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요

 




'''鍾繇
종요
'''
'''시호'''
<colcolor=#000000> 성후(成侯)
'''최종직위'''
태부(太傅)
'''성씨'''
(鍾)
''''''
(繇)
''''''
원상(元常)
'''증조부'''
종호(鍾皓)
'''아내'''
장창포(張昌蒲)
'''생몰기간'''
151년 ~ 230년
'''고향'''
예주 영천군 장사현(長社縣)
'''태위 재임기간'''
223년 8월 11일~226년 12월
1. 개요
2. 생애
3. 연의
4. 해서체
5. 미디어 믹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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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후한 말, 삼국시대 위나라의 인물. 자는 원상(元常).
영천군 장사현 출생으로 영천에서 유명한 명사인 종호[1]의 증손자. 아들은 종육, 종회. 아내는 장창포. 외조카는 곽원. 본래 후한에서 상서복야(尙書僕射) 벼슬을 하고 있었지만 후에 조조와 제휴해 위나라 건국 후에는 3대를 섬겼다. 조조보다 4살이나 많았으며 조조의 초창기 기반이 된 이른바 영천 호족의 일원으로서 순욱, 순유, 진군, 곽가, 두습 등의 쟁쟁한 인사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2. 생애


어린 시절에 낙양에 갔다가 관상 보는 사람을 만났는데 이 사람이 말하기를 "후에 크게 될 인물이지만 물을 조심해야 한다"고 했다. 근데 그런 말을 한지 10리도 못 가서 진짜로 물에 빠져 죽을 뻔 했다. 종요와 같이 있던 그의 재당숙 종유는 '이놈 진짜 크게 되겠는데?' 하고 생각하고 그의 공부 비용이나 생활비를 전부 대주어 학문에 힘을 쓰도록 하였다.
후에 종요는 음수에게 천거받아서 벼슬살이를 하게 되었는데, 이때 이각곽사가 한참 분탕질을 벌이고 있었다. 때마침 조조가 황제에게 사신을 보내자 뜬금없이 배알이 꼴린 이 두 명이 조조의 사자를 잡아서 가둘 생각을 했다. 이때 종요가 나서서 그러지 말라고 해서 말리게 되었다. 종요는 그들을 설득함으로써 조조에게 유리한 행동을 하게끔 했고 조조는 순욱에게 종요의 칭찬을 여러번 들은데다 이런 일이 생기자, 종요를 상당히 좋아하게 되었다. 이각, 곽사의 분탕질은 갈수록 절정에 다다르고, 황제 일행은 궁궐을 탈출할 계획을 세운다. 이때 크게 공을 세운 사람이 종요였다.[2]
조조가 황제를 모시게 되고, 이번에는 마등한수가 으르렁 대면서 싸우자 조조는 그 불똥이 튈까 염려하였는데 이를 순욱에게 상담하자 종요를 추천하였고, 조조는 종요에게 관중의 군벌들을 관리하라고 명을 내리게 된다. 종요는 장안으로 가 마등과 한수에게 편지를 보내 싸우는 걸 말린다. 종요는 그들을 잘 구슬려서 돌려보냈을 뿐만 아니라 그 아들들을 중앙에 들여보내 벼슬살이를 하도록 설득한다. 말하자면 자발적으로 인질을 보내도록 한 셈이다.
그 후 조조는 원소와 대치하며 관도대전을 벌이게 되는데, 종요는 말을 2천필이나 조조에게 지원해준다. 그러자 조조는 소하에 비견하여 상황이 아주 급할 때에 맞추어 말을 보내 주어서 대단히 고맙다. 관중의 오른쪽이 평정되어 사방을 둘러보아도 걱정거리가 없어진것은 그대의 공으로 지난날 소하는 관중을 지키면서 한고조에게 군량미와 군사를 충분히 공급해 준 바 있는데 그대 또한 마찬가지라며 종요를 높이 칭찬하였다.[3] 흉노선우가 반란을 일으키자 이걸 진압하던 중, 원상이 임명한 종요의 외조카(!) 곽원이 하동으로 오자 그 세력이 몹시 강해졌다. 모두 하동을 버리고 달아나자고 말하는 중 오직 종요만이 싸우자고 주장하였다. 이 곽원을, 장기마등을 설득해 마초가 군사를 끌고 와 전부 때려 부수었다. 자세한 내용은 곽원 항목 참조. 그 후 위고, 장성, 장염 등의 반란을 진압하던 종요는 사람들이 많이 사라진 낙양 주변으로 여러 사람들을 이주시키고 개발하여 폐허가 된 낙양일대를 재건한다. 조조가 관중정벌에 나설 때 가장 큰 힘이 된 게 바로 이런 사람들이었다.
