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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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국 동진 시대의 서예가. 자는 일소(逸少)로 우군장군(右軍將軍)의 벼슬을 하였다 해서 왕우군으로도 불린다. 왕람의 증손자.
사람 많은 중국 역사 중에서도 글씨 잘 쓰는 것으로는 고금 으뜸으로 꼽힌 사람이며, 후대에도 엄청난 존경을 받았다. 서성(書聖)이라고 불리우며, 대략 시쪽의 굴원, 이태백, 두보 같은 위치라고 보면 될듯.[1]
왕희지뿐만 아니라 그의 아들 왕현지, 왕응지, 왕환지, 왕숙지, 왕휘지, 왕헌지 등도 모두 당시에 이름을 날렸는데, 일곱 번째 아들 왕헌지(王獻之)도 뛰어난 서예가로 이름을 날렸다. 이 둘을 일컫어 ‘이왕(二王)’ 또는 ‘희헌(羲獻)'이라고도 했다.
2. 생애
현재의 산둥성 린이시(臨沂市)인 낭야(琅琊) 사람으로, 동진을 만드는데 공을 세운 왕도의 조카이고, 아버지는 왕광이라는 사람이었다. 처음 글씨를 배우기 시작할 때는 위부인이라는 여류 명필에게 글씨를 배웠다. 그 후에는 특별히 스승을 두지 않고 한나라나 위나라의 비문을 보고 스스로 배우면서 공부를 계속하였다.
나중에는 벼슬길에도 나아가 비서랑(秘書郞)으로부터 출발하여 유량의 장사(長史)가 되고, 351년에는 우군장군 및 회계의 내사에 이르렀다. 세상을 살펴보는 눈도 있어서 북벌을 요청하기도 했고 재상 사안에게 민간의 정치를 논하는 글을 쓰기도 했다. 하지만 이 시대 남조 지식인들이 대부분 그렇듯이 '이놈의 속세를 내가 떠나야지' 하고 마음을 먹고 있다가 벼슬을 그만두고 회계 땅으로 가서 경치가 아름다운 곳을 잡고 사안 ·손작(孫綽) ·이충(李充) ·허순(許詢) ·지둔(支遁) 등과 청담을 나누고, 도가 쪽에도 관심이 있었는지 도사 허매(許邁)를 따라 채약에 몰두하는 등 유유자적하면서도 나름대로 분주하게 살다가 일생을 마쳤다.
왕희지의 업적은 해서 ·행서 ·초서의 각 서체를 완성함으로써 '''서예를 단순히 글씨를 쓰는것이 아니라 예술의 영역으로 끌어오는 데 성공했다는 것이다.''' 왕희지는 예서(隸書)를 잘 썼는데 아직 성숙되지 못했던 해서 ·행서 ·초서를 예술로 만들었다. 왕희지의 남은 필적들도 다 이 세 가지로 되어있다. 그의 서풍(書風)은 전아(典雅)하고 힘차며, 귀족적인 기품이 높다.
미켈란젤로가 조각의 완성이자 끝판왕 격이라면, 왕희지는 서예[2] 의 완성이자 끝이라고 평가 받는다. '왕희지 체'의 특징은 유려하며, 기교적 측면에서 독보적이다. 현대에서도, 서예가가 자신의 서체를 완성하기 위해서는, 왕희지의 서체를 기반으로 만들어가기 시작 할 정도로, 표준적인 모델이다. 물론, 예술의 범위에서 '왕희지 체'보다 '아무개 체'가 더 예술적, 심미적으로 좋다고 할 수도 있으나, '왕희지 체'는 이미 왈가왈부 할 수 없을 정도로, 그 격이 정립된 모델이라고 할 수 있다.
3. 작품세계
''해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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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론(樂毅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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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정경(黃庭經)》
''행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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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정서(蘭亭序)》[3][4]
''초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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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칠첩(十七帖)》
등등이 대표작이다. 그외 글씨로 《상란첩(喪亂帖)》 《공시중첩(孔侍中帖)》 《유목첩(遊目帖)》 《이모첩(姨母帖)》 《쾌설시청첩(快雪時晴帖)》등의 필적이 남아오지만 그의 온전한 필적과는 좀 다를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그리고 왕희지 글씨가 많이 사라지게 된 이유 중에 하나는, 당태종 이세민이 워낙 왕희지를 좋아해서 죽을 때 천하에 있는 왕희지의 글씨를 수집해서 자기 무덤에 끌고 가버려서 라고 한다.
2010년 11월 10일, 사상 처음으로 경매에 나온 왕희지의 《평안첩(平安帖)》이 3억 800만 위안에 낙찰되었다고 한다. 이건 한국 돈으로 따지면 '''약 523억'''. 거기다 이건 왕희지 원본도 아니고 복제품이다.
4. 일화
왕희지에 관련된 당태종의 도둑질 설화가 있는데, 바로 난정서에 관련된 것이다. 난정서는 동진 목제의 영화9년(353) 3월 3일 회계산음(저장성 소흥) 난정에서 당시의 명사 41명이 모여 계추를 하고 유상곡수(流觴曲水)의 유흥을 하고 시흥에 젖었을 때, 왕희지가 쓴 시집의 서이다.
