전한 전투가 바로 이 양양 공성전이다. 물론 소설의 특성상 양양 공성전의 공로는 모두 곽정에게 돌아가고, 여문환, 여문덕 형제는 그저그런 탐관오리로 등장한다.

4.2. 양양 함락과 남송의 멸망


양양이 함락된 이후 몽골군은 거침없이 송나라 남부 영토를 향해 진격했다. 이때 양자강을 건너 진군하려던 바얀의 앞에 송나라 수군이 나타나자, 바얀은 "항복하라"며 4일 동안 회유했지만, '''항복한 송나라 장수는 단 한 사람도 없었다.''' 이후 벌어진 전투에서 송나라 수군의 결사 항전에 바얀의 군대도 상당히 고전했으나, 작전을 바꿔 철기병을 멀리 우회해 따로 상륙시켜 후방에서 적을 동요케 하자 심리적으로 흔들린 송나라 수군은 결국 무너지고 말았다. 같은해 6월엔 20만 대군이 강주를 함락시켰으며 이에 남송은 15만 대군으로 맞서보려 했으나 두 번의 누란지세를 이겨낸 명장 맹공과 왕견 같은 장수는 더 이상 없었고 이 군세를 이끈 건 간신 가사도였다. 결국 이 군대마저 괴멸되어 가사도가 죽은 뒤엔 남송의 운명은 정해졌고 1276년엔 수도 임안마저 함락되었다.
[image]
이후 마지막 재상 문천상이 최후의 4년을 분투했다. 이때 망명 정부파의 양진이라는 인물이 "내가 저들의 진영에 가서 시간을 벌겠다." 며 대놓고 가서 사로잡히면서 시간을 벌었고, 그 사이에 나머지 인물들은 도망치는데 성공했고. 결국 푸저우까지 함락당하자 이들은 홍콩 근처까지 도주해서 계속 정부를 이어나갔고 이 와중에 문천상은 몽골군에게 사로잡힌다. 그리하여 홍콩 근처의 애산에서 소략한 임시 정부를 꾸린 최후의 잔존 세력은 군-민을 합쳐 모두 20만 명 가까이 되었다. 아직 숨을 쉬고 있는 '정부' 의 기틀은 거의 다 육수부가 전담해서 책임졌는데, 육수부는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품위를 잃지 않고 꼿꼿하게 행동하다가도, 조정이나 군대에 혼자 있게 되면 늘 비통한 생각에 눈물을 흘렸으며, 그 모습을 본 다른 사람들도 다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또한 이 잔존 세력에는 옛 후주의 황실 가문이자 송 태조 조광윤에게 황위를 선양한 시씨 가문도 끝까지 참여했다.
결국 1279년, 쿠빌라이 칸원나라에게 완전히 패배하면서 남송은 비극적인 최후를 맞고 멸망한다. '''황족들과 신하들의 최후의 항전'''의 비극적인 전투와 마지막 송의 군대는 육군은 내륙, 나머지 해군은 800척 정도의 전함에 머물며 최후의 대결을 준비했고, 백성들과 관료 황족들은 몽골 지배하엔 살지 않겠다고 수십 만이 그나마 안전한 바닷배에 있었다. 최후의 결전에서 함대전으로 펼쳐진 애산 전투의 초반은 장세걸이 이끄는 부대가 유리해보였지만, 장홍범은 물러나서 풍악을 올리며 쉬는 척을 하더니 이내 포위전을 개시했고, 포위당한 송나라 병사들은 먹을게 없어 바닷물을 마시고 구토하며 버텼으나 결국 완전히 대패하고 말았다. 수백 척이나 되는 함선이 가라앉았고, 수만 명이 물에 빠져 죽었다. 이 때 이미 포로로 잡혔던 문천상도 몽골 군영 내에 있었는데 남은 송나라군에 항복하라는 편지를 보내라고 장홍범이 종용했으나 그는 끝까지 거부했고 결국 더 이상 그런 요구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때 육수부는 완전히 패망하기 직전까지도 7살이 된 황제에게 역사를 가르치고 있었다. 그리고 결국 모든 것이 확정되자, 어린 황제와 함께 같이 물어 뛰어들었다. 황제의 어머니인 양 태후는 패전의 대혼돈 속에서 구출되었으나, "일이 이렇게 되었는데 내가 더 살아서 무엇을 하겠나" 며 바닷물에 몸을 던져 자결했다. 7살의 마지막 황제와 황족들, 신하들이 다 바다에 빠져 자살해버린다. 몽골 기록에 다음날 떠오른 시체만 10만구였다고 한다.
장세걸은 전투의 마지막까지 살아남았다. 양 태후의 시신을 수습해 제를 올리고, 안남 지역으로 재기를 위해 떠나려 했는데, 때마침 태풍이 불어닥쳤다. 그러자 하늘을 우러러 보며 이렇게 소리쳤다.