위나라가 건국되자 종요는 대리(大理)라는 직위에 임명되었다가 상국 벼슬에 이른다. 그러다가 위풍의 반란이 발생하고 위풍을 추천했던 종요는 관직을 박탈당하고 집에서 놀게 된다. 이후 조비가 황제로 즉위하고 정위(廷尉)가 되는데 중2000석의 고위직으로 요즘으로 치면 법무부 장관쯤 되는 자리다. 이후 태위에 올랐다.(223년 8월 11일~226년 12월) 가후가 사망한 후 그 자리에 올랐는데 위풍 사건으로 한번 실각했지만 그거 하나로 훅가기엔 워낙 거물이었기에 조비 즉위 후 복귀했었고, 가후가 죽고난 뒤 종요가 태위에 오르면서 '태위 종요/사공 화흠/사도 왕랑' 이라는, 조비~조예 즉위 초를 상징하는 삼공라인이 완성된다. 조비가 어찌나 이들을 자랑스럽게 여겼는지, 이들의 뒤를 이을만한 인물들이 나오기 힘들 거라고 찬탄했을 정도. 조비는 종요를 일컬어 '모든 관료들의 모범'이라고 칭찬하기도 했다.
가후 사망 이전에 대사마인 조인이 죽어 공석이 되었기 때문에, 가후 때와는 달리 지휘권은 쪼개지지 않고 온전히 손에 들어왔을 테지만, 이 시기에는 별로 중요한 군사적 움직임이 없었다. 제갈량의 북벌은 227년부터 시작되는데, 이에 앞서 226년 12월 군부가 재편되니 종요가 태위로서 활약한 모습은 볼 수 없다.
조예 때에 이르러도 종요는 황제를 보필했는데, 황제의 스승에 해당하는 최고 명예직인 태부(太傅)가 된다. 그런데 종요는 어렸을 때부터 자주 병에 걸려 건강이 좋지 않았고 나이가 많아 일어나기가 힘든지라 화흠과 더불어 수레를 타고 조회에 참가하는 게 허락되었다. 요화, 여대, 내민 등과 더불어 삼국시대에 장수한 인물 중에 하나다. 종요는 '''75세(!!!)'''에 27세인 장창포와의 사이에서 종회를 낳을 정도로 건강했다.
위씨춘추는 종요 말년의 노망에 가까운 행적 한 가지를 기록하고 있다. 그가 종회의 생모인 장창포를 총애해 원래 정실인 손씨와 이혼했을 때, 이것을 도덕적으로 못마땅하게 여긴 무선황후 변씨가 조비를 통해 저지하려 했다. 조비가 이혼한 아내와 재결합하라고 명하자 종요는 화가 나서 짐독으로 자살하려 하였으나 그러지 못하였고, 초(椒)를 한꺼번에 먹어 말을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자, 이러한 생떼(...)를 본 조비는 뜻을 꺾었다.[4][5]
야사이지만 육씨이림[6]과 세설신어에서도 종요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종요가 비교적 젊었던 시절에 건강이 나빠져서 몇 달 동안이나 조회에 참석하지 못했다. 어떤 사람이 연유를 물었는데 종요는 그것은 매일 밤마다 나타나는 아름다운 귀부인과 동침을 하여 그리 된 것이라 하자 이를 들은 그 사람이 종요에게 말하길, 그 여자는 필경 귀신일 것이니 퇴치해야 한다고 조언하였다. 그리하여 그날 밤 종요가 도끼로 귀부인의 다리를 베자 귀부인이 도망갔고, 다음날 아침 그 핏자국을 따라 쫓아갔더니 웬 큰 무덤이 있었고 '그 관 속에 다름아닌 마치 살아 있는 것만 같은 그 귀부인의 시신이 들어있었다'라는 호러틱한 이야기다.