이 난정서는 왕희지의 7대손 지영에게 전해졌다고 하는데 지영은 승려라 자손이 없었기 때문에 100세로 입적하게 되자 죽기 직전 이것을 제자인 변재에게 물려주었다. 당태종은 입맛을 쩝쩝 다시면서 이걸 가지려고 했지만 당시 승려이던 변재는 "난 그런 거 없음." 하고 오리발을 내미니 황제 체면에 글씨 하나 얻자고 때려 패고 뒤져올 수도 없어서 전전긍긍했다.
그러자 당태종은 신하들에게 이를 의논했는데 그중 방현령이 감찰어사 소익(蕭翼)[5] 을 추천했다. 이에 당태종은 소익을 보내 이걸 가져오게 하였다. 소익은 우선 길손으로 위장해서 "지나가는 길인데, 스님이 바둑을 그리 잘 두신다면서요?" 하고 친해져서 계속 바둑을 붙었다. 변재도 바둑을 좋아해서 둘은 맨날 바둑을 두고 있었는데, 소익이 지나가는 말로 왕희지 이야기를 꺼내자 변재는 난정서를 꺼내서 보여주었고, 소익은 "이야, 쩐다." 하고 넘어갔다. 그래서 매일 바둑을 두고, 난정서는 꺼내서 보다가 옆에 두고 하는것을 반복했다.
소익은 어느날 종이를 가져와서 바닥에 둔 난정서와 바꿔치기를 하였다. 그리고 아무렇지도 않게 그곳을 달아났다. 변재는 나중에야 속은 걸 알았지만 '''당나라 황제에게 따질 수도 없고……''' 변재는 비록 황제를 속였지만 80을 넘긴 고령이고 난정서의 값으로 비단과 쌀을 받았다. 변재는 이것을 3층 보탑 건립 비용으로 사용하고 스승의 유품을 잃은 것에 애통해 하다가 1년이 지난 뒤 숨을 거뒀다. 이것은 실제로 조선왕조실록에도 나오는 이야기다. 난정서는 그 후 당태종이 소장하고 있다가 자신의 무덤인 소릉에 배장해서 아예 무덤 속까지 가져갔다. 그러나 훗날 당나라가 멸망한 뒤 군벌 온도에 의해 소릉이 도굴되어 원본은 영원히 사라지고 말았으나 원체 유명했기 때문에 필사본이 여러 남아 전해지고 있다.
아무튼 이 왕희지는 삼국시대 종요 및 위기, 위관과 인연이 있다. 종요는 종회의 부친으로, 역시 글씨로 중국 역사에 이름을 남긴 인물인데, 왕희지의 스승인 명필 위부인이 종요의 서풍을 이어받았다. (위부인은 역시 명필로 유명했던 위기, 위관 부자의 가문 후손이다. )왕희지 자신도 종요를 존경했다고. 어떤 사람들은 왕희지와 종요, 그리고 후한의 서예가인 장지를 고금의 가장 뛰어난 서예가로 꼽기도 한다. 아무튼 이렇게 살아있을 때나, 죽었을 때나 대단한 평가를 받으며 많은 사람들이 왕희지 글씨의 진품을 얻으려고 핰핰 거리다 보니 재미있는 일화가 많이 남았다.
하루는 왕희지가 평복 차림으로 회계 거리를 다니다가, 부채 가게를 지나게 되었다. 부채 가게는 노파가 혼자 앉아있었는데, 그러자 왕희지는 아무 말도 안 하고 부채에 쓱쓱 글자를 쓰기 시작했다. 노파는 웬 이상한 놈이 낙서를 쓴다고 생각하고 돈을 내놓으라고 했다.
"부채 값이 얼마입니까."
"하나에 일 문이외다."
"그럼 이 부채를 문 밖에 거시구려. 하나에 백 문을 받을 것이니 말입니다."
그리고 왕희지가 나가자 노파는 황당해 하고 있는데, 갑자기 귀신같이 다른 사람이 나타나더니 백 문을 주고 부채를 사갔다. 뒤에야 그 정체를 깨달은 노파가 다음 날 그에게 하나만 더 써주라고 했지만 그는 그냥 지나갔다고 한다.
거위를 매우 좋아했다고 하며 식용이 아니라 관상용 내지 애완용으로 좋아해서 보기를 즐겨했다. 이 때문에 거위와 관련된 일화가 몇개 있다.
하루는 어느 도사가 좋은 오리를 가지고 있어 팔라고 했자 도사는 돈 대신 도덕경을 한 부 필사해줄 것을 요구했다. 왕희지는 기꺼이 도덕경 한 부를 써주고 오리를 데려왔다고 한다.