"신이 조 씨를 위해 힘쓸 일은 이제 다 끝나고 말았습니다. 정녕 이것이 하늘의 뜻입니까? 하늘이 만약 송을 망하게 하려는 것이 그 뜻이라면, 신 역시 이 바다에 잠겨 죽게 해주소서."

이윽고 거대한 풍랑과 함께, 장세걸의 배도 뒤집히고 말았다. 세계 최강의 국가의, 가장 강력한 군단을 상대로, 가장 오랫동안 맞서 싸운 끝에 세상의 끝에서 황제도 태후도 대장군도 재상도 한 사람도 남지 않고 전부 최후를 맞이했던 것이다. 아직까지 점령되지 않아 남아있던 마지막 송나라의 잔류 병력들이 끝까지 저항했으나 황제가 자살했다는 소식을 듣고 구심점을 찾지 못하게 되었고 끝내 최후의 구심점 문천상까지 처형되어 부흥 운동도 중단된다.
남송이 무너지고 전쟁이 끝난 이후 몽골은 하도 저항이 심해서 깊이 빡친 나머지 전쟁이 끝난 후 송나라인들을 모조리 사실상 노예 상태로 만들어 버린다. 저항이 적었던 여타 국가의 백성들은 2급 시민 취급했던 것과는 다른 행보였고 결국 이 지역은 몽골에 강한 저항 정신을 가져 후일 원나라가 붕괴하자 한족 반격의 중심지가 되었다.[9]
남송과 원나라의 전투는 물론 중간 중간 소강 상태도 있었고, 44년 동안 내내 싸움만 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한 번 전투가 벌어질 때마다 엄청난 규모의 싸움들이 있었고, 전투가 없는 기간에도 늘 서로 전쟁에 대비하며 준비하고 있던 살얼음판 같은 시대였다. 이를테면 송나라의 위대한 충신으로 불리는 문천상(文天祥)이나, 결국 송나라를 멸망시키게 되는 몽골의 명장 바얀(伯顔)이 태어난 해는 모두 1236년이다. 자기들이 태어나기도 전부터 전쟁이 펼쳐지고 있었고, 40살도 훌쩍 넘어 그 당시 기준이라면 슬슬 황혼기를 생각해야 할 시점에서 전쟁이 끝났다. 전쟁이 시작할 무렵 20살의 패기 넘치는 젊은이었던 쿠빌라이 칸은 송나라 정복이 완료된 시점에서 64살의 노인이 되고 말았다. 그야말로 자신들의 세대 전부를 소진했던 전쟁이라고도 할 수 있다.
송나라는 역대 중국사의 왕조들 중에서도 유독 최약체 이미지가 강하고, 수 많은 송군 굴욕의 역사 일화가 조롱거리로 언급되는 등등 송나라 사람들은 "책이나 읽고 글이나 외울 줄 알지 '상무 정신' 이 없어서 칼들고 싸울 줄 모르는 인간들."이라는 식으로 비판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역대 어느 왕조와 비교해도 더 장렬하게 순국하고 끝까지 뜻을 꺾지 않고, 변절하지 않은 사람이 많았다는 평을 듣기도 한다.
청나라의 조익은 이십이사차기에서 이렇게 평했다.

"역대 이래 몸을 던지며 나라에 순국한 자는 유독 송나라 말에 많았다. 패망을 구하진 못했다고 해도, 요컨대 나라가 사대부를 양성한 보람이 없었다고 할 수 없다."