진군전에 따르면 진군과 함께 시대를 앞서서 사형제 폐지를 주장한 인물이기도 하다. 그러나 사도 왕랑에게 까여 실행되진 않았다. 하지만 그 내용을 보면 차라리 사형시켜 주는 게 감사할 따름으로 사형 대신 코와 발뒤꿈치를 절단하는 형벌을 주장했다고 한다. 왜냐하면 그 당시에 형벌로 인해 신체가 훼손된 경우 죽음보다 더한 수치로 봤기 때문이다.
시기가 언제인지 알 수 없으나《태평어람》 권464에 인용된 위략에 따르면 엄한은 《춘추공양春秋公羊》에 밝았는데, 종요鍾繇는 《공양公羊》을 싫어하고 《좌씨左氏(=춘추좌씨전)》를 좋아했다. (종요는) 《좌씨》를 태관太官(=궁중의 요리를 담당한 관직)에, 《공양》을 떡장수에 비유하였다. 그래서 자주 엄한과 논쟁하였는데, 종요는 기민하여 논지를 잘 폈으나 엄한은 어눌하여 막상 아무 말도 못하였다.
조조군 명군사였던 순유와는 매우 친한 사이였다. 이 때문에 순유가 죽을 때, 자기 식솔들의 살림을 종요에게 맡긴다고 하였으며, 자신의 경험을 담은 병법, 전략책을 넘겼지만 아쉽게도 해당 서적은 분실되었다고 한다. 주건평전에 따르면 순유와 친하던 종요가 순유가 죽은 후 그의 집안을 정리하며 아무를 비롯한 순유의 첩들을 시집보냈다.
문선(文選)에 기록된 조비의 편지에 따르면, 종요는 조비에게 귀중품을 강탈당한 적이 있다. 대략 세자에서 위왕 시기 쯤 종요가 평소 차고다니는 옥결(옥으로 만든 허리에 차는 고리)이 아름답다는 말을 들은 조비가 기뻐하며 조식을 시켜 옥결을 빼앗아왔다. 옥결이 담긴 상자를 받으며 '오장이 다 떨리고 두근거린다'는 오글거리는 표현까지 했을만큼 좋아하면서 '진소왕이 화씨지벽을 본 것 같은 기쁨이 있으나 인상여 같이 계책으로 화씨지벽을 탈취한 속임수는 없다.'는 눈에 보이는 거짓말을 하고 '공(종요)의 아름다운 하사가 후하니 감히 공경스럽게 받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하며 마치 종요가 자발적으로 진상한 것처럼 뻔뻔히 굴었다고 한다.

3. 연의


연의에서는 장안을 지키면서 서량 군벌들의 다툼을 조정하거나 곽원을 격파한 일, 혹은 이후에 문관으로서 뛰어난 면들이 거의 다 삭제되고, 마초가 장안, 동관을 공격할 때 장안성을 통째로 빼앗기고 털리는 역할로만 나온다. 대표적인 삼국지연의의 피해자
다만 제갈량의 1차 북벌 때 하후무와 조진이 연달아 패배하자 가족의 목숨을 담보로 실각 상태에 있던 사마의를 천거한다. 결과적으로 사마의가 촉군을 막아내긴 했지만 훗날에 권력을 찬탈했고, 종요의 아들인 종회가 사마의의 아들인 사마소에게 반기를 들었다가 살해당한 것을 생각하면 좀 미묘하다.

4. 해서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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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인 역사와 달리 서예사에서는 엄청나게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사람으로, 지금 우리가 정자체로 알고 있는 해서체(楷書體)를 확립한 사람이다.