다른 야사로 어떤 집에서 키우는 거위가 목청이 좋기로 유명하다길래 구경하기 위해 왕희지가 직접 찾아갔더니만, 정작 그 집에 도착하니 거위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당황한 왕희지가 집주인에게 거위가 어디갔나고 하니 집주인은 사람들이 명필께서 오셨다기에 대접할 게 변변치 않아서 '''거위를 잡아 음식으로 만들고 있다고''' 해서 왕희지가 사색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5. 난정서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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永和九年,歲在癸丑,暮春之初,會于會稽山陰之蘭亭,脩稧事也;群賢畢至,少長咸集。
영화 9년 세재 계축(서기 353) 늦봄 초에 회계산 북쪽 난정에 모여 계사(稧事)를 지냈으니, 군현(群賢)이 모두 이르고 소장(少長)이 다 모였다.
此地有崇山峻領,茂林脩竹,又有淸流激湍,暎帶左右;引以爲流觴曲水,列坐其次;雖無絲竹管弦之盛;一觴一詠,亦足以暢敍幽情。
이 땅은 숭산준령(崇山峻領)과 무림수죽(茂林脩竹)이 있고 또한 맑은 여울이 좌우로 띠를 이루었는데, 이를 끌어다 유상곡수(流觴曲水)를 삼고 순서대로 늘어서 앉으니, 비록 사죽관현(絲竹管弦)의 성대함은 없지만, 술 한 잔에 시 한 수로 또한 그윽한 정을 후련히 풀기에는 충분하였다.
是日也;天朗氣淸,惠風和暢,仰觀宇宙之大,俯察品類之盛;所以遊目騁懷,足以極視聽之娛,信可樂也。
이날, 천기는 화창하고 바람은 온화하여 우주의 크기를 우러러 바라보고 사물의 풍성함을 굽어 살피니, 멀리 바라보고 회포를 풀어내서 보고 듣는 즐거움을 족히 다하여 즐길 만하였다.
夫人之相與,俯仰一世;或取諸懷抱,悟言一室之內;或因寄所託,放浪形骸之外。
무릇 사람들이 서로 어울리며 한 세상을 살아감에, 누구는 여러 정회를 가지고 방구석 안에서 말로 깨닫고, 누구는 자연에 몸을 맡기어 육신의 밖으로 방랑을 한다.
雖趣舍萬殊,靜躁不同;當其欣於所遇,暫得於己,怏然自足,不知老之將至;及其所之旣惓,情隨事遷,感慨係之矣。
비록 나아감과 머무름이 모두 다르고 고요함과 분방함이 같지 않으나, 그 즐거움을 만나서는 잠시 스스로를 얻고 우쭐거리며 자족하여 늙음이 다가온다는 것도 알지 못하다가, 그것이 권태로워지게 되고 나서는 감정이 세상사에 따라 바뀌어 개탄스러운 마음이 이에 매이게 된다.
向之所欣,俛仰之閒,以爲陳迹;猶不能不以之興懷。況脩短隨化,終期於盡!
즐겁게 여기던 것도 잠깐 사이에 흔적만 남으니, 더욱 정회가 생겨나지 않을 수 없다. 하물며 수명의 장단이 조화에 따라 종내는 다하게 될 것임에야!
古人云:"死生亦大矣";豈不痛哉!
옛 사람도 "죽고 사는 것은 큰 일이다"라고 하였으니, 어찌 비통하지 아니한가!
每攬昔人興感之由,若合一契;未甞不臨文嗟悼,不能諭之於懷;固知一死生爲虛誕,齊彭殤爲妄作。
언제나 옛 사람들이 감흥을 일으킨 원천을 살펴보면 약속한 듯 일치하여, 그 문장을 보고 탄식하지 않은 적 없고 정회를 깨닫게 되지 않은 적 없으니, 생사가 하나라는 말이 허탄(虛誕)하고 장수와 요절이 같다는 말이 망작(妄作)하다는 것을 진실로 알게 된다.
後之視今,亦由今之視昔;悲夫!
먼 훗날 지금을 보는 것이 또한 지금 먼 옛날을 보는 것과 같으리니, 슬프도다!
故列敍時人,錄其所述,雖世殊事異,所以興懷,其致一也;後之攬者,亦將有感於斯文。
그러므로 이때 사람들을 순서대로 적고 그들이 지은 바를 기록해두니, 비록 세상이 달라지더라도 정회가 이는 것은 일치할 것이므로, 후세에 이것을 보는 자는 또한 이 글에서 느끼는 바 있을지로다.
[1] 이태백은 시선(詩仙) 두보는 시성(詩聖)이라 불린다.[2] 중국에선 서법, 일본에서는 서도로서 불린다.[3] 왕희지의 글씨 중에 가장 유명하며 중국에서 거의 국보 1호급으로 취급받는 무가지보(가치를 매길 수 없는 보물)이다. 도장이 많이 찍힌것은 이 글씨를 본 사람들이 기념으로 찍은 것이다. 참고로 원본은 사라젔으며 이것은 당나라 풍승소의 신룡본 필사본이다. 500종이 넘는 임,모본 중에 가장 유명하다.[4] 중국 현대의 문학자 곽말약은 난정서가 진본이 아니고 7대손 지영이 쓴 글이라고 주장해 큰 논쟁을 낳았다. 결국 이 논쟁은 모택동까지 끼어들었으나 서로 논변근거가 취약하여 결론 없이 종결하였다.[5] 남북조시대 양나라 원제 소역의 증손자다.