진정의 《중국 과거 문화사》에서는 송나라의 최후를 다음과 같이 평했다.

13세기에 몽고의 기병이 폭풍처럼 유라시아를 석권할 때, 그들은 오직 남송에서 가장 격렬하고 지속적인 저항을 받았다. 1235년 원나라 군대가 처음 송을 공격했을 때부터 1279년 광동 애산 전투에서 승상 육수부가 어린 황제를 등에 업고 바다에 뛰어들어 죽을 때까지, 장장 40여년 동안이나 전쟁을 벌여 몽고의 몽케 칸 또한 남송의 합주성에서 전사하였다. 장원 출신의 재상 문천상을 중심으로 한 사대부들이 최후의 궁지에서도 혈전을 벌이며 송 황실을 위해 목숨을 바친 행동은 송 왕조가 3백 년간 사대부를 우대한 것에 대한 최상의 보답이었고, 송대 문관정치에 유종의 미를 거두게 한 것이기도 했다.


5. 고려와의 관계




6. 평가


남송의 역사는 사실 사실상 황제의 역사라기보다도 군약신강 재상의 역사[10]일 것이다. (+ 상황 정치) 유명한 진회를 시작으로, 그나마 멀쩡했던 효종 이후로는 광종을 폐위시킨 조여우, 한탁주의 권력 투쟁(5년), 한탁주 독점(12년), 한탁주 죽고는 사미원(26년, 이때 금나라가 멸망했다) 그리고는 몽골의 침공 등으로 어수선했던지라 좀 조용한가 했는데 끝판왕 가사도가 나타나서... 그래도 문천상이라는 남송 최후의 재상이 분전하는 모습도 보여주었다.
그래도 나름대로 원나라에 대항해 합주 조어성(중경) 등의 사천 지역이나 강릉, 양양 등의 형주 지역에서 훌륭한 방어를 자랑했던 시절도 있었고 금나라를 역으로 위협하던 시절도 있었다. 또 근대화 전까지 막을 나라가 없었다던, 세계를 지배했던 몽골의 주공격을 두번이나 격퇴했고 10여년이나 몽골과 전면전을 한 전무후무한 나라였다. 송나라 군대가 약했다는 상식과는 다르게 남송의 군사력은 매우 놀라운 수준이어서 결사적으로 몽골의 주력과 싸워 버텨냈다.남송의 군사력 뭐 당시 송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화포와 로켓을 날리던 국가였으니. 송나라 시절에는 대포가 없었고 투석기로 화약무기를 날렸으며 흔히 아는 대포의 형태는 원나라때 처음 나타난다.
남송의 멸망이 1279년이고 고려와 몽골의 전쟁이 1231년에 시작되어 1259년에 끝났으니 고려가 몽골과 전쟁이 벌어졌을 때 이미 세계가 다 뒤집히고 난 뒤가 아니라, 그때만 해도 남송이 멀쩡하게 있었던 상황이었다. 멀쩡한 것은 둘째치고 20년은 더 지나야 멸망했으니... 물론 몽골과 전쟁해서 아예 그냥 물리친 나라도 있고, 점령당했다가 금새 몰아낸 나라도 있긴 하지만, 대체로 그런 나라들은 너무 멀거나 몽골군이 소수였거나 애당초 중요한 목표가 아니었거나 하는 경우였다.[11] 반면에 남송은 중국 북부를 장악한 몽골군의 지척이자 몽골군의 최고 주력군이 공격해가는 최대의 목표이자, 몽골 제국의 대칸(우구데이, 몽케)이 직접 '친정'하는 상대였음에도 불구하고 1235년부터 1279년까지 무려 44년을 버텼다. 그렇지만 당연히 이 44년 동안 몽골이 지속적으로 전력을 다 해서 남송을 공격한 건 아니다. 일단 몽골은 동시에 서부로 원정을 강행하기도 하였고, 내부에도 칸 자리를 놓고 내분이 많아서 남송을 치다가 회군하여 5년의 내전을 치렀던 일도 있었으며, 간신 가사도는 아예 굴욕적인 불평등 조약을 맺어 몽골이 회군하게 하기도 하였다.