그가 쓴 선시표(宣示表)가 해서체의 정본으로 잘 알려져 있는데[7] 글씨를 보면 지금의 해서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이 표문은 황실 창고에 보관되어 오다, 8왕의 난 때 행방이 묘연해졌지만 이후 동진이 건국되면서 보관하고 있던 관리가 진상하면서 행방이 밝혀졌다. 해서첩 중에 가장 오래된 본으로 원본은 남아있지 않고 복각한 부본들만 남아있지만 왕희지는 당대에 실물을 보고 해행(楷行)을 비롯한 자신의 자체를 완성하는 데 큰 도움을 받았다.
종요가 살던 삼국시대에는 해서라는 말이 없었고, 종요의 글씨도 해서와 예서의 과도적인 성격을 띄고 있으나, 일반적으로 서예계에서 해서의 시조는 종요로 본다. '해서를 종요가 창시했다'라기보다는 자연스럽게 예서에서 해서로 서체가 진화하는 과정에서 해서의 형태를 확립한 인물이라고 보는 쪽이 옳을 듯.
왕희지의 스승인 위부인이 종요의 필법을 본받았으며, 왕희지 자신도 종요를 존경했다고 한다. 왕희지로 말할 것 같으면 당시 아직 성숙하지 못하였던 해·행·초의 3체를 예술적인 서체로 완성하여 서예의 지위를 확립한 서성(書聖)이라 불리는 흠좀무한 사람. 이런 흠좀무한 사람이 존경했던 인물이라고 한다면 종요가 가지는 서예계에서의 위치는 두말 할 것이 없을 것이다.
여담으로 종요와 비슷한 케이스가 채옹.
천자문에도 나오는 인물. 더 나아가 천자문의 저자라는 설도 있다. 가장 보편적으로 천자문의 저자로 알려진 인물은 후대의 인물인 주흥사. 지금 남아있는 천자문도 주흥사의 것이라고 한다.

5. 미디어 믹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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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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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12, 13
삼국지 시리즈에서는 대체적으로 정치력은 90 이상을 유지하고 있으며 지력도 70대 후반~80대는 유지하고 있다. 흔히 말하는 내정형. 무력이 낮긴 해도 통솔력은 시리즈에 따라 일정 수준 이상을 찍기도 한다.
삼국지 2에서의 능력치는 지력 79/무력 16/매력 24로, 무슨 잘못을 했는지는 몰라도 능력치가 굉장히 폄하되었다. 아들인 종회의 이미지 때문인지....
삼국지 3에서는 정치력이 그럭저럭 수준이지만 70대라서 군사는 될 수 없다. 나머지 능력치는 잡문관 수준이다. 딱 두 가지 용도밖에 없는데 하나는 상업투자 전용이고 다른 하나는 엄청 오래 기다리면 종회를 얻을 수 있다는 점이다. 문제는, 시나리오 1을 기준으로 한다면 실제 시간대가 아니라 게임상의 시간대 기준으로 무려 50년 씩이나 기다려야 종회가 등장한다는 점이다. 종회가 태어날때쯤 되면 사실 시나리오일 경우 삼국지에 등장하는 거의 대부분의 장수들이 명을 끝내고 드러누운 이후이며 그 시기에도 여전히 살아남은 제갈량, 허저, 주태도 오늘내일 오늘내일 하는 수준이 된다. 즉, 너무 심할 정도로 종회가 늦게 나온다는 점이다. 종회가 유비보다 64살 연하이니 당연하지만.
삼국지 4에서도 정치력은 높은데 야망 수치가 높아서 반동탁이나 조조군의 태수로 있을 때 구호탄랑으로 배반이 쉬운 녀석 중 하나다.
삼국지 5에서는 무력 8/지력 76/정치력 92/매력 56에 특기는 내분, 수습, 고무, 진화, 격려, 진립. 왕윤, 장굉, 비의, 동윤 등과 함께 지력이 90을 넘지 않는 정치력 90대의 문관. 인사담당관에 배치하면 통일할 때까지 상당한 수의 인재를 물어다 준다. 진립, 격려 등 괜찮은 특기가 있지만 최하위 수준의 무력으로 인해 전투에 쓰기 어렵다.[8] 다만 충성도 관리가 안되면 쉽게 배반하기 때문에 등용하고 바로 포상을 해줘야 한다.
삼국지 6에서는 기본 공적이 높게 책정되어 고위직 장군으로 자주 임명되는 탓에 야전에 종종 등장한다. 물론 종요 단독이면 18,000명도 한 턴에 썰릴 수 있다.
삼국지 7에서는 무력 76/지력 81/정치력 88/매력 78이라는 만능형 능력치를 받았다.[9] 다만 일기토 특기가 없어서 일기토를 할 땐 불리하다.
삼국지 9에서의 능력치는 통솔력 60/무력 15/지력 77/정치력 95. 병법으로 조영, 배반, 고무를 가지고 있지만 전투에 끌고 나가기에는 다소 부족해서 내정용으로 쓰게 된다.
삼국지 10에서의 능력치는 통솔력 70/무력 26/지력 78/정치력 92/매력 72에 특기는 9개.(농업, 기술, 보수, 치안, 화시, 고무, 반목, 반박, 명사) 농업, 기술, 치안 특기가 있어서 내정 셔틀로 써먹기에 충분하며, 통솔과 정치 양면으로 괜찮기 때문에 태수로 써도 훌륭하다
삼국지 11에서의 정치력은 91이고 부여된 특기는 내정형 중에도 상위권인 능리. 영웅집결 시나리오에서는 아들 종회가 독립 군주임에도 그대로 조조군에 속해 있다. 방덕의 아들인 방회위나라에서 활약했음에도 마등군에 있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삼국지 12에서는 상재가 없고 경작과 명사를 가지고 있다. 전법은 전군색적. 일러스트는 붓으로 죽간에다가 글씨를 쓰려는 모습이다.
삼국지 13에서의 능력치는 70/24/77/93. 특기는 농업 7, 문화 9, 설파 5, 교섭 8, 언변 6. 전수특기는 문화로 전법은 위보동요. 상업이 없는 게 아쉽지만 농업 7 문화 9로 든든한 내정요원이 되어준다. 아쉬운 건 중신특성이 군사특성인 화기생재인데 문제는 종요는 지력이 77밖에 안되기 때문에 90 이상을 만들기가 상대적으로 어렵다. 높은 정치력에 맞게 내정특성을 주지 않은 것이 아쉬운 대목. 그리고 PK에서 자신의 동생인 종진#s-1.1이 추가되었다.
삼국지 14에서의 능력치는 통솔 70, 무력 24, 지력 76, 정치 91, 매력 77로 전작에 비해 지력이 1, 정치력이 2 하락했다. 개성은 조달, 진흥, 문화, 능리, 주의는 예교, 정책은 지역진흥 Lv 5, 진형은 방원, 학익, 충차, 전법은 연노, 견제, 치료, 진정, 친애무장은 순욱,[10] 순유, 위풍, 장기, 장창포, 조비, 채염, 혐오무장은 없다. 이번 작부터 자신의 아내인 장창포#s-3.1가 추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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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코야마 미츠테루 삼국지에도 등장하는데 왠지 무관의 이미지가 강하다. 원작에도 없는 이름모를 동생이 부장으로 있다.
삼국전투기에서는 최유기현장 삼장으로 패러디. 때문에 먼 후일 아들 종회는 최유기의 손오공로 설정되었다. 최훈의 정사 재조명 경향에 따라 관중 일대를 안정시키고 군사적인 활약을 하는 부문이 강조되었다. 연의에서 거의 등장하지 않는 장기와 함께 여러 부분에서 등장한다. 평범한 문관으로 비춰지는 연의의 모습에 익숙한 사람에게는 신선한 부분. 완 전투 (1)편의 타이틀 컷을 장식했으나 정작 완 전투 편에서는 나오지도 않는다. 타이틀 컷에서는 유명한 사형폐지론자인데 그 내용이 거시기하다고 언급되지만, 정작 본작에서는 그게 구체적으로 뭔지는 묘사되지 않는다.