언급했듯 1258년도의 전쟁을 보면 몽골군 주력이 세 방향으로 갈라져 쳐들어 오는 와중에 삼군 중 일부는 저 멀리 운남 방향으로 돌아서 송나라를 치기도 한다. 이미 전방은 말할것도 없고 후방 지역의 나라까지 다 털린 상태였음에도 송은 위에서 나온 대로 버텼다. 오고타이 칸이 이끄는 군대가 1235년부터 1241년까지 계속 공격을 펼쳤으나 실패하고 우구데이 칸이 병사해서 퇴각에서 실패, 몽케 칸이 이끄는 부대가 1258년 또다시 직접을 공격을 펼쳤으나 5개월동안 아무것도 못해보다가 몽케 칸의 사망으로 퇴각해서 실패했다.
이후 쿠빌라이가 대칸이 된 후 송나라 방위 라인의 핵심인 양양성을 주 타겟으로 삼아 공격해서, 수만명의 병력에다 중동에서 가져온 공성병기까지 투입했지만 무려 6년 동안 함락을 못 시켰고, 양양 근처의 허약한 성을 일단 먼저 밀어버린 후 말라죽이는 전략으로 가면서 양양 성주 여문환에게 넌지시 항복을 권해서 겨우겨우 양양을 손에 넣었고, 양양성이 떨어진 후에야 겨우겨우 직접적인 타격이 가능해져서 20만 대군을 투입시키면서 그제서야 확실한 승기를 잡았는데, 이미 대세가 완전히 넘어간 후에도 송나라 황족들과 고관들은 무너지면서도 계속해서 물러나면서 버티다가 남쪽 바다 끝까지 몰릴 때까지 버티고, 결국 남쪽 끝까지 몰린 후 애산에서 '''정말 최후의 최후까지 저항하다 장군이고 재상이고 황족이고 죽을 때까지 싸우다가 멸망한 것이다.''' 송나라가 문약하다며 비웃는 사람들도 이런 남송의 최후에 대해선 높게 평가하는 경우가 많다. 이후 남중국은 명나라 때에도 이민족의 침입에 대비할 수 있는 최고의 요지로 취급된다.
몽골과 남송의 전쟁 후반부인 1270년 무렵에 몽골과의 전투중 투항이나 무너진 지역 및 나라가 호라즘 제국, 막북, 서하, 서요, 금나라, 토번, 중동, 러시아, 동유럽, 고려, 대리국 등등이었는데 결국 멸망하긴 했어도 남송은 꽤 오래 버티고 있었다. 바투가 저 폴란드 레그니차 전투에서 하인리히의 군사를 전멸시킨게 남송의 멸망보다 무려 38년 전이고 남쪽의 대리국이 몽골군에게 멸망당한게 남송의 멸망보다 26년 전이었다. 그렇게 먼 곳까지 쓸리는 와중에서도 코 앞에 있던 나라가 무너지지 않았던 것이다.
남송은 북송과 달리 지방군 지휘관들의 권한이 강했기에 군벌이라는 위협도 존재했다. 실제로 남송 초기에 금나라와의 전쟁에서 군벌세력들이 수도 임안을 포위하며 방어선에 구멍을 낸 덕분에 금나라가 일시적으로 임안을 함락시킬수 있었다. 그러나, 군벌세력중 하나인 한세충이나 악비 등의 활약으로 오히려 금나라가 밀렸는데 남송 정부는 금나라보다 군벌들을 우려하여 적당히 돈 좀 주는 것으로 전쟁을 매듭짓고 곧바로 군벌 숙청에 들어갔다. 즉, 남송과 싸우던 몽골이 다민족국가라 통합이 덜 되었다 쳐도 남송 또한 군사적인 부분에선 완전히 통합이 잘 된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남송과 싸울 당시 몽골제국은 화북지방과 중앙아시아, 중동, 동유럽 상당수를 먹어치운 대제국이므로 국력이 남송보다 많이 약하다고 보기도 어렵다. 그리고 남송의 화남 지역은 화북 지방에 비해 산악지대와 정글이 많아서 죄다 농경지는 아니었다. 물론 화북지방이 오랜 농경으로 지력고갈이 되어 쇠퇴하면서 화남이 개발되어 역전된 케이스지만, 중국 대륙이 농사에 최고로 적합하냐면 글쎄올시다.