실질적인 첫 등장은 하구 전투 편부터로 하구 전투 편에서는 조조의 명으로 서량의 마등, 한수와 강화를 맺으러 가서 뛰어난 달변 실력으로 어렵지 않게 마등, 한수를 조조의 편으로 끌어들이는 데 성공했다고 언급된다.
그리고 오랫동안 등장이 없다가 평양 전투 편에서 재등장. 장안에서 실질적인 조조군의 서부지역 총사령관을 맡고 있었다고 묘사된다. 왕읍에게서 곽원군이 쳐들어왔다는 보고를 받고 본인이 직접 3만 대군을 끌고 평양으로 향하려 했다. 가규가 북쪽에서 시간을 끌어준 덕분에 제시간에 장기와 평양에 도착하는 데는 성공했고, 평양 앞에 위치한 강인 분수의 지형을 확인하기도 했다.[11]
그런데 갑자기 흉노군이 평양으로 침공해오는 돌발사태가 발생하자 당황하기도 했다. 흉노만이라면 괜찮지만 발목을 잡힌 사이 곽원군이 분수를 넘어버리면 상당히 골치가 아파지기 때문. 이후 종요는 곽원과 흉노 간 커넥션이 있었음을 직감했는지 흉노는 곽원군이 도착하기 전까지는 적극적으로 움직이지는 않을 것이라 판단하였으며, 그 동안 장기가 마등에게 지원을 요청하자고 말하자 마등이 여태까지 조용히 있는 걸 보면 뭔가 받아먹은 게 있어서 그럴 것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방법이 딱히 없었기에 장기에게 마등의 설득을 맡기게 된다. 장기가 마등에게 간 이후에는 바로 흉노군과 맞붙는데, 역시나 흉노군이 시간만 끄는 모습을 보이자 짜증을 내기도 했다.
이후 곽원군이 예상보다 빠르게 분수에 도달하자 여러 제장들이 협공을 당할 수 있으니 후퇴하자고 제의하지만, 후퇴를 하게 되어 자신들의 위명이 떨어지게 되면 지방의 호족들과 백성들이 전부 적으로 돌아서 버릴 수 있기에 죽이 되는 밥이 되든 붙어 보는 수밖에 없다며 각오를 다지지만, 다행히 장기가 마등의 설득에 성공해서 마초가 지원군으로 오게 됐고, 종요가 흉노를 견제하는 동안 마초가 곽원군을 싹 정리해 버리면서 전투에서 승리하게 되었다.
승리한 뒤 방덕에게서 곽원의 목을 전달받고 곽원은 형제처럼 지내던 조카였다며[12]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 이에 방덕이 사과하자 어차피 그는 국가의 적일 뿐이었으니 미안해할 것 없다고 말한다. 이후, 마초가 언젠가 다시 만날 날이 있을 테니 기대하라고 말하면서 떠나가자, 종요가 마초를 바라보며 이 녀석이야말로 요주의라고 독백하는 것으로 평양 전투 편이 마무리된다.
신야2 전투 편에서는 조조에게서 마등을 포섭하라는 지시를 받았고, 또 장기를 마등에게 보내서 마등을 포섭하는데 성공했다.
동관 전투 편에서는 언급만 되는데 장안에 쭉 머무르고 있다가 조조의 명을 받고 하후연과 함께 한중으로 장로 정벌을 위해 파견된 것으로 묘사됐다.
연의에서 마초에게 털리는 것처럼 묘사된 부분은 빠지고 장안을 지키면서 곽원을 격파하는 등 공적이 많이 묘사되어 버프를 받은 편.
그 밖에는 위풍이 난을 일으켰을 때 주변 사람이 연루되는 바람에 실직해서 집에는 뭐라고 말해야 하나 걱정하며 그네에 앉아 축 쳐져 있는 개그씬을 보여주기도 했다.
화봉요원에서는 하동에서 원소 사후의 원씨랑 싸울 때 등장해 수 차례 외조카인 곽원에게 항복 권고문을 보냈다가 곽원이 여러 차례 항복하는 척 하면서 나중에는 미안하다고 보내자 전령을 시켜 곽원을 구할 도리가 없게 되었다고 곽가에게 보고하도록 지시하며, 평양에서 원상군을 공격하기 위해 장합, 장료를 출진시킨다.