애초에 군사력이 허접하다고 조롱할땐 언제고,[12] 이제와서 인구니 국력이니 운운하는거 보면 모순이다. 그리고 당시 원나라의 경우 화북지방과 중동이라는 선진 문명권의 소프트웨어와 물력까지 흡수해 국력은 물론 군사력까지 괴물 수준에 이르던 초강대국이었다. 총 인구에서 남송보다 좀 밀리는거지, 투사하는 역량을 보면 남송 못지않게 상당했었다. 그나마 밀리는 수군조차 화약병기를 보유한 육군의 보조로 격파하는게 원나라군이었다. 당시 원나라군은 몽골 기병대에서 여러 문명권의 기술력과 힘을 흡수해 하이브리드 군대가 되었고, 야전은 물론 기동전과 공성전 등 못하는게 없는 올라운더 군대였다. 그런데 인구수의 우위를 빌미로 마치 막을수 있는 것을 막았을 뿐이다? 원나라 인구도 수천만대다.
추가로 원나라는 화북 지방의 물력과 더불어 강력한 기병까지 갖춰서 몽골 기병대의 가공할 기동전을 봉쇄하던 남송의 요새화 영역을 보병-기병-수군의 연계를 통해 기병으로 통과하지 못하는 구역을 보병과 수군으로 길 열어주거나 송나라군의 반격 시도를 기병으로 분쇄시키는 등 유기적인 제병 합동으로 송나라의 모든 시도를 끝없이 격파하며 양쯔 강 수계를 체계적으로 장악해나갔다. 이는 쿠빌라이를 비롯하여 명장 바얀, 장홍범, 아링카야 등 남송과의 전쟁 경험이 매우 풍부한 인재들이 남송의 방어선을 파훼할 열쇠를 찾은것도 원인이었다.
더불어, 남송은 군마 육성에 용이한 목초지대와의 접촉성이 떨어지는 곳이었기에 돈을 아무리 쏟아부어도 기병 육성에서 몽골 기병을 따라잡는 것이 어려웠다. 무슨 경제력이 마법이라도 되는것 마냥 경제력 운운하는데, 막상 송몽전쟁 중후반에 들어설수록 남송은 유독 자연재해와 혹한기를 많이 겪으며 흉작 크리가 떠서 산성방어체제를 받쳐주는 생산력이 떨어진 것도 있었다. 예를 들면 석유 볼모지에 돈 뿌린다고 해서 석유가 펑펑 터져나오는가? 그렇지 않다. 그 돈으로 석유를 수입하는게 좋은 방법이라고 할 것이다. 이렇듯 돈은 경제 수단이지 마법이 아니다.
북송의 고질병이었던 비대한 금군 본위의 군 체제가 남송 시기 이후 각 지방 단위의 상비군이랄 수 있는 둔수 대병 위주의 방어 체계로 개편된 덕도 있다. 북송의 경우, 상비군의 규모 자체는 거란, 서하와의 전쟁이 한창이 때는 무려 140만 정도까지 불어날 정도로 크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황제가 비서 기관인 추밀원을 끼고 직접 전군의 군령권, 발병권을 행사하는 구조 자체가 군에 대한 문치에 있어서는 좋았을 지 몰라도 시시각각 변하는 전선의 사정에 맞서 응변하기에는 참으로 비효율적인 체계였다.
무엇보다 수내허외, 즉 안을 든든히 하고 밖을 허약하게 하여 만당 시기 같은 지방 번진들의 발호를 막는다는 명목하에, 무려 전군의 2/3에 달하는 82만명을 황제 직속 금군에 소속시켜 그 중 대부분을 수도인 동경 개봉부에 주둔시켰는데, 오늘날의 물색에 비견하자면, 62만 대한민국 국군 중 무려 40만 가량이 동부나 서부 전선이 아니라 수도방위사령부 소속으로 서울 관내에 주둔하는 격이다. 물론 이 금군들이 수도만 지키고 있었던 건 아니지만, 수도 주둔이 베이스였던 만큼 변경의 사정에 군 구성원들이 자동적으로 어두워지는건 정한 이치고, 그로 인하여 작전능력이 날이 갈수록 현저하게 저하되는 부작용이 있었다.
거기에 송나라의 경우, 석경당이종가의 후당을 멸망시키고 황제가 될 욕심에, 거란의 지원을 받을 심산으로 만리장성 이남 연운 16주(지금의 베이징을 위시한 허베이 성 일원)을 거란에다가 가져다 바친 환경 하에서 시작했기 때문에, 북방 방어선 구축에 있어서도 전대의 다른 중국 통일 왕조들에 비해 상당히 애를 먹어야 했다.
헌데 남송으로 밀리고 나서는, 국경지대의 지리적 조건 자체가 장성 이남에 거란을 끼고 있어야 하는 악조건에서, 회수, 장강, 사천 준령 등의, 하늘의 내린 방벽을 국경으로 삼는 호조건으로 바뀌게 되고 비대하기만 했지 제 구실을 못하던 금군 위주의 방만한 군대는 한세충, 악비 같은 근왕 군벌들이 직접 모병한 정예 둔수 대병들을 주축으로 충실하게 재편되었던 것이다.
물론 이러한 군벌들의 발호를 걱정한 송고종이 진회를 앞세워 실행한 정치적 조처로 인해 악비는 처단되었고, 한세충은 축출되었다.[13] 한때 40만에 달했던 둔수 대병들은 21만 정도로 축소되었지만, 남송기 금군의 역할을 담당한 삼아제군의 규모가 13만 내외였던걸 상기하면 북송 기에 비해서는 상당히 지방군과 중앙군의 밸런스가 이상적으로 재조정 된 거라고 봐야한다. 이후 남송은 금 해릉양왕의 남정군을 문관 우윤문이 장강 남안 채석에서 격파하고, 구대륙에서 몽골을 상대로 가장 오래토록 버티는 등 멸망할 때까지 상당히 견실한 방어력을 자랑하게 된다.
험요지에 국경을 이뤄놨던 바탕에 강남의 경제력 포텐셜이 최대로 터진 시기인 것이 절묘하게 맞아 떨어져 강력한 방어선에 풍부한 물자 보급선을 구축할 수 있었던 것이 역시 남송이 버틸수 있었던 주요 요인이었다. 실제로 남송 시기는 본격적으로 강남이 잦은 전란으로 무너진 강북의 경제력을 능가하기 시작한 시기로 평가된다. 물론 위에 링크된 블로그를 봐도 알 수 있듯 북송 시기의 경제력이나 군사력 지탱이 힘들다면서 송효종 및 남송 지식인들이 투덜거리는 장면도 있으나 남송 후기 쯤 가면 경제력도 매우 융성하여 남방과 사천 지역에서 끊임없이 생산되는 물자, 험준한 지형을 바탕으로 세워진 요새들은 몽골군의 침공을 막는데 큰 역할을 했다. 앞서 언급한 사천 지방의 조어성이 이런 험준한 지형에 의지해 세워진 튼튼한 요새의 대표적 예였는데 이곳은 또 물자가 풍부하게 준비된 곳이어서 송의 수비군이 물고기와 밀가루를 몽골군에게 던지며 우린 10년도 더 버틸 수 있다고 조롱했다.
관런해 여담이 될수 있는 것은 상기된 명장 맹공이다. 바로 중국인(한족) 역대 최고의 명장을 가려보자는 VS놀이에서 변수가 되는 존재라는 목소리다. 즉 세계최강 몽골이라는 평가, 남송의 막장스러움, 거기에 수십년을 버틴것에 대한 역할론등이 관철된다면 엄청난 평가가 가능한것은 자명하다. 즉, 매니아들 사이에서 후보군이라 할 수 있는 한신, 이정, 서달, 백기등등과 함께 당당히 역대 중국인 넘버 원(GOAT)을 놓고 경쟁이 가능하다는 목소리들이 있다. 하지만 나무위키에서도 나중에야 그의 문서가 생성될 정도로 안습한 인지도에 매니아들은 안타까워하고 있다.[14]