적벽대전에서 조조가 크게 패해 조조가 죽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는데, 대군에서 원소의 잔당인 범성과 이민족인 강족, 선비족 등의 공격을 받아 큰 위험에 빠지고 그 와중에 강무가 서신으로 유씨 문중의 사람인 상곡 지역의 진익으로부터 병력을 이끌고 도와주려 한다는 소식이나 안문의 이창과 육영 등이 배반했다는 안 좋은 소식이 전해지면서도 병사들을 지휘한다.

[1] 鍾皓, 생몰년도는 87 ~ 155년으로 자는 계명(季明). 영천 장사 사람으로 임려의 장에 제수되었지만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다고 하며, 같은 영천 출신인 순숙(荀淑), 한소(韓韶), 진식(陳寔)도 유명했다.[2] 원굉의 한기에 기록된 호송에 공을 세워 열후에 봉해진 명단은 위장군 동승, 보국장군 복완, 시중 정충丁沖, 충집种輯, 상서복야 종요鍾繇, 상서 정부郭溥, 어사중승 동분董芬, 팽성상 유애劉艾, 풍익馮翊 (태수) 한빈韓斌, 동군태수 양중楊衆, 의랑 나소羅邵, 복덕伏德, 조유趙蕤 다. 이각에 잡혀 죽은 사성교위 저준沮儁은 추증하여 홍농태수로 삼았고 의랑議郎 후기侯祈, 상서尚書 풍석馮碩, 시중侍中 대숭臺崇을 꾸짖어 벌을 내렸다.[3] 배송지는 종요전에서는 분명 종요가 말 2천필을 조조에게 보내줬다고 하는데 무제기에는 문추랑 싸울때 조조가 보유한게 6백필이라고 하니 종요가 보내준 2000필의 말 어디로 갔냐고 기록의 과장성을 비판했지만 문추와의 전투는 관도대전의 서전격 전투였고 종요가 말을 보내준 것은 조조와 원소가 대치하고 있던 상황에서 보낸것이니 문추 전사 이후 종요가 말을 보냈다고 하면 모순없이 해결된다.[4] 장창포는 199년생이므로 둘의 나이차는 48세나 된다(...). 물론 손씨가 장창포의 태아를 독살하려고도 했을 만큼 질투가 심하긴 했지만 집안 문제인 만큼 대중에 잘 알려지지도 않았고 그때나 지금이나 고위 공무원이 손녀뻘 첩 때문에 국가수반의 뜻도 거스르며 정실을 내쫓는다고 하면 누가 좋아할까....[5] 여담이지만 삼국지 13에서 등록무장으로 199년생 장창포를 생성하고 종요의 부인으로 지정하려고 하면 종요가 배우자 목록에 나타나지 않는다. 게임 시스템상 40세 이상 나이차가 나는 결혼은 성립하지 않기 때문. 장창포는 삼국지 14에서 정식으로 데뷔한다.[6] 삼국지 배주에 인용된 책.[7] 내용은 특별한 게 없다. 일반적인 표문으로 남방의 손권을 견제하여 잘 대처해야 된다는 내용.[8] 대신 중소규모 전투에서 10부대를 모두 채우지 않을 경우 병사 1명을 주어서 참군으로 쓸 만하다.[9] 참고로 그 제갈량의 무력이 78이다.[10] 순상의 증손자 순욱이 아닌 위나라 중신이자 조조의 참모인 순욱이다.[11] 분수는 다른 지역보다 물이 매우 차고, 수심이 얕아서 바로 넘어가기 좋은 강으로 묘사된다. 장기는 어디선가 차가운 지하수가 합류하기에 물이 찬 것이라 추측했고, 종요는 수심이 얕아 바로 넘어가기 쉽기에 곽원은 최단거리인 분수 방면으로 바로 올 것이라고 확신했다.[12] 평양 전투 (2)편에서 왕읍에게서 곽원의 이름을 듣고 곽원이 확실하냐며 물어보는 장면이 두 사람이 최소 지인 관계 이상일 것이라는 복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