7. 남송의 역대 황제


북송에서 그대로 이어지는 왕조이므로 10대부터 표기한다. 즉 송은 960년에 건국해 1279년에 멸망했다고 볼 수 있다.

대수
묘호
이름
연호
즉위년일
퇴위년일
재위 기간
능호
10
-
조구(趙構)
건염(建炎, 1127년 5월 ~ 1130년)
1127년 6월 12일
1129년
3년
-
임시
-
조부(趙旉)
명수(明受, 1129년)
1129년
1129년
27일
-
복위
고종
조구(趙構)
건염(建炎, 1130년)
소흥(紹興, 1131년 ~ 1162년)
1127년
1162년 7월 4일
32년
영사릉(永思陵)
11
효종
조신(趙昚)
융흥(隆興, 1163년 ~ 1164년)
건도(乾道, 1165년 ~ 1173년)
순희(淳熙, 1174년 ~ 1189년)
1162년 7월 24일
1189년 2월 18일
26년 209일
영부릉(永阜陵)
12
광종
조돈(趙惇)
소희(紹熙, 1190년 ~ 1194년
1189년 2월 18일
1194년 7월 24일
5년 157일
영숭릉(永崇陵)
13
영종
조확(趙擴)
경원(慶元, 1195년 ~ 1201년)
가태(嘉泰, 1201년 ~ 1205년)
개희(開禧, 1205년 ~ 1208년)
가정(嘉定, 1208년 ~ 1225년)
1194년 7월 24일
1224년 9월 17일
30년 55일
영무릉(永茂陵)
14
이종
조윤(趙昀)
보경(寶慶, 1225년 ~ 1227년)
소정(紹定, 1228년 ~ 1233년)
단평(端平, 1234년 ~ 1236년)
가희(嘉熙, 1237년 ~ 1240년)
순우(淳祐, 1241년 ~ 1252년)
보우(寶祐, 1253년 ~ 1258년)
개경(開慶, 1259년)
경정(景定, 1260년 ~ 1264년)
1224년 9월 17일
1264년 11월 16일
40년 60일
영목릉(永穆陵)
15
도종
조기(趙祺)
함순(咸淳, 1265년 ~ 1274년)
1264년 11월 16일
1274년 8월 12일
9년 269일
영소릉(永紹陵)
16
-
조현(趙顯)
덕우(德祐, 1275년 ~ 1276년 4월)
1274년 8월 12일
1276년 2월 4일
1년 176일
위치 미상
17
단종
조하(趙昰)
경염(景炎, 1276년 5월 ~ 1278년 4월)
1276년 6월 14일
1278년 5월 8일
1년 328일
영복릉(永福陵)
18
-
조병(趙昺)[15]
상흥(祥興, 1278년 5월 ~ 1279년 2월)
1278년 5월 10일
1279년 3월 19일
313일
선전시 송소제릉[16]

8. 계보


추존 황제 선조 조홍은
1.태조
2. 태종
조덕소
조덕방
3. 진종
조원분


4. 인종
조윤양



5. 영종



6. 신종



7. 철종
8. 휘종



9. 흠종
10.고종

11.효종


원의태자

12.광종


13.영종

14.이종


15.도종


16.공종
17.단종
18.소제

9. 미디어 믹스


징기스칸 4에서 송 효종을 군주로 하여 등장하며 도시는 임안천주 2개이다. 사실 컴퓨터 상의 금나라는 인공지능의 한계로 '''덩치만 큰 찐따'''나 다름없으므로 난이도는 그리 높지 않은편. 따라서 수호지에서도 못이룬 연운 16주 탈환을 노려보자.
금나라와 우호도는 낮으나 1년, 6턴 동안 동맹상태이고 동맹 상태일때 군사 유닛이 한턴에 갈수 있는 범위가 더 넓기 때문에 이를 활용하여 연경까지 진격해보자. 군대를 4부대 이상 편성하여 연경(북경)을 포위하고[17] 이때 연경은 시나리오 개시 초창기라 가을 추수 횟수가 많지 않아 상비식량이 적으므로 연경의 식량이 다 떨어졌을 때 공략하여 손쉽게 정복할 수 있다. 그 후에 화포병을 이용하여 임안과 연경에서 개봉을 양면공격하고 만주의 회령까지 탈환해보자. 아무리 늦어도 금나라 최후의 먼치킨이 등장하기 전에 금나라를 멸망시킬 수 있다. 이쯤되면 흥경돈황, 하노이까지 정복하여 서하베트남 이조를 밀어내어 화북화남을 통일하는 것은 일도 아니게된다. 또한 임안과 천주 둘다 농업, 학술, 항해 수치가 높은 편이라 내정을 꾸리기에도 손색이 없다.
[1] 수많은 동전들이 발행되었다. 동전명의 앞부분은 주로 각 황제의 연호가 붙으며 ~원보(元寶), ~통보(通寶), ~중보(重寶) 등으로 끝난다.[2] 후에 장방창은 담주(潭州)로 유배당한 뒤, '불충'한 죄로 사약을 받게 된다.[3] 실제로 이 사망 플래그는 원나라쿠빌라이 칸 때 재반복 되는데, 이번에는 악비고 의병이고 협상이고 그딴건 없고 그대로 남송 황족 전원이 바다로 몸을 던져야했다.[4] 통념과는 달리 금나라 정벌을 주장하는 측에서도 몽골이 장차 위협이 될 거라는 점은 인지하고 있었다.몽골과 연합해서 금을 먹어야 한다고 주장한 게 아니다.[5] 같은 사람이 작성한 글이나 댓글에서도 볼만한 부분이 있어 양쪽 글을 모두 덧붙인다.[6] 몽케 본인이 이 싸움에서 전사했다는 설도 있다.[7] 이 지역은 1279년 남송이 멸망할 때까지 버티다가 항복한다.[8] 말이 전쟁 영웅이지 사실 짜고친 고스톱(...)이었다.[9] 이후 강남 일대에서 일어난 한족의 명나라가 원나라를 몰아내고 중원과 강남을 회복한다. 그리고 명나라는 이런 모습을 보고 반란이나 이민족의 공격에 대비해 강남의 남경에 많은 물자를 대비하게 한다.[10] 사실 송나라 종실은 문치주의를 펼쳐 재상에게 많은 권한을 주었으니 어쩌면 당연한 귀결일 수도 있다, 하물며 원래 수도를 빼앗겨 황제들이 치욕을 당해 황권이 실추되고 남쪽으로 이주한 처지였음에야...이후 황제의 전제권이 강화되는것은 명, 청 시기부터이다.[11] 그나마 예외는 베트남 정도, 이쪽은 무려 3차례나 침공했는데도 못 먹었다.[12] 사실 남송이 북송처럼 공격전에서는 약했던건 사실이다. 하지만 애초 남송의 상대는 같은 중국인 계통 왕조가 아닌 유목제국이었고 유목제국을 상대로는 중국 뿐 아니라 어떤 농경국가들도 제대로 당해내지 못했다. 물론 당태종처럼 가끔씩 걸출한 군주가 나와 유목제국을 짓밟아놓기도 했지만 그런 사람이 흔히 나오는 것도 아니고 그런 군주가 죽으면 그대로 원위치 되는 일이 많았다.[13] 이론의 여지는 있을수 있다 오늘날에도 악비, 한세충 숙청의 본의가 송 고종, 진회 누구한테 더 쏠리는지는 연구 대상이기 때문이다.[14] 이렇게 된 이유는 애초 맹공이 방어전에서 주로 활약한 장군이기 때문일 것이다.[15] 원에서 마지막 황제를 송 공제 조현으로 간주하고 조병에게는 정식 시호나 묘호를 부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상흥제 등으로 다양하게 불린다. 자세한 건 송소제 항목을 참고.[16] 따로 능호 없이 그냥 송소제릉이라고 부른다.[17] 적부대가 도시 주변 4칸을 모두 주둔할 경우 포위되어 그 도시는 식량 수입이 0이 되고 도시 바깥으로 유닛 등이 나갈수 